인민행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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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싱가포르의 정당. 1954년에 창당되어, 1959년 이래 싱가포르의 여당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사실상의 독재 정당이다.[2]
2. 이념
창당 초창기만 해도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인을 위한 빅텐트 정당으로 당 내에 다양한 이념 분파가 있었고, 심지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속해 있었을 정도로 따지고 보면 좌파 성향이 더 돋보이기도 했던 정당이었으나, 갈등 끝에 사회주의자들이 탈당하고 싱가포르의 자국 언론 탄압 등이 논란이 되자 1976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떠난 이후의 인민행동당은 전반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권위주의, 사회보수주의와 반공주의를 지향해왔다. 다만 싱가포르의 역사성이나 다양한 인종 구성원[3] 때문에 다문화, 다인종 공존은 지향하고 있다.
3. 역사
3.1. 창당
1954년, 싱가포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리콴유(이광요)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같은 싱가포르 출신의 화교 학우인 토친체(杜進才, 두진재, Toh Chin Chye), 고켕쉬(吳慶瑞, 오경서, Goh Keng Swee)와 함께 결성한 정당이다. 당시 싱가포르는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슬슬 세계적 추세가 탈식민주의 흐름이 보이고 영국도 싱가포르를 놓아줄 기미를 보이자 싱가포르 독립을 주장하는 싱가포르인들의 여망을 담아 인민행동당을 창설한 것.
다만 지금의 권위주의 우파 성향과 달리 이때만 해도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가나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당원 가입을 받아주고 당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는 등 이념의 폭이 넓은 빅텐트 정당에 가까웠다.[4] 이를 바탕으로 토착 싱가포르인이 처음 선거권을 얻었던 1955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선거로 선출되는 32석 중 25석을 차지했다. 다만 당시 싱가포르는 완전한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영국 식민 행정당국의 요인들이 당연직 의원에 있었고, 이에 따라 당장 여당이 되지는 못하고 제1야당이 되었다.
1959년부터는 완전한 자유 총선이 치러졌고, 이때도 인민행동당은 전체 51석 중 43석을 점유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리콴유는 영국령 싱가포르 총리에 취임했다. 한편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싱가포르 현지 사회주의자들도 공산혁명을 꿈꾸며 몇차례 소요를 일으켰으나 식민 당국에 의해 진압당했고, 이때 몇몇 인민행동당의 사회주의자들도 선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리콴유 총리의 요청으로 이들은 풀려나 다시 당권에 복귀했다. 이후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를 발전시키며 인기를 얻었다.[5]
3.2. 사회주의 갈등
인민행동당이 커지면서 현지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인민행동당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영향인지 당내에서도 이념 갈등이 심화된다. 그리고 이런 이념 갈등에 확실한 불을 붙인게 싱가포르의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 문제였다.
싱가포르는 당시 영국령 해협 식민지(말레이 반도 + 싱가포르 + 북보르네오)의 한 지역이었는데,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소왕국들에 대해서는 속국으로 부리는 방식으로 간접 통치했고, 싱가포르는 중요 지역으로서 직할 통치를 하였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영국령 해협 식민지 내에서도 영국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지역이었으며, 특히 영국인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위해 화교들을 싱가포르에 데려오면서 싱가포르는 해협 식민지의 다른 지역과 달리 말레이인보다 화교가 더 많았다.
