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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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흔히 알려진 만청 후기에 유행한 변발. 음양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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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변발
중앙아시아 북방의 흉노, 돌궐, 몽골, 여진족, 거란, 만주족 등 북방 기마민족들의 유서깊은 헤어스타일. 만주어로는 손초호(ᠰᠣᠨᠴᠣᡥᠣ soncoho), 몽골어로는 게제르(ᠭᠡᠵᠢᠭᠡ/гэзэг), 카자흐어로는 아이다르(айдар)라고 한다. 몇몇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고대 이집트인들도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했다.
사실 유목민족들은 환경적 특성상 물이 귀해 머리 감기 어렵고 떡지기 쉬운데다, 머리카락이 길면 말타고 달리는데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므로 변발을 자주했다. 우크라이나의 슬라브계 유목민족인 카자크도 추프(чуб)라 불리는 비슷한 변발을 했다.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대장 불리바>의 삽화나 율 브리너가 연기한 영화를 본 사람들은 기억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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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라를 들고 있는 카자크 노인.
앞머리는 깎고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로 몽골인, 만주족, 여진족, 거란, 튀르크 등 북방계 유목민들의 전통 헤어스타일이다. 거란족은 위의 그림과 같이 양 옆 조금만 남기고 다 밀어버렸으며, 몽골족과 튀르크인은 앞머리와 좌우 양쪽의 머리를 조금 남긴 후 귀 뒤 2갈래로 길어 늘어놓았다. 여진족, 만주족은 뒷머리의 일부만 남기고 죄다 깎아버린 후 남은 뒷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놓았다.
굳이 머리를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전쟁시에 편하라고 이렇게 했다는 의견이 대세다. 과거 냉병기 시절 전투는 두꺼운 옷 위에 쇠로된 갑옷을 입고 역시 쇠로 된 투구까지 쓰고 격렬하게 움직이는데, 이때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어 열을 빨리 식히기 위해 머리를 밀었던것. 아무래도 다른 부위에 비해 뇌가 열받으면 훨씬 후유증이 크다는 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잦았던 유목 민족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며, 일본의 촌마게도 비슷한 이유로 나온 머리다.[1] 한편, 변발이 유행했던 지역은 물이 부족하기 때문[2] 에 물을 아끼기 위한 측면도 컸다. 지금도 위구르같은 경우는 모든 남자들이 아예 스킨헤드를 기본 스타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위구르인들도 전통적으로 변발을 해서이다. 터키인의 복식에서 유독 모자가 발달한 이유 역시 변발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터키인 남자들은 머리를 박박 밀고 그 위에 모자를 쓰는게 일반적이어서 터번이나 페스(말총으로 만든 꼬리술이 달린 붉은 모자) 같은 모자가 발달했고, 현재도 터키의 노인들은 대개 민머리이다.
중국을 정복한 거란, 여진, 몽골 등 유목민족들은 이 머리를 한족들에게도 강요했는데, 특히 이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에 제일 심했다. 1644년, 순치제[3] 는 치발령을 내려 이 머리를 모든 한족들에게 강요했으며 이는 청 대를 이어가며 중국의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치발령이 떨어질 당시에는 아직 남명과 같은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한족들은 야만족의 풍습을 따를 수 없다면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 게다가 머리를 한 가닥만 남긴다는 자체가 조선의 유생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것 처럼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에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특히 보수적 경향이 강했던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 때문에 본보기로 성 하나를 전부 도륙한다는 도성(屠城)을 시행해 양주 대학살과 가정삼도가 일어났다. 서양에서는 이런 모습이 기묘해 보였는데 보통 '돼지꼬리(변발을 말한다.)를 거부하면 죽음을 당했다'이라는 식으로 언급하곤 했다. 한편 변발령 시행과 아울러 청나라는 한족의 복식을 종래의 한푸에서 자신들의 복식인 치파오로 바꾸는 역복(易服)도 강제했는데, 체발은 즉시 집행되었으나 역복은 옷감과 실의 수급 문제가 있으므로 1년의 유예 기간을 두고 그 이듬해에 본격 시행되었다.
