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샹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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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국민당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혁명가 랴오중카이의 아내로 국민당 내부의 대표적 좌파인물이었다. 장제스가 신우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이후로 반장파의 일원이 되었으며 중일전쟁 기간 동안 국공합작을 지지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자 본토에 잔류하여 중국 공산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진 않고 쑹칭링과 함께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결성하여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의 국민당원으로 남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존중받아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생애
2.1. 전족 거부와 독학
허샹닝은 1878년 영국령 홍콩의 부유한 차 상인 하재와 가난한 여공 출신의 진씨의 3남 9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허샹닝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남자형제들을 능가할 정도로 억척스러웠다 한다. 그러다가 전족을 할 나이인 5~6세가 되었을 때 사건이 발생했다.
발단은 허샹닝의 외가 친척이었다. 태평천국에 가담했던 그 친척은 태평천국의 정황에 대해 잘 알았고 허샹닝과 만날 때마다 태평천국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이야기가 큰 영향을 주었다. 태평천국 여군들의 무용담과 태평천국의 천족관에 매료된 허샹닝은 전족에 반항하며 밤만 되면 가위로 베를 풀어버렸다. 가난했던 관계로 어려서 전족을 하지 못했던 허샹닝의 모친 진씨는 자신들의 딸들만이라도 전족을 시키려고 했으나, 허샹닝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기를 10여차례 반복하자, 그 시대에 자유연애를 통해 가난한 여공이었던 진씨와 결혼할 정도로 사상이 깨어 있었던 하재는 더 이상 허샹닝에게 전족을 강요하지 말 것을 명령, 허샹닝은 전족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전족거부 일화가 허샹닝의 성격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화로 꼽히고 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독학 사건인데, 이것은 허샹닝이 7살 때의 일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거기에 하재는 "여자와 남자가 같이 공부하면 여자가 남자의 총명함을 앗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하재는 허샹닝에게 서당 가는 것을 금지하고, 다만 여자들을 모아 여자가 글을 가르치는 여서관(女書館)에 가서 전통적 유학 교육만 받을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나마도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고 곧 그만두게 했다.
하지만 허샹닝은 부모 몰래 책을 구하여 읽었다. 남자 형제들이 글을 배울 때 밖에서 엿들으며 공부했고 정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하녀를 서당선생에게 보내가면서 독학으로 글을 배웠다. 이로 인해 허샹닝은 다른 여자들에 비해 상당한 학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나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함으로 어릴 때부터 혁명 사상에 노출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이고 강인한 성격이 있어 동시대의 다른 중국 여성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2.2. 랴오중카이와의 만남
하재는 여러모로 허샹닝을 모순적으로 대했는데 전족을 안하게 해주면서도 동시에 미신을 신봉하여 글은 배우지 못하게 했고 그러면서 또 허샹닝이 16세가 되자 조수로 삼아 가계부와 가게 장부를 정리하게 하였다. 덕분에 허샹닝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런 허샹닝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랴오중카이(요중개)였다.
