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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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정치인, 사회운동가. 5선 국회의원 출신이다. MB정부 실세로 친이계 좌장이었다. 초기부터 쓴소리하다 날라간 정두언이나 후기에 부패 스캔들로 날라간 이상득과 달리, 지금도 MB 곁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인물. 허나 그러다보니 대표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MB 시절 정책이랄 수 있는 대운하와 4대강 정비 사업 옹호 때문에 지금도 진보 진영에선 상당한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거고, 과거 운동권 전설이었던 이력과 여전히 버리지 않은 개혁적인 성향, 그리고 친박 세력과 적대적이라는 점 때문에 나름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3] 실제 박근혜와 대립각을 세워 친박 진영에서도 곱게 보진 않는 인물이다.
2. 생애
1945년 1월 11일,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성장해 영양고등학교,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학생 시절이던 1964년 6.3 항쟁에 참여하였다.[4] 1964년 4월부터 1966년 12월까지 군생활을 했는데 이때 5사단 소속으로 포천이동중학교에서 군 파견교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5]
졸업 이후 대성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역임하였는데 당시 가르친 제자 중 한 명이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국회의원이다. 이후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 1979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자격으로 경북 안동댐을 방문했다가, 현장에 박정희의 방생기념탑은 크게 선 반면 안동댐 건설 공사로 숨진 노동자들의 위령탑은 초라하게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10월 유신독재의 실체"라고 비판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구속된 적이 있다. 이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에 몸담으면서 1989년 창립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조국통일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군부독재 시절 5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6] 자그마치 '''10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제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사찰을 당했다. 이러니 군부독재 세력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박근혜에게 호감을 느낄 리 만무하며, 박근혜 정부에서도 여러모로 박근혜와 친박에게 계속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주장하는 인사 중 한명이였다. 오죽하면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후 은근히 박근혜 정부를 까는 글을 SNS에 올릴 정도였으니..
아버지는 독립군 활동을 했다고 한다. 참여정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친일청산 관련한 법을 통과시키려고 했는데, 당시 친일법 대상을 촘촘히 해야 한다고 발언했던 김희선 의원의 부친이 만주국 공안국 특무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김일련이었고 당시 독립군이었던 이재오의 아버지를 김일련이 잡아넣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3. 정치인 생활
1990년 노동정당인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원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러다 김영삼이 이끌던 문민정부 시절이던 1994년 김문수, 이우재 등과 함께 당시 여당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정치국민회의 이원형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으며, 이후 같은 선거구에서 한나라당, 새누리당 소속으로 다섯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01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한나라당의 원내대표(원내총무)를 지냈다.
3.1.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 대통령과는 대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6.3 항쟁)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6.3동지회의 전임회장과 후임회장으로 인연으로 이어지고, 15대 국회에서 같이 의정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이명박이 15대 국회 첫 질문에서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경부운하를 언급한 것에, '형님 진짜 그거야말로 나라를 바꾸는 거다. 그러면 이걸하려면 형님이 대통령 해야 되니깐, 국회는 내가 할 테니 형님은 대통령 하시오'라고 담화를 나눴다고 한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MB 캠프’의 좌장으로 활동하면서 캠프 내 조직과 구성원들의 인사(人事) 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여해 이명박 후보의 경선 승리를 가져온 1등공신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계파 갈등[7] 속에 치러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가, 문국현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자 이후 치러진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원외 신분이던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국민권익위원장을 역임하였는데, 친이계 실세라서 당시 국민권익위원회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친이계 좌장으로 친박계와 다툼을 자주 벌였고, 실제 친이계가 당권을 잡은 18대 총선에선 친박계 공천학살을 주도했다는 의혹도 있다.[8] 당연히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판하는 등 박근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2012년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한 후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진수희 등 자신을 제외한 측근들이 모두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9]
3.2. 박근혜 정부 시절
비박#s-4계와 손잡고 19대 국회에서 친박계의 불통, 권위주의를 비판하다,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비박계 김무성 대표가 당직인 파동까지 벌이며 은평 을에 대해 무공천 선언하며 당선 가능성이 높아졌고, 실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진보 진영의 표가 분산되어 이재오 의원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정의당의 김제남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강병원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강병원 후보의 당선으로 이재오 의원의 6선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총선 이후 새누리당에 복당하지 않고 최병국 전 의원과 함께 중도 신당 창당 작업에 착수했다.
