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

 



崔萬理
1398년(태조 7) ~ 1445년(세종 27)
1. 소개
2. 경력
3.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
4. 변호
5. 대중매체에서
6. 기타
7. 관련 문서


1. 소개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는 자명(子明), 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시호는 공혜(恭惠).

2. 경력


1398년 해동공자 최충(崔沖)의 11대손인 최하(崔荷)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14년(태종 14) 식년시 생원시에 2등 3위로 급제했으며#, 1419년(세종 1) 증광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했다.# 1420년 집현전에 보임된 후 계속 집현전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홍문관교리(校理)에 재직하던 1427년(세종 9)에는 중시 문과에 을과 2등 1위로 급제하였다.# 1439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440년 다시 집현전에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 상급 직책인 영전사, 대제학, 직제학 등이 겸직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세자의 시강학사를 맡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뛰어난 유학 실무자이자 청렴하고 올곧은 관료로 꼽힌다. 일단 세종대왕 시기 자체가 천재들이 활보하는 조선의 리즈 시절로 국가 최고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의 실질적 수장이 얼마나 능력있는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세종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가 유지된 519년간 공식적으로 218명밖에 인정받지 못한 청백리 중 한 사람이다.

3.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


1444년 2월 최만리는 정창손, 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千古。 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裁)하시옵기를 바랍니다.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하나,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螗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하나,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1]

하였으나,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2],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一, 新羅 薜聰吏讀, 雖爲鄙俚, 然皆借中國通行之字, 施於語助, 與文字元不相離, 故雖至胥吏僕隷之徒, 必欲習之。 先讀數書, 粗知文字, 然後乃用吏讀。 用吏讀者, 須憑文字, 乃能達意, 故因吏讀而知文字者頗多, 亦興學之一助也。 若我國, 元不知文字, 如結繩之世, 則姑借諺文, 以資一時之用猶可, 而執正議者必曰: "與其行諺文以姑息, 不若寧遲緩而習中國通行之文字, 以爲久長之計也。" 而況吏讀行之數千年, 而簿書期會等事, 無有防(礎)〔礙〕 者, 何用改舊行無弊之文, 別創鄙諺無益之字乎? 若行諺文, 則爲吏者專習諺文, 不顧學問文字, 吏員岐而爲二。 苟爲吏者以諺文而宦達, 則後進皆見其如此也, 以爲: "二十七字諺文, 足以立身於世, 何須苦心勞思, 窮性理之學哉?"

하나, 신라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3]

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胥吏)복예(僕隷)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였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結繩)[4]하는 세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5]나 기회(期會)[6] 등의 일에 방애(防礙)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吏員)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7]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如此則數十年之後, 知文字者必少。 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 不知聖賢之文字, 則不學墻面, 昧於事理之是非, 徒工於諺文, 將何用哉? 我國家積累右文之化, 恐漸至掃地矣。 前此吏讀, 雖不外於文字, 有識者尙且鄙之, 思欲以吏文易之, 而況諺文與文字, 暫不干涉, 專用委巷俚語者乎? 借使諺文自前朝有之,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灼然可知之理也。 厭舊喜新, 古今通患, 今此諺文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損, 於治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也。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8]

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右文)[9]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변로지도(變魯至道)[10]를 하려는 뜻으로서 오히려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一, 若曰如刑殺獄辭, 以吏讀文字書之, 則不知文理之愚民, 一字之差, 容或致冤。 今以諺文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 然自古中國言與文同, 獄訟之間, 冤枉甚多。 借以我國言之, 獄囚之解吏讀者, 親讀招辭, 知其誣而不勝棰楚, 多有枉服者, 是非不知招辭之文意而被冤也明矣。 若然則雖用諺文, 何異於此? 是知刑獄之平不平,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 欲以諺文而平獄辭, 臣等未見其可也。

하나,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刑殺)에 대한 옥사(獄辭)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11]

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冤枉)[12]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招辭)[13]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一, 凡立事功, 不貴近速。 國家比來措置, 皆務速成, 恐非爲治之體。 儻曰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謀及宰相, 下至百僚國人, 皆曰可, 猶先甲先庚, 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 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工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 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 且今淸州椒水之幸, 特慮年歉,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燮之時乎? 臣等尤未見其可也。

하나, 무릇 사공(事功)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14]