청나라는 산해관 입관 후 이듬해 남명 정권을 붕괴시키고 명나라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자 전국에 변발령을 내리면서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留頭不留髮),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겨 두지 않겠다(留髮不留頭)"'''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엄포가 아닌, 말 그대로 '천명'이었으며, 이에 불응하는 것은 천명에 거스르는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청나라는 변발령을 결연한 의지로 밀어붙여 체발(剃髮)에 불응하는 자가 새벽에 잡혀 오면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저녁에 잡혀 오면 저녁 해가 지기 전에 가차없이 처형했고, 변발령에 저항하여 일어난 봉기들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진압하였다. 한편 변발령을 집행하는 관리가 마을을 방문할 때 체발 도구와 함께 먼저 거쳐 온 마을에서 체발에 저항하다 참수된 자들의 수급을 다발로 엮어서 가지고 왔다고도 하며, 고을 안에 변발을 하지 않은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고을의 관원들도 한 묶음으로 처벌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록 체발을 했더라도 규정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면 역시 처벌되었는데, 위의 사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앞머리를 체발하고 뒷머리를 남겨 놓은 소위 음양두(陰陽頭)는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것으로서, 원래 변발은 동전 크기만한 면적의 머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체발하는 소위 금전서미(金錢鼠尾)로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머리는 동전 크기만 남기고 모두 체발하며, 남겨 놓은 머리를 땋았을 때 그 굵기가 쥐꼬리와 같이 얇아서, 동전을 꿰는 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되어야 했다. 금전서미(金錢鼠尾)의 뜻 자체가 금전(金錢)이 동전을 뜻하고, 서미(鼠尾)는 쥐꼬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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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야 한다. 서미라는 말 그대로 쥐꼬리와 닮았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매일매일 빛나는 민머리로 관리하는 건 현대에서도 보통 고역이 아닌데 하물며 청나라 시대때는 그러한 관리가 더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소에 중요한 일이나 잔소리할 사람이 없으면 그냥 뒤통수에 금전서미만 남긴 상태의 민머리를 '방치'하여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입영장정 스타일에 꽁지머리만 달린 정도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황제나 팔기의 높으신 분들을 중요한 일로 만나야 하면 급히 이발사 불러다 빡빡 깎거나 관모 써서 적당히 가리고, 공무가 해결되면 그냥 신경 끄고 지내는 식.[4] 심지어 황제들도 어진을 잘 보면 관모만으로는 잘 안 가려지는 옆머리는 현대의 군인들처럼 검은머리, 흰머리로 묘사되기도 하며, 옹정제의 젊은 시절처럼 머리 길이가 대머리라기보다는 현대의 군인머리 정도로 꽤 자랐는데 모자로 가리지도 않은 초상화마저 남아있는걸 보면 사람들의 귀차니즘이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5] 그리고 부모의 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머리를 깎지 않고 길러서 상중에 있음을 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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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황제의 딸의 등장인물들. 후기의 음양두를 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제작된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절 남자들의 머리 모양이 당시의 금전서미가 아닌 청 말기에 나타난 음양두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만일 진짜로 '''그들 시대에 음양두를 하고 있었다면 당장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차라리 강철의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버커니어 대위의 머리 스타일이 원래의 변발에 가깝다.[6] 한편 이러한 변발령에서 예외인 자들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승려'들이었다. 이때문에 변발을 피해 승려가 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비교적 종교에는 관대한 유목민 왕조의 특징인지 일부 도사들도 제외되었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시대, 그것도 한창 변발 보급하던 초창기가 아니라 변발이 정착된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예전 한족 옷을 입고 속발을 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 도사다.[7] 그리고 이는 유달리 한족들과 회족들에게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청나라 치하의 몽골족도 자신들의 알타이식 변발을 만주족의 퉁구스식 변발로 바꾸도록 강요당하지 않았으며, 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은 4품 이상의 관리들만 퉁구스식 변발을 하였고 나머지는 몽골족과 마찬가지로 알타이식 변발을 그대로 유지했다. 