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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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일생
2.1. 초기 생애
2.2. 주요 활동
2.3. 의문의 실각 및 사망
3. 여담
4. 같이보기


1. 소개


鄭地. 1347년 ~ 1391년
고려시대의 무신. 본관 하동(河東). 초명 준제(准提). 시호 경렬(景烈).
외침에 시달렸던 고려 말엽 동시대에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최영, 이성계 같은 쟁쟁한 무장들보다 인지도가 많이 낮지만,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 토벌에서 맹활약한 명장이다.

2. 일생



2.1. 초기 생애


고려사에 수록된 그의 열전에 따르면 나주 출신이었고, 외모는 장대했으며 성품이 관후, 즉 너그럽고 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겼으며, 책 속에 담긴 의미를 잘 파악하는 것은 물론 이를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도 잘 했다고 한다. 거기다 항상 책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니, 훗날 무신으로서 활동하는 걸 생각해보면, 이성계도 그러하였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의외라고 볼 수도 있는 부분. 조준, 윤소종과 같은 문신들이 그와 친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걸로 봐선 그 수준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훗날의 일이지만, 중종 때 왜구와 관련해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는 그를 선비인 무장 혹은 병법을 익힌 문신을 의미하는 유장(儒將)이라고 언급할 정도였으니......즉, 이후 그의 무신으로서의 활동까지 생각해보면 지용겸비를 넘어선 문무겸비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렇게 학문을 좋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숙위를 담당하는 속고치 소속의 중랑장이 되는데, 이 때가 공민왕 때로 왜구의 침입이 심각했던 시기였던지라 공민왕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검교중랑장인 이희라는 인물이 수전 훈련을 해야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고, 이를 본 공민왕은 기뻐하기보다는 초야에 묻힌 이희도 이러한데 백관이나 위사[1] 중에서는 이러한 인재가 없느냐며 탄식하자, 위사였던 유원정이란 이가 정지를 추천했고, 때마침 정지가 왕을 호위하고 있는 중이었던지라 왕이 그에게 직접 물어보자, 자신의 주머니에서 왜구에 대한 전략이 적힌 글을 꺼내어 바쳤고, 이를 본 공민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희를 양광도 안무사로 임명한 것과 더불어 그를 전라도 안무사 겸 왜인추포만호로 임명하였으며, 정지 휘하의 군사 85명에게 첨설직[2]을 준 것도 모자라서, 그와 이희에게 따로이 천호공명첩 20개와 백호공명첩 2백 개를 각각 주는 등 파격에 가까운 혜택을 제공한다.
이후 그러한 공민왕의 모습에 감동받은 듯 정지와 이희가 두세 번에 걸쳐 모두 수십 조에 달하는 전략을 올렸는데, 이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내륙에 사는 백성은 배를 부리는데 익숙하지 못하니 왜구를 막기 어렵습니다. 바닷섬에서 나고 자랐거나 해전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만 등록시켜 저희들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게 하면 5년 내에 바닷길을 깨끗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순문사 같은 관직은 군량을 허비하고 민생을 소란하게 할 뿐이니 바라옵건대 그것을 없애소서.” - <고려사 정지 열전>'''

사실 당시 순찰사로 있었던 최영이 여섯 도를 순시한 후에 전함 2천 척을 건조해 각 도의 군사들로 하여금 왜구를 잡게 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진행하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집을 부수고 달아나는 자가 열에 대여섯이나 되었을 정도로 심각했던 상황이 벌어졌던지라, 정지 등이 어러한 건의가 올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공민왕이 최영과의 상의 끝에 이를 받아들여서 시행하자, 그제서야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한다.

