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댐

 



[image]
[image]
1. 개요
2. 가는 길
3. 건설 배경
4. 허구 투성이 200억 톤 수공설
5. 건설 과정과 그 이후
6. 영향
7. 그 외 이야깃거리


1. 개요


북한강 최북단 민간인 출입통제선 경계에 위치해 있는 댐. 행정구역상으로는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에 위치하고 있다. 광복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화천군 화천면 수하리[1][2] 길이 601m, 높이 125m, 최대저수량 26억 3000만t으로 대한민국 내의 모든 댐 가운데 3위의 규모이다. 1989년 당시 준공되었으며 2004년, 2012년 2회에 걸쳐 증축되었다.

2. 가는 길


[image]
[3] 다음로드뷰
460번 지방도를 통해 갈 수 있다. 99구배의 멀미가 걱정이라면 한묵령로를 이용해서도 갈 수 있다.[4] 길 이름이 말하듯이, 멀미를 잘 안 하는 체질이라 해도 멀미약을 꼭 챙길 것. 내비를 찍어 보면 드래곤 커브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구불구불함을 확인할 수 있다.
저 표지판으로부터 평화의 댐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 가량. 한묵령로를 이용하면 20분 가량이다. 그러나 굽이굽이 도는 길이어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느낌인데다가 가는 길에 차가 없다. 직접 방문하면 아흔아홉 굽잇길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옛 미시령길은 애교처럼 느껴지는 수준. 단, 매우 구불구불한 데 비해 미시령길만큼 가파르지는 않고 완만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과 완만한 경사가 묘한 상승효과를 일으켜 사람을 졸리게 하니 주의할 것. 이런 특이한 도로 덕분에 자동차나 바이크의 좋은 와인딩 장소로 입소문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일요일 오전에 평화의 댐에 가면 스포츠카나 미들급 이상의 대형 바이크들을 찾아보기 쉽다고 한다.
댐 자체는 별로 볼 것 없지만 가는 길에 '두타연' 등 명소가 많으며, 자연 경관이 정말 멋지고 깨끗하다. 한 번 쯤 여행해볼 만한 곳이다. 수자원공사에서 관리하는 전시관, 평화의 종, 비목공원, 캠핑장, 깨끗한 화장실 등이 잘 조성되어 있어 한 번쯤 둘러보기 나쁘지 않다. 식당과 매점도 있다! 평화의 댐 자체의 전경은 꽤 아름다운 편이지만, 엄청나게 바람이 많이 분다는 것을 기억할 것. 또한 댐 자체는 과속방지턱을 천만배 쯤 확대해 놓은 것 같은 형상이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상수도와 발전을 위해 물을 가둬둔 저수댐이 아니기에''' 저수댐을 생각하고 갔다간 바닥까지 비워둔 기이한 모습에 당황할 수도 있다.
한번 구경해 보고 싶다면
  • 화천읍에서 풍산리로 향해 계속 북으로 가다보면 평화의 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오는데, 여기로 가면 된다. 또한 농어촌버스(화천 버스 2, 화천 버스 13)가 경유하기도 한다. 다만 시간대에 따라 7사단 신교대~57포병대대를 지나 민통선 이북 지역으로 들어가기도 하므로 검문소 앞에서 하차하기 싫으면 행선지를 물어보자.
  • 보트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다. 파로호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고 한참을 걸려 갈 수가 있다. 물론 보트가 있거나 빌려야 한다는 것은 함정.