티베트족 또한 변발령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머리의 경우 가짜 변발이라도 붙여야 했다.''' 사실 아예 머리털이 없는 사람은 극소수고 대다수의 탈모가 있는 사람들은 정수리와 앞머리가 없으니 뒷머리만 길러서 땋으면 되었다. 다만 무모증같이 진짜로 없으면 가발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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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적인 머리모양이지만 후기에 유행한 음양두는 오히려 약점이 되기도 한 듯. '변발을 잡히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래서 군인같은 경우 초~중기의 변발을 했다[8] .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이렇듯 엄청난 반발이 있었는데, 변발을 행한지 몇 백여년 간의 오랜세월이 흐른 까닭에 점차 '역시 남자라면 변발이 멋져야지' 같은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발을 전문으로 가꿔주는 직업이 등장하는 등 한족들, 특히 화북 지역 중국인들의 경우 만주족들의 풍습처럼 중히 여기게 된다.[9] 그래서 신해혁명을 전후로 혁명의 의미로 변발을 자르고 민간에도 '변발 금지령'을 내렸는데 여기에 대해서 다시 저항이 있어 가위를 들고 변발을 잘라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북방민족에 동화된 일부 지식인들과 변발이 전통 한족의 풍습이 아니란 걸 몰랐던 일반인들이 '변발은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것이므로 자를 수 없다'면서 반발했다고 한다(...). 사실 화남 지역은 예로부터 한족 전통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었고 그에 따라 청나라 초기의 변발령이 화남 지역에서 특히 반발이 심했으며 반청복명사상도 화남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 반면 화북 지역 한족들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예로부터 북방 유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10] 그에 따라 다른 지역 한족들에 비해 변발에 적응하는 속도도 상대적으로 빨랐기 때문에, 변발령과는 반대로 화북 지역에서 특히 반발이 심했다. 사실 이런 경향은 현대에도 이어져서 중국인 남성들은 아주 젊은 층을 제외하면 머리를 잘 기르지 않으며, 노년층들은 민머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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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청나라 사람들의 미국 이주가 활발해졌는데, 미국인들은 중국인의 변발을 보고 돼지 꼬리(pig tail)라며 조롱했다. 능지처참과 마찬가지로 이런 머리를 하는 중국인은 야만적이므로 우리가 개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널리 이용되기도 했다. 쑨원 등의 혁명가들은 외국인 친구들에게 변발은 원래 중국의 풍습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오해를 풀고 다녔다고 한다. 청나라 유학생들도 변발을 부끄러워하여 해외에서 거주할때 변발을 자르고 단발을 하고 다녔다.[11] 1917년 장훈복벽으로 12일 간 청나라가 복고되었을 때는 변발의무가 폐지되어 신민의 자유에 맡긴다고 포고하기도 했는데 뭐 12일 동안이니 의미는 없고...극단적인 경우 원래 한족의 상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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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국에서는 아무래도 전통 한족의 문화는 아닌데다가 비주얼적(...)으로 좀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에서도 변발을 비난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얼른 변발 같은 유목민족의 풍습이 아니라 전통 한족의 모습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사실 한족 민족주의 지식인들 입장에서는 절대 치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자민족의 헤어가 아닌 오랑캐의 헤어가 한족의 것으로 외국에 알려져 있으니(...).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변발이 북방 오랑캐들이나 하는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지만, 고려의 원간섭기 시절에 충렬왕이 변발을 틀고 귀국하면서부터 몽골의 문화가 전파되어 고위층들과 관료들 사이에서 변발과 몽골풍 옷을 입는것이 유행했다. 물론 초기에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라서 충렬왕의 모습을 직접 본 백성들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신하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쏟아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백성들에게까지 변발이 유행하였다. 다만 고려는 '''변발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강제되었던 건 아니기에'''(쿠빌라이 칸의 불개토풍 약속[12] ) 청나라와는 다르게 대다수의 일반인과 유학자들은 여전히 상투를 틀었으며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로는 고위층들에게 변발을 풀고 다시 상투를 틀도록 명하고 자기 자신도 상투를 틀며 변발의 유행은 1세기도 안가 사그라들었으며 다시 이전처럼 변발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 취급을 받는다.