2016년 말 박근혜 정부 최악의 오점으로 남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11월 20일 검찰이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규정하자, 21일 박근혜 대통령의 검찰수사 전면 거부와 관련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을 권리와 의무도 있지만, '''범죄자인 대통령을 끌어내릴 권리와 의무도 있다'''"며 맹디스를 날렸다. 그러면서 "범죄자를 대통령으로 받들고 그 하수인이 된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더 이상 당이 존립할 근거가 없다. 즉각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날, 이명박도 '''"참담한 심정이다. 박근혜는 민심에 따라 당장 퇴진해야 한다."라며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3.3.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
2017년 1월 11일, 늘푸른한국당을 창당하였다.[10] 정운찬을 늘푸른한국당 대선주자로 세우는 것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2017년 3월 20일 본인의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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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등록 후 2017년 4월 17일 사진처럼 복면을 하고 나와서 대선 후보간 복면 토론을 제안하였다. 이재오가 친이계 및 정치계의 중진급 인사이기는 하나 아직 늘푸른한국당이 원외 정당인 데다가 역대급의 사태가 터져 보수계열 정당의 당선 확률 자체가 희박한 만큼 차차기 친이계 재건 및 대권을 노린 대선 출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4월 24일 군소후보 토론회에서는 그래도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사람답게 9명 중 제일 정상적이라는 평가[11] 를 받고 있다. 오영국 같이 정말 허황된 공약들을 내세우는 군소후보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체계적으로 짜인 공약들+진보적 통일관은 그가 괜히 5선 의원에 특임장관까지 역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실제로 이 토론에서의 승자는 이재오라는 게 중론이다.[12] 다만 특유의 쉰 목소리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아쉬운 점.
토론에서 '신6자회담, 남북자유왕래, 한반도평화조약' 등 진보계에서 먼저 나올 법한[13] 통일관을 제시하며 이재오 특유의 노련미를 뽐냈다. 다만 일부 극우인사들에겐 이재오의 통일관이 종북 수준이라는 논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 1만 표도 얻지 못하며 12위로 낙선하고 만다. 그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정치생명에 치명타란 평가도 있었지만, 애초에 대선출마는 어디까지나 일반 대중들에게 신생정당인 늘푸른한국당을 알리기 위해 출마한 것에 가까워서 정치생명에 큰 타격은 없을 거란 평가도 있었다.[14] 게다가 이미 이재오 나이가 70대로 정계은퇴해도 무방한 나이라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은거 말년에 맘껏 하고 있다고 보면 될듯.
