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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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실상부 20세기 한국 재벌의 원탑[5] 으로 창업주는 아산 정주영 회장이다. 계열 분리가 이루어진 이후 "현대그룹"이라고 하면 분리된 기업집단 가운데 5남 정몽헌 회장이 물려받아 그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이끌고 있는 집단만을 이르는 말이다. 참고로, 정몽헌 회장은 정주영 회장이 직접 지목한 후계자.'''꿈과 희망의 현대'''
'''긍정'''[4]
과거 현대그룹에 속했던 기업집단들을 통칭 범 현대가로 부르며, 여기에는 정주영 회장 생전에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한 기업집단도 포함된다. 2010년 이후로도 자산기준 10대 기업집단에 현대자동차그룹 및 현대중공업그룹이 올라 있으며 현대백화점그룹, HDC가 대기업 기준의 순위에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과거 현대그룹의 위상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2. 역사
2.1. 자수성가형 재벌
어깨라이벌 삼성그룹이 조상 때부터 지역에서 나름대로 재력을 축적하고 있던 가문[6] 에서 출발한 데 반해, 현대그룹은 정주영 회장의 가문이 지지리도 못 살던 빈농이었고 정 회장 스스로도 소학교만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부모님 몰래 '''소 판 돈 들고 가출하여''' 세운[7] 자수성가형 기업으로 유명하다.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세워 1950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합친 뒤 주식회사로 개편했고, 같은 해 현대상운을 세워 사업 확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2년 충북 단양에 시멘트공장을 세우고 1963년에는 현대양행까지 세웠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수없는 기업들이 흥망을 거듭하는 와중에 현대는 건설업을 중심으로 사세를 꾸준히 키워나갔고,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1967년 현대자동차,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을 각각 세워 자동차와 조선업에 진입해 중화학 드라이브를 선도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집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현대가 없었으면 지금의 울산광역시도 없었다. 그 외에 1971년 금강개발산업을 세워 관광 등 서비스사업에도 진출했고, 1977년 국일증권을 인수해 금융업에도 손을 뻗었다. 1979년 그룹 참모조직 '종합기획실'도 발족했다.
2.2. 20세기 대한민국 최강 재벌
리즈시절이었던 1995년에 제작된 그룹 PR
21세기 이후로는 삼성그룹이 규모에서나 영향력에서나 압도적인 지위를 갖고 있지만 1970년대 후반 중동 건설붐 이후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집단은 현대그룹이었다. 현대가 재계 서열 1위였을 당시 삼성과의 격차는 21세기의 삼성과 현대의 격차보다 훨씬 컸다 .[8]
삼성과 현대의 관계는 1970년대까지는 우호적이었다. 유통(백화점), 식품, 전자, 무역, 화학 등 경공업이 주력 업종이었던 삼성그룹과 달리 현대는 건설, 자동차, 조선 등 중공업이 주력 업종이었기에 경쟁하는 분야가 없었다.
그러나 1979년 현대-중앙일보 매스컴 전쟁부터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1980년대 이후 현대가 전자, 백화점, 석유화학에 진출하고, 삼성은 중공업, 건설에 뛰어들면서 둘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두 그룹의 사업분야가 사실상 똑같아진 것이다. 게다가 현대는 중앙일보를 견제한다고 문화일보를 만들기도 했다. 딱 하나, 자동차만 빼고...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매출액, 자산 등에서 밀리던 삼성이 그 차이를 뒤집기 위해서 반도체에서 거둔 수익으로 삼성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떠돈 적도 있다. '삼성이 하는건 현대도 다 하는데, 현대가 하는 것중에 삼성이 안하는 유일한 품목이 바로 자동차!'.
다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이미 삼성은 1960년대부터 계열사 총 자산에서 현대를 앞서고 있었고 오히려 1990년대에 현대가 이를 추월했다가 정주영 사후 삼성이 다시 탈환한 바 있다.[9] 더군다나 삼성은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정치권 및 법조계 등 이른바 '삼성장학생'의 육성에 성공하였기 때문에[10] , 기업 자체의 이미지와는 달리 삼성의 파워는 현대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주영 본인의 창당 및 정치권 입문을 본인의 성향뿐 아니라 이런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2.3. 왕자의 난, 공중분해
그러나 정주영 명예회장이 1992년 대선에서 패한 후, 이듬해 출범한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1995년까지 현대에 '자금압박'이란 정치보복을 가해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 상태로 1995년 말 정기인사 때 동생 정세영 회장이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자 차남 정몽구 현대정공 회장이 그룹회장을, 5남 정몽헌 현대전자 부회장이 그룹부회장을 각각 맡아 2세 경영체제로 들어섰다.
그러나 1997년 IMF 사태를 전후하여 상당수 계열사가 위기에 처했다.[11] 1998년부터 그룹회장제와 종합기획실, 문화실을 경영자협의회와 구조조정협의회, PR사업본부로 각각 개편해 정몽구/몽헌 형제가 공동의장을 맡도록 했고, 같은 해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 1만 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으면서 금강산 관광 성사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대북사업에도 박차를 가해 이미지 전환을 꾀하려 했다.
위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선 2세 승계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2000년에 소위 '''왕자의 난#s-3.1'''을 겪으면서 위기를 맞게 되고, 결국 정주영 명예회장이 은퇴하고 이듬해 숨을 거두면서 완전히 분해되는 운명을 겪었다.[12]
사실 한국 재벌의 역사에서 이런 식으로 자식 세대에서 기업을 나눠가지는 '분봉' 관행은 딱히 보기 드문 일은 아니다. CJ그룹과 신세계그룹 등이 분리된 삼성그룹이나 GS그룹과 LS그룹 등이 분리된 LG그룹을 비롯한 여러 재벌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다만 현대그룹의 경우 분열과정이 워낙 극적이고 다툼이 많았으며, 한꺼번에 서너개의 그룹으로 분열이 이루어졌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은 2001년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재계순위 10위권 밖으로 규모가 확 축소되었다. 그룹의 희망이던 대북사업은 2008년 이후 남북관계 악화와 박왕자 피살사건으로 금강산이 막히면서 사실상 엎어진데다, 세계금융위기로 해운 업황이 악화되면서 2016년 현대증권을 포함한 현대저축은행·현대자산운용 등 금융 3사를 KB금융지주에 매각하고, 현대상선은 채권 출자전환으로 소유 및 경영이 채권단에 넘어갔다. 결국 한때 재계 1위였던 현대그룹 자체는 공정거래법상 대규모기업집단의 기준인 자산가치 5조원에도 들지 못하는 ‘중견기업’으로 전락하였다.