북방민족이 중국을 지배한 마지막 정복왕조인 청나라는 조선에게는 예외로 두었으나 명나라의 한족들한테는 이 변발을 강요했다. 그 이유와 관련해서 연암 박지원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처음 홍타이지가 조선의 항복을 받고 난 뒤에 청에 투항한 한족 관리들이 나서서 "조선인들도 한족한테 하는 것처럼 변발시키고 만주족처럼 옷을 입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홍타이지는 "그랬다가는 의관이라는 것에 목숨 거는 조선놈들이 더 날뛸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우리처럼 활동이 편리한 옷을 입고 나면 쓸데없이 군사력 증강이나 실용 기술 도입 같은 다른 것에 관심 돌릴지도 모르잖아. 그냥 지금 쟤들 하는 대로 치렁치렁한 넓은 소매나 상투에 목숨 걸면서 예법이네 전통이네 따지느라 다른 건 말도 못 꺼내는 저런 식으로 살게 놔두는 게 낫지."라고 했다고. 사실상 조선인들에게 변발을 굳이 강요하지 않은 것이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변발과 호복을 하지 않은 것은 조선으로써는 다행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조선을 문약하게 만들어 도리어 청에게 이익을 주었다"고 평했다. ## 허생전에도 허생이 북벌에 대한 계책을 물으러 온 이완에게 "청나라 오랑캐들한테 원수 갚겠다는 놈들이 치렁치렁한 넓은 소매에 큼지막한 갓이나 쓰고 다니면서, 그런 옷으로 어디 전쟁이나 할 수 있을 것 같냐?"라고 까는 대목이 나오기는 한다. 연암의 글에 나오는 내용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 특히 박제가의 글에서도 "조선 의복은 갓도 큼지막하고 옷소매도 넓어 쓸데없이 불편한데 그걸 예법이네 전통이네 이러면서 고수하고 앉았으니 답답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면 조선의 실학자들도 당대 조선식 의복의 불편함을 인식하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들은 청나라의 변발 풍속을 오랑캐의 미개한 짓이라고 여겨 무척이나 혐오했는데,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지원(朴趾源 1737~1805년)이 직접 청나라를 방문하여 보고 들은 일을 적은 기행문인 열하일기를 보면 초반에 많은 조선 사신단이 모이는 자리에서 어느 선비가 "도대체 중국에 볼 만한 것이 뭐가 있느냐? 천자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오랑캐의 변발을 했지 않았느냐? 만약 나한테 10만 대군이 있다면 산해관을 넘어 중국으로 쳐들어가 오랑캐가 남긴 더러운 유산을 모두 없애버릴 것이다."라고 열변을 토하며 북벌론을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겼다는 내용이 언급된다.[13]
중국에서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찍을 때는 어설프게 대머리 가발을 씌우지 않고 '''진짜로 머리를 삭발한 다음''' 그 위에 변발을 씌운다. 황제의 딸을 보면 얼마나 빡빡 밀었는지 머리에서 광이 날 정도.(...) 이 때문에 중화권 남배우들은 청나라 시대 사극을 찍는 걸 꺼릴 정도로 변발이 중국 남자 배우들에게 주는 마음의 상처는 매우 크다.(...) 이례적으로 이연걸처럼 변발이 잘 어울리는 배우들이 있기는 하지만 비주얼의 50% 정도를 날려버리기 때문에 젊은 남자 배우들이라면 청대 사극 찍기 전에 고민 좀 한다고 한다. 그나마 중국 드라마의 특성상 100% 사전제작인지라 촬영을 끝낸 후 드라마 제작보고 기자회견이나 홍보용 토크쇼 같은 자리에서부턴 조금씩 길러서 활동할 수 있다는게 위안이랄까.[14][15] 또한 누르하치부터 시작해 홍타이지와 도르곤의 삼각관계, 도르곤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순치제의 복수와 로맨스 등등 대대로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청대 사극임에도 시청자들의 입덕을 가로막는 가장 큰 심리적 장벽이기도 하다. 원나라 배경 사극의 경우 진짜 몽골식 변발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예 순화된 머리모양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원나라 배경은 아니지만 토목의 변이라는 시대적 배경상 몽골계 유목민족 오이라트부가 등장하는 명나라 배경 드라마 여의담윤현 속 에센 타이시의 헤어스타일은 그 중에서도 백미로, 거의 락스타나 아이돌 수준의 폭풍간지를 자랑한다.
