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춘애
1. 소개
'''라면 소녀[3] 로 알려진 육상계의 아이돌.'''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한 대한민국의 전직 육상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2.1.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의 활약
사실 임춘애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서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선발전 이후에 치뤄진 전국체전 3000m 종목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좋은 성적을 기록하자, 임춘애를 국가대표로 선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뒤늦게나마 국가대표에 합류했다.
국가대표로 깜짝 발탁된 임춘애는 '''1986 아시안게임에서 '신데렐라'로 거듭난다'''. 여자 육상 800m, 1,500m, 3,000m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여 3관왕이 되었다.
3,000m는 중국 선수에게 개인 최고 기록에서 10초 이상 뒤진 기록이었지만 중국 선수가 주춤하고 임춘애는 포텐이 터지며 금메달을 땄다. 800m는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는데 앞서 들어온 인도 선수가 파울로 실격당해 임춘애가 우승했다.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 게임 3관왕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2.2. 1988 서울 올림픽에서의 부진과 은퇴
아시안 게임이 끝난 뒤,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부진하였다. '''사실 기록이 딸려서 출전권조차 못 따냈다.''' 올림픽에 아예 출전을 안한 건 아니었는데[4] , 세계의 벽을 실감하며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 와중에 아시안 게임에서 메달따고 포상금 받으니 배가 불렀다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점은 잘못된 비난이다. 육상에서의 세계의 벽은 정말 에베레스트만큼 높은 벽이다. 2015년 현재에도 육상의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기록경기 어느 종목을 봐도 한국 기록은 (아니 아시아 기록을 보더라도) 세계 기록과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난다. 우리나라는 마라톤에서 성과를 낸 것 말고는 육상에서 상위권에 들어 간 것을 찾기도 힘든 수준이다. 이는 헝그리 정신으로 극복할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메달이나 순위 문제가 아니라 기록 자체가 부진한 진짜 이유가 있었는데 '''학대'''에 불과한 비과학적 훈련에 시달린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임춘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떡잎을 알아보고 전담 코치를 자처한 김번일[5] 은 사람을 보는 눈이나 열정은 있었어도 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시시때때로 구타로써 근성을 강요하였고, 급기야는 기록이 오르지 않는다고 감정적으로 뺨을 후려쳐서 고막을 파열시키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성인도 아닌 '소녀'에 불과했던 임춘애는 아시안 게임만으로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는데 이후 올림픽 대비 훈련을 하면서 몸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성장기에 무리한 운동을 한 때문에 골반에 금이 갔고, 더 이상 운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1988 서울 올림픽 이후로 은퇴하고 완전히 육상계를 떠나게 된다.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었던 임춘애는 축구선수 출신의 '이상용'씨와 결혼하며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 소개해준 사람이 김주성이라고 한다.
3. 은퇴 이후
남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기도 하는 등, 오랫동안 육상과는 담을 쌓은 채 살았다. 하지만, 육상계에 후배 양성이 필요하다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2010년에 성남시 소속의 학교 전문코치로 다시 육상계에 복귀했다. 현재는 대한육상경기연맹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4. 라면 이야기의 진실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는 기사가 나왔었는데 '''사실이 아니며''' 게다가 이는 임춘애가 직접 발언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가난하게 살았던 건 사실이다.
임춘애 학교의 육상부 코치였던 김번일이 육상부의 열악한 환경을 이야기하며 나온 이야기였다. 육상부에 지원이 부족해서 '''간식으로''' 라면만 먹는다는 식으로 기자에게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기자가 이를 왜곡해서 임춘애를 비롯한 육상부 선수들이 '라면만 먹고 운동한다'고 기사를 쓴 것이 사실처럼 전달된 것이다.