3.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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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벌마크는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2개의 정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각형은 인류 건축을 대표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상징한 것이며, 황금색과 초록색은 새싹이 자라 녹음이 되듯 영원히 새롭게 번영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957년 제정된 심벌마크로 당시에는 심벌마크가 두껍게 그려져 있다. 1974년에는 두꺼운 모양의 심벌마크가 얇은 모양으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CI는 1984년 심벌마크의 직각 삼각 모양을 수정하여 변경하였다.
4. 역대 임원
- 명예회장
- 정주영 (1987~1992/1993~2000)
- 회장
- 경영자협의회 의장
- 정몽구, 정몽헌 (1998~2000)
- 부회장
- 정몽헌 (1996~1998)
- 종합기획실장
- 박영욱 (1979~1981)
- 이현태 (1981~1992)
- 어충조 (1992~1993)
- 심현영 (1993~1995)
- 박세용 (1995~1998)
- 구조조정본부장
- 박세용 (1998~1999)
- 노정익 직무대행 (1999~2000)
- 김재수 (2000~2003)
- 문화실장
- 이병규 (1990~1991)
- 이영일 (1991~1998)
- PR사업본부장
- 이영일 (1998~2001)
5. 역대 슬로건
- 우리의 현대, 세계의 현대 (1983~1993)
- 기술의 현대, 세계의 현대 (1993~1996)
- 삶의 질 향상을 지향하는 - 기술의 현대, 세계의 현대 (1995~1996)
- 사람, 사회, 미래를 위한 가치경영 (1996~1999)
- 대한민국 그리고... 현대 (2003~2004)
- 내일을 믿습니다 (2007~2009)
- 긍정을 믿습니다 (2010)
- 꿈과 희망의 현대... 현대가 움직이면 세계가 움직입니다 (2010~ )
- 긍정의 시대를 엽니다 (2011)
- 긍정, 내 안에 있습니다 (2012)
- 긍정, 창조의 시작이 되다 (2013)
- 긍정, 혁신의 방향이 되다 (2014)
- 긍정의 힘으로 (2015)
6. 기업 문화
창업자가 맨손으로 일으킨 자수성가형 기업인데다가 주력산업이 건설, 자동차, 조선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진취적, 모험적이면서도 거칠고 남성적인 기업문화로 이름이 높았다. 한국 경제의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정신을 상징하는 기업이라고 보면 맞다. 물론 부작용도 고스란히 안고 가긴 했으며, 그 일부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일부 범 현대가 그룹의 경우 군대식 "다나까"체 사용을 권장하며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똥군기 문화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이런 특징 덕에 1987년 6.29 항쟁 후 한국의 노동운동이 끓어오르던 시기에 무노조이던[13] 현대그룹 계열사는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었고,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등 당시 울산에 자리잡고 있는 현대그룹 노동조합들은 말 그대로 노동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지게차, 굴삭기를 앞세워 경찰과 구사대를 밀어내고 울산시내로 진출한 일은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회자되며, 1990년 당시 '골리앗 투쟁'으로 알려진 갠트리 크레인 위 고공 농성도 유명하다. 사실상 현대그룹 노동조합들이 지금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복지 수준이 말할 수 없이 향상된 지금의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손꼽히는 대형 노동조합이다. 비정규직이나 사내 하청 노동자같이 같은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훨씬 열악한 처우를 받는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협력은 아오안.[14] 특히 어용 노조였던 현대중공업 노조[15] 는 어찌나 그 정도가 심했던지 강성노조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민주노총으로부터 '''제명'''당하기까지 했었는데, 애초에 현대중공업 노조가 대표적인 무파업 노조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민주노총과의 관계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런 역사 덕에 범 현대가 기업들은 노동조합 다루는 기술이 유명하다.[16] 노조 관련 문제에 대한 기술만은 삼성을 압도한다고.[17]
7. 기업정신
7.1. 사훈
'''근면, 검소, 친애'''
7.2. 현대 2020 (2010~ )
- 경영이념
'''꿈과 희망을 향한 도전과 창조적 예지로 풍요로운 내일을 창조한다'''
- 경영비전
'''세상을 움직이는 현대'''
- 경영방침
'''고객 행복 경영, 가치 창조 경영, 사회 친화 경영'''
7.3. 사가
작사는 시인 조지훈, 작곡은 김동진이 맡았으며,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도 똑같은 가사의 사가를 부른다. 다만 중간에 회사명이 들어가는 부분을 다르게 부르는 것이 현대그룹 사가와의 차이이다.
8. 대북 사업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 휴전선 이북의 강원도 통천군인 관계로, 정주영 회장 생전부터 대북사업에 큰 관심을 보여왔다. 관련 기사 "소떼 방북"으로 유명한 1998년의 소떼 지원은 남북 모두에서 큰 화제가 되었으며, 금강산/개성 관광 사업 등 남북간의 정치, 경제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데 현대그룹이 기여한 바는 항목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울만큼 지대하다.
정주영 회장이 사실상 장남인 정몽구 현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을 제치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정몽구 회장이 대북사업에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였다. 정몽헌 회장이 자살한 뒤 계승한 아내 현정은 회장 역시 대북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주영 회장 사후 현대그룹이 산산조각난 뒤 이명박 정부에서 금강산 관광 중단, 박근혜 정부에서 개성공단 중단이 이루어지는 등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현대아산이 주도하던 대북사업은 사실상 중단되었으나, 문재인 정부 이후 남북관계가 크게 개선되면서 다시 대북사업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등 다른 범 현대그룹 계열 기업들은 대북사업에선 2선으로 물러나서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북한에서의 경제 투자가 활발해질 경우 철도, 토목 건설 등 범 현대그룹 계열과 맞물리는 분야의 규모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어서 관심이 크다.
