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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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국의 기업인.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鄭周永)의 셋째 동생이다. 정인영, 정순영은 그의 형이고, 정상영은 그의 동생이다.
현대자동차의 초대 사장, 회장으로 현대자동차의 설립, 성장의 주역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2. 초기 생애
1928년 8월 6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1] 마을에서 태어나 보성고등학교(서울)(39회)와 1953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하였다.
6.25 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영어 실력이 좋은 편이다.[2]
1957년 현대건설에 입사하였다.[3] 1965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였다[4] .
3. 현대자동차: 설립에서 하차까지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사장을 맡았다. 이듬해 첫 자동차 코티나를 생산하였다. 하지만 코티나는 대한민국 도로여건에 맞지 않아 악평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974년에는 한국 최초의 국산 모델 자동차인 현대 포니를 생산하였다. 포니 자동차는 평가가 긍정적이었다. 1976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에콰도르에 포니를 수출하였다. 이로써 현대자동차는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 2번째로 고유 자동차 모델을 런칭하고 성공했다. 이 때부터 '''포니 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는지 탈모가 진행되었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현대그룹 회장 겸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낸 뒤, 아들 정몽규에게 현대자동차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 된다. 현대자동차의 개인 주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30년간 현대자동차를 직접 일구어 온 것을 생각한다면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계속 가져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고, 당시 사람들도 현대자동차=정세영, 정몽규 부자의 몫으로 생각했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현대그룹 회장 겸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냈다. 정주영 회장이 정계에 진출함에 따라 그룹 회장직에 오른것이다. 92년 대선 결과가 나온 후 형 정주영 명예회장을 대신해 당시 당선인 신분이던 김영삼 대통령을 찾아가 사죄를 한것도 정세영 회장이었다.[5] 아들 정몽규에게 현대자동차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 된다. 현대자동차의 개인 주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30년간 현대자동차를 직접 일구어 온 것을 생각한다면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계속 가져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하지만 정주영과 정주영의 아들들 입장에서는 그룹의 알짜배기인 현대자동차를 정세영에게 넘겨줄 리 없었다.[6] 그래서 정세영은 현대자동차의 덩치가 너무 커지면 오히려 자신에게 경영권이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기아자동차를 인수하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1998년 12월, 결국 정몽구가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취임하고 정몽규는 부회장으로 밀려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영은 우호 지분을 끌어모아 주주총회에서 정몽구 측 인사들의 이사 선임을 저지하는 등 끝까지 현대자동차를 놓지 않으려 했으나...#
형 정주영의 한마디[7] 에 포기하고 만다. 1999년 3월 5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몽구의 현대산업개발 지분과 정세영-정몽규 부자의 현대자동차 지분을 맞바꾸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32년 만에 자동차 업계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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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세영-정몽규 부자의 현대자동차 퇴진 기자회견때의 모습. 정세영 회장은 애써 표정을 유지했지만 정몽규 회장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8]
위 사진은 훗날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부분이기도 한데, 정세영 회장은 현대자동차 회장 이임식에서 회사 사가(社歌)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억울했던 모양.[9]
이 당시 여론은 '동생이 애써 키워놓은 회사를 아들한테 넘겨주냐'면서 상당히 안좋았다고 한다.
만약 정세영이 현대자동차를 조카에게 넘기는 데 계속 반발했다면 현대그룹은 한바탕 홍역을 치뤘을 판이었다. 실제로 그 다음해인 2000년 세칭 '왕자의 난'이라 불린, 정몽구-정몽헌 사이의 그룹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던 것, 2001년에 정주영이 별세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룹이 공중분해될 수도 있었다.
사실상 이 시기부터 현대가는 형제의 난, 시숙의 난, 시동생의 난 등등 끊임없는 권력투쟁에 몸살을 앓게 되는데 그로 인해 현대그룹은 갈라지기 시작했고, 결국 정주영 창업주가 사망하고 그렇게 현대그룹은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등, 여러 대기업으로 나뉘어졌다.
그래도 정세영으로부터 현대자동차를 넘겨받은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그룹을 세계 5위 자동차그룹으로 성장시키는등 뛰어난 경영능력을 보여주어 현대자동차는 포니 정 시절때보다 더 잘 나가게 되었다.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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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현대산업개발 명예 회장으로 있다가 폐렴 증세로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2005년 5월에 별세하였다. 이때도 정몽규 회장에 대한 동정론은 더욱 커지고, 조카인 정몽구 회장도 미안했는지 숙부인 정세영 회장의 빈소를 찾게되는데, 이때 정몽규 회장과 어색한 분위기 등이 화제가 되기도했다.
그가 타계한 2005년부터 그의 별명을 딴 '포니 정 재단'이 설립되었다. 주로 국내외 장학 사업, 사회 각 부문의 혁신가들을 선정, 시상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2008년에는 강남 삼성동의 현대아이파크 타워 1층에 포니정 홀이라는 강당을 마련, 연주회나 세미나를 열고 있다.
5. 기타
현대가로서는 드물게 대머리이다. 그의 형제들은 풍성한 반면 거의 유일한 대머리라고 한다. 하지만 정의선 등 손자 세대에서도 탈모가 보이는 걸 보면 현대가에 탈모 유전이 있긴 한듯.
6. 가족 관계
[1] 정주영의 호 아산은 이 마을 이름에서 따 왔다.[2] 정세영회장의 영어 인터뷰. 영상은 당시 포니의 개발수장으로 영국에서 '모셔 온' 조지 턴블의 다큐멘터리이다.[3] 앞서 언급했듯 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인연 때문에 미8군이 의뢰하는 공사를 현대건설이 쉽게 다 따낼 수 있었다고 한다.[4] 이 공사 현장에 신입사원 '''이명박'''이 파견나갔다.[5] 이때 참으로 안습한 일화가 있는데 정세영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6] 현대정공의 자동차산업 진출은 이런 분위기를 보여준 일화라고 볼 수 있겠다. 정주영 역시 동생이 수십년을 키워온 현대자동차를 아들에게 넘기고 싶어했고 현대정공의 자동차 산업 진출을 도왔다는 후문.[7] '''"몽구가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 라고 말했다고. 이 말은 정세영의 자서전에도 나온다. 당시 '''"형님이 현대산업개발을 주신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한다."'''고 인터뷰할 정도였으니 현대그룹의 창업주이자 오너인 정주영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간에서는, "정세영 회장도 결국 전문경영인에 불과했다"고 평했다.[8] 본인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사촌형한테 넘어가 버리니 당연히 화날만 했다.[9] 그러나 큰 형인 정주영 회장은 기업인으로서는 냉혹했지만 형으로서는 좋은 형이었는지 이후 정주영 회장에 대해 여전히 '존경하는 분'이라고 했다. 실제로 2001년 정주영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크게 대성통곡했던 사람이 정세영 회장이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사업적인 부분에서는 냉엄한 보스였지만 기업 외적인 부분, 특히 가족 중에서도 동생들을 많이 챙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