2.2. 주요 활동


위에 서술한 것처럼 공민왕의 눈에 들어 등용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배이자 명장이었던 최영이 추진한 계획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패기를 보여주었지만, 그의 진가는 공민왕 사후 뒤를 이어 즉위한 우왕 때부터 드러나게 된다. 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보자면 대략 이러하다.
  • 예의판서로 재직 중이었던 우왕 3년(1377) 여름에 왜구가 순천, 낙안(樂安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등지를 침략하자,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적을 격파해 18명의 목을 베고 3명을 사로잡았고, 겨울에도 왜구를 공격하여 40여 명의 목을 베고 두 명을 사로잡았다.
  • 우왕 4년(1378), 왜구가 영광군, 광주광역시, 동복(同福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 등지를 침략해 오자, 정지가 도순문사 지용기 및 조전원수 이림, 한방언 등과 함께 옥과현(玉果縣 :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까지 추격했는데, 적이 미라사(彌羅寺)로 들어가자 아군이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마구 공격하니 적은 대부분 불에 타 죽었으며 말 100여 필을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정지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에, 승첩을 보고하자 정지 및 지용기에게 각각 은 50냥을 하사하였다. 왜구가 다시 담양현(潭陽縣 : 지금의 담양군)을 침략했으나 정지와 지용기가 격파해 열일곱 명의 목을 베었다. 곧이어 정지는 전라도 순문사가 되었다.
  • 우왕 8년(1382)에는 해도원수가 되었는데, 왜선 50척이 진포(鎭浦 :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로 들어오자 정지가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내었고, 군산도(群山島 :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까지 추격하여 배 네 척을 포획하였다.
  • 우왕 9년(1383)에는 정지가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중에 왜구가 큰 배 120척을 거느리고 경상도를 침략해왔는데, 이 때 출전하여 선봉에 있던 20척과 전투를 벌였고, 격파하여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이것이 바로 최영홍산대첩, 이성계황산대첩, 최무선진포대첩과 더불어 유명한 전투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는 관음포 전투이다. 이후 정지는 이 때의 전공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도도원수 겸 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로 임명된다.
  • 우왕 14년(1388)에는 안주도도원수로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 휘하에 소속되어 제2차 요동정벌에 참가했는데, 그 즈음 이성계가 출전하기 전에 사불가론을 주장하며 예측했던 대로 왜구가 세 도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황이 그리되자 위의 전공들로 인해 왜구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던 정지가 위화도 회군 직후 양광전라경상도도지휘사로 임명되어 도순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과 진원서, 전주목사 김용균, 양광도 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 등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는데, 이 때 적을 대파하여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둔다. 당시 사람들이 “이번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삼도의 백성은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라며 안도했다고 할 정도.
이렇듯 동시대의 선배 명장인 최영, 이성계 못지 않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우왕 13년(1387)에는 스스로 대마도 정벌을 자청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이끼도[一岐島](지금의 나가사키현[長岐縣] 이끼도[壹岐島])에 웅거해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무시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들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신사년(충렬왕 7년) 일본 정벌 당시 몽고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 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려사 정지 열전>'''