9. 영문 명칭
영문표기가 HYUNDAI인 이유는 과거에는 영문 표기법이 정립되기 전이라 '대'자의 영문 표기법이 'DAE'와 'DAI'가 혼용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DAE'로 결정된 뒤에는 이미 이름을 바꾸기엔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20]
여담으로 이 명칭에 대해서 일본 그룹처럼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루머가 있다. 하지만 현대라는 명칭은 1947년 처음 쓰였고, 현대자동차의 설립은 1967년이며 미국시장 진출은 1985년임을 고려하면 노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절대 다수의 외국인들은 일본어의 ‘대’ 혹은 ‘다이’ 발음 존재 유무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하며, 현대가 현다이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일본기업 이름처럼 들린다고 생각하는 외국인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21] 따라서 외국인들에게 일본기업처럼 보이려고 이름을 Hyundai로 정했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또한 현대자동차 광고를 보면 Hyundai의 발음이 '현다이'가 아니라 '헌대이'[22] 라고 정정해서 알려주기까지 한다. 실제로 북미에서 현재 가장 보편적인 Hyundai 발음은 ‘헌대이’이다.
10. 기타
이명박은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 '''20대 부장, 30대 사장, 40대 회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친 화려한 이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한 바 있다. 샐러리맨 신화의 대표격 인물. 그러나 정주영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대선에 출마할 당시 이명박은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둘 사이는 갈라졌다.
각종 국제대회를 대한민국으로 끌어오게 하는 건 도가 텄다. 가까운 예시로 선대 정주영 회장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고 현대중공업그룹의 정몽준 회장은 2002년 한일 월드컵, 현대자동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은 2012 여수 엑스포를 유치시켰다.
일본은 80년대부터 준비한 것을 현대는 1990년에 "아 우리도 이제 월드컵 개최하자!!!" 이 말과 함께 한일 공동개최를 만들어 버렸다. 물론 일본은 이전에도 이것저것 한게 많아서 이번엔 한국에도 기회를 주자, 라는 식으로 해석했을 여지가 있는 만큼 일본보다 이쪽 분야에서 우수한 실적을 거뒀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쪽 분야의 본좌급인 일본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공동개최를 이끌어낸 실적은 높이 평가해야 하고, 실제로 2002년 월드컵 개최지를 발표할 때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본축구협회장이 넋이 나간 상태로 있었는데 정몽준이 억지로 손을 잡아서 같이 손을 올리기도 했다. 한국 축구 분야에 엄청난 기여를 했으며 다른 분야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성과를 올렸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또한 현대가는 세계 유수 싱크탱크들과 어깨를 겨루는 정책연구소를 길러내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정주영 전 회장부터가 세종연구소의 모태인 일해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으며, 그의 아들들인 정몽준은 2008년 아산정책연구원[23] 을, 정몽구는 2011년 동아시아재단을 각각 설립하고 투자도 많이 했다. 이들 모두 한국에서 지명도가 높은 싱크탱크들이 되었는데, 그 덕에 한반도 관련 각종 정치전략 관련 보고서들 중에 현대가가 관여한 연구소 손을 안거치는게 없을 정도. 여기에 한술더떠 정몽구 회장은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전경련 해체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전경련이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처럼 연구중심 싱크탱크로 변모해야한다"'''[24] 는 제언을 하기도 했다.
케이블방송 사업에도 진출했었다. 1990년대 중후반 당시 HBS(현대방송)와 음악채널(M21→KMTV)을 운영했고, 두 채널은 각각 따로따로 분리되었다. 이후 두 채널은 다시 한 가족이 되었으나 2015년에 다시 분리되었다.
사족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퇴직금을 지급한 곳이 현대그룹이다. 2000년 정주영 회장의 퇴직금이 그것인데, 현대그룹 24개 계열사에서 총 217억이 지급되었다. 그 이전의 기록은 1999년 당시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을 퇴임한 정세영이 지급받은 50억, 1995년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퇴임 시 LG화학에서 지급한 20억 등이다.
본래 재벌 총수들은 퇴직금의 지급을 사양하는 경우가 많은데 회사 사정에도 부담이 되고 부정적 여론도 들끓기 때문이다. 근데 심지어 당시 산업은행으로부터 4,000여억 원을 지원받는 등 현대건설의 재무상황이 좋지 않은 와중에 이만한 금액의 퇴직금을 받았으니 참... 그리고 이 퇴직금은 이후 현대그룹 계열분리 당시 현대자동차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 있던 MH를 지원하기 위해 기타 계열사 주식을 처분한 자금과 함께 현대자동차 주식의 매입에 사용되었으나, 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처하자 모두 처분한 후 현대건설의 회사채 매입에 쓰였고, 회사채와 기타지분을 매각한 자금이 출자전환과 유상증자에 투입되어 현대건설 주식으로 바뀌었다. 이 주식은 정주영 회장의 별세 당시 현대건설에 증여되었고, 감자되었다.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
현대라는 이름이 너무 단순하고 쉽게 떠올라서인지, 아니면 국내 굴지 기업의 이름을 따라 쓰고 싶은 것인지, 전국 각지에 현대그룹의 이름을 사칭한 '현대슈퍼', '현대병원'[25] 등 여러 업종의 '현대OO'가 전국에 넘쳐난다. 특히나 이들은 영문표기마저 HYUNDAI라고 해놓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도호쿠, 홋카이도 지방에서도 '파칭코 현대(파칭코 겐다이)'가 1980년대 영업하던 시절이 있었다. 글 지금은 사명(社名)을 <VEGAS VEGAS>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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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소위 왕자의 난 때까지 옛 현대그룹의 본사였던 계동 사옥.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이 분리되고 2004년까지는 이 사옥을 썼다. 계동 사옥이 지어지기 전에는 현대해상 사옥으로 불리는 광화문 사옥을 썼는데, 사옥 이전 이후 현대건설이 이 사옥을 팔아서 현대해상이 매입하고 2004년에 리모델링했다.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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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현재의 현대그룹이 '''사들여서''' 리모델링하고 2011년부터 본사로 쓰고 있는 연지동 사옥.[28]
11. 범 현대가
아래 범 현대가 일람은 우선 정주영 회장의 동생 대("영"자 돌림)에 분가한 기업과 아들 대("몽"자 돌림)에 분가한 기업으로 분리하였다. 현재 크게 보면 '''10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2015년 기준 재계서열에 범 현대그룹이 '''무려 7개'''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자산총액을 다 더해도 삼성그룹 하나에 못 미치는 함정.
범 현대그룹의 자산 및 매출 현황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참고하면 좋다.
인물에 대해서는 범 현대가 문서 참고.
아래 기업은 '''주요 계열사'''만 나열하였다.