3. 건설 배경


이 댐이 지어지기 시작한 1986년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타오르던 때였다. 이 관심을 돌리고자, 북한이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금강산댐[5]을 건설, 무려 '''200억 톤의 수공을 펼쳐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든다'''라고 과장되게 발표한 것. 건설부 장관이 10월 30일 처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날은 건국대학교에서 발생한 점거농성이 진압되기 전날이었다.
[image]
이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하루 종일 63빌딩이 절반이나 물에 잠기는 것을 비롯해서 서울특별시의 주요 건축물이 물에 잠기는 모형을 보여주었고[6], 유명한 대학 교수들[7]이 출연하여 그럴싸한 설명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국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해 기업과 국민들에게서 성금을 거의 반강제로 모금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국민학생들도 저금통이나 용돈을 털어 평화의 댐 건설에 보태는 일까지 벌어졌다.[8] 심지어 TV 쇼프로그램까지 동원하여 홍보에 앞장서기도 했다.링크(대한뉴스)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반공 분위기로 얼어붙는 바람에 줄기차게 개헌을 요구하던 야당과 국민의 여론,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크게 위축되었다. 전두환이 이것을 노렸다는 것이 정설로, 전두환의 심복이었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세동과 제2차장 이학봉이 주도하여 '시나리오'를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대표적인 실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외에 이기백 국방부장관도 이 일과 관련이 있다.
더불어민주당배재정 의원이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집권여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4. 허구 투성이 200억 톤 수공설


  • 한때 동양 최대의 댐 소리까지 들었던 소양강댐의 최대 저수량이 29억 톤이다. 참고로 이 정도 수량을 모으는 데도 6년 넘는 공사기간과 훨씬 더 긴 저수기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 호수의 규모도 상상을 초월한다. 길이는 장장 100km 이상, 평균 수심 100m 이상, 수문 근처의 최대 수심은 200m가 넘는다. 그런데 이것의 7배(200억 톤) 짜리 호수를 소양강 댐보다 훨씬 상류에? 그것도 북한이? 단순하게 계산만 해도 200억톤의 물을 저장하려면 가로 20km, 세로 10km, 높이 100m 짜리 직육면체 정도 되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 정도 규모의 댐을 지으려면 치악산 국립공원 면적에 평균수심 100m 짜리는 되어야 간신히 근접할 정도로 초 대규모 댐이다.
  • 만약 정말 금강산에 200억 톤의 물을 비축할 수 있는 댐을 만들려면 덤프트럭으로 흙 나르는데 10년, 물 채우는데 17년, 최소한 도합 27년이 걸리는 것으로 계산이 되었다. 물론 시간은 흘러흘러 발표시점에서 이미 25년이 흘렀고, 저수는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저수용량은 약 26억 톤 수준에 불과하다.
  • 더구나 북한의 토목기술 수준으로 보아 금강산댐에 필요한 인원은 공사기간 내내 연인원 10만 명 이상이 필요한데, 금강산댐의 공사 지역이 굉장히 좁기 때문에 이만한 인원과 장비를 억지로 밀어넣는다면 당연히 정상적인 공사는 어렵다.[9] 그러나 북한은 금강산댐 착공 당시 이미 군병력을 15만명이나 동원했었다. 따라서 무리한 공사였음은 맞으나 여기서 북한의 공사 인력 문제를 들먹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그리고 하류에 건설된 우리의 화천댐, 춘천댐, 의암댐, 청평댐, 팔당댐이 있어 방류 이후 서울지역 침수까지는 최대 8 ~ 9시간이 걸리므로 홍보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기습적인 수공은 불가능하다.
  • 또한 비축한 물이 120억 톤 이상이 되면 물이 오히려 넘쳐서 북으로 역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이것과 앞선 이유들(공사기간, 작업면적)은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그나마 양심 있던 한 안기부 간부가 이학봉 2차장(이재용 분)에게 진언한 내용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학봉 차장 왈, "시끄럽고, 그럴듯한 그림이나 그리시오!" 이는 드라마상의 내용이지만 이 드라마 자체가 "실화"와 교차검증된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드라마는 분명히 논픽션을 표방했으며, 등장인물들 상당수가 아직 살아 있는 정계/재계의 거물들이기 때문에 소송 위험도 있었다. 얼마나 신중하게 만들어졌을지 생각해 보자.
  • 세계 최대의 댐인 중국의 싼샤 댐의 저수량이 각각 393억 톤, 미국 최대인 후버 댐의 저수량이 336억 톤이다. 북한에서 신설하던 댐이 200억 톤을 달성한다는 것은 북한에 양쯔강 급의 강이 있더라도 불가능했을 일.
  • 만약에 북한이 남침용으로 이런 짓거리를 한다면, 남침의 주력이 될 기갑부대의 진격로를 모두 쓸어버려 습지로 만들어 놓고 한강을 도하할 수 있는 다리를 모조리 무너뜨리는 자폭을 저지르는 셈이다. 전차, 자주포 등 각종 중장비와 어마어마한 보급물량이 소요되는 현대전에서 도하는 훨씬 어려워졌기에 대형 교량이 지니는 전략적 가치는 상상 외로 크다. 단기 결전만이 살 길인 북한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제 손발을 자르는 셈. 80년대 후반이면 이미, 홍수로 선공해서 피해준다고 북한이 적화통일을 노릴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 1986년 당시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기간이고 1988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1988 서울 올림픽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을 절대 수수방관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공언했었다[10]. 허나 이런 만행을 저지른다는 것은 1972 뮌헨 올림픽사건을 상기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듯이 외교적으로 매우 아둔한 행위임에 틀림없다.[11] 그야말로 소련, 중공도 편들어 줄 수 없었을 정도로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
  • 이 모든 사실을 떠나서 일단 위에 언급한 TV 방송의 모형과 달리, 서울은 수조 안에 들어 있지 않다(…). 심지어 분지 지형도 아니다. 200억톤의 물이 서울에 가득 찬다고 해서 63빌딩 절반이 물에 잠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광범위한 면적에 수해가 발생할 뿐이다.[12]
21세기 같았으면 검색 한 방에 논파됐을 떡밥들 투성이지만, 당시의 언론통제 수준과 그 용이성을 잘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하다. 물론 이런 논파를 시도했다간 빨갱이 소리는 기본에 고문의 위험까지도 존재했을 시대였다. 따라서 200억 톤 수공설이 허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그냥 입 꾹 다물고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13] 그러나 북한이 남한을 엿먹이려고 금강산댐을 지은 것과 남한이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평화의 댐을 건설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5. 건설 과정과 그 이후