한국 사극에서는 최근 주요 인물들에게서 변발이 필수인 드라마들[16] 의 경우 대놓고 변발을 무시하고 어이없는 머리스타일로 등장하기 시작해서 욕을 먹고 있다. 심지어 엽기적인 그녀는 주연급도 아닌 비중이 그저 그런 청나라 태자조차도 변발을 안 하고 나온다. 머리를 밀지 않더라도 변발 가발이 달린 청나라 전통 모자 소품을 썼으면 해결될 일이었는데 말이다.
장철 감독의 영화 자마(刺馬)[17] 에서는 머리를 밀지 않고 그냥 땋은 정도로 우리나라의 댕기머리와 상당히 비슷한 변발을 등장시키는 혁명(?)적인을 방법을 제시했다. 그 당시까지는 만주인의 청나라 자체가 재평가받기 전이라 부정적인 이미지인데다 비주얼(...)도 좀 그런 탓에 아예 변발이 등장하는 자체가 선호받지 못했다. 등장하더라도 악당의 상징. 청나라가 중국 사극의 단골배경이 된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시간적으로는 청나라를 다룬 작품을 보면 변발에 대해 있던 듯 없던 듯 왠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한 민국시대같은 비주얼이다. 고증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 던듯도 한데 이소룡의 정무문이나 성룡의 취권이 이런 예.[18] 시간적 배경은 청나라 말기인데 비주얼은 민국 시대같다. 어쨌든 이런 암묵적인 징크스를 최초로 깬 작품인 셈. 이 비주얼과 나름의 고증을 동시에 가지는 시도는 제법 성공해서 이후 80년대 청나라 시대극을 이러한 '''순화 변발(...)'''로 찍는 게 유행했다.
청나라 배경의 시대극도 조금씩 흥하기 시작한다. 이소룡이 찍을 뻔 했던 연갱요도 '자마'의 영향을 받았는데, 돌아다니는 스틸컷의 의상이 바로 자마 촬영에서 적룡이 입었던 것. 이 시기의 무협물들이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며 일본 만화에도 영향을 줘 중국무술만화가 유행하거나 인기소재가 되었고, 이미지를 정착시켜서 일본 작품에서 이러한 순화 변발(...)을 차용한 중국풍 캐릭터를 제법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란마 1/2의 주인공 사오토메 란마 등이 있을 듯. 주성치 주연의 청나라 배경 영화들(녹정기, 무장원 소걸아, 구품지마관 등)은 모두 자마에서 영향을 받은 댕기머리식 변발로 등장한다. 이후 90년대에는 서극 감독의 '''황비홍'''의 음양두가 엄청난 임팩트를 선사하여 변발의 상징으로 남았다.
위의 자마와 달리 리메이크작이라 할 수 있는 명장(영화)에서는 꼬박꼬박 변발이 나오며, 그것도 전쟁중에는 밀어버린 앞머리 부분에서 뾰족뾰족 머리카락이 올라오다가 난이 평정되고 생활이 안정되니까 앞머리가 반짝반짝 광이 날 정도로 깔끔하게 밀려있는 등 깨알같은 디테일을 보여준다. 특히 유덕화, 금성무가 연기한 조이호, 강오양은 이연걸이 연기한 관군 출신 방청운과 달리 산적 출신이었던지라 그냥 오늘날 훈련병들과 비슷해보일만큼 대책 없이 방치(...)된 변발이 중화권 최고 미남들의 비주얼(...)로 한껏 버프를 받았다.[19]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후에는 남경 거리에서 한족들이 기껏 길러놓은 머리를 다시 변발로 밀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만주족 가수로 유명한 중국의 가수 송희동宋熙東(만주명 악샨ᠠᡴᡧᠠᠨ)은 평소에도 음양두를 하고 다닌다.