11.1. 직계 기업집단
순서는 출생순서.
장남 정몽필은 주지하다시피 82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고[29] , 4남 정몽우는 음독자살, 그 자식들 몫으로 현대비엔지스틸이 있다지만 이 회사는 지금 현대자동차그룹 소속이다. 막내(8남) 정몽일은 바로 윗형인 정몽윤과 마찬가지로 금융 계열사를 받아 독립했으나 종합금융 사태 때 맛이 가면서 정몽준의 현대중공업그룹 우산 아래에 있으며 특별한 배려를 받았지만, 결국 경영에서 은퇴, 야인(野人)이 되었으나, 이후 현대중공업의 지주회사 전환과정에서 다시 현대기술투자를 받아서 분가했다.
# 5남 정몽헌은 대북송금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했으니[30] 8명의 아들에게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알뜰살뜰하게 챙겨주려던 왕회장의 의도와는 별개로 정상적으로 기업을 승계한 아들은 절반에 불과한 셈이다.
11.1.1. 현대자동차그룹
범 현대가 최대의 그룹이자, 실질적으로 정주영 회장 시절의 현대를 잇는 기업은 사실상 이쪽이라고 볼 수 있다.[31]
차남 정몽구 / 이후 장남 정의선에게 회장 승계
- 현대자동차
- 기아
- 현대제철
- 현대건설
- 현대엔지니어링
- 현대모비스
- 현대위아
- 현대트랜시스
- 현대엠엔소프트
- 현대캐피탈
- 현대카드
- 현대차증권
- 현대글로비스
- 현대로템
- 이노션월드와이드
- 현대오토에버
- 현대엔지비
- 농업회사법인 주식회사 현대서산농장
- 전북 현대 모터스
- KIA 타이거즈
-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 인천 현대제철 레드엔젤스
- 학교법인 서울현대학원
11.1.2. 현대백화점그룹
삼남 정몽근. 이후 장남 정지선에게 회장 승계
11.1.3. 현대그룹
오남 정몽헌. 사후 부인 현정은에게 회장 승계
11.1.4. 현대중공업그룹
육남 '''정몽준'''[33]
- 한국조선해양
- 현대중공업
-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34]
- 현대건설기계[35]
- 현대미포조선
- 현대삼호중공업
- 현대오일뱅크
- 아산사회복지재단 (서울아산병원을 비롯한 전국 8개의 아산병원)
- 울산 현대[36]
11.1.5.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칠남 정몽윤
11.1.6. 현대미래로그룹
팔남 정몽일
- 현대미래로
- 현대기업금융
- 현대기술투자
11.2. 방계 기업집단
11.2.1. 한라그룹
첫째 동생 정인영 회장 계열[40] . 현재 정인영의 차남 정몽원이 회장으로 있다.
11.2.2. 서한그룹
매제 김영주 계열. 김영주는 현대 창업의 1등 공신이자 정주영 회장의 셋째동생 정희영의 남편이다. 김영주 회장 사후 현재 장남인 김윤수가 회장. '한국프랜지그룹'으로 되어 있었지만 홈페이지를 보면 서한그룹이다. 물론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 부품사인 한국프랜지공업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한국프랜지공업
- 서한산업
11.2.3. 후성그룹
매제 김영주 차남 김근수 회장 계열. 현대제철을 대상으로 내화물 제조 및 시공하는 한국내화를 시작으로 그룹이 성장했으며, 현재 한국내화와 후성[41] 이 그룹 전체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1.2.4. HDC그룹
넷째동생 정세영 회장 계열[42] 현재 장남 정몽규가 회장으로 있다.
- HDC
- HDC현대산업개발[43][44]
- HDC현대EP
- HDC아이파크몰(용산역)
- 부산 아이파크
- HDC영창
- HDC아이콘트롤스
- HDC아이서비스
- HDC아이앤콘스
- 호텔HDC
- HDC자산운용
- HDC신라면세점
- 부동산114
- HDC현대PCE
- 서울춘천고속도로
11.2.5. 현대코퍼레이션그룹
정주영 회장의 형제 중 다섯째인 정신영[45] 씨의 아들 정몽혁 전 현대오일뱅크 회장 계열. 현대종합상사는 왕자의 난을 거치며 은행관리로 넘어간것을 2009년에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인수하여, 정몽혁이 CEO로 임명되었다가 스스로 인수하여 2016년 계열분리하였다.
은행관리시절 사업다각화를위해 이것저것 손을 대었는데, 특기할만한 것으로 '청도현대조선'이 있다. 2005년 조선경기가 활황일때 중국 칭다오의 '링산조선소'를 인수한 것으로, 이후 조선해운경기가 침체되자 한해 200억의 손실을 내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이후 2015년 매각에 성공하였는데, 2500만달러를 추가투입하여 채무상환에 사용하고, 보유지분 66.25%를 단돈 '1$'에 매각하였다. 그렇게 해서야 이제 추가손실이 없을거라고 증권사에서 호재라 평가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리고 위 현대오일뱅크항목에 기술된바 있는 정몽혁이 2010년 현대종합상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분은 2014년 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26세 아들을 '''법무팀 차장'''으로 입사시켰으며, 2015년 1월1일자로 현대씨엔에프 부장으로 발령내어 빈축을 샀다.
정몽혁이 현대종합상사를 인수할 자금이 부족하여 독립할 가능성이 낮다고 점쳐졌으나, 2015년 현대종합상사의 사업 중 브랜드관리사업과 수입육유통사업만 '''현대씨엔에프'''로 분리시키고, 정몽혁이 현대씨엔에프를 인수 → 현대씨엔에프가 현대종합상사를 인수 하는 식으로 계열분리를 이루었다.
11.2.6. KCC그룹
정주영 회장의 막내(여섯째)동생 정상영 회장 계열. 건축자재를 만드는 구 금강스레트공업과 도료를 만드는 고려화학으로 시작했으며 이후 합병하여 KCC건설과 함께 KCC그룹을 이루고 있다. 범현대가의 주력인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에 사용되는 각종 건축자재와 도료납품으로 성장했으며 현재 현기차 유리도 여기서 생산하고 있는 중.
- KCC
- KCC건설
- 전주 KCC 이지스
11.3. 해산/분리된 기업
- 경일요트 (현 현대요트): 1982년 현대정공에 합병됐다가 2000년 재분사됨.