총 공사비는 1700억 원이었으며 이 중 639억여 원[14]은 반년동안 모은 국민 성금으로 충당되었다. 1987년 2월 28일 착공하여 1989년에 1단계가 완공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에 들어서야 국정감사를 받으면서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15] 북한의 금강산 댐의 저수량은 최대 59.4억 톤에 불과하므로 그 위협은 의도적으로 과장된 것이며, 이를 대비하기 위한 평화의 댐의 필요성도 엄청나게 부풀려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3년 댐 완공 뒤에 정보당국이 항공사진으로 판독한 결과 그 절반 수준인 26억 2천만톤으로 판명났다. '''그러나 사법처리는 없이 유야무야 넘어갔다. 심지어는 사죄 한 마디 없이.'''[16]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철썩같이 믿었던 정부에 속은 것'''이었다.
게다가 평화의 댐은 이름은 댐이지만 '발전 기능과 홍수 조절 기능이 없는 댐'이라서 비용에 비해 정말 하는 것이 없는 댐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도 떠안게 되었다. 아예 평상시에는 물이 없는 건류댐이니 뭐(물론 후술할 내용처럼 '만일을 대비해' 지어진 댐이니 만큼 건류댐인 것이 당연하기는 하다.) 보통 댐이라면 배수량을 인위적으로 조절, 홍수 조절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댐은 비상시 대량방류를 할 수 있는 수문이 따로 없으며 대신 댐 옆에 설치된 여수로 몇 개가 작은 수문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바보댐'''이란 별명도 붙었다.
참고로 탈북자 출신 네티즌 '회오리 33'[17]의 말에 따르면 '''금강산댐의 숨겨진 목적'''은 저수지도 아니고, 수공도 아니고, 바로 땅굴이라고 한다. 물론 남침용 땅굴이라는 소린 아니고, 전쟁 발발 즉시 한미연합군에게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당할 북한군이 궁여지책으로 동부 해안선 방어를 위한 보급로로 땅굴 터널을 뚫었다는 것이다.