랴오중카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로 16세에 아버지 요죽빈을 여의고 청나라 공무원으로 일하던 숙부 요유걸과 큰형 요은도를 따라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랴오중카이는 그들의 전철을 밟아 과거를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서양학문으로 눈길을 돌려 구국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랴오중카이는 전족하지 않은 여자를 아내로 원했고, 매파에게 전족하지 않은 여자를 찾아줄 것을 요구했다. 딸 때문에 고심하던 하재는 그 소식을 듣고 하씨 가문과 요씨 가문의 결혼을 주선했다. 청나라 관료 집안인 요씨 집안과 홍콩 거상 집안인 하씨 가문이 서로와의 결합을 합의하면서, "큰발 때문에 결혼 못하겠다"고 부모의 걱정을 샀던 허샹닝은 큰발 덕분에 1897년 10월 광저우에서 랴오중카이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 날에 랴오중카이를 처음 본 허샹닝은 그의 키가 160cm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처음엔 실망하였으나, 그의 신사적인 태도와 남녀평등적인 사고에 감동받아 그에게 빠지게 되었다. 아내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던 당시 중국의 상황과 달리 랴오중카이는 평등하고 상호존중하는 근대적 결혼생활을 함으로 허샹닝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4년간 허샹닝과 랴오중카이는 독서, 시화를 함께 하며 정서를 나누었다. 이 4년간 랴오중카이는 허샹닝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더 넓은 시야를 가지는데 도움을 주었고 허샹닝도 남편의 영향을 받아 구국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2.3. 일본유학과 쑨원과의 만남
그러던 중 서양학문에 목말라 예전부터 일본 유학을 꿈꾸던 랴오중카이가 일본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청나라에 반기를 들진 않은 상황으로 관료인 요우걸과 요은도가 유학비용을 대주었고 주일 청나라 공사 마정량을 보증인으로 내세워주어 랴오중카이의 와세다대학 입학을 주선하였다. 여기에 남편을 돕고 싶었던 허샹닝은 자신의 결혼 패물을 팔면서 남편의 유학을 도왔고 자신도 남편과 같이 유학하기로 결정, 랴오중카이가 일본으로 떠난지 2달 후인 1903년에 자신도 일본으로 떠났다. 도쿄보습학교에서 몇달간 일본어를 공부한 후 허샹닝은 도쿄여자사범학교 예과에 입학했고 랴오중카이는 1904년에 예정된 대로 와세다대학에 들어갔다. 비록 학교는 달랐지만 이들은 같이 학업에 매진하였고 1904년에 장녀 요몽성을 낳기도 했다. 이 때문에 허샹닝은 잠시 귀국하여 딸을 홍콩에 맡기고 다시 일본에 돌아가 학업에 열중했다.
한편 일본의 청나라 유학생들 사이에선 민족주의, 혁명주의를 기반으로 한 반청감정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고 랴오중카이와 허샹닝도 1902년 거아의용대를 비롯한 학생조직에 의연금을 제공하는 등 어느 정도 공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사상에 결정적인 분기점을 제공하는 인물을 만나니 바로 쑨원이었다. 당시 쑨원은 유학생들 사이에서 청나라를 뒤엎고 민국을 건립하자는 주장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는데 1903년 9월 간다에서 열린 중국 유학생 집회에서 허샹닝과 랴오중카이는 쑨원을 직접 보게 된다. 그의 연설에 감명받은 그들은 쑨원의 하숙집을 방문하여 그를 다시 만났고 이후 1달간 방문하며 그로부터 반청혁명 사상을 학습받았다. 쑨원은 그들에게 뜻 있는 유학생들을 모아 광범하게 교류를 맺으라고 하였고 이로써 허샹닝의 본격적인 혁명활동이 시작되었다.[이때][2] 이후 1905년 8월 중국혁명동맹회가 결성되자 첫 여성회원으로써 가입하였고 자신의 집을 동맹회 회원들의 집회장소로 제공하였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고용인을 해고하고 동맹회의 뒷바라지를 했다. 이후 군주제 유지를 주장한 입헌파와 논쟁하며 해외 화교들을 혁명파로 포섭하기 위한 선전활동을 진행했고 유학생들을 모아 의용대를 조직하여 무장훈련까지 실시했다. 하지만 혁명에 투신한 다른 유학생들에 비하면 활동이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는 밑에서 설명할 병환, 출산 등의 개인적 문제와 더불어 일본 유학을 미래에 대한 투자로 여겨 일본에서 얻은 학식을 바탕으로 나중에 혁명에 투신하겠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1906년 허샹닝은 메지로일본여자대학 교육학부에 입학했으나 1907년 위궤양이 심해져 휴학했고 1908년 장남 랴오청지를 출산하게 되면서 1909년 도쿄혼고여자미술학교 고등과로 전학하여 그림공부를 하였다. 학업을 하면서도 허샹닝은 혁명활동에도 매진하며 매우 검약한 생활을 하였고 모든 고생이 중화혁명을 위한 것이라고 참아내었다. 그러던 중 중국동맹회의 톈진 지부 설치를 위해 와세다대학을 자퇴한 랴오중카이가 중앙대학 정치경제과에 편입하여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1909년 졸업 후, 쑨원의 지시에 따라 지린으로 가서 북방에서의 혁명세력 확보에 가담하게 되자 허샹닝은 홀로 도쿄에 남게 되었다. 허샹닝은 1911년 도쿄혼고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아이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돌아감으로 근 1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2.4. 신해혁명에서 호법운동까지