- 고려산업개발 (현 두산건설): 2001년 부도난 후 법정관리를 거쳐 2004년에 두산그룹에 인수되었고, 이후 舊 두산건설을 역합병했다.
- 가구사업부 (현 현대리바트): 1999년 재분사.
- 알루미늄사업부: 구 한미해업-현대알루미늄공업. 2002년 재분사 후 산은캐피탈 관리를 받다가 2008년 동양강철에 매각된 후 2011년 합병됨.
- 금강기획 (현 금강오길비): 1999년 영국 CCG에 지분이 매각된 후 2000년 계열분리됨.
- 기아대전판매: 1999년 기아자동차에 합병됨.
- 기아모텍: 1999년 계열분리 후 '모텍코리아'로 변경됐으나, 2001년 부도맞고 2006년 법인이 소멸됨.
- 기아자동차판매: 1999년 기아자동차에 합병됨.
- 기아전자: 1999년 계열분리 후 이듬해 '본텍'으로 바꿨으나, 2002년 현대기아차그룹에 편입 후 2005년 현대오토넷에 합병됨.
- 기아정보시스템: 1999년 현대정보기술에 합병됨.
- 기아중공업 (현 현대위아): 1999년 계열분리 후 2002년 현대기아차그룹에 편입됨.
- 기아포드할부금융: 1999년 자산이 현대캐피탈로 넘어간 후 청산됨.
- 다이아몬드베이츠 (현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 미국 베이츠 사와의 합작사로, 2000년 계열 분리된 후 2018년 폐업됨.
- 대한알루미늄공업: 2000년 미국 알칸-대한전선 컨소시엄에 매각된 후 '남천산업'으로 변경됐다가, 2002년 알칸대한에 합병됨.
- 동서산업 (현 아이에스동서): 1990년 계열분리 후 2008년 일신건설로 넘어감.
- 동해해운 (현 페스코라인즈코리아): 러시아 FESCO와의 합작사. 1999년 계열분리 후 2003년 재편입됐으나, 2012년 본사와 합작 청산.
- 삼표제작소: 2001년 윈앤윈21에 매각된 후 SNG21-유리이에스로 각각 바뀌었으나, 2009년 부도난 후 폐업됨.
- 서진항공: 1995년 금강개발산업에 합병됨.
- 선일상선: 1999년 청산됨.
- 스페이스브로드밴드 (현 알파그린): 구 현대전자 위성서비스사업단. 2001년 분사 후 몇달 후 계열분리됨.
- 신대한: 1998년 고려산업개발에 합병됨.
- 아시아자동차: 1999년 기아자동차에 합병됨.
- 아시아자동차판매: 이하 동일.
- 영진석유: 1995년 세일석유에 합병됨.
- 이미지퀘스트 (현 현대바이오사이언스): 현대전자 모니터 생산부문이었으나, 2000년 '현대이미지퀘스트'로 분사 후 이듬해 계열 분리되어 현대아이비티로 사명을 변경했다가, 이후 바이오사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 인천공항외항사터미널: 1999년 계열분리 후 2016년 폐업됨.
- 인천정유 (현 SK인천석유화학): 구 한화에너지 정유사업부문. 2000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국영석유회사(IPIC)에 매각됨.
- 칩팩코리아 (현 스태츠칩팩코리아): 구 서울프로덕션. 1998년 현대전자 반도체조립부문을 양수받고 업종변경해 해당 사명으로 변경했으나, 1999년 계열 분리됨.
- 태화쇼핑: 2001년 파산, 2006년 법인 소멸.
- 티존코리아: 구 현대미디어시스템-현대정보시스템. 2000년 현대오토넷에 합병됨.
- 하이닉스반도체 (현 SK하이닉스): 구 현대전자. 2001년 계열분리.
- 비메모리반도체부문 (현 매그나칩반도체): 2004년 분사됐다가 2009년에는 미국 애비뉴캐피탈에 매각되었다.
- 정보기기사업부 (현 현대멀티캡): 1998년 종업원지주사로 독립 후 2000년 현대전자 지분을 매각함. 현대컴퓨터라는 사명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 홈오토메이션부문 (현 현대통신): 1999년 종업원지주사로 독립 후 2000년 현대전자 지분을 매각함.
- TFT LCD부문 (현 하이디스): 2001년 하이디스로 분리되었다가, 중국 대표 디스플레이 업체인 BOE에 인수. 모든 기술이 중국으로 누출되었고, 현재 BOE는 LCD부문의 세계적 강자이다. 이후 대만 영풍그룹으로 매각. 영풍그룹은 특허권 임대로 매년 수백억의 이익을 올리고있다. 10년간 외국자본으로 주인이 계속 바뀌는동안 하이디스에 대한 투자는 전혀 없었으며, 공장은 폐쇄되고, 희망퇴직을 거부한 근로자들은 정리해고되었다.
- 한국도시개발: 1986년 한라건설(현 HDC)에 합병됨.
- 한국산업써비스: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합작사로, 1993년 현대중전기에 합병됨.
- 한국알라스카개발: 1995년 계열 분리됨.
- 한국에이비시스템: 1999년 기아정기에 합병됨.
- 한국포장건설: 1986년 고려산업개발에 합병됨.
- 한소해운: 러시아 FESCO와의 합작사로, 1999년 현대상선에 합병됨.
- 한화에너지프라자: 1999년 현대정유에 합병됨.
- 현대네트웍스: 구 하이닉스반도체 ADSL사업부. 2001년 계열분리 후 2004년 폐업됨.
- 현대디스플레이테크놀로지: 구 하이닉스반도체 LCD사업부. 2001년 계열분리 후 2011년 청산됨.
- 현대로지스틱스 (현 롯데글로벌로지스): 2014년 상당수 지분이 오릭스로 넘어감.
- 현대문화신문 (현 문화일보): 1998년 사원지주회사로 독립함.
- 현대반도체: 구 금성일렉트론-LG반도체. 1999년 현대전자에 합병됨.
- 현대방송 (현 OCN Movies): 1999년 넥스트미디어에 채널을 매각하고 법인이 청산됨. 반면 HBS 채널은 2000년 3월 NTV로 변경되었으며 2001년 4월 제일제당그룹으로 넘어갔고, 2002년 7월 홈CGV로 바뀌었다가 2005년 12월 채널CGV로 바뀌었다가. 2020년 3월 OCN 자매채널 OCN Movies로 채널명이 변경됨.
