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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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전 국회의원·정치인이다. 서울특별시 출생이며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2. 생애
1961년, 서울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동성중학교(서울), 1967년 중동고등학교, 197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197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군복무는 학군사관후보생(ROTC) 10기(중위)로 마쳤다.
1995년부터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 킴벌리 클라크 동아시아 총괄사장직, 그리고 KT 사외이사직으로 있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2007년 8월 23일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다. 10월 30일 새로 창조한국당을 창당하고 11월 4일 대선후보로 추대됐고, 유효득표의 5.8%를 득표하여 낙선했다. 하지만 주요 후보들의 소속 정당 및 이름을 가린 Blind Voting에서는 비록 인터넷 이벤트였을지언정 당당하게 1위를 차지, '''정책의 경쟁력이 매우 강한 후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정치권의 대안으로 젊은층의 지지를 받았던 점에서 훗날의 안철수가 막 정치권에 진입했을 때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안철수는 정치 진입 초창기 문국현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대선출마를 선언했으나 서울 강남에서 부동산 거래로 약 20억의 시세차익을 거둔 사실이 드러났고, 또한 2004년에 본인의 전원주택을 신축하면서 농지를 영농 목적으로 구입한 후 불과 한 달 만에 용도변경허가를 신청한 것까지 알려지게 되어 도덕성에 의구심을 지니게 했다.
게다가 두 딸이 모두 비정규직[3] 이어서 약자의 아픔을 안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나, 막상 선관위에 신고한 재산 내역에서 증여세를 납부하지 않은 상태로 두 딸에게 약 6억가량의 현금과 주식이 분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에 문국현의 선거운동본부[4] 에서는 "펀드매니저의 조언에 따라 재산 분할관리를 했을 뿐"이라며 변명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걸 대선 출마 직후에야 본인의 명의로 황급히 환원시킨 사실이 밝혀져 본인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며칠 후에는 또 "아이들의 혼수를 생각해서 그랬다”며 사실상 증여를 시인하는 등의 말바꾸기가 이어지며 상당한 지지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정계진출 이전 시기에 토론에 참여해 보수논객으로 이름을 얻은 정규재 한국경제 주필의 송곳 질의를 확실하게 논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제 전문가의 위엄'''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미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1위였고 그 남은 자리를 정동영이 차지한 상황에서 대중에 비춰지는 기회가 현저하게 적어 후보 본인을 제대로 알릴 기회가 없는 매우 불리한 싸움을 치러야 했다. 선거 당시 여권에서 '''후보단일화''' 제의를 하며 손을 내밀기도 했지만 끝까지 제3의 길을 고수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요소.
결국 개표 결과 5.8%라는 아쉬운 득표율로 대선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있었다면 출구조사 결과 20대에서는 '''15.9%라는 상당한 득표율로 3위를 기록'''했다는 점. 이명박도 정동영도 불신하는 당시의 20대들에게 문국현이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인터넷의 진보 네티즌 사이에서는 정동영 대신 문국현을 밀자는 주장이 일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붙은 별명이 바로 '인터넷 대통령'.
2008년에 열린 18대 총선에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창조한국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 48,656표(52.02%)를 득표하여 3선 의원인 한나라당의 이재오 후보를 약 10,492표차로 이기고 당선됐다.[5]
2009년 9월 1일까지 창조한국당과 자유선진당의 연합 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의 대표를 지냈다.
2009년 10월 22일, 선관위의 지도를 받아 1%의 이자로 발행한 당사랑채권이 시중 금리(당시 5%)보다 낮다는 이유로 4% 차이만큼 당이 잠재적인 금전적인 이익을 얻은 죄를 물어, 당을 처벌할 수 없으니 자연인인 당 대표를 처벌하였다. 다만, 이유가 이것뿐만은 아니고 '''저리로 발행한 당채의 매입 당사자 중 1명이 비례대표 상위순번자'''였다는 게 문제였다. 비례대표 2번으로 공천되어 당선된 이한정 의원이 당사자로 이 당채를 6억 원치를 매입했던 것이다. 선관위와 법원은, '''저리로 발행된 당채를 하필 비례대표 상위순번자가 매입'''한 것을 일종의 공천헌금으로 해석한 것이다. 당채의 이율이 시중금리 수준이었으면 문제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사 저리로 발행했어도 당 후보자들이 매입하지 않았으면 역시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대법원 판결에서도 4인의 대법관들이 합의를 보지 못하자 전원합의체로 돌려 9:4로 대법원 전원 합의체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의 형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이재오가 이듬해 보궐선거를 통해 지역구 복귀에 성공했다. 징역형을 받았으므로 2019년까지 향후 10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돼 사면되지 않는 한 출마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정치에서는 은퇴한 상태다. 해당판례(2009. 10. 22. 2009도7436)는 형사소송법에서 공소장일본주의와 관련하여, 공소장일본주의의 위반의 효과와 위법의 치유에 대한 리딩케이스이다.
정치계를 떠난 후 2009년부터 김광수경제연구소 고문을, 2010년부터 뉴 패러다임 인스티튜트 대표이사를 지냈다. 2013년부터는 한솔섬유의 사장을 맡고 있다.
2015년 1월에는 캄보디아에 위치한 한솔섬유의 자회사 현지 공장에서 노조 간부들이 무더기로 해고되어 노동자 탄압이라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
3. 기타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1] 의원직 상실[2] 소아마비 장애인인 여동생이 천주교 영세를 받고 싶다고 해서 같이 받았다고 한다.[3] 큰딸은 유치원에서 비정규직 발레 교사로 일하다 그만뒀고, 작은딸은 외국계 은행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다 대학에 복학[4]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출신의 장유식(서영교 의원의 남편) 변호사가 문국현의 대변인으로서 이 내용을 발표했다.[5] 이 선거는 계파 갈등과 공천 문제 때문에 친박계가 친이계 후보들의 낙선을 위해 아예 대놓고 야당 후보를 밀어 버린 선거이기도 했다. 이거 때문에 사천에서 강달프가 몰표를 얻은 희대의 대이변이 발생했다.[6] 2009. 10. 22 의원직 상실 (정치자금법 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