귀국한 허샹닝은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고 1911년 10월 10일 무창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하지만 신해혁명은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결국 실패했고 계축전쟁 실패 후 일본으로 잠시 망명하기도 했다. 허샹닝은 1914년 중화혁명당 창당에 가담하며 혁명활동을 지속하였고 이때 쑨원과의 관계가 진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쑹칭링을 만나기도 했다. 1915년 10월 20일 쑨원과 쑹칭링이 결혼할 때 랴오중카이와 허샹닝 부부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1915년 12월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중화제국 선포 후 황제에 오르려다가 전국 각지에서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 결국 취소하고 그 직후에 죽자 광둥으로 귀국하여 1차 호법운동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군벌 루룽팅이 쑨원을 배신함으로 1918년 6월 상하이로 이주해야 했고 2년간 쑨원을 도와 집필, 잡지 창간 등을 도왔다.
1920년 천중밍이 광저우를 탈환하고 쑨원을 초빙하자 허샹닝은 쑨원을 따라 2차 호법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활동의 주역은 랴오중카이가 맡고 있었고 이때까지 허샹닝은 남편을 보좌하면서 호국전쟁 당시의 군인 부인들에 대한 공작, 모금 활동 등의 부수적인 임무에 치중하였으며 여러 번역물들과 혁명저작들을 읽으면서 사상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이 시기 대표적 활동으로 1921년 쑨원의 북벌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군인위로회를 조직하여 전선으로 나가 위문활동을 한 것 등이 있다.
하지만 허샹닝은 과감한 여인이었고 1922년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광저우 군정부를 전복하고 쑨원을 축출하자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게 된다. 6월 16일 천중밍의 총통부 공격이 시작되고 쑨원의 행방이 묘연해졌으며 랴오중카이는 감금되었다. 허샹닝은 이틀만에 쑨원과 쑹칭링 부부를 만나 그들의 무사함을 확인한 후 10일이 지난 후에야 감금된 랴오중카이를 면회할 수 있었다. 랴오중카이는 자신이 곧 죽는다며 허샹닝에게 작별시를 내주었지만 허샹닝은 그를 살리기 위한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때 천중밍 휘하의 홍조린이란 자가 쑨원의 영풍함이 계속 광저우로 포격하는데 쑨원이 하루만 포격을 하지 않으면 랴오중카이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허샹닝은 그렇게 한다면 쑨원과 중국 인민들을 볼 낯이 없다며 거부했다. 8월 천중밍이 백운산에서 총사령부 회의를 소집하자 허샹닝은 비를 맞아가며 직접 백운산으로 찾아갔다. 허샹닝은 회의장으로 난입하여 여러 군관들 앞에서 천중밍의 배신행위를 크게 질책했다. 천중밍은 허샹닝에게 비를 맞았으니 옷부터 갈아입으라면서 진정시키려 했지만 허샹닝은 거절했다.
허샹닝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오자 천중밍은 랴오중카이의 석방을 지시하였고 그날 밤 늦게 랴오중카이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허샹닝은 천중밍이 마음을 돌릴 것을 우려하여 랴오중카이를 설득하여 다음날 새벽 바로 상하이로 떠나 쑨원 부처와 합류했다. 이후 허샹닝은 랴오중카이과 쑨원-요페 선언을 위해 활동할 때 허샹닝은 실무를 맡기 어려운 상황이라서 1922년 9월 27일 랴오중카이가 요페와의 밀담을 위해 일본으로 가자 자신도 1923년 1월 딸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남편을 도왔다."비에 젖은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오늘 나는 죽을 준비를 하고 왔다. 랴오중카이가 도대체 당신들에게 무슨 잘못한 점이 있어서 그를 가두는 것인가? (...) 오늘 여기 올때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왔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죽여도 두렵지 않다. 다만 똑똑히 물어보고 싶은 것은 랴오중카이를 죽이겠는가, 아니면 놓아주겠는가?"