- 현대상선(현 HMM): 2016년 한국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갔다.
- 현대상운: 1955년 현대건설에 합병됨.
- 현대생명: 2001년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돼 퇴출 후 계약이 대한생명으로 넘어갔고, 청산과정을 거쳐 2012년 법인이 소멸됐다.
- 현대석유화학 (현 씨텍): LG화학 및 호남석유화학 컨소시엄이 공동으로 인수함.
- 현대세가엔터테인먼트: 구 신흥전자-현대테크시스템-현대포스시스템. 2000년 계열분리 후 '현대디지털엔터테인먼트'로 사명을 변경했으나, 시티레이서를 엠플래닛으로 매각 후 '하이디테크'로 변경했다가 2008년 폐업됨.
- 현대시스콤: 구 하이닉스반도체 통신시스템사업부. 2001년 계열분리 후 2004년 청산됨.
- 현대야크항공: 1995년 청산됨.
- 현대양행 (현 두산중공업): 1980년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조치로 대우그룹에 매각됨.
- 현대에너지 (현 CGN율촌전력): 2000년 계열분리 후 2001년 미국 메이야 사에 매각됨. 2009년 기존 법인이 'CGN코리아홀딩스'로 변모하자 물적분할됨.
- 현대오토넷: 구 현대전자 전장사업부. 2004년 계열 분리했다가 이듬해 현대자동차그룹에 합류 후 2007년 현대모비스로 합병됨.
- 현대우주항공: 2000년 항공사업부문을 신규법인 한국항공우주산업에 매각하고 2001년 폐업됨.
- 현대울산종합금융: 2001년 동양증권에 인수합병됨.
- 현대자산운용: 2017년 사모펀드 키스톤 PE에 매각됨.
- 현대자원개발: 1998년 청산.
- 현대저축은행 (현 유진저축은행): 2016년 KB금융지주에 매각됨.
- 현대전동기산업: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과의 합작사. 1993년 현대중전기에 합병됨.
- 현대정보기술: 2004년 미라콤아이앤씨에 매각됨.
- 현대정유: 2000년 아랍에미리트 IPIC에 매각됐다가 2010년 현대중공업그룹에 넘어감.
- 현대정유판매: 구 극동쉘판매-세일석유. 1999년 현대정유에 합병됨.
- 현대존브라운엔지니어링: 1995년 폐업.
- 현대종합금속: 1990년 계열분리.
- 현대종합금융: 1999년 조흥은행에 합병됨.
- 현대중기산업: 1999년 청산 후 폐업됨.
- 현대증권 (현 KB증권): 2016년 KB금융지주에 매각됨.
- 현대차량: 철도차량 제조업체. 1985년 현대정공에 합병됨.
- 현대철탑산업: 1994년 현대중공업에 합병됨.
- 현대큐리텔: 구 현대전자 통신단말기사업부. 2001년 계열분리 후 2002년 팬텍에 합병됨.
- 현대투자신탁운용: 2004년 미국 푸르덴셜그룹에 매각된 후 '푸르덴셜자산운용'으로 바꾸고 2010년 한화그룹에 매각 후 2011년 한화투자신탁운용에 합병됨.
- 현대투자신탁증권: 2004년 미국 푸르덴셜그룹에 매각된 후 '푸르덴셜투자증권'을 거쳐 2010년 한화그룹에 매각돼 '한화투자증권'으로 변경됐으나, 2012년 한화증권에 합병됨.
- 현대투자자문: 1998년 폐업.
- 현대해양개발: 1985년 현대중공업에 합병됨.
- 효문산업: 이명박 현대건설 대표가 맡았던 자동차 시트 제조 업체. 1985년 현대자동차에 합병됨.
- A&H인터내셔날: 현대종합상사와 아시아메리카의 합작사. 2003년 계열분리.
11.4. 스포츠 후원
- 울산 현대 호랑이: 2002년 계열분리 후 현대중공업으로 귀속됨.
-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2002년 계열분리 후 현대미포조선으로 귀속되었으나, 2016년 해체됨.
- 현대중공업 코끼리 씨름단: 2002년 계열분리 후 2005년에 현대삼호중공업으로 이관되었으나, 2016년 해체됨.
- 전북 현대 다이노스: 2000년 계열분리 후 현대자동차로 귀속됨.
-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2000년 계열분리 후 기아자동차로 귀속되었다가, 이듬해 현대모비스로 이관됨.
- 대전 현대 걸리버스: 2001년 계열분리 후 KCC에 매각됨.
- 청주 현대건설 하이페리온: 2001년 계열분리되있다가 2004년에 신한은행으로 매각됨.
- 현대 유니콘스: 2001년 계열분리 후 2008년에 해체됨.
- 현대자동차 배구단: 2000년 계열분리 후 현대자동차로 귀속되었다가, 이듬해 현대캐피탈로 이관됨.
- 현대건설 여자배구단: 2001년 계열분리 후 현대건설로 귀속됨.
- 인천제철 여자축구단: 2000년 계열분리 후 인천제철로 귀속됨.
- 인천제철 남자양궁단: 2000년 계열분리 후 인천제철로 귀속됨.
- 현대정공 여자양궁단: 2000년 계열분리 후 현대정공으로 귀속됨.
- 현대정유 오일뱅커스: 2000년 계열분리 후 현대정유로 귀속되었으나, 2003년 해체됨.
- 오일뱅크 레이싱팀: 2000년 계열분리 후 현대정유로 귀속되었으나, 2005년 해체됨.
- 현대건설 야구단: 1999년 해체됨.
11.5. 관련 단체
11.6. 지분관계사
12. 이름이 비슷하지만 관련없는 것들
- 현대교역: 사진기 필름 브랜드 '현대칼라'로 유명한 업체이며, 필름카메라 전성기 시절 후지필름, 코닥, 아그파와 경쟁했다.