6. 영향


다만 댐의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2002년, 2005년 북한 측에서 예고없이 금강산댐을 수억 톤 방류했을 때는 물론, 1995년, 1996년, 2010년에 일어난 강원 북부 지역의 집중호우에 대처 및 방어하는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image]
2002년 김대중 정부 시절에, 북한의 금강산댐의 노후화로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댐의 높이를 좀 더 올리는(80m→125m) 등 2단계 공사(1단계 보강공사)가 시행되어 2005년 완공되었다. 들어간 예산은 약 3995억 원.
이 증축을 두고 전두환이 한 건 나쁘고 김대중이 한 건 괜찮냐 운운하는 의견들이 당시부터 드물게 주장되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명확하고 정당한 사유 아래 이미 있는 댐을 증축한 것이었고, 반대로 전두환은 서울수공이라는 사기성 짙은 명분 하에 기존에 없던 댐을 신축한 것이니 양측의 차이는 지대하다 하겠다. 여하간 아래에 나오듯이 화천 평화의 댐은 결과론적으로 '북한강 유역의 수위를 안정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도구로써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위정자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을 속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평화의 댐은 1단계 완공이 목표가 아닌, 1단계 완공 후 금강산댐의 공사상황을 고려하여 2단계 공사를 하는 것이 원래 공사 목표였다. 하지만 희대의 사기극으로 밝혀진 이후 잠정중단되었다가 이후 정부의 평화의 댐 보강은 북한의 무단 방류 뿐만 아니라 서울 대기 중의 수증기가 모두 다 물로 변했을 때의 극한 상황을 가정하여 저수량을 대폭 높이는 방향으로 공사, 완공하였다.
금강산댐(임남댐)은 17년이 지난 2003년에 비로소 완공되었는데 폭 710미터, 높이 121.5미터, 저수용량은 최대 26억 2천만톤으로 추정되며 실제로도 충주댐 급의 매우 큰 댐인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이 댐은 인위적으로 일정 수준 이하로 수위를 낮출 수 없게 설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고의든 사고든 간에 한 번 댐이 넘치게 되면, 중간에 있는 댐들(화천댐, 춘천댐, 의암댐, 청평댐, 팔당댐)이 완충을 하더라도 서울특별시 등 한강 하류에 위험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2009년 '한탄강 북한 황강댐(룡성댐) 방류 사건'으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자, 평화의 댐에 대한 인식을 재고해야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2012년 6월 10일 국토해양부는 댐 치수능력 증대사업의 일환으로 2014년까지 평화의 댐 남쪽 사면을 콘크리트로 덧대는 3차 보강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2012년 9월 착공하였다. 목표는 '금강산댐이 붕괴'됨과 동시에 '극한강우' 즉, 대기 중의 수증기가 모두 비가 되는 상상 가능한 최대 폭우가 내려도 견딜 수 있는 기준이 적용된다.[18] 이 공사에는 1650억원을 투입하고 2014년 상반기 말 준공 예정이었으나 2018년에 완공 되었다.
임진강에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군남댐이 있다.

7. 그 외 이야깃거리


서브컬처 쪽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대표적인 예제가 바로 따개비 한문숙어. 에피소드 하나를 통째로 여기에 할애할 만큼 당시로서는 큰 이슈였다.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브릭스 요새는 최전방에 댐 형상으로 축조되어서 성격이 비슷하다.
웹툰 신과 함께에서는 거해지옥 도감에 이 댐 건설이 실려있다고 한다. 김자홍이 거해지옥에서 남에게 속은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할 때, 진기한 변호사가 '1986년, 평화의 댐 건설에 오천원을 냄’이라고 답하자, 재판하는 대왕이 '거해지옥 도감에 실린 사건이었지' 라고 대꾸하며 확인.