여담으로 투표권이 없는 10대들이 '청소년이 직접 뽑는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운동본부'의 주최하에 대선 모의 투표를 했는데 60,075표 중 13표를 획득하며 꼴찌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3.4. 문재인 정부 시절
2017년 12월 5일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에서 이명박에게 매우 적대적인 기자 주진우와 만나서 약 1시간 반가량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방송 듣기 또한 채널A의 시사 프로그램 '외부자들'에서 이명박 공격수로 가장 유명한 정봉주[15] 와도 두 차례에 걸쳐 살벌한 설전을 벌였다. 처음(47회)에는 정봉주가 '의리는 좋지만 이젠 떠나실 때 됐는데' 라고 말하자 이재오는 '없는 사람들끼리 의리라도 있어야 되지 않나'라며 되받았고, 두 번째(56회)에는 김백준과 국정원 특수활동비유용건이 두고 이재오와 정봉주와 진중권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이명박 前 대통령에 대해 수사 압력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 통합을 명목으로 늘푸른한국당을 해체하고 2018년 2월 12일,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복당하면서 이명박에 대한 수사를 정치보복이라며 비난하였고#, 2018년 12월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였다.#
2019년 9월 전광훈 목사가 출범시킨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에서 총괄본부장직을 맡고 범투본측에서 10월 3일 개천절 집회를 기획하였고.# 집회를 주관하며 문재인 정부에 대해 날을 세웠으나, 참가자들에게 질서있는 비폭력 평화집회가 되도록 이끌었다.그러나 정작 자유한국당 대표인 황교안에게도 자유한국당은 집회에서 빠지라는 발언을 하는 등 여전히 친이 좌장의 입장에서 황교안의 친박, 친황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9년 12월 23일, 소설가 이문열, 송복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보수계열 시민단체인 국민통합연대를 출범시켰는데 이곳에는 친이, 비박, 친홍 계열 정치인들도 여럿 왔다. 이에 대해 직접, 정치인 여러분들은 개인적 친분 때문에 온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자리에 전광훈 목사가 와 축사를 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문재인 하야하라는 전광훈 집회에도 몇번 모습을 보여 이재오가 전광훈에 물든 것 아니냔 우려가 나오기도 했는데, 본인 왈론 초대를 받아 몇번 간거라고 밝혀서 10월 이후에는 이름 빌려준 값만 해준 듯 하다. 본인 스스로도 모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군복 입고 태극기 들면 그게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태극기 부대를 은근히 디스하는거 보면 더 그렇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대참패한 이후엔 몇몇 보수인사들과 함께 성명을 내고, 미래통합당은 자진 해산하고 중도실용 정당으로 환골탈태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잘했다는건 아니고, 이런 정권 하나 심판못하는 무능한 야당에 대한 질타가 강했다고 보면 될듯. 이명박 정부 때엔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에 못지 않은 숱한 비난과 질타를 받았던 MB맨이었으나 박근혜와 각을 세운 이후, 잇따른 친박내홍사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지면서 온건보수의 이미지가 생겼다. 친이계도 이명박 정부 이후 각종 내분과 이합집산으로 그 흔적이 옅어져서 그런지 친박이 욕을 먹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운좋게 이미지 타격을 많이 입지 않았다.
2020년 5월 이후에는 KBS 정치시사프로그램 더 라이브 에 보수측 정치원로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8월 24일자 방송에서 8.15 광복절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 참석 후 코로나 검체검사 결과 음성이 나온 것을 밝혔다.
2020년 9월 1일 건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임용되었다.
4. 여담
- 저서로 '한국학생운동사'가 있는데, 1984년에 초판이 나왔다. 이 책은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학생운동의 역사를, 직접 활동하던 운동권 출신이 쓴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학생운동사에서 굉장히 가치가 높은 저서로 평가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이 워낙 의미가 있다 보니 꾸준히 재판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 행정구역 개편에 관심있는 정치인 중 하나라서 여러 번 자신만의 (도 폐지 뉘앙스를 지닌) 행정제도 개편안을 제안한 적이 있다. 전국을 50여 개 광역시로 개편하자는 것. 또 내각제에 관심이 있어서 이원집정부제를 골자로 한[16] 개헌 제안도 종종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차린 정당인 늘푸른한국당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 이명박과 이재오가 같은 경주 이씨라는 이야기나 재령 이씨가 분적한 성씨이나 이재오가 항렬상 손자뻘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재령 이씨의 분적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이 미비하여 항렬을 세는 중시조가 다르므로 항렬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2010년대 들어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같은 항렬이라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실제 이재오는 23세로 추정된다.
- 국회 신상 발언에서 "나 같은 사람이 청춘을 바쳐 민주화 운동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가능했던 것", "노무현 대통령은 독재하에서 경찰서 유치장도 한 번 안 가본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로[17] 자신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 민중당 사무총장시절 자금모금을 위해 민주당 지지자였던 유명가수 민해경을 섭외해서 디너갈라쇼 기획을 했다고 한다. 민해경은 무료로 출연했고 수입은 민중당에 기부했다고 한다.