2.5. 국공합작과 여성해방운동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소,용공,노농부조의 신삼민주의 정책이 발표됨으로 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쑨원을 지지하던 허샹닝은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4년 8월 국민당중앙 3대 부녀부 부장[3] 겸 국민당 광동성 당부 부녀부장에 취임하여 드디어 본격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허샹닝이 페미니즘에 입각한 여성해방운동을 우선시했는가 아니면 혁명활동을 중시하면서 여성해방운동도 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허샹닝 본인의 저작, 회고나 국민혁명 이전까지 가정주부 활동을 더 많이 했던 것을 보아 전반적으로 국민혁명을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허샹닝은 부녀부 부장에 취임한 후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3.8 국제 부녀절 행사를 크게 개최함으로 많은 여성들의 호응을 얻었고 부녀지성이란 잡지를 창간하였다. 훗날 저우언라이의 아내가 되는 덩잉차오가 주필을 맡아 1925년 12월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극회, 강연단을 조직하여 부녀운동과 국민혁명을 여성들에게 선전하였고 국민당원의 가족들을 집회에 참석시켜 강연을 하게 함으로 삼민주의와 5권 헌법의 의의를 알렸다. 이러한 선전활동 외의 활동으로 해외의 화교들의 지원으로 빈민산부인과의원을 설립함으로 가난한 산모들을 지원했고 부녀학교, 합작사 등을 건설하여 복리사업에도 나섰다. 또한 부녀노동학교를 만들어 여공들을 교육시켜 그들의 학업과 인권 향상을 지원했고 광저우여자미술연구소, 광저우여자제작품판매합작사, 국민당구호소, 여공보습학교 설립에 나섰다.
허샹닝은 국민당 내부에서도 여권 신장을 위해 활동하였는데 신해혁명 이후 참정권을 요구하는 의회 난입 사건이 일어나는 등 여성해방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혁명정당인 국민당에서조차 남성우선적인 구시대적 사고는 완전히 사라지고 있지 않았다. 여성집행위원들이 발기한 남녀평등원칙은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국민당은 그 시기까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허샹닝은 2.8 부녀절 기념대회를 통해 남녀평등, 각 기관의 여성 고용, 혼인의 자유, 재혼을 백안시하지 말 것 등의 구호를 제창했고 법률상, 경제상, 교육상, 사회상 남녀평등의 원칙을 확인하여 여권의 발전을 돕자는 것을 강조했다. 이 활동 덕분에 남녀평등원칙이 국민당 내부에서 통과될 수 있었다. 또한 광동성에서 조직된 여러 여성단체들의 단결과 여성운동 통일성을 위해 여러 결합체를 조직하였다. 또한 1925년 10월 혁명전쟁의 수요를 담당하기 위해 국인가속부녀구호보습소, 1926년 9월 광저우에서 국민당 중앙부녀운동강습소를 창립하여 부녀운동요원을 교육하였다. 허샹닝은 이 과정에서 국민당에 합류한 공산당원들과 적극 교류, 협력했다.