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先甲) 후경(後庚)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15]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公務)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一, 先儒云: "凡百玩好, 皆奪志, 至於書札, 於儒者事最近, 然一向好着, 亦自喪志。" 今東宮雖德性成就, 猶當潛心聖學, 益求其未至也。 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 臣等俱以文墨末技, 待罪侍從, 心有所懷, 不敢含默, 謹罄肺腑, 仰瀆聖聰。

하나,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玩好)는 대개 지기(志氣)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16]

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17]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18]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19]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含默)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년) 2월 20일 1번째 기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중국의 한자와 방식이 다르다.
  •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은 일본, 여진, 몽골 같은 오랑캐나 하는 일이다. [20]
  • 원래 존재하던 이두는 조악하기는 하나 한자를 배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한자와 관련이 더 적은 한글을 쓴다면 한자를 아는 자가 적어질 것이다.[21]
  • 훈민정음을 반포하면 형사(刑事)에 있어서 억울함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나, 이는 훈민정음과 관계없는 문제이다.
  • 논의도 없이 갑작스럽게 글자를 만들고 운서를 고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
  • 동궁(세자)이 해야 할 다른 일이 많은데 훈민정음 창제에 너무 관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분노하였다. 세종이 감정적으로 분노를 직접 표출한 몇 안되는 사례이다. 내뱉은 독설의 수준을 보면 아버지인 태종과 매우 유사하다.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 薜聰吏讀, 亦非異音乎? 且吏讀制作之本意, 無乃爲其便民乎?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汝等以薜聰爲是, 而非其君上之事, 何哉?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且疏云: ‘新奇一藝。’ 予老來難以消日, 以書籍爲友耳, 豈厭舊好新而爲之? 且非田獵放鷹之例也, 汝等之言, 頗有過越。 且予年老, 國家庶務, 世子專掌, 雖細事固當參決, 況諺文乎? 若使世子常在東宮, 則宦官任事乎? 汝等以侍從之臣, 灼知予意, 而有是言可乎?"

"설총이나 나나 백성을 편하게 하자는 것인데, 너는 감히 설총은 옳고 임금은 그르다고 하느냐. '''그리고 너희들이 운서를 알기나 하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 개더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또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보면 알겠지만 과격한 표현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아마 실제로는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의 육두문자가 남발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최만리 등 상소의 작성자들은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나 파직이라는 형을 받은 정창손[22]을 제외하고는 다음날 석방되었다. 최만리는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린지 1년 뒤에 48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실록에서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최만리에 대한 기록은 1444년 이후로 사라지는데 명망있는 관리들은 꼭 써주던 졸기 하나도 없는걸 보면 세종의 최만리에 대한 증오는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이에 대한 찬양이 거듭되면서 반대 급부로 최만리는 사대주의자, 수구꼴통 유학자로 까이게 되었다. 물론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대왕의 높은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최만리에 대한 비난은 지나친 감이 있다.
최만리에 대한 비난은 개화기 이래로 유구한 전통이다. 사실 이전에는 듣보잡으로 취급되었는지 별로 언급되지도 않는다. 이 때부터 유교와 양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졌으며 민족주의가 강조되면서 한글은 민족 유산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고 조선 시대의 왕들이 전반적으로 폄하되는 가운데도 세종대왕만은 한글 창제라는 업적으로 인하여 높은 평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관이 정립되면서 최만리는 '유교적 관념 때문에 새로운 문물과 개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조선을 퇴보시킨 구시대 양반 세력', '민족 문화를 저버리고 외국 문화를 추종한 민족 반역자'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최만리의 이러한 행동은 훈민정음을 집현전이 아닌 세종대왕이 직접 비밀리에 창제했다는 설의 증거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었고 기간도 짧지 않아 집현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아는 인물이었다. 집현전의 실질 수장인 부제학만 6년을 지냈고 집현전 학사 등의 직책으로 집현전에서 일한 기간만 무려 17년이다. 태종 시절부터 왕의 경연을 맡는 학사를 했으니 실질적인 기간은 20년이 넘는다. 만약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수행했다면 아무리 비밀리에 작업했다고 해도 최만리가 이러한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상소가 갑자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갑자상소문'이라고도 한다.

