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종

 


尹紹宗
1345년 ~ 1393년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창작물에서
5. 같이보기


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윤택의 손자.

2. 생애


총명하고 민첩하면서 학문을 좋아해 20세가 되기 전에 시문에 익숙해 이제현이 기이한 재주라 여겼으며, 공민왕 때 장원급제해서 선발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해 정언이 되었다. 김흥경, 김사행 등이 임금의 뜻을 맞추어 나라를 피폐하게 하자 이들을 탄핵했고 충렬왕 때부터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왕이 놀러다닐 때가 아니라면서 김광대를 참수해 석실 공사를 중지하고 화원을 부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공민왕에게 상소가 올라가기 전에 여러 달 동안 휴가를 내고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탄핵당해 파직되었다.
우왕 때 전교시승, 성균관사예, 전의부령, 예문관응교 등을 차례로 역임했고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아 집이 매우 가난했는데, 이존성이 우왕에게 이야기해 쌀 열 석을 하사받고 전교부령이 되었다.
1388년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고 이성계에게 곽광의 전기인 곽광전을 바쳤고 창왕 때 전교령이 되자 옛 제도를 따르고 축문, 사소와 종묘, 적전의 제사를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도록 건의했으며, 우사의대부가 되고 이인임의 죄를 논의했다가 등창으로 휴가를 청해 그 틈에 상소가 중지되었다가 대사성으로 승진해 이인임의 죄를 논의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공양왕조준의 천거로 좌상시, 경연감독관이 되었으며, 과거에 조준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공양왕 때 많은 상소를 올렸다.
  • 이숭인의 재능을 질투해 영흥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숭인을 참소.
  • 변안열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림.
  • 공양왕에게 정관정요 대신 대학연의[1]를 강의받아야 한다고 상소.
  • 우왕, 창왕을 유배지로 호송한 신하들에게 공신호를 내려주는 것을 반대했지만 거부됨.
  • 승려 찬영을 왕사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
  • 직접 건의하는 제도를 폐지하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
  • 공양왕이 장당현으로 행차할 때 여러 사람을 수행하는 것을 반대.
장당현으로 행차하는 것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예의판서로 승진했다가 송문중에게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윤소종은 동서 최을의와 노비를 두고 다투다가 반복해에게 청탁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상시가 되어 시비를 자주 벌여 왕의 미움을 샀다가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공양왕의 귀에 들어갔으며, 정몽주의 탄핵을 받아 윤소종은 금주로 유배되었다가 정몽주가 죽은 후에 용서받았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1392년 10월 13일에 병조전서를 지내면서 조준, 정도전, 정충, 박의중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하는 작업을 했으며, 1393년 7월 2일에는 3등공신에 책봉되고 8월 2일에 병으로 사직했다가 9월 17일에 사망했다.

3. 여담


철저한 유교(성리학)원리주의자였다. 조선이 성립된 다음, 태조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자, 성석린 등과 함께 척불상소를 올려서 불교 척결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쉽게 말해 불교라면 치를 떠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러가지로 당대 관인들보다는 후대 사림과 비슷하다고 보여질 정도로 철저하게 유교원리주의를 주장한 인물.[2]
또 특이한 기록이라고 한다면, 지독한 공민왕 바라기였다는 점. 그의 문집인 동정집을 보면 엄청난 양의 공민왕에 관련된 한시들이 나오는데, 공민왕이 살아있던 시절엔 공민왕을 찬양하던 시들이 있었고, 공민왕 사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공민왕을 그리워하는 시들을 많이 남겼다. 동정집의 문헌을 읽어보면 윤소종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공민왕 '''생전'''과 공민왕 '''사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공민왕이 죽은 이후에 전조를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한다는 시를 짓기도 했다. 물론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이후로도 공민왕에 대한 애절한 충심은 변하지 않아서 속에서 공민왕이 나와서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의 시도 있는걸 봐서는 죽을 때까지 공민왕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유교적인 면모를 보인 또다른 일화를 소개하자면, 어느날 고려공양왕정몽주에게 정관정요를 강독하게 했는데, 이때 윤소종이 이를 말리면서 "중흥 군주로서 요순과 삼대[3]를 모범으로 삼아야지 당태종은 따를 것이 못 된다"고 디스하고, 정관정요 대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권했다고 한다. 당태종을 춘추의리로 비판했던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저서로는 동정집이 있으며, 그의 아들이 세종 때의 중신인 윤회인데, '구슬 삼킨 거위 때문에 하루 종일 묶여 있었다'는 일화로 나름 유명한 인물이다.

4. 창작물에서


KBS 대하드라마 개국에서는 이신재[4]가 연기했다.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박웅[5]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사제 관계를 비롯해 당시 사대부 사이의 인간 관계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지는 않은데다 원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임팩트가 크진 않았다.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병욱이 연기한다. 꼿꼿한 성격과 독설, 프로 어그로꾼, 아가리 파이터등의 강렬한 캐릭터로 그간 대중적 인지도가 희박하던 윤소종의 인지도를 확 올려줬으며, 심지어 당시 실시된 사회복지직 공무원 시험에도 예상범위도 아닌데 등장하기까지 했다.# 덕분인지 본 위키에서는 실존인물로서의 항목보다도 드라마 캐릭터로서의 항목이 먼저 생성되었다. 해당 문서 참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특정 배역으로 출연하지는 않는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에 의해 성균대사성으로 추천되었다는 언급이 잠깐 나오는 것이 전부. 그리고 이후 극이 폭풍전개되어 1394년 이후로 시점이 바뀌면서 등장도 제대로 하지 않고 죽었다.

5. 같이보기


[1] 중국 송나라 진덕수(眞德秀) 작으로 조선시대에는 세조의 명으로 이석형(李石亨, 1415년 ~ 1477년)이 대학연의집략을 편찬하기도 하였다.[2] 사실 여말선초 당시의 신진사대부들은 일단 국시로 유교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직 유교에 대한 이해도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래서 세조때까지만 해도 겉으로는 유교를 주장하면서도 스님이랑 같이 놀거나 유학을 탐구하기보다는 문장을 아름답게 하는데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본격적인 유교원리주의의 등장은 성종 이후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해서 이들이 사림파를 이루게 된다.[3] 고대 중국의 세 왕조. , , 왕조를 이른다.[4] 태조 왕건에서 박지윤을 연기한 배우.[5] 후속작인 왕과 비에서는 정인지를 연기했고, 그 리메이크 작인 인수대비에서는 양녕대군을 맡은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