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호산
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가. 팔로군 출신으로 연안파로 분류된다. 본명은 이천부(李天夫 혹은 李天富).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제6사단장(☆), 제5군단장(☆☆)을 역임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측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된다.
전쟁 말기 김일성종합군사대학 초대 학장에까지 올랐으나 전쟁 이후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숙청되었다. 최종 계급은 중장.
2. 상세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소련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과 중국 옌안의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수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이후에는 중국에서 팔로군 소속 장교로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에 참가했다.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난 후, 대부분이 조선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인민해방군 제166사단을 이끌고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166사단은 병력 충원 후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되었으며, 당연히 그가 초대 사단장(☆)으로 취임했다.
무정 등의 다른 팔로군 출신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군사학을 공부하였고 실전경험도 풍부했기 때문에 6.25 전쟁 당시 가장 유능한 북한군 지휘관이었다. 인민해방군 166사단에서 이름만 바뀐 6사단 또한 마찬가지로 정예 중의 정예였다. 곧이어 발발한 6.25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건 어찌보면 예상된 일이었다.
6.25가 발발하자 6사단은 국군 1사단이 담당하던 서부전선 쪽에서 쳐들어왔다. 개전하자마자 옹진반도와 해주의 국군병력을 순식간에 패퇴시킨 후, 주공(主攻) 방면으로 예상되던 곳에 집중되어 있던 국군 수비병력을 우회, 폐선된 철도를 복구하여 병력과 장비들을 개성(전쟁 전에는 남한 땅이었다)까지 열차로 순식간에 진격시키는 비범한 기동을 선보였다. 개전 사흘만인 27일에 김포를 점령했는데, 이는 '''모든 북한군 부대들 중 가장 먼저 한강을 도하한 것이다.''' 심지어 그쪽은 하류라 강폭도 넓었는데 말이다. 물론 일개 사단만으로 전선을 밀 수는 없으므로 한강 방어선 전투는 그와 별개로 진행되었다.
이후에도 언제나 다른 북한군 부대들보다 진격속도가 빨랐다. 중부·동부전선에서는 춘천-홍천 전투, 동락리 전투, 대전 전투 등에서 국군과 미군이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고 있었으나, 그가 이끌던 서부전선의 6사단은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충청남도와 전라도 쪽으로 쾌진격해 내려갔다. 실제로 전쟁 초반 국군의 패주 이후 마산 전투 직전의 진주 전투까지 국군이 북한군 6사단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한반도 서부에서 남하중인 대규모 적 부대를 포착하였다"는 유엔군 정찰기의 정보 뿐이었다. 즉 거의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전력을 온전히 보전한 채로 밀고 내려왔던 것이다.
이는 국군에게 심대한 위협이 되었는데,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전선 당시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은 전선 북쪽과 서북쪽에 집중되어 있어 서남쪽에 대한 방어는 상대적으로 허술하였기 때문이다. 방호산은 이 허점을 제대로 찔러[5] 서쪽에서 마산 방면으로 급습했다. 천만 다행히도 6사단이 마산 바로 옆의 진주를 점령했을 때 이를 포착한 미군이 북서쪽을 담당하던 미 육군 25사단을 부랴부랴 마산 방면으로 돌려 확인사살했다. 마산과 부산이 얼마나 가까운지 생각하면 북서쪽 전선의 전투보다도 이 전투가 더 중요한 전투였다. 자세한 내용은 마산 전투 문서 참조.
사실 당시 국군과 미군도 북한군 6사단이 김포반도 점령 후 소식이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서쪽에서 남하중일 것이라는 예측은 했으나, 이 정도로 빠르게 기동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적이었던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조차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은 이제까지의 6.25 전쟁을 통해 가장 훌륭한 기동이었다"'''고 평할 정도였다. 그는 이 공로로 김일성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그가 지휘한 6사단 또한 '''근위''' 제6사단이라는 칭호와 함께 전 병력의 특진과 임금 50% 인상을 수여받았다. 다만 마산 전투에서 북한군이 패하자 상당한 타격을 받아 추가적인 공세는 하지 못했다.
이후 인천 상륙작전을 위시한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에도, 부대편제가 와해되어 무질서하게 패주한 여타 부대들과 달리 부대편제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주변의 낙오/패잔 병력들을 수습해 '''후퇴 이전보다 오히려 사단 인원수를 늘려가며''' 질서정연하게 북으로 퇴각한 공로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하나 더 받아 2중영웅이 되었다.[6] 6.25 전쟁 당시 공화국2중영웅 칭호를 받은 인물은 방호산을 제외하면 다섯 명 뿐이었다고 한다. 이때, 6사단에서만 공화국 2중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은 방호산을 포함해 3명이나 되었다.[7] 참고로 당시 편제를 유지하여 퇴각한 부대가 하나 더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팔로군 출신인 이건무[8] 소장이 이끄는 4사단이었다. 사실 김일성은 6사단이 빠른 기동으로 마산을 급습한 것보다 이렇게 부대편제를 유지하며 퇴각한 것을 더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전쟁에서 진격보다 퇴각이 더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후 1950년 10월에는 방호산 휘하의 6사단이 확대 개편돼 5군단으로 승격되면서, 방호산도 북한군 5군단장(☆☆)으로 진급하였다. 북한군 5군단은 그의 지휘 하에 현리 전투에도 참가해 큰 공을 세웠으며, 정전협정이 가시화하자 그는 당시 창립된 김일성종합군사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이렇듯 군사적으로 승승장구하였지만 연안파였기 때문에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숙청되어 '''모든 칭호와 공훈을 박탈당하고''' 함경남도 단천군 검덕광산의 후방부 지배인으로 좌천되었으며 그 이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1959년 처형당했다고도 한다.