2.6. 국민혁명 시기
그러던 중 쑨원이 사망하자 허샹닝은 쑨원이 소련의 원조를 받기 위해 주창했던 연소, 용공, 노농부조의 삼민주의의 유지와 옹호를 천명하였고 남편 랴오중카이의 영향을 통해 대중운동과 노동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랴오중카이와 허샹닝의 행동은 중국 공산당의 세력 확장 도구에 이용될 뿐이라는 후한민 등의 국민당 우파의 적대적인 반응을 샀다. 이후 랴오중카이가 국민당 우파에게 암살당하자 허샹닝은 '정신은 죽지 않는다'고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를 집 문앞에 걸고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나는 비록 아무런 능력도 없지만 국민당을 개조하려는 선생님의 노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금후 맹세하건데 쑨원 선생님께서 국민당을 개조하려는 정신을 옹호하겠습니다. 쑨원 선생님의 모든 주장도 나는 맹세코 준수할 것입니다. 쑹여사에 대해 나는 당연히 있는 힘껏 아끼고 사랑할 것입니다."
쑨원의 임종을 맞아서 한 발언.
이후 랴오중카이의 대중운동 노선을 여성운동에 접목시켜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다. 쑹칭링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고 여러 여성 공산주의자들과도 두루 친교를 맺게 되었다. 이러한 노선 차이와 상황으로 인하여 허샹닝은 자연스레 국민당 좌파의 입장을 취했다.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서산회의의 개최에 허샹닝은 1926년 1월 광저우의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정식 대표로 참가하여 이를 맹렬히 비판했다."애통한 마음은 다만 당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분발할 것이며 언제가 되어서야 나라를 위하려는 이 마음을 다할 것인가?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나의 온 집안을 송두리째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다.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랴오중카이의 혁명정신을 배우고 힘써 선열들의 뜻을 계승하여 힘껏 나아가야만 한다."
이로 인하여 광저우의 제2차 전국대표대회는 <총리의 유촉 수락에 관한 결의>, <서산회의파에 대한 탄핵결의안> 등을 통과시켰다. 허샹닝은 부녀운동보고심사위원회,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광동성당부 부녀부장 겸 중앙부녀부장 대리도 맡게 되었다. 이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면서 우페이푸의 거점인 우한이 국민당의 수중에 떨어졌고 국민당은 1926년 11월 우한으로 천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허샹닝도 겨울에 우한으로 이동해 정부에 합류했으며 1927년 2월 쑹칭링과 함께 부녀정치훈련반을 개설하고 북벌적십자회, 부상병구호협회, 구호훈련반을 조직하여 여러 사업을 실시했다. 또한 중산함 사건으로 우파에 합류한 장제스의 권력에 대한 견제에도 착수, 1927년 3월의 국민당 2기 3중 전회에 출석해 국공합작과 노농부조를 강조하는 한편 장제스의 중앙상무위원회 주석, 군사위원회 주석, 중앙조직부장 직위 해임에 투표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장제스에게 직접 전달하며 우한 정부는 그가 군사독재자가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통고에 장제스는 폭발하여 허샹닝의 앞에서 집기를 때려부수며 울부짖었다 한다. 결국 국민당 좌파가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쿠데타를 감행함으로 독자적인 난징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허샹닝은 즉각 4월 13일 호북성당부 한구특별시당부에서 <장제스는 반혁명파>라는 연설을 발표함으로 그를 타도할 것을 요구했다. 4월 22일에는 장제스 토벌에 관한 공개전보를 발표함으로 그가 따로 중앙을 세우고 혁명대중을 살해한 죄행을 책망한다면서 그를 제거하자고 호소했다."서산회의파의 쑨원의 3대정책 파괴 행위는 질책받아 당연하다. 우리는 공고히 공산당과 합작하여 함께 분투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우리 모두 혁명을 성공시켜야만 한다. 혁명당원이 긴밀히 합작하여 단결을 공고히 하고 다른 사람의 도발을 받지 말며 공동으로 노력하여 삼대정책을 충실히 집행함으로 쑨원의 혁명 주장을 실현하자."
