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1939)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제10대
윤후정

제11대
장상


제12대
신인령

[image]
張裳
1939년 10월 3일 ~ (84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목사, 신학자, 교육자. 이화여자대학교 제11대 총장. 본관은 인동(仁同).
종교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로, 목사이기도 하다. 남편 박준서도 신학자로,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 및 부총장, 경인여자대학교 총장 등을 지냈다.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다.

2. 생애


1939년 10월 3일,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에서 독실한 개신교 신자 가정의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 장수근(張壽根)[1]을 여의었고, 8살이던 1947년 어머니 김봉현(金鳳鉉)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2] 11살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져,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다니며 초등학교를 여러 번 옮겼고, 피난민 학생들을 위한 임시학교인 대전종합중학교에 다니다가 휴전된 후 서울 숙명여자중학교편입학했다.
숙명여자중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중고등학교 내내 장학금을 받았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수학과까지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다녔다. 공부 외에도 다양한 활동들을 열심히 했으며, 당시 총장을 지낸 김활란, 김옥길 등 교수들로부터도 총애를 받았다. 대학 2학년 때는 수학과 퀸으로 뽑혀, 메이퀸[3] 행렬에 참가하기도 했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영향으로, 장상은 전공인 수학뿐 아니라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대 졸업 후에는 연세대학교 신학과편입학했다. 이때 남편 박준서를 처음 만났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의 편입생으로, 법조인보다 신학자의 길에 뜻을 가지게 되어 연세대 신학과에 편입했다고 한다.
졸업 후 196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석사)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박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마침 박준서도 같은 학교에 유학 와 있어서 장상은 박준서와 재회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학생 부부가 되었다. 1973년 장남 박찬우를 낳았는데, 나중에 장상이 국무총리 후보에 올랐을 때 장남의 국적 문제가 말썽이 되었다.
장상과 박준서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아기를 키우고, 학비와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일까지 하며 바쁘게 살다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77년 한국으로 귀국했다. 1978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차남 박찬석이 태어났다.
귀국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및 부총장, 총장을 역임하였다. 줄곧 독신 여성들만[4] 이화여대의 총장을 맡아왔던 관례를 깨고, 기혼 여성으로서 총장이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이중국적 또는 미국 국적 취득, 병역 기피 의혹, 부동산 투기와 이를 위한 위장전입, 집의 크기, 엄청난 예금액수 등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사며 결국 낙마했다.[5]
이후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민주당 공동대표, 대표를 역임하였다.
2008년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문국현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어 치러진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지금도 나는 꿈을 꾼다>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0
2010년 재보궐선거 (서울 은평구 을 국회의원)
민주당
33,048표 (39.90%)
낙선 (2위)
[6]

[1] 1883년(고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평안북도 곽산군수를 지낸 장익후(張益厚)의 4남으로, 일본유학해 영문학을 공부했다.[2] 10살 위였던 언니 장란(張蘭)은 일찌감치 서울 진명여학교로 유학을 가 있었다.[3] 과거 여러 대학에서 5월마다 했던, 일종의 미인대회. 용모, 성적, 재능, 품성 등등을 두루 고려하여 선발하며, 학교의 스타 내지는 아이돌처럼 여겨졌다. 각 학과마다 퀸을 뽑고, 그 중에서 또 학교 전체 퀸을 뽑았다.[4] 이화학당의 창립자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제외하고. 한국에 올 당시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52세의 과부였으며, 장성한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했다.[5] 최초의 여성 총리는 한명숙이 됐다.[6] 전임자 문국현 당선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