- 손학규 前 경기도지사도 이명박, 이재오와 6.3 항쟁에서 같이 했었던 만큼, 셋과의 친분도 상당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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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前 대통령과의 사이는 당시 이재오가 야당 원내대표로 정적 관계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나름 유명한 일화로, 참여정부 시절 사학법 문제로 여야가 치열하게 대립하던 당시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부르자 여당 원내대표까지 포함해 셋이서 만났는데 자신이 야당의 원내대표로서 양보를 부탁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엔 야당에 양보해 주시죠"라고 여당 원내대표에게 부탁했고 그는 당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남긴 뒤 여당에 이를 전하러 떠났다. 이후 노 대통령은 이 원내대표와 함께 청와대를 둘러보며 또 만날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훗날 보니 그게 설마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고. 이 사건을 겪고 이재오는 친이계 좌장인 것과는 별개로, 노무현에 대해 "정국이 꼬여 여야가 싸울 당시 야당의 편도 들어줄 줄 알던 여유를 가진 자"였다며 호평했다.#[18]
- 2013년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후 "잊고 살았던 고문 당한 전신이 스믈스믈거리고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전신이 옥죄이면서 아파온다. 비단 나뿐일까? 아,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물이 난다"라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 보수정당에 대해 '독재당이다, 수구보수꼴통당이다 이런 소릴 탈피하자'고 주창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친박계와 견원지간으로 지낸 것도 이런 그의 사상적 신념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 2014년 12월 29일 올라온 노유진의 정치까페에 보수 여당 의원 중 최초 게스트로 출연해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교수와 정치 입문 계기부터 시작해서 MB 정권 시절 일들과 박근혜 정부 평가 등 여러 만담을 나눴다. 본인 왈 야당보다도 당시 여당인 보수를 개혁하는 게 급선무란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보수 정당으로 입문한 게 컸다고...
- 20대 총선을 1주일 앞둔 2016년 4월 6일 저녁 8시경, 서울 은평 을에서 유세 중 한 취객에게 "(국회의원) 그만 해먹어라, 왜 자꾸 나오냐"라며 가슴을 타격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사건 이후에도 이재오 후보는 별 문제없이 선거 유세운동을 진행했으며, 경찰은 경범죄 혐의로 취객을 체포했다. 이와 연관되어 19대 총선 때 은평구를 위해 마무리하지 못한 지역사업이 있다는 취지로 마지막 총선이라는 말을 했는데, 20대 총선 때도 비슷한 말을 하며 이번이 마지막 선거라고 해서 타격당한 거 아니냔 웃픈 소리가 떠돌기도 했다.
- 엄청난 자전거 애호가이다. 이명박도 상당한 자덕이라 둘이 같이 타고 다니기도 한다. 이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겪었는데, 2007년 10월 자동차 전용 도로인 올림픽대로에서 자전거를 탄 혐의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적이 있었다. 한반도 대운하 자전거 탐방을 마치고 서울로 오던 중이었는데, 같이 자전거를 타던 관계자 13명도 함께 즉결심판에 회부됐다고.#
- 과거 운동권 경력이 있어서인지 노회찬, 심상정 의원과도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이명박 대통령도 대통령 당선 직후 심상정을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한편, 이재오는 2013년 당시 안기부 X파일 문제로 노회찬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할 때 안타까움을 표현한 적이 있었고, 그의 의원직 상실을 막고자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발의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 노회찬 의원이 2018년 투신했을 때도 자기 페이스북에 긴 추도사를 올려 안타까움을 표했다.