그런데 영국이 물러가고 해협 식민지를 독립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는 한 식민지로서 서로 교류가 많았지만 영국 식민지 시절 유입된 화교가 경제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바람에 말레이인들 사이에서는 화교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일단 말레이 반도는 1957년에 말라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달성했고 당시 싱가포르는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리콴유는 말레이 반도에 물자를 대주는 항구 및 무역 중개지로서 발전해온 싱가포르의 역사를 볼 때 말라야 연방에 가입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해 말라야 연방에 가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내 사회주의자들은 말라야 연방 가입에 반대했다. 당시 반공 성향이 강했던 말라야 연방의 여당 UMNO가 자신들을 탄압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사실 싱가포르 사회주의자들은 싱가포르의 말라야 연방 가입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말레이인 위주의 UMNO가 화교들 위주의 싱가포르를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1961년에 UMNO의 당수이자 당시 말라야 연방의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은 리콴유와 함께 싱가포르의 연방 가입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는 UMNO가 화교만큼 싫어했던 인민행동당 내 좌파들을 축출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져 있었으며, 실제 당내 사회주의자들은 싱가포르의 가입 계획에 충격을 받고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리콴유를 비롯한 당내 반대파들을 이기지 못하고 당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탈당하게 된다. 그렇게 인민행동당은 점차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반공 정당이 되어간다. 하여튼 그렇게 싱가포르는 1963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여 말레이시아의 한 주가 된다.
3.3. UMNO와의 갈등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시아 연방의 정당이 되었지만, 말레이인 우선 정책을 펼치고자 하는 UMNO와 화교 위주의 정당인 인민행동당은 합방 직후부터 갈등을 벌였다.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시아인들의 말레이시아'(Malaysian Malaysia)를 주창했다. 인종에 상관없이 '말레이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모든 말레이시아인에게는 똑같은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말레이인들을 비롯한 UMNO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화교에 비해 경제력이나 학업 성취도 면에서 말레이계가 너무 뒤쳐져 있으니 이대로 똑같이 평등하다면 말레이인들은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밀어붙이려는 UMNO를 견제하기 위해 1964년 말레이시아 총선에 참여했다. 비록 2.0%의 득표율로 페낭에서 1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말레이시아 내에서는 꽤 많은 호응을 얻었고[6] 이는 인민행동당이 싱가포르 지역정당으로 남길 원했던 UMNO에 엄청난 어그로를 끌었다. 싱가포르를 포함 말레이 반도 전역에서 말레이인과 화교의 갈등이 엄청났는데 싱가포르 가입 후 국내 화교가 더 많아지니 말레이인들의 불안감은 더해져갔고, 이는 여러 번의 소요 사태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싱가포르에 혼란을 부추겨 공산혁명을 시도하려던 사회주의자들의 선동도 한몫했다.
결국 말레이시아는 국가 안정을 위해 싱가포르를 1965년 연방에서 축출했다. 말레이시아의 한 주로서 싱가포르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당시 싱가포르 주 총리인 리콴유는 원치 않은 독립을 선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싱가포르의 축출 이후 말레이시아는 국내에서 인민행동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한다. 이에 싱가포르인이 아닌 인민행동당 당원들의 당적도 말소되었고, 이들은 말레이시아에서 민주행동당을 차렸다. 이 민주행동당은 인민행동당과는 반대로 초창기의 색채가 유지되어 우경화가 진행된 인민행동당과 다르게 중도좌파 정당으로 분류된다.
3.4. 싱가포르 독립 이후
싱가포르 독립 이후 인민행동당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동남아에서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교역과 금융도시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7]
하지만 인민행동당은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했기에 사회적으론 권위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는데, 독립 이후 첫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총 58석 중 58석을 석권(...)했고, 이런 현상이 1984년까지 쭉 이어졌다. 싱가포르에서는 여러 정당들이 있고 이들의 활동도 명목상으론 보장되어 있지만 선거법 문제(싱가포르/정치 참조)로 인해 인민행동당 이외의 다른 정당은 집권당이 되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
또한 오랜 집권으로 사법부를 사실상 종속시키고, 이를 통해 당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하는 등 우회적인 방식으로 언론을 통제해 반대 세력의 형성을 방해하고 있다. 리콴유 시절엔 아예 물리적인 방법도 꽤 동원했었다.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 덕분에 1976년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되었다.