하지만 장제스의 여러 정치적 공작과 펑위샹, 옌시산 등의 거물들이 잇달아 장제스 지지를 선언하는 등의 정세 변화, 국민당 내부에서도 공산당의 과격한 혁명에 염증을 내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에 겹쳐 소련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을 장악하라는 지령을 내린 것이 국민당에 알려지면서 결국 국공합작은 국민당 내부에서 설 자리가 없어졌다. 결국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도 분공을 결정함으로 국공합작은 결렬되었다. 쑹칭링과 허샹닝은 이에 반대했고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하지 않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허샹닝의 입장 발표는 1927년 9월 광저우로 돌아가 중개농공학교를 세우기 전까지에는 있지 않았고 이에 대해서는 자신의 정세 오판 등에 대해 인지하고 입장을 정리한 시간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다.
2.7. 중일전쟁 시기까지
한동안 허샹닝은 1945년까지 정치적 야인으로 지내게 되었다. 당시 허샹닝이 정부에서의 정치적 행보는 지극히 제한적으로 국민당 대표대회에 참석한 것이 1937년 한번에 불과할 정도다. 허샹닝은 1929년부터 2년간 유럽으로 정치적 망명을 떠났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나서 귀국하였고 이후 장제스 정권에 대한 비판에 주력했다. 그 시작으로 1931년 11월 정부에 의한 공산당원인 덩옌다 구금, 살해 사건이 벌어지자 허샹닝은 즉각 쑹칭링과 함께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성명에 여러 민주 인사들이 허샹닝에게 크게 동조하였고 '국민당에는 이 두 여인만 남아있다.'란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허샹닝은 시를 지어 상하이의 중국군 장병들을 격려하는 한편, 직접 전선으로 달려가 항전의 주역인 19로군 병사들을 위문하였고 우쑹 전선 장병들에게 솜옷 보내기 운동을 벌여 3만벌의 솜옷을 전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1934년 마오쩌둥이 <항일구국 6대강령>을 발표하자 적극 호응, 공산당과의 항일민족통일전선 설립을 호소하며 중국민족무장자위원회를 설립하였다. 다음은 그 당시의 연설이다."최근 들어 지방에는 천재와 인재라는 재난이 발생하여 사망자가 매우 많으며 용감한 청년들이 정치사건으로 희생되는 경우 역시 적지 않으니, 예를 들어 이전부터 혁명을 위해 노력했던 덩옌다와 같은 용감한 청년이 너무나 억울하게 마침내 살해되었다. 이러한 국난의 시기에 이르러 인민의 생명은 더욱 아껴야 할 것이니, 공동으로 국난에 대처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야 한다. 따라서 당연히 정치범을 석방하고 흉악한 일본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 이와 같은 일본으로 인한 국난의 시기를 당하여 우리 전국 동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구국의 방법을 준비해야 할 것이며, 전국의 형제자매들 앞에서 삼가 공헌할 것과 연구 토론할 것을 권유한다. 나 허샹닝은 차후 중앙위원직을 사임하고 전심전력을 다해 사회자선 사업에 전념하여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그 책임을 다하려 한다.
허샹닝은 항일 구국운동 외에도 민권 운동을 벌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인 랴오청지 석방운동과 전국각계구국회 7인, 즉 7군자의 석방을 위한 구국입옥운동이 있다. 허샹닝의 아들 랴오청지는 독일 유학을 갔다가 1932년 3월 귀국하여 중화전국총공회 상해집행국 중화해원공회 담당서기가 되었으나 입국한지 2주가 되지 않은 3월 28일에 체포되었다. 이에 허샹닝은 상하이 경비사령부장 우톄청에게 "장제스를 욕하기로는 내가 제일 많이 욕했을 것이다. 어째서 나를 붙잡지 않고 도리어 이런 무고한 청년들을 가두는가?"라고 항의하여 랴오청지를 석방하게 했다. 하지만 랴오청지는 중국 공산당원으로 정말로 상하이에서 공산당의 비밀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이제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망국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원치 않는가를 물어볼 때이다. 만약 망국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오로지 자발적으로 이러나 대일작전에 참가하고 완전히 정부에 의지하는 환상을 포기해야 자기를 구하고 나라를 구할 수 있다. (...) 중국 인민은 이미 전쟁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게 되었다."