4. 변호


1990년대 이후 현대에는 최만리의 주장을 재해석, 일부이나마 옹호하는 주장들도 있다. 보통은 최만리가 훈민정음의 장점을 미처 알지 못하고, 새로운 문자를 사용할 경우 이전까지 한문을 기반으로 한 정치 및 학문 체계 등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 우려했다고 주장한다.
최만리의 상소 중 창제 작업의 성급함과 세자의 참여 문제는 (훈민정음의 중요성을 배제해 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지적이다. 훈민정음 창제 작업은 세종 본인과 세자 문종, 그리고 극소수 최측근 인사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해석에 따라서는 세종 혼자서 작업을 수행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당시 세종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상당히 나빴고[23], 이 때문에 중요 국정은 문종에게 거의 10여년간 대리청정을 맡긴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자 창제 작업에 크게 열중한 것은, 최만리에게는 자칫 더 중요한 국정 운영에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최만리의 주장을 쉽게 표현하면 "문자 만드느라 나라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정작 만들어도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보수주의적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반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종은 2~6항에 대해서는 격하게 반응했지만 사대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으며, 당시에 중국에 대한 사대는 최만리뿐 아니라 세종까지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은 동북아시아에서 절대적으로 중국이었으며, 모든 법제나 기술 등의 중심 역시 중국이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굴욕적인 것이 아니었다. 명과 조선의 관계에서는 강대국에 대해 이익을 챙기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위 요약 내용의 첫번째에서 세번째 사항들을 잘 보면 훈민정음의 장점을 알지 못했다기보다는 '''너무 잘 알아서 충공깽먹고 반대한 것으로도 보인다.''' 사실 한글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정작 조선왕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한자를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현상의 발생과 확대에 대한 최만리의 염려가 현실화된 적이 전혀 없다.[24] 오히려 세종 뒷목 잡을 정도로 취급이 박한 편이었다.[25] 최만리가 염려한 악영향은 조선왕조 이후인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 즉 최만리의 시점에서 '''엄청나게 멀고 먼 미래의 이야기다.''' 거의 예지 능력자 수준. 그게 너무 멀리 본거라서 문제였지......게다가 중국의 한자와 방식이 달라서, 오랑캐들이나 하는 일이라서라고 반대하는 부분은, 문자가 달라짐으로서 문명권 사이의 문화적 공유성이 줄어들고 상호간 이질성이 심해지는 것을 염려한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문자가 달라짐으로서 생기는 문명의 가치 체계의 대변동을 염려했다고도 해석된다. 이때문에 최만리를 '''문자가 가지는 인류 문명에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장 심도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26][27]

5. 대중매체에서


  •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전반에서는 더없이 든든한 세종의 지지자지만 자존심과 고집이 센 면이 있다. 그렇기에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정인지와도 가끔 의견이 충돌하고는 하지만 결국엔 납득하는 편. 후반부 들어 훈민정음의 문제로 세종과 충돌하는데, 이전까지 세종의 가장 큰 정적이던 조말생(물론 어디까지나 극중 한정)까지도 씹어먹을 정도의 최종 보스로 그려진다. 하지만 마지막엔 세종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뜻을 굽히고 물러나게 된다. 배우는 이성민[28]
  •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재해석이 가해져서 비록 세종의 의도에는 반대하지만, 세종의 능력과 문자의 위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올곧은 신념을 가진 채 이를 비판하는 깨끗한 선비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참고로 원작에서는 올곧은 보수주의자로 등장하며 드라마보다는 재해석의 정도가 덜하다. 그리고 엄청난 반전이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 배우는 권태원. 영화 타짜에서 호구 아저씨 역으로 유명하다.
  • 드라마 장영실에서는 후반부에서야 나오는데, 뮤지컬 배우 안신우[29]가 이를 맡았다.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를 보고 경악하며, 장영실에게 치를 떤다. 여기서는 견물 연구를 폄하하는 모습을 보인다.

6. 기타


서울의 중구 만리동과 만리재로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동네다. 최만리가 벼슬 살던 때 기거하던 사택이 있던 곳이라해서 시쳇말로 최만리 고개, 만리재로 불렸고 이후 만리동, 만리재로라는 지명이 파생된 것.
훈민정음을 보고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문자'''라고 언급한 기록이 있다.
기생 홍랑과 가슴절절한 러브스토리를 가진 삼당시인 고죽 최경창이 그의 후손이다.