그나마 1980년대부턴 싱가포르 내의 비판을 의식해 야당에 좀 더 유리하게 선거법을 고쳤고, 이후 야당 국회의원들도 조금은 등장했지만 그 의석은 대개 2석에서 6석 내외 극소수로 그마저도 맘에 안들면 광고 제한, 발언권 박탈, 신상 제한 등의 구박을 꽤나 받았다. 리콴유가 물러나고 21세기 들어서부턴 과거에 비해 야당이 성장하고 인민행동당 지지율도 상대적으로 떨어졌지만, 지금도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 국회 101석 중 표결권이 없는 12석을 제외한 89석 가운데 83석을 차지하고 있는 압도적인 1당이다.
2020년 싱가포르 총선에서도 수치상으론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명목상 승리, 실질적 패배를 당했다. 수치상으로 83석을 차지했으나 노동당이 10석을 차지하여 처음으로 야당한테 두 자리수 의석을 허용했다. 선거 종료 이후 코로나 여파로 싱가포르의 2020년 2분기 경제성장률이 1분기 대비 '''-41.2%(연율)'''를 기록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기사.
4. 역대 당 의장
5. 조직
인민행동당은 중앙집행위원회(Central Executive Committee)를 두고 있으며 이 기구에서 당의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 위원회의 장은 서기장(Secretary General)이라 하며, 사실상 서기장이 당수로서 기능한다.[8] 창당 이래 1992년 11월 1일까지 38년간 리콴유가 서기장직에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받은 고촉통, 리셴룽 모두 서기장직을 맡았다.
중앙집행위원회 산하에 여러 위원회가 있으며 해당 위원회들은 각자 담당하는 분야에서 의사결정을 한다.
- 중앙집행위원회
- 인사위원회
- 유권자위원회
- 자문위원회
- 뉴미디어위원회
- 말레이시아 문제위원회
- 당원모집 및 간부선발위원회
- 인민행동당 어워드
- 정치교육위원회
- 홍보출판위원회
- 사회오락위원회
- 여성위원회
- 청년위원회
- 노인위원회
- 정책포럼
[1] 화교, 말레이, 인도계 등이 섞여사는 다인종 국가인 싱가포르의 역사성 때문에 이런 경향을 띄기도 하나, 권위주의 성향이 강해 변질되었기에 시민 내셔널리즘 개념에 완벽히 부합하진 않는다.[2] 선거를 통한 형식적 민주주의는 보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야당에 대한 탄압과 권위주의를 내세우고 있다.[3] 말레이, 인도계 등. 물론 주류는 화교다.[4] 오히려 이땐 사민주의 정당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장 1976년까지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있던 정당이었다. 보면 당명도 사회주의 정당들이 주로 쓸법한 당명이다.[5] 사실 싱가포르는 독립 이전에도 중계무역 중심지로서 꽤나 부유한 곳이었다.[6] 말레이시아에서는 1964년 총선에서 경과 조치로 1963년에 연방 가입을 받았던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에 대해서는 총선을 치르지 않았고 대신에 총선 후 각 주에서 알아서 하원의원을 선출해 연방의회에 파견하도록 했다. 이 중 사라왁과 사바는 연방하원의원을 선출해 파견했으나 싱가포르의 경우 선출 이전에 쫓겨나서 하원의원이 선출되어 파견되는 일은 없었다.[7] 다만 지금은 금융업이나 도박 산업이 주요 수입 루트인 국가다보니 이런 곳들이 으레 그렇듯 경기를 많이 타는지라 내실이 부실하다는 비판도 있긴 하다.[8] Secretary General은 보통 사무총장으로 번역하지만 이 정당이 애당초 사회주의자들의 입김이 강했고 실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 정당이었다는 점, 한국 정당의 사무총장과 달리 지금도 이 직책이 당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무총장보다는 서기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중국어 번역명도 비서장(秘书长)으로 중국어권에서 서기장을 이르는 말이다. 좌파에서 우파로 성향이 바뀐 케이스라 이런 혼란이 오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