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군사령관
- 한자: 集團軍司令官
- 영어: Army Group Commander
1. 개요
군대의 직책으로 집단군을 이끄는 지휘관을 가리킨다. 휘하에 2-3명의 야전군사령관을 두게 된다. 최소 40만에서 100만의 병력을 지휘하게 되기 때문에 평시에는 구현되기 힘들고 전시에도 엄청난 규모의 군대가 아닌 이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집단군사령관이 나타난 적이 없다. 다만 전시라면 육군병력이 많은 한국군답게 나타날 수도 있다.
폴란드나 러시아에서는 집단군을 전선군(фронт)이라 불렀기 때문에 전선군사령관이 집단군사령관을 가리키며 일본군의 경우엔 총군이란 말을 사용했다.
2. 보직
야전군사령관으로 대장 혹은 중장이 보임되는 만큼 집단군사령관은 원수나 대장 보직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의 경우, 중장이 집단군을 이끈 경우도 있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경우 집단군장(集團軍長)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집단군사령관에 해당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사용되는 집단군의 의미와는 달라서 이 직책은 한국의 군단장급에 상당한다. 북한의 경우에도 수도방어집단군사령관에 상장이 보임되는데, 이는 군단급에 해당하므로 서방권의 집단군과는 급이 다르다.
3. 실존 인물
3.1. 미군
미군은 2차대전기 유럽전선에서 3개 집단군을 운용했다. 태평양 전선의 경우 실제 복수의 야전군(6군, 8군, 10군, 호주 제1군 및 야전군 급(2개 군단/6개 사단)인 해병대)이 운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양과 섬이라는 전선의 특성 상 별도의 집단군사령부가 구성된 바는 없으며, 대신 체스터 니미츠의 태평양해역군(POA), 더글러스 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SWPA)이 유럽전선의 연합군 최고사령부(Supreme Headquaters Allied Expeditionary Force, 약칭 SHAEF)와 같이 해당 지역 육, 해, 공군의 작전을 총괄하는 최고사령부로 기능하며 직접 야전군을 통제하였다.
- - 서류상으로만 존재한 집단군으로 본래는 브래들리의 12집단군의 최초 편성시 단대호였다가, 노르망디 상륙 전 독일군 정보당국을 교란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된 퀵실버 작전에서 가상의 집단군 단대호로 쓰였다. 패튼이 워낙 독일에도 널리 알려진 지휘관이다보니 패튼의 이름을 사령관으로 올려놓았다. 참고로 실제 패튼은 이 시기 부상병 구타 사건으로 보직해임당해 거의 백수 신세로 있다가(...) 간신히 노르망디 상륙 직전에서야 제3야전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 제6집단군사령관 : 제이콥 데버스 육군대장 - 용기병 작전으로 형성된 남프랑스 전선 사령관이었다.
- 제12집단군사령관 : 오마 브래들리 육군대장 (후에 원수로 진급) - 실질적인 서부전선 연합군의 주력. 실제로 브래들리는 2차 세계대전 미군 원수 중 합동참모회의 구성원(리히, 마셜, 킹, 아놀드)이나 전역 사령관(아이젠하워, 니미츠, 맥아더)이 아닌 유이한 멤버이며 유일한 육군 집단군사령관이라는 점에서 다른 집단군과는 격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제15집단군사령관 : 마크 클라크 육군대장 - 18집단군의 후신으로 종전 때까지 이탈리아 전선을 담당했다.
3.2. 영국군
영국군은 2차대전기 유럽전선과 태평양전선을 통틀어 3개(종전시 2개)의 집단군을 운용했다. 단, 15집단군의 경우는 군 구성이 바뀌면서 집단군사령관이 미군 몫으로 바뀌었다. 서부전선의 집단군은 미군과 마찬가지로 연합사령부인 아이젠하워의 연합군 최고사령부(SHAEF)의 지휘를 받았고, 동남아시아 버마 전선의 집단군은 루이 마운트배튼의 동남아시아 전역사령부(South East Asia Command, 약칭 SEAC)의 지휘를 받았다.
- 제11집단군사령관 : 조지 지파르 육군대장 → 올리버 리즈 육군중장 → 윌리엄 슬림 육군중장 (후에 원수로 진급) - 동남아시아의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한 집단군. 1944년 12월부터는 동남아시아 연합국 지상군사령부(Allied Land Forces South East Asia, 약칭 ALFSEA)로 재편되며 조지프 스틸웰이 지휘하던 북부전구사령부(Northern Combat Area Commands)도 지휘계통에 편입시켜, 명실공히 버마전선의 연합국 지상군 최고사령부 역할을 했다.
- 제18집단군사령관 → 제15집단군사령관 : 해롤드 알렉산더 육군대장 -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로 이어지는 지중해 전선에서의 연합군의 반격을 지휘하기 위해 구성된 집단군. 1943년의 튀니지 점령 이후 15집단군사령부로 단대호가 변경되었으며, 1944년 12월 부로 사령관이 미육군의 마크 클라크 대장으로 바뀌었다.
- 제21집단군사령관 : 버나드 몽고메리 육군대장 (후에 원수로 진급) - 두말할 나위 없는 오버로드 작전의 주역. 노르망디 상륙 이후로는 서부 연합군의 북부 전선을 담당하였다.
3.3. 국민혁명군
국민혁명 시기 중국 국민당에 펑위샹, 옌시산 등의 대군벌들이 잇달아 가입하게 된다. 이에 국민정부는 기존 국민혁명군을 1집단군으로 개편하고 펑위샹에게 2집단군 사령관, 옌시산에게 3집단군 사령관 직위를 부여한다. 1집단군 사령관에는 장제스가 임명되었다. 이어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자 우한 정부는 탕성즈를 4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장제스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국공결렬, 영한합작 등의 교통정리가 끝난 후 당계전쟁으로 탕성즈가 퇴갤하면서 계계군벌의 수장 리쭝런이 4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됨으로 중국에는 총 4명의 집단군 사령관이 존재하게 된다.
이후 편견회의를 통해 집단군 체제 정식으로 취소되었지만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일어나자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에 대항하기 위해 집단군 체제를 부활시켰다. 1집단군 사령관에는 광저우 국민정부의 주력을 차지하던 천지탕이 임명되었으며 4집단군 사령관은 리쭝런이, 5집단군 사령관은 화북에서 봉기한 스여우싼이 임명되었다. 2,3집단군 사령관은 각각 펑위샹, 옌시산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되나 두 사람 모두 광저우 국민정부와 사이도 좋지 않았고 중국에서 추방당한 상태라서 부임하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대군을 동원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국민혁명군 집단군이 다시 편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