- 현대스위스저축은행[46]
- 현대약품
- 현대음반
- 기타 업체명에 '현대'가 들어가는 곳[47]
13. 관련 문서
[1] 지금은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가 됐지만 어쨌든 현대그룹의 기반이 된 현대건설의 창업시점을 설립일로 삼고 있다.[2] 현대그룹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삼성카드가 이 건물을 본사로 썼다.[3] 20세기까지는 누구도 부러울 것 없던 초대형 재벌이었지만 정주영 회장 사후 계열분리 과정을 거치면서 사세가 줄어 현재는 중견기업이 됐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후술.[4] 현대그룹 광고를 보면 2009년부터 긍정이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사실 '긍정적인 사고'는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이 강조하던 덕목이기도 했다.[5] 물론 21세기에도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재벌 중 하나이지만, 재벌 대부분의 경우에는 알짜회사이거나 회사의 모태가 된 회사가 오리지널 그룹에 남지만(삼성의 경우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LG의 경우에는 LG화학, LG전자 등), 여기는 알짜회사를 중심으로 분가해 버린 특이한 케이스이다.(현대의 주력은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정도로 분류하기에)[6] 호암 이병철 창업주의 집안은 경남 의령군 내에서 대대로 만석꾼 집안이었다. 타고난 부자였던 셈. 하지만 그마저도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사업을 2번 말아먹었었다.[7] 돈 벌겠다고 가출해서 대도시로 상경한게 총 4번이다. 처음 2번은 다시 돌아갔고, 3번째에 소판 돈 훔쳐서 서울 상경 후 학원에 다니다가 다시 돌아간 후에 4번째 가출해서 서울로 올라간 다음 쌀집 배달꾼으로 취직한다.[8] 1997년 외환 위기부터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삼성그룹은 대우그룹한테도 순위가 밀렸던 적도 있었다. 삼성그룹의 경우 외환위기 당시에 돈이 안된다고 판단했던 사업체를 여러개 청산했던 반면에 대우그룹은 그동안 몸집불리기를 시전했기 때문인데 대우의 몸집불리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대우그룹은 망해버렸고 반대로 삼성은 애니콜이 잭팟을 터트리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게 되었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현대그룹에게 압도적으로 뒤처진건 사실이었다.[9] 이렇게 된 데에는 삼성이 이병철 선대회장 사후 일찍부터 자녀들에게 계열분리를 한 것도 있다. 1991년 한솔그룹을 시작으로 새한, 보광, CJ, 신세계 등이 계열을 분리해 나갔다. 삼성이 당시 대우그룹한테도 규모가 밀렸던 이유 중 하나다.[10] 반도체공장 근로자 백혈병사망 산재불인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바람에 법조계는 '''방산비리범과 동급취급'''을 받는 중이다.[11] 당시 현대그룹은 주요계열사 중에 흑자를 내는 곳이 현대증권 뿐이었다. 반면 삼성은 삼성전자의 수익과 삼성생명의 엄청난 자금력으로 삼성자동차를 르노에게 지분을 일부 넘겨주는 식으로 반 포기하는 선에서 그룹을 지켰다.[12] 반면 이 시기 삼성은 삼성전자라는 괴물 계열사의 눈부신 성장에 힘입어 자타공인 대한민국의 원탑으로 자리잡게 되었다.[13] 인천제철은 제외.[14] 현대차의 경우 같은 작업 라인에서 일하는 데도 정규직과 사내 하청 비정규직 간의 임금 격차가 두 배까지 벌어진다. 정규직에게만 주어지는 각종 복지 혜택을 감안한다면 더욱더 큰 차이.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있다. 현대차 생산직 정직원으로 들어가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전국 각 지역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최상위 성적이어야 하고, 여러 관련 국가 공인자격증, 철저한 신체 검사에 합격할 건강한 신체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도 현대차 정규직 노조는 사내 하청 비정규직 노조와 아무런 협력도 없고 오히려 견제에 급급하다. 사실 같은 회사인데 노조가 여러개라는 것부터가 에러다.(복수 노조는 합법이다.)[15] 원래부터 어용이었던 건 아니고 원래 엄청 강성 노조였다. 그러나 정몽준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현대중공업을 전문경영인한테 맡기면서, 정몽준은 정치인으로써의 이미지를 신경 썼기에 "노조와 잘 지내라"고 하고 정치인이 됐다. 그러자 전문경영인인 현대중공업 사측은 노조의 입장을 잘 들어주게 됐고, 현중 노조는 사측이 자기네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니 이후 강성 노조 색채를 잃고 사실상 어용처럼 변질됐다.[16] 현대자동차그룹 중에서 기아자동차의 노조 대응이 절정이다. 기아차는 현대가로 흡수되기 전, 이미 15년이나 현대자동차보다 앞서 노조가 생겼기 때문.[17] 사실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현대가는 조합과 대화와 타협, 협박과 회유를 적절히 섞어 대응하는 고단수 노조 운영을 하지만 삼성은 불법인 무노조 경영 원칙을 세워 노동 운동을 하면 무조건 잘라버리고, 산재나 사고는 돈으로 회유한다. 2020년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을 안 하겠다고 발표한 상태라 향후 어떨지는 두고 볼 일.[18] 현대백화점그룹 측은 '고객의 기쁨은 우리의 보람 / 바친다 이 정성을 고객감동에'로 부른다.[19]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등은 각자의 모기업명을 넣어 부른다. 그러나 현백 측은 '맑은 마음 밝은 미소 행복한 생활 / 미래를 밝혀가자 현대백화점으로'라고 부른다.[20] 이건 발음상의 문제이다. 지금은 'ㅐ' 발음이 단모음이지만 100여년전만 해도 이중모음('아'나 '이'를 따로 빨리 발음하는 것과 비슷)이였기 때문에 그런 발음의 흔적이 남은 예전 사람들이 'ㅐ'를 AI로 표기한 것. 당장 아펜젤러도 '배재'의 영문표기를 PAICHAI로 한 것을 보면 그시절의 발음이 그랬다고 볼 수밖에. 참고로 해태의 영문명도 HAITAI이다.현대그룹과는 전혀 관계없는 현대교역(현대칼라 회사)은 '''HYONDAE'''를 썼다.[21] 현다이가 일본어처럼 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세계에 한국인밖에 없다.[22] 이 캠페인은 현대자동차가 1980년대 미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Hyundai'를 '현다이'라고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 경우 영어의 'die'(죽다)를 연상시켜 자동차 마케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원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읽도록 홍보한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Hyundai like Sunday' 캠페인을 전개해 'dai' 부분을 'Sunday'의 'day' 부분과 같이 발음하라고 알려준 일화는 유명하다.