후에 그 기자가 왜 그런 왜곡 기사를 작성 했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도 열악한 육상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좀 더 후원을 많이 받게 해주려고''' 인터뷰 내용을 심하게 '''과장'''해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당시 큰 대회를 앞두고 사람들은 영웅을 원했고, 그것이 '''가난을 극복한''' 스토리였기에 사람들은 라면 소녀에 열광했다. 실제로 이 기사가 나간 이후로 상당한 후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각인효과가 너무 커서, 그녀는 영영 '''라면 소녀'''로 각인되어 버렸다. 게다가 넘버 3같은 영화에서 이렇게 나오면서 각인 효과는 풀리지 않는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당사자는 '라면 소녀'라는 타이틀을 지우고 싶어 하지만, 가능한 것 같지가 않다. 최근의 인터뷰를 보면 그냥 포기한 듯 싶긴 하다. 당사자가 아무리 해명하려 하여도 씨알도 안 먹힌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운동선수들은 헝그리 정신이니 뭐니 그딴 거 전혀 없고 뭐든지 잘 먹어야 운동을 할 수 있다.''' 하다 못해, 그 찢어지게 가난한 윗동네 북한에서조차 운동선수들만큼은 절대로 굶기지 않고 영양섭취를 잘할 수 있도록 잘 먹여서 운동을 시킨다. 그만큼, 뭐든지 잘 먹어야만 몸도 건강해지고 체력도 붙어서 운동을 잘 할 수 있다. 당연히 나트륨이 잔뜩 들어간 라면만 먹으면서 운동하면 영양섭취도 올바르게 되지 않는데다 체력도 쉽게 안 붙을 것이 분명한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언플 자체가 흑역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임춘애의 키가 170cm 정도인데 여성의 신장의 변화가 거의 멈춘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게다가, 1980년대 당시에도 장신에 속했다. 당연히 성장기 때 운동도 열심히 잘 하고 뭐든지 잘 먹어서 키가 큰 것이다. 결국, 본인이 한 말도 아닌데 본인이 한 말로 아직까지도 오해받는 것을 보면 그저 안습이다.
그리고, 응답하라 1988 1화에서 김정봉이 임춘애의 이력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위의 라면 발언을 전면부정하는 멘트를 하기도 했다.
5. 수상 기록
6. 기타
-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임춘애가 깜짝 활약을 하자 중성이 아니냐는 논란도 발생했으며 3차례씩이나 성별 검사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결혼을 해서 아이 셋의 어머니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 이상 논란거리도 못 된다.
-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성화 최종 주자가 되었다. 경기장에 마지막 도입 주자였던 손기정에게 성화를 받아서 경기장을 한 바퀴 돈 다음 3명의 최종 점화자[6] 에게 성화를 전달했다.
- 육상계에서 체육연금을 받는 몇 안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임춘애를 포함해서 마라토너 이봉주와 투포환의 백옥자 선수 정도가 전부라고한다. 황영조는 연금 대신 일시금으로 받았다고 한다.[7]
- 라면 루머에서 '우유가 마시고 싶다', 더 나아가 우유 마시고 키컸다라는 루머가 나왔는데[8] 임춘애는 정작 우유 마시면 탈이 나서 우유를 못 마시는 체질이었다고 한다.
- 사실, 라면 이미지의 원조는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유도선수 안병근이라고 한다. '배가 하도 고파서 라면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먹었다'는 기사가 나간 적이 있다. 무명시절의 안병근이 가난했던 것이 사실이긴 해도 저런 인터뷰 내용은 과장된 것이라고 직접 증언하였다. 게다가, 유도를 비롯한 레슬링, 복싱, 태권도같은 격투기 종목이나 체조 종목 선수들은 체급을 유지하기 위한 식이요법과 체중 감량 문제로 인해 언제나 먹는 것을 조절해야 되기 때문에 늘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 기계체조 선수 양학선도 금메달을 따내자 유사한 라면 논란의 희생양이 되었다. 비닐하우스에 사는 부모님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라면'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라면 업체에서 라면을 협찬하고, 건설 업체에서 아파트를 후원하는 등 광고 효과를 노리는 대기업들에게 본의아니게 엮어버렸다. 그래도 임춘애의 경우와 차이점이 있다면, 양학선은 실제로 라면을 정말 좋아해서 운동이 끝나고 많이 먹는다는 점이다. 사실, 양학선 선수는 라면을 먹어도 살이 찌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것은 운동량이 워낙에 많기 때문에 온몸이 근육질을 유지하는데다 체중 조절도 잘하는 편이라서 그렇다. 체조 특유의 엄청난 운동량으로 인해 라면 2~3개 이상을 먹어도 칼로리가 소모되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한다. 왠지 맥너겟을 즐겨먹는 우사인 볼트와 비슷하다.