[1] 이 리의 소멸 시기가 불명이다.[2] 화천군 - 양구군 군계는 댐 옆의 능선이다.[3] 사진은 화천쪽에서 진입해 해산터널을 나오자마자 있는 간판. 터널 전 해산령을 올라가는길도 상당히 험하다. 평화의 댐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양구쪽 길도 험하기는 마찬가지.[4] 민간인 출입통제선을 넘게 되어 북한강 앞 검문소에서 신분증을 맡기면 출입증을 준다.[5] 북한에서는 임남댐이라고 부른다. 이 댐 때문에 금강산선의 일부 구간이 수몰되어 버렸다.[6] 평화의 댐이 있으면 수공을 막을 수 있고 보조댐까지 지으면 역공격도 가능하다는 쇼도 했다.[7] 대표적으로 서울대 토목공학과의 교수였던 선우중호는 전두환의 구미에 맞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학문적으로 전두환의 사기질을 도왔으나, 사기극이 드러난 이후에도 별다른 타격없이 지내다가, 1995년에는 서울대 총장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딸을 고액과외 시킨 것이 드러나 자진사퇴. 이후 명지대 총장을 지냈고 광주과학기술원의 총장으로 있다가 2012년 퇴임하였다. 여담이지만 이 양반이 명지대 총장 지내던 시절에는 국가정보원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여 두고두고 명지대의 흑역사로 남았다.[8] 국민학교에 찾아와서 전교생에게 빈봉투를 나눠주고 모금함에 집어넣는 장면을 찍어서 TV에서 방송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국민학교에서는 교사 주도로 성금을 내지 않는 학생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따돌림을 유도하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또한 절대 열외는 존재하지 않아서 최저생계비를 받고 사는 학생에게도 100~500원을 요구했다. 1980년대 당시 국민학생에게 500원이라면 상당히 큰 돈이었다. 그때는 10원짜리 풍선껌이나 90원짜리 라면도 있었고 성인 시내버스 요금이 100원이었다.[9] 실제로 개성-평양간 고속도로의 어느 다리 공사에서 인력과 장비를 억지로 밀어넣었다가 교각이 붕괴되어 수백여명의 사상자를 낸 전력이 있었다. 관련 링크.[10] 1986년 3월 평양을 방문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수상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이와 같은 연설을 하였다.[11] 물론 북한은 실제로 이런 상황 속에도 테러 공작을 벌였다.[12] 다만 평화의 댐에 대한 비판이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한 김영삼 정부 시절, 당시 안전기획부장이었던 김덕은 1993년 7월 국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금강산댐은 "북한이 정치적으로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 "댐 높이는 155m에서 215 m까지 축조 가능하다." "5공 당시 안기부가 왜곡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높이 200 m 댐이 무너지면 수도권은 해발 44.8 m에서 50.7 m까지 침수될 것이라고 미 육군 공병수로국이 판단하였다."라고 증언한 적이 있다. 즉, 김영삼 정부의 인사였음에도 김영삼 정부의 입장과 정반대되는 5공 당시의 안기부 입장을 그대로 표명했던 것.[13] 온라인 매체는 없었고 PC통신의 태동기였으며 그나마도 소수의 컴덕들만 접근하는 정도였던 시기이다. 하지만 전화선을 사용하는 PC통신은 1997년 야간정액제에 가입되어있지 않거나 시내/시회전화로 접속해 조금만 오래 써도 '''전화비 폭탄을 맞았다.'''(014XY는 시내/시외전화와 달리 요금 산정구간이 넓다. 시내전화가 1도수당 180/258초라면 014XY는 277초/396초로 산정된다. 물론 적당히 써야하는건 마찬가지 였지만..) 단 1988년 12월 이전에는 도수 전화요금제여서 전화비 폭탄이 없었다.#) 한겨레 신문정도 되는 논조의 오프라인 매체도 없었다.[14] 2015년 한국은행경제통계시스템 환산액수 1254억원[15] 평화의 댐 감사결과 발표문 요지 #[16] 그나마 이 당시 언론에 나와 위험성이 심각하다고 하던 어느 대학교수는 2000년대 들어서 쓴 책자에서 당시 왜곡했다고 인정하면서 글로써나마 사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그 누구도 사과는커녕 문제는 현재에 와서도, 실무담당 공무원을 처벌할 법조항은 있어도 단체장, 장관, 대통령 등을 처벌할 법조항이 없다. 정책 실명제가 논의중인 상황.[17] 보수성향의 밀리터리 커뮤니티 유용원의 군사세계(비밀)에서 상당히 풍성한 소재의 글을 올리며 한끗발 날리던 네티즌이다. 물론 그의 말이 모두 신빙성 있는 건 아니니 이 점도 확실히 해 두도록 하자. 가령 폭풍호 증언이라든가...참고로 이 양반은 2011년 현재, 한국에서 사기친 후 중국으로 도주한 상태.[18] 16년 1월 2일 기준으로 두깨 1m, 높이 수m를 높인다고 평화의댐 에 위치한 공사현황판에 명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