7. 관련 문서


[1] 중국의 문화로 오랑캐를 올바르게 바꾼다.[2] 소합향은 이란이 원산지인 소합향나무에서 채취하는 진액으로 실크로드를 통해서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향이 진한 고급 약재중 하나였다. 반면 당랑환은 말똥구리가 굴려 만든 말똥 혹은 소똥으로 만든 약재다. 그러니까 소합향을 버리고 당랑환을 취한다는 것은 훈민정음 반포를 일컬어 '''한자처럼 고귀한 문자를 버리고, 급이 낮은 문자를 만드는 것'''이라 비판하는 글귀다.[3] 항간에 떠도는 언어로 간단히 말해 민중들의 언어라고 해석이 가능하다.[4] 노끈을 이용해 표현하는 방식. ##.[5] 정부 부처의 일지를 말한다.[6] 회계 업무 중 하나.[7] 참고로 실제 반포된 훈민정음은 26자로 최종 발표때 1자가 사라졌음을 알수가 있다. 이 글자의 존재도 학계의 중요한 떡밥중 하나.[8] 행정업무의 다른 이름.[9] 학문을 숭상함.[10] 선왕이 남긴 유산을 실행하지 않던 노나라를 도로써 변화시킨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11] 한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의 흐름을 깨우치는 것, 즉 문맥 파악이 되는 것을 말한다.[12] 억울하게 당하는 것.[13] 용의자의 진술서.[14] 모든 벼슬아치.[15]청주시 내수읍 초정리이다.[16] 성리학에 마음을 둠.[17] 유학자들이 즐겨야할 기예 6가지. 몸가짐과 마음가짐 올바르게 하는 것(禮), 음악(樂), 활쏘기(射), 말타기(御), 글쓰기(書), 수학(數).[18] 시민(時敏)은 창경궁의 동궁인 시민당을 말한다. 시민당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장소로 해석하면 "언문 창제는 세종의 왕세자의 공부에 방해만 된다." 정도가 되겠다.[19] 시를 쓰거나 서화를 그리는 것을 말한다.[20] 일본은 가나, 여진은 여진 문자, 몽골은 몽골 문자를 만들어 쓰고 있었고 이들은 당시 한국의 이두에 비해 좀 더 독자적인 문자였다. 그리고 이들 나라들은 당시 한국에 비해 한문이나 중국 문화의 통용도가 낮은 편이었다.[21] 이 우려는 수백 년 뒤 대한민국에서 한글 전용이 대중화되면서 한자를 아는 자가 줄어들며 실현되고 있다.[22]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라고 주장하다가 세종대왕으로부터 '용속한 선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유교의 핵심 이념인 교화를 부정한 것이기 때문.[23] 당뇨로 인한 체중 감소 및 실명이 진행 중이었다[24] 다만 완전 그런 것만은 아니라서 숙종때 남구만은 시골에선 사람들이 언문만 익히고 한자를 모르는 자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있다고 말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25] 단 이것은 완전 틀린 말은 아닌데 '암클' 이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 위주로는 많이 썼으며 이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기에''' 대비 같은 경우에는 상당수가 한글로 글을 작성했으며 제안대군처럼 무식한 왕족은 한문 대신 한글을 사용하기도 했기에 적어도 조정에서 근무하는 관리라면 모를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게다가 조선조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인 만큼 적어도 왕실에서는 (자기 조상님이 만든 거니까) 평가가 높았다.[26] 참고로 상소 내에서 여진 문자를 언급하는데 여진 문자는 이 예시에 상당히 부합하는 것으로 금세종은 여진 문자 보급에 힘썼는데 이 금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한 군주였는데 그런 군주가 여진 문자 보급에 힘쓴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27] 일단 적어도 문자의 보유는 소유한 집단에게 큰 의미를 갖는데 문자로 기록한 것이 소실되지 않는 이상은 자신들에 대해서 기록을 통해 전승할 수 있기 때문, 예시로 유목민족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다 그들 자신이 기록한 것이 아닌 그들과 이웃한 농경국가들의 기록이다. 게다가 이렇다 보니 성문법 만드는 것도 역사책을 편찬하는 것도 체계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문자가 있고 없고에 따라 문명의 정도까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괜히 세계 4대 문명 모두에서 문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28] 당시 이성민이 아직 무명에 가까웠던 시절. 본인은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라고 한다.[29] 같은 시기를 그린 대왕세종에서는 효령대군을 연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