1935년부터 내전의 정지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각계구국회가 성립되자 허샹닝도 당연히 이 움직임에 참석하여 상해부녀구국회 주석단, 상해문화계구국회 주요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후 전국각계구국회가 성립되자 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들은 군사충돌의 중지, 정치범 석방, 정식대표를 파견하여 통일된 항일정권 건립, 인민구국전선의 공동항일강령 이행, 항일역량을 약화하는 모든 행동 제제를 내걸고 국민정부와 대립했다. 1936년 11월 7군자 체포 사건이 벌어지자 허샹닝은 즉각 쑹칭링, 마상백과 연명으로 비판했고 구국입옥운동을 벌였고 1937년 2월 국민당 제5기 3중전회에 출석해 내전정지와 국공합작, 정치범 석방을 호소했다. 허샹닝의 국공합작 요구는 서안 사건으로 얼떨결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외에는 여성운동, 교육보급, 그리고 중국의 생사 생산 증진 등을 위해 노력했다.
2.8.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합류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중일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자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은 다시 치열해져갔다. 1946년 초부터 허샹닝은 국공내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1월 5일 정치협상회의에서 허샹닝은 <평화 단결은 중국 유일한 출구>라고 논평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리고 <각계 인사들이 일어나 정부를 독촉하여 정협의 결의를 실행할 것을 희망한다>에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오늘 국민들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다만 정전을 확실하게 집행하여 영구적인 평화를 공고히 하고 따라서 각 당파들을 단결하여 민주연합정부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 다음 자유롭고 진정한 보편적 선거를 통한 국민대회를 거행하고 민주제도를 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허샹닝은 이를 중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허샹닝은 장제스와 마오쩌둥 모두에게 편지를 써서 말했다."금후 가장 중요한 것은 정협의 결의를 집행하는 것이며 전국 인민과 해외 각계 인사들이 모두 일어나 국민당 정부를 감독하여 정협의 결의를 집행하고 민주정치의 실현을 가속화해야 한다."
또한 트루먼에게도 편지를 보내 말했다."전국 인민은 평화를 갈망하고 국공 양당이 모두 나라를 위해 서로 참기를 바라며 기타 당파와 사회에 덕망 있는 명사들은 중재하여 힘을 다해 공동으로 담판을 성사시켜야 한다."
<국내외 신문사와 통신사에 보내는 편지>에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미국 정부가 목전에 중국을 원조하여 취한 절차는 (...) 중국의 내전이 날로 확대되게 하고 있으며 독재의 분위기는 날로 높아가고 있어 평화의 희망은 더욱 막막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 인민으로 하여금 실망과 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미국 정부는 신속히 공평하고 효과적인 절차를 취하여 일체 중국의 내전을 조장할 수 있는 조치를 중단하고 중국의 평화를 회복시켜야 한다."
하지만 내전의 중지 호소가 소용없을 것같다고 인식이 바뀐 이후 허샹닝은 국민당과 장제스에 대한 성토로 방향을 전환하여 장제스에 대해 강력히 성토하고 나섰고 1947년 중반부터는 리지선, 펑위샹 등 반장세력과 연합, 장제스에 대한 비판을 화교들에게 선전하고 중국의 민주인사들과 연합하여 국민당을 타도하기로 하였다. 1947년 11월 중국국민당 민주파연합대표대회가 개최되었고 1948년 1월에는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가 창설되었다. 국공내전이 유리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자 중국 공산당은 "각 민주당파 인민단체, 사회의 덕망있는 명사는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실현할 것을 토론하며 민주연합정부를 성립하자."라고 민주파에 대해 러브콜을 보냈다. 허샹닝은 이에 동조를 표했으며 공산당의 영도를 인정,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회의에 참여하여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를 대표해 축사를 하였고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허샹닝이 마침내 중화민국을 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한 것이다."인류는 서로 사랑하고 기독교의 박애와 불교의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대공무사를 주요 취지로 삼아 다시 연합하여 국공 양당에 평화를 호소하여 영원히 내전을 중지하게 할 것을 요구한다. (...) 트루먼 대통령에게 공정하고 합리적인 태도로 중국의 분쟁을 조정하고 다시는 한쪽 편에만 군사원조를 하여 전쟁의 불길을 조장하지 말게 해야 한다. 중국 내전의 위기를 구하는 것은 곧 세계 인류의 재난을 피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2.9.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와 말년