다만 선배들처럼 백전백승은 아니었던 듯하다. 몇 번의 패전을 경험하기도 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왕 5년(1379)에 순천(順天), 조양(兆陽 :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 진원(珍原 :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 등지를 침략한 왜구와 전투를 벌였을 때 패한 것이 그 중 하나다. 다만 최영 열전에 따르면 당시 그의 소식을 들은 최영이 때마침 자신을 찾아온 경복흥 등에게 '''“재상들이 어찌 나라를 근심하지 않소? 왜구들이 이처럼 제멋대로 날뛰니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스럽다한들 그 많은 적들을 어떻게 당해내겠소?”'''라고 꾸짖었고, 이를 들은 이들이 무안해 하였다고 하는 걸로 봐서는, 그의 잘못도 어느 정도 존재했겠지만 당시 상황이 상당히 안 좋았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쳐서 생긴 일인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히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보면 그 당시 상황이 상당히 개판이었던 건 사실이니......
또 하나는 바로 사근내역 전투로서, 당시 그 전투에 참가했던 9원수 중 한명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황산 대첩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 전투도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는지라......물론 이 때의 패전 이후 이성계, 변안열 등이 새로이 급파되었을 정도니 그 상황이 심각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그와 같은 9원수 중 한명인 배극렴이 황산 대첩 이전에 이성계와 합류했던 것으로 봐선 정지 역시도 그들과 더불어 황산 대첩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니......
어찌되었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숱한 전공을 남기는데, 전쟁활동 이외에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의판서, 문하평리, 지문하부사 등 중앙의 관직에도 임명되어 최영, 이성계, 변안열과 같은 다른 선배 무장들처럼 중앙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권문세족 등으로 인해 조정 상황이 막장이었던 탓인지 정치에도 관심을 가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고려사 조준 열전에 따르면 조준이 그와 더불어 훗날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우는 윤소종, 이성계와 같은 동북면 출신에 사돈 관계인 조인옥, 공민왕에게 정지를 추천한 유원정 등과 벗이 되었고, 그들과 함께 왕씨를 중흥하자는 맹세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지 또한 조준의 벗으로써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던 것으로 봐선 그 역시도 이성계처럼 신진사대부와 꽤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그 역시도 한때는 학문을 익혔던 인물이었고, 늘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였으니......
물론 그들이 목표로 삼은 폐가입진은 좀 뒤에 나오는 것인지라 저 당시의 일에 대한 진위여부가 좀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저들의 관계가 상당히 깊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위에서도 언급한 위화도 회군 직후 윤소종을 이성계한테 천거한 이가 정지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으니......거기다 이 기록에다 이후 회군공신 중 한명으로 선정되는 것을 통해 본다면 그 역시도 회군에 동조한 인물임을 알 수 있고, 그가 추천한 윤소종의 이후 활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역시도 개혁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렇듯 전쟁 영웅+개혁 성향의 무장이라는 특징을 가진 만큼 결국 다른 동료들처럼 이성계와 더불어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누구라도 예상하겠지만......

2.3. 의문의 실각 및 사망


이후 창왕 때에 문하평리로써 이성계, 심덕부, 배극렴 등과 함께 우왕을 위해 지금의 여주인 황려부에서 연 잔치에 참석하기도 하고, 양광전라경상도절제체찰사 겸 총초토영전선성사에 임명되어 활동하는데, 창왕 말에 최영의 인척인 김저, 정득후우왕의 지시를 받아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우왕의 추천을 받아 도움을 받기로 한 곽충보의 배신으로 실패하여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김저는 체포되어 순군옥에 수감되었다가 심문을 받은 순간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김저가 자신과 공모한 이로 변안열, 우현보 등을 거론하는데, 그 명단에 정지의 이름까지 나온 것이다.
이것이 참 특이한 상황인데, 다른 이들같은 경우에는 이성계 혹은 그를 따르는 이들과 여러 이유로 갈등이 있던 이들이니 그렇다쳐도 이전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지는 이성계의 최측근인 조준, 윤소종과도 막역한 사이였으며,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하고 이성계에게 윤소종을 추천하는 등의 활동을 보여줄 정도로 혁명파와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창왕을 옹립한 지 1년 만에 이성계를 제거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정지의 예도 있고, 김저가 이러한 진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옥사를 한지라 당시에 이 사건에 대해 의혹을 품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3]
그러나 폐위된 왕이 다시금 왕위를 되찾고자 벌인 사건에 이름이 언급된지라 결국 유배형에 처해져서 외지로 갔다가 같은 사건으로 유배를 간 변안열이 죽을 당시 한 발언으로 인해 벌어진 새로운 사건으로 인해 관련자로서 계림(지금의 경주)에서 국문을 당하였고, 횡천현(지금의 강원도 횡천)으로 옮겨지게 된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양왕 1년(1390년) 5월, 사절단으로서 명나라에 갔던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이 개경에 돌아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부에서 신 등에게 이르되, "그대 나라 사람으로서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彝)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란 사람이 와서 황제에게 호소해 말하되, '고려의 이 시중(이성계)이 왕요(王瑤: 공양왕)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는데, 요는 종실이 아니고 곧 이 시중의 인친입니다. 요는 이성계와 더불어 모의하여 병마를 움직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함으로, 재상 이색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니, 곧 이색, 조민수, 이임, 변안열, 권중화, 장하, 이숭인, 권근, 이종학, 이귀생을 잡아서 살해하려 하고, 우현보, 우인열, 정지, 김종연, 윤유린, 홍인계, 진을서, 경보, 이인민 등은 잡아서 먼 곳으로 귀양보냈는데, 그 내쫓긴 재상 등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했습니다. 부디 친왕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와서 정토하게 해주십시오.'한다."하면서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 조민수 등의 성명을 내어 보였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우현보, 권중화, 경보, 장하, 홍인계, 윤유린과 최공철 등을 순군욱에 내려 가두고 이색, 이임, 우인열, 이인민, 이숭인, 권근, 이종학, 이귀생, 그리고 정지 등을 청주의 감옥에 가두고 국문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유린, 최공철, 홍인계가 옥사하니 시신을 저자에 효수했다.
이제 꼼짝없이 죽임을 당하는 듯 했던 정지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감옥에 갇힌 정지 등을 국문하려 할 때에 갑자기 천둥을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져 냇물이 범람하여 청주성을 덮쳐 성 안의 물의 깊이가 한 장 남짓 되고 관사와 민가가 거의 다 떠내려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에 공양왕은 하늘의 뜻이니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성계 일당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사면을 받은 정지는 광주에 거처하다가 1391년 10월 경에 나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미처 나아가지 못하고 병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후 태조 3년(1394년) 7월 태조 이성계는 정지를 위화도 회군 2등 공신에 책록해 신원을 회복시켜줬고 그해 9월, 전라도 도관찰사 조박이 "처음으로 전함을 만들어서 왜구를 막아내 백성들을 구한 정지의 집을 정표하자."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의 공로를 기렸다.