3. 평가 및 여담
김무정, 남일 등과 함께 전쟁 당시 가장 유능한 북한군 장령 중 한 명이었으며, 특히 주요 전과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동전의 대가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숙청당한 많은 인물들이 그렇듯, 그 또한 남한에서는 김일성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 수많은 국군 장병들과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숙청당했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서 언급이 금기시되고 있다.
숙청당하기 전까지는 북한에서 어찌나 명성이 자자했던지, 아동용 그림책에조차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숙청당해 언급이 금기시 된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난 오늘날의 북한에서는, '6사단 출신 인민영웅' 이라 하면 방호산과 동일하게 공화국2중영웅 칭호를 받은 6사단 정찰과장 리학문이나, 320고지 전투 당시 '나의 고지 운동'을 주도한 6사단 15련대 3소대장 한계렬이 인지도가 훨씬 더 높고, 당시 참전한 6사단 출신 북한 전쟁노병들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비록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 악귀이지만 어쨌든 북한군 입장에서는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부하들에게 인망도 높았다고 한다. 그가 지휘하던 북한군 6사단과 5군단은 대부분 팔로군 시절부터 함께 싸운 사이라 전우애도 투철했다고.
또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는데, 바로 6사단 점령지에서 수많은 인민재판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깐깐하고 만만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같이 생각되겠지만, 6.25 전쟁 당시 북한군 중좌로 방호산의 6사단에서 정치 장교로 근무했던 최태환씨에 따르면, 무인이라기 보다 문인 스타일의, 점잖고 부드러운 성격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가 지휘했던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현재도 6.25 직전과 마찬가지로 서부전선의 개성특급시에 주둔 중이다. 비록 제1대 사단장은 숙청되어 방호산의 후임인 2대 사단장이 1대 사단장으로 기록되는 등의 기록말살형까지 당했지만 6사단은 여전히 '근위 제6사단'의 칭호를 유지하고 있다.
4.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는 과연 무엇인가?
위키피디아 기준으로 따지자면 출생년도가 1916년, 사망년도는 물년미상이다.
출생년도는 사실상 4개의 년도로 좁혀졌지만, 사망년도는 아직 논의가 계속 되고 있다.
심지어,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도 출생년도를 1916년, 사망년도를 미상으로 지정하고 있다. [9]
4.1. 다른 위키들과 차이점은?
가장 적대적이라고 하는 디시위키에서는 아예 문서가 없다(...) [10]
위키백과에서는 생애 문서를 간략하게[11] 잘 다두르고 있다. [12]
나무위키가 탄생할 수 있었던 리그베다 위키는 프로젝트가 없어 방호산 문서가 없다.
영리 목적이지만 같은 동지인 리브레 위키에도 '''역시''' 문서가 없다.
[1] 위키마다 다르며 위키피디아에서는 '''1916년'''으로 표기하고 있다.[2] 단 대부분의 위키에서는 물년미상으로 쓴다.[3] 사망년도 마저도 위키마다 다르며[2] 역시 위키백과에서는 '''몰년미상'''으로 뜬다.[4] 8월 종파사건까지는 김일성종합군사대학 초대 학장까지 올라왔다.[5] 물론 이는 북한군 수뇌부 전체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방호산의 초월적인 기동능력으로 인해 조성된 결과론적 해석에 가깝다. 김일성은 전략에는 별 관심도 없이 오로지 '광복절까지 부산을 점령하여 전쟁을 끝낸다'는 생각밖에 없었다.[6] 방호산은 평소 김일성 직계 북한군 지휘관들의 전투 역량을 멸시하는 말버릇을 갖고 있었고, 김일성을 우습게 보는듯한 건방진 태도도 갖고 있었으나, 김일성은 이를 못 본체 했다고 한다.[7] 각각 6사단장 방호산, 6사단 정찰과장 리학문, 6사단 507군부대 소속 김기우.[8] 자료에 따라서는 이권무.[9] 사진 참고[10] 아마 8월 종파사건 때문인 것 같다. 디시위키에서는 8월 종파사건을 '''혐오한다.'''[11] 간략하더라도 너무 간략하다.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 방호산 문서 참조.[12] 역시 사망년도 관련해서는 문단이 '''없다.'''[13] 나무위키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