[23] 정치인인 정몽준 본인의 정책/공약개발을 위한 측면도 있기는 했다.[24] 다만 헤리티지 재단은 태생부터가 강경보수, 신자유주의, 기독우파 옹호의 최일선에 서는 행동조직이 있어야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정몽구 회장의 설명과는 거리가 있다. 보수정권과의 유착, 친기업 및 우파 행동주의적인 면으로 볼때 오히려 전경련보다 더 문제시되는 자유기업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니 설상가상...[25] 참고로 진짜 현대그룹 계열의 병원 이름은 현대가 아니라 아산병원이다. 정주영의 호를 딴 것.[26] 여담으로 이 사옥이 건축가 김수근의 공간 사옥 바로 옆에 대궐만하게 지어져서, 건축가들은 계동 사옥을 깐다고 한다. 2001년에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10개층은 현대자동차그룹이, 5개층은 현대중공업그룹이 매입해서 사용했고 2011년에 현대건설이 현대자동차그룹 산하로 들어가면서 현대건설이 다시 되돌아왔다.[27] 참고로 이 사옥과 똑같이 생긴 호텔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 호텔현대가 운영하는 호텔 점포인데 현대에서 계동 사옥을 참조해 만든 호텔이다. 이 호텔은 이후 호텔롯데에 매각되었다.[28] 1992년 준공. 그 전까지는 삼성카드에서 썼었다.[29] 더군다나, 정몽필은 슬하에 딸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몫으로 돌아온 회사도 없다. 정몽필의 사위인 주현은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인 현대BHL의 사장으로 재직 중[30] 그나마 며느리 현정은이 경영하게 된 현재의 현대그룹도 해운업 불황으로 인해 현대상선이 그룹에서 이탈, 사실상 해체되었다.[31] 현대의 시초이자 중심인 현대건설을 갖고 있기 때문.[32] 현정은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현대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을, 상선이 기타 제조업계열사와 현대증권을, 증권이 기타 금융계열사를 지배하는 식이었다. 상선·택배·증권이 모두 분리된 현재는 실질적으로 현대그룹 그 자체나 다름없다.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 분리 이후 현대건설·현대전자의 부도로 담보로 제공했던 주식이 다 없어졌을 때 정몽헌 회장의 자살 이후 現 현정은 회장이 처음 경영으로 나설 때 모두 현 회장의 어머니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이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당시 약 18%정도)의 의결권을 위임받아 현대그룹을 경영하였다. 이 지분은 당시 범현대가의 지분율과 맞먹었다. 김문희 이사장은 아직도 현대그룹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크며 이것이 범 현대가에서 현씨 가문이 정씨 가문의 회사를 접수하려고 한다는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킨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정몽헌 회장 사후 초기에는 백기사를 자처했던 범 현대가에서 현대그룹에 적대적 M&A를 시도하게 된다.[33] 정치인 정몽준 맞다.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은 겉으로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중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서울의 통합영업본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34] 범 현대그룹과 무관한 '현대일렉트릭'이라는 별개의 회사가 이미 존재하여 붙인 이름이나, 대내외적으로 그냥 현대일렉트릭을 약칭처럼 쓰고 있다. 현대중공업 전기전자사업부를 2017년 4월에 계열분리시킨 회사이다.[35] 현대중공업 건설장비사업부를 2017년 4월에 계열분리시킨 회사이다.[36] K리그1의 울산 현대와 함께 실업축구인 한국 내셔널리그 소속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도 운영했었다. 조선업 경기 불황으로 2016년 말 해체 후 선수단은 신생팀 안산 그리너스가 인수하고 현대중공업그룹은 안산에 메인 스폰서로만 참여하고 축구단 운영은 울산 현대에 집중하는 중.[37] 1955.3. 동방해상보험 설립 → 1963.8. 동방해상화재보험 사명변경 → 1980.5. 동방화재해상보험 사명변경 → 1985.10. 현대해상화재보험 사명변경.[38] 1990.2. 한일자동차손해사정 설립 → 2000.2. 현대해상 자회사 편입 / 현대해상자동차손해사정 사명변경 → 2013.4.1. 현대하이카손해사정 사명 변경[39] 2002.6. 현대하이서비스 설립 → 2005.11. 현대하이카손해사정 사명변경 → 2013.4.하이카업무 이관 / 현대하이라이프손해사정 사명변경[40] 신군부에게 현대양행의 중공업사업부(한국중공업 → 현 두산중공업)을 빼앗긴 것이 철천지한이되어 한국중공업 사옥이 보이는곳에 사무실을 마련하여 매일 내려다보았다고한다. IMF크리로 한라건설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가 정리되었다. 당시 재계순위 10위였으나 부채비율 1000%로 30대그룹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한라중공업은 현대중공업에 넘어가 현대삼호중공업이 되었고, 김치냉장고인 '''딤채'''를 만들었던 만도기계(구 현대양행)의 공조사업부는 UBS컨소시엄에 매각되어 '''위니아만도'''가 되었다가 대유그룹에 인수되었다. 만도기계의 자동차부품부문은 '''만도'''가 되어 범현대가의 지원(현대자동차에서는 범현대가 아닌 다른곳에 회사를 넘기면 납품을 끊어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KCC는 한라컨소시엄에 참여했다)현하에 한라그룹에서 되찾아왔다.[41] 일본의 반도체 원료 수출규제에 맞춰 불소로 유명해진 업체.[42] '''포니정''' 정세영 회장 계열. 별명처럼 평생을 현대자동차에 바쳤으나 정주영 회장이 빼앗아서 정몽구 회장의 현대산업개발과 맞바꿔주고 독립시켰다.[43] 오래된 현대아파트의 경우 대부분 HDC현대산업개발에서 지은 것.[44] 이명박 전 현대건설 회장의 자서전을 보면 아파트 시장이 커질 거 같아서 진출은 해야 하는데 당시 현대건설이 오일달러로 인해서 한창 잘 나가던 시기라 '대 현대건설이 어찌 쪼잔하게 집 장사 하겠나!'란 내부 의견이 많아서 따로 회사를 만든것이라 한다.[45] 정주영 회장의 형제 중 가장 영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 기자였고 독일 유학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46] 실제로 현대그룹과는 털끝만큼도 상관 없는 곳이다. 이 때문에 현대그룹에서 이 곳에 소송을 내기도 했다. SBI저축은행으로 사명이 바뀐 현재에는 옛말이 되었지만...[47] 현대교통, 현대운수, 현대지능개발사, 현대상가, 현대빌딩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