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군

 



'''조선 정종의 왕자'''
'''진남군
鎭南君'''

'''작호'''
진남정(鎭南正) → 진남군(鎭南君)
'''시호'''
이간(夷簡)
'''본관'''
전주(全州)
'''이름'''
종생(終生)
''''''
원보(原甫)
'''부왕'''
조선 정종
'''생모'''
숙의 이씨(淑儀 李氏)
'''부인'''
의춘군부인 의령 남씨(宜寧 南氏)
'''자녀'''
4남 1녀
'''묘소'''
경기도 용인시 역북리 구성동
'''생몰
기간
'''
'''음력'''
1393년 2월 15일 / 1406년 미상[1] ~ 1470년 11월 27일
'''양력'''
1393년 3월 27일 / 1406년 미상 ~ 1470년 12월 19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여담
5. 가족과 후손

[clearfix]

1. 개요


조선 초기의 왕족. 정종의 6남이다. 어머니는 숙의 이씨이다. 친형제는 없다.

2. 생애


1425년(세종 7년)에 중직대부(中直大夫) 정윤(正尹)에 봉해졌고# 1430년(세종 12년)에는 원윤으로 승격되었다. 그 해에 세종이 왕족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종학의 관리직인 유사(有司)에 임명되어 종친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지를 감찰했다. 1442년(세종 24년)에는 세종의 명으로 전주에 있는 회안대군서자의 집에서 태조 이성계어진을 모셔왔다.# 1444년(세종 26년)에는 명선대부 진남정에 봉해졌고#, 1453년(단종 1년)에는 정의대부 진남군으로 승격했다.#
1466년(세조 12년)에는 세조의 특명으로 사옹원[2]과 장원서[3]의 책임자인 제조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품계가 숭헌대부(崇憲大夫)로 높아졌으며 그 다음해에는 가덕대부로 승격하고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으로 책록되었다.##

3. 사후


1470년(성종 1년) 12월 19일에[4]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5]
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 비정동에 있었으나 도시 개발 계획으로 1971년에 경기도 용인시 역북리 구성동으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른다.
1872년 3월에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4. 여담


  • 평소에 책읽고 글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항상 근검과 청렴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한다.

5. 가족과 후손


의춘군부인 의령 남씨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다. 딸은 연안 김씨 김승과 혼인했다.
장남은 익대공신[6]인 거평군 이복(居平君 李復)이고 차남은 이조참판을 지낸 진례군 이형(進禮君 李衡), 3남은 봉성군 이이(鳳城君 李侇)이며 4남은 병조참의를 역임한 금산군 이연(金山君 李衍)이다. 금산군은 큰아버지 종의군양자로 출계했다.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전주 이씨 종의군파를 이루고 있다. 선조 시기에 좌의정이었던 충익공 이헌국은 진남군의 현손이다.
[1]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전주 이씨 진남군파 종중회에서는 1393년 2월 15일 생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성종실록》 1470년 11월 27일 자의 진남군 졸기를 보면 1406년 생으로 나와 있다.(정확히는 향년 65세라고 적었다. 이를 역으로 계산하면 1406년 생이란 결론이 나온다.)#[2] 司饔院. 왕의 식사나 궁중의 음식 공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3] 掌苑署. 궁궐에 있는 정원의 꽃과 과일 나무 등을 관리하던 관청.[4] 음력 11월 27일.[5] 세는나이 65세.[6] 翊戴功臣. 남이의 옥사를 평정한 공로로 신하 37명에게 내린 공신 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