이후 허샹닝은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정협전국위원회 부주석, 화교사무위원회 주임, 중국미술가협회 주석 등을 지냈으며 특히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화교 외교 쪽에 집중적으로 종사하였다. 허샹닝은 1949년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아들 랴오청지와 함께 화교사무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최초로 화교사무위원회의 채임자가 되어 해외의 화교들의 권익 보호, 중국 내부의 화교 재산 보호, 화교들의 국내 투자 호소, 귀국화교들에 대한 지원 사업, 화교 학교 건립 등에 집중했다. 이러한 사업들을 바탕으로 1955년 화교재산보호관철에 대한 명령을 통과시켰고 1951년에 광둥, 푸젠, 상하이에서 화교투자공사를 설립하였고 광둥, 푸젠, 윈난, 하이난다오에서 화교열대작물간식공사를 설립하였다. 허샹닝은 1959년에 80세의 나이로 직위를 사임했다. 1972년에 폐렴으로 사망했고 남편 랴오중카이와 함께 묻혔다. 향년 94세로 엄청 장수했다.
1957년 시작된 반우파투쟁 당시 허샹닝은 민주당파의 소수를 "우파"로 다수를 "좌파"로 정의하고 전자를 탄압대상으로 넘겨주고 비판하는데 적극적이진 않아도 소극적인 야합으로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3. 여담
- 정치 뿐만이 아니라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라 예술관 역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화가로도 활동하였지만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엔 여러 예술가들과 연대해 합동 전시회도 열고 수익금은 기부했다고 한다.
- 랴오청지는 문화대혁명 중 장칭의 비판을 받고 위기에 처했으나 저우언라이가 그를 필사적으로 도와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 2001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문물국은 허샹닝의 작품에 대한 국외반출금지령을 내렸다. 이와 같은 조치는 리커란, 쉬베이훙, 푸바오스 등 허샹닝을 합쳐 총 10명의 화가들의 작품에 해당되었다. 이후 2013년 21명의 화가, 서예가들에 대한 작품들에도 국외반출금지령이 내려졌다.
- 쑹칭링과 절친한 사이었다.
- 손자 랴오후이(廖暉)는 국무원 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 주임을 지냈으며 태자당의 원로로 2008년 11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정협 부주석으로 출마되었다.
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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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대업에서는 배우 이빈(李濱)이 분했다.
5. 참고문헌
- 하향응의 정치활동과 사회인식, 김문희, 부산대학교.
- 하향응의 사회인식과 중국여성운동에 관한 연구, 이상숙, 부산외국어대학교.
- 일본유학시기 하향응(何香凝)의 반청사상과 활동, 윤미영, 동아시아일본학회.
- 하향응(何香凝)의 사회인식 형성과 그 활동 -신해혁명기(辛亥革命期)까지를 중심으로, 김문희, 신라대학교.
- 송경령과 하향응 : 손문유지(孫文遺志)의 계승과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이양자, 중국사학회.
- 사료를 이용한 인물학습 : 하향응을 중심으로, 김문희, 한국기록관리학회.
- 反右派闘争について(반우파투쟁에 대하여), 北村総
6. 관련문서
- 신해혁명
- 계축전쟁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2차 호법운동
- 영풍함 사건
- 1차 국공합작
- 선후회의
- 국민당의 1차 동정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1925년 객군 반란
- 국민당의 2차 동정
- 서산회의
- 중산함 사건
- 국민혁명
- 반장전쟁
- 만주사변
- 제1차 상하이 사변
- 열하사변
- 서안 사건
- 중일전쟁
- 국공내전
- 대약진 운동
- 문화대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