3. 여담


나주에서 태어났으나 묘소가 광주 망월동에 있고, 광주에 장군을 기리는 경열사를 지었다가 나중에 출생지인 나주에도 같은 이름의 경열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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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정지 장군의 경번갑 유물
복원된 정지 장군의 경번갑
관련 유물로 보물로 지정된 정지장군 갑옷이 있다. 종류는 경번갑인데 원형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어 고려시대 갑옷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고, 오늘날 정도전과 같은 한국 사극에서 복원된 경번갑은 대부분 정지의 이 갑옷과 세종실록에 실린 경번갑 그림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광주시립민속박물관이 갑옷을 소재하고 있다. 하지만 2018년 1~12월까지 보존처리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왜란기의 의병장인 김덕령이 의병활동을 시작했을 때 정지의 묘가 있던 고향에서 그의 후손이 보존하고 있던 정지의 갑옷을 입었다는 얘기가 국조인물고를 통해 전해진다. 다만 앞뒤 내용을 보면 거의 전설과 같은 느낌인지라 진실인지는 명확치가 않다.
또한 조선 초의 무신인 마천목이란 인물이 정지를 따랐던 인물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마천목이란 인물이 위치상 자신의 전 상관이 추락한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정도전과 정지와는 달리 나름 성공한 삶을 살았던 조준의 인생을 바꾼 무인정사2차 왕자의 난에 참여하여 공신이 된 인물이라는 게 상당히 묘한 부분. 다만 실록에 따르면 정지의 아들인 정경과는 썩 좋은 관계가 아니어서 갈등이 적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선 우연일 가능성도 있을 듯 하다.
대한민국 해군은 왜구소탕의 공을 기려 손원일급 2번함에 정지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광주광역시의 도로명에 충장공충장로, 금남군금남로처럼 시호 경열공(景烈公)에서 딴 경열로(景烈路)가 있다.[4]

4. 같이보기




[1] 대궐이나 능, 관아, 군영을 지키는 장교를 말한다.[2] 고려 말기에 군공을 포상하기 위해 설치된 실직없는 관직[3]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김저 사건의 미심쩍음에 주목 이 사건을 아예 정도전, 남은, 이방원이 다같이 쿵짝을 맞춘 이성계 일파의 선날승으로 묘사한다.[4] 고려 숙종 때의 무관 왕국모(王國髦)도 시호가 경열공이긴 한데, 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은 이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