- 고등학생 때는 가난해서 음식을 못 먹어서 키가 150cm대로 작았지만, 대학 진학 이후 영양 상태가 좋아져 부쩍부쩍 커서 160cm로 올랐다고 한다. 결국, 라면 루머가 말이 안 되는 것도 성장기때 뭐든지 잘 먹으면서 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종 신장은 170cm가 되었는데, 대한민국 여성으로서는 평균 신장보다 훨씬 큰 편이다.
- 2011년 SBS '좋은 아침' 에서 딸 이지수와 함께 출연하였다.
- 1988년 7월 16일, KBS 1TV로 방영한 애니메이션 아리수변 꿈나무가 바로 임춘애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재방송을 지겹게 하던 다른 KBS 당시 애니메이션이랑 다르게 재방영도 없었기에 본 사람이 적다. 심지어 비디오조차 제목이 영광의 트랙이고, 임춘애의 이름도 개명되었다.[9] 이미지 구하기조차 어렵다. 참고로 이는 KBS와 C&D의 합작이다. 유럽에서 상까지 탈 정도로 작품성 자체는 괜찮았지만 정석적인 작품으로 제작되었고, 결정적으로 올림픽 시즌을 노린 홍보용 작품으로 제작되다보니 임춘애가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면서 홍보용 애니메이션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었고 결국 방영은 했지만, 묻혀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된 듯하다.[10] 어찌나 묻혀있는지 방송된 채널이 KBS1이 아니라 MBC로 와전되기도 할 정도이다. 비슷한 소재의 달려라 하니가 계속 재방영이 된 점을 생각하면 안습이다.
7. 관련 기사
[1] 現 성남시 은행동[2] 고2 시절에는 162cm에 불과했다.[3]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라면만 먹고 뛴 것처럼 알려졌다.[4] 4x400m 계주에 출전하였는데, 주최국 자격으로 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5] 이 사람은 육상 선수 출신이고 학교에서 일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다녔지만, 지도자 교육을 따로 받지 않고 코치를 맡다보니 체육학 지식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지금 기준으로 보면 무리수가 작렬할 수 밖에 없었다. 당대에 나름대로 가방끈이 길었다는 김동엽이나 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써낸 박종환도 선수들을 빡세게 구른것을 생각하면 당대 스포츠 지도에 있어서 그런식의 빡세게 구르는 방식이 정석으로 여겨졌던 때였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장기간 코치를 하면서 얻은 경험은 있기에 당시 어린 임춘애를 보고 기록이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날렵한 체형과 뛰고 나서도 별로 숨 차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야! 물건이다!"라 했다고 한다.[6] 남자 마라톤 선수 김원탁, 전남 신안 가거도의 중학교 분교 체육교사 정선만, 여고생 무용학도 손미정 등 3명이 성화대에 성화를 점화했다. 참고로 3명의 점화자가 성화대에 성화를 동시에 점화한 것은 이 때가 올림픽 사상 최초의 사례였다.[7] 아시안 게임 금메달 점수는 10점이고, 연금 점수는 30점부터 지급된다. 아시안 게임 3관왕을 차지해서 최소요건을 충족한 사례다.[8] 텔런트 이의정이 출연한 예능프로에서 우유 마시고 이와 관련해 임춘애와 통화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도 위의 라면루머와 우유루머를 부정했다. 라면은 선생님이 간식으로 가끔 준 거고 우유는 아예 마시질 못한다고 밝혔다.[9] 물론 줄거리도 실제와는 다르게 영양실조 얘기까지 나오는 등 각색되었다.[10] 비슷하게 홍보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달려라 호돌이'는 아리수변의 나무와는 정반대로 어느정도 인기는 있었지만 올림픽 헌장에 따라서 올림픽 시즌이 끝나자마자 MBC 아카이브실에서 잠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