- 이명박,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로 임명된 정운찬과 상당히 친해져서, 현재 이재오와 정운찬은 늘푸른한국당에서 행적을 같이하고 있으며 실제로 정운찬은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다만 아직까지는 국민의당, 바른정당, 늘푸른한국당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편인지라[19] , 늘푸른한국당 내에서는 이재오의 대선 등판 요구가 나오고 있다고... 그리고 이내 그 요구를 수락해 늘푸른한국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 이재오의 이름 석자의 뜻을 해석하면 있을 재(在)에 다섯 오(五)인데, 흥미로운 점은 이재오는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을 5번 갔었고, 국회의원 5선을 했다는 거다. 숫자 5랑 인연이 많은 듯. 또 이재오의 선조가 나름 유명한 갈암 이현일인데 숙종 시절 환국 두 차례 잠깐을 제외하고는 만년 야당이었던 영남 남인의 대표격 인물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반면 아랫문단의 서청원은 달성 서씨로서 선조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를 배출했던 서인-소론의 명문가였고,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인으로서 과거시험에서 그 정약용을 차석으로 밀어내고 수석을 했던 서영보의 6대손이다.
- 한때는 서청원과 같이 범(汎) 상도동계(민주계)이면서 중앙대 2년 선후배로 동세대고[20] 6.3항쟁도 같이 했었던 관계로 매우 친했으나 2000년대 중반의 당내 정치구도를 거치면서[21] 친이-친박의 구도가 굳어진 2007년부터는 견원지간이 되었다.[22] 기사(조선일보 프리미엄서비스 140113)에 두 사람 간의 관계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다. 위의 집안 내력까지 해서 정치 호사가들이 참 좋아할 소재이긴 하다.
- 19대 대선 후보 15인 중에서 전과에 유일하게 반공법 위반이 있었다. 참고로 반공법이 폐지 혹은 국보법에 병합된 것은 1980년이다.
- 정치 비평을 하는 유튜브 채널도 있다. 채널 이름은 '이재오의 와이러니'이다.
-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아들 병역 의혹에 대해 자신은 외아들이 있는데 강원도 인제군에서 복무했으며 전방초소근무도 시켰고 복무 중 아버지를 밝히지 말고 휴가도 나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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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해에서 태어났으나 이후 쭉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자랐기 때문에 실질적인 고향은 영양군이다.[2] 경주 이씨의 분파이나 갈라져 나온 게 고려시대로 오래 되었다.[3] 다만 2010년대 후반 들어 전광훈과 같이 다니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며 평이 깎인 측면이 있다.(...) 본인은 일단 성향을 공유하는건 아니고(당장 YS, MB를 실패한 보수 대통령으로 규정한 전광훈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라고 부탁하니 갔을 뿐이라는 입장이나, 전광훈 행적을 보면 알다시피 보통은 불러도 안가는게 상식적이긴 하다. 그나마 2020년 전광훈이 사실상 코로나 테러(...)를 저질러서 재수감되었기에 같이 다닐 일은 잘 없을듯.[4] 이 때 이명박, 손학규와도 친분이 생겼다. 또한 6.3항쟁에서 중앙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대학 선배 서청원과도 친분이 생겼는데, 다만 둘은 우여곡절을 거쳐 2000년대 중반 한나라당 내 친이-친박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선 적대관계로 변했다.[5] 이것이 2010년에 특임장관 청문회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2009년 출간한 자서전에 소상히 나와있는 내용이고 결국 특임장관이 되었다.[6] 박정희 시절에 3차례 , 80년대에는 2차례 갔다왔다 .[7] 이거 때문에 2008년 총선에서 꽤나 많은 친박계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를 결성했다. 심지어 당시 친박 공천 학살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이명박 측근 이방호만큼은 낙선시키겠다고 친박계가 아예 대놓고 민노당 강기갑을 팍팍 밀어주는, 희대의 정치 코미디가 벌어지기도 했다.[8] 그래서인지 박사모가 1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이재오, 이방호 낙선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9] 다만 이때는 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 때 친박 중진들이 대거 학살당한 것과는 달리 친이계 중진들은 다수 공천을 받았고, 친이계 초재선이 대거 컷오프됐다는 차이점이 있다. 말년이었긴 했지만 어쨌든 이명박이 현직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대 총선에선 얄짤없이 중진까지 대거 날려버린다.[10] 이명박 대통령이 창당대회에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여론 동향을 의식한 것으로 여겨진다.[11] 조원진 vs 김선동의 병림픽, 오영국의 특이한 기행+제비족 내지 트로트 가수를 연상시키는 복장 등과 대비하여 그렇다는 얘기. 대통령 임기 6개월만에 개헌하고 3년만에 하야하겠다는 주장은 정말 뜬금없는 소리라는 평을 받았다. 6개월 이내 개헌도 말이 안되고, 3년만에 하야하면 3년만에 대선을 다시 치뤄야 한다.[12] 당시 19대 대선 후보자 토론-비초청 영상.[13] 한반도평화조약은 심상정 후보의 공약이기도 했다.[14]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이재오와 늘푸른한국당의 행보는 대통령 당선에 중점을 두지 않고, 늘푸른한국당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대선 출마에 가까웠다. 원내정당을 제외하면 애초에 대권을 노린다는 자체가 현실 가능성이 떨어지기도 하고.[15] 참고로 정봉주는 진중권이나 주진우를 능가할 정도로 이명박을 가장 맹렬하게 공격했던 인물이다.[16] 이재오의 제안은 "대통령이 비상대권과 외치(국방, 외교, 통일)"를 맡고, 국회에서 이루어진 "총리 내각이 내치(경제, 사회 등)"를 맡는 방안이다. 일종의 이원집정부제와 비슷하다 보면 되겠다.[17]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 & 노동 변호사 시절인 1987년 구속당한 적이 있다.[18] 한나라당, 새누리당 국회의원이었던 정두언 전 의원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식대로만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만나보면 타인이 바라는 것도 (납득만 시키면) 잘 들어주던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은 남 얘기 경청하는 듯 보여도 결국엔 본인 독단대로 한다고 디스하면서 나온 발언이긴 하지만..[19] 다만 정운찬 역시 친박과 박근혜를 매우 싫어하기에, 자유한국당에 입당할 가능성은 없다. 당장에 친이계 인사이자 이재오와 함께 차기 친이계의 대권주자로 손꼽혔던 정운찬이 박근혜와 친박에게 호감 자체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20] 하지만 정치경력 차이는 많이 난다. 2014년 19대 국회 시절 서청원은 본인이 15대 국회 4선째 때 이재오가 초선으로 등원했기 때문에, 이재오와 싸울 군번이 아니라고 했었다.[21] 아래 조선일보 링크의 기사에 따르면, 2003년 당대표 경선에서 바로 앞문장에 썼듯이 계파가 큰 틀에서 같기 때문에 지지층이 겹쳐서 표가 갈라져 이재오가 독자출마를 하지 않았으면 충분히 이겼을 최병렬에게 경선에서 져서 대표직을 내주고 최고위원이 된 것에서부터 악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22] 잘 알려졌듯 이명박도 6.3 항쟁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이 때문인지 이명박과도 인연이 있는 사이었으나, BBK, 도곡동 땅, 최씨 가족, 문고리 3인방 등의 소재가 전부 다 나온 대선 경선 과정의 그 유명한 공방을 거친 2007년 이후로 사이가 크게 나빠졌다고 한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부터 이명박이 상대 박근혜 진영의 서청원을 콕 찝어서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치러진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예상대로 시원하게 떨어졌지만 친박연대 창설 및 친박 무소속 연대로 18대 국회에 생환했다.[23]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24]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25] 전임자 문국현 의원직 상실[26] 단 소위 옥새런 사건의 결과로 새누리당 후보의 은평구 을 무공천이 합의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새누리당 후보로 봐도 무방하다.[27] 전임자 박근혜 탄핵 인용에 따른 파면으로 인한 궐위에 의한 선거[28] 2018년 2월 9일 늘푸른한국당 해산, 2018년 2월 12일 자유한국당 복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