최근까지도 쉽게 볼 수 있던 중국의 거리 이발사는 청나라 때 변발을 깎으려고 파견한 하급관리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여진족—
가장 흔히 알려진 만청 후기에 유행한 변발. 음양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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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변발
1. 개요
중앙아시아 북방의 흉노, 돌궐, 몽골, 여진족, 거란, 만주족 등 북방 기마민족들의 유서깊은 헤어스타일. 만주어로는 손초호(ᠰᠣᠨᠴᠣᡥᠣ soncoho), 몽골어로는 게제르(ᠭᠡᠵᠢᠭᠡ/гэзэг), 카자흐어로는 아이다르(айдар)라고 한다. 몇몇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고대 이집트인들도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했다.
사실 유목민족들은 환경적 특성상 물이 귀해 머리 감기 어렵고 떡지기 쉬운데다, 머리카락이 길면 말타고 달리는데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므로 변발을 자주했다. 우크라이나의 슬라브계 유목민족인 카자크도 추프(чуб)라 불리는 비슷한 변발을 했다.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대장 불리바>의 삽화나 율 브리너가 연기한 영화를 본 사람들은 기억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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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라를 들고 있는 카자크 노인.
2. 상세
앞머리는 깎고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로 몽골인, 만주족, 여진족, 거란, 튀르크 등 북방계 유목민들의 전통 헤어스타일이다. 거란족은 위의 그림과 같이 양 옆 조금만 남기고 다 밀어버렸으며, 몽골족과 튀르크인은 앞머리와 좌우 양쪽의 머리를 조금 남긴 후 귀 뒤 2갈래로 길어 늘어놓았다. 여진족, 만주족은 뒷머리의 일부만 남기고 죄다 깎아버린 후 남은 뒷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놓았다.
굳이 머리를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전쟁시에 편하라고 이렇게 했다는 의견이 대세다. 과거 냉병기 시절 전투는 두꺼운 옷 위에 쇠로된 갑옷을 입고 역시 쇠로 된 투구까지 쓰고 격렬하게 움직이는데, 이때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어 열을 빨리 식히기 위해 머리를 밀었던것. 아무래도 다른 부위에 비해 뇌가 열받으면 훨씬 후유증이 크다는 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잦았던 유목 민족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며, 일본의 촌마게도 비슷한 이유로 나온 머리다.[1] 한편, 변발이 유행했던 지역은 물이 부족하기 때문[2] 에 물을 아끼기 위한 측면도 컸다. 지금도 위구르같은 경우는 모든 남자들이 아예 스킨헤드를 기본 스타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위구르인들도 전통적으로 변발을 해서이다. 터키인의 복식에서 유독 모자가 발달한 이유 역시 변발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터키인 남자들은 머리를 박박 밀고 그 위에 모자를 쓰는게 일반적이어서 터번이나 페스(말총으로 만든 꼬리술이 달린 붉은 모자) 같은 모자가 발달했고, 현재도 터키의 노인들은 대개 민머리이다.
중국을 정복한 거란, 여진, 몽골 등 유목민족들은 이 머리를 한족들에게도 강요했는데, 특히 이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에 제일 심했다. 1644년, 순치제[3] 는 치발령을 내려 이 머리를 모든 한족들에게 강요했으며 이는 청 대를 이어가며 중국의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치발령이 떨어질 당시에는 아직 남명과 같은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한족들은 야만족의 풍습을 따를 수 없다면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 게다가 머리를 한 가닥만 남긴다는 자체가 조선의 유생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것 처럼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에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특히 보수적 경향이 강했던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 때문에 본보기로 성 하나를 전부 도륙한다는 도성(屠城)을 시행해 양주 대학살과 가정삼도가 일어났다. 서양에서는 이런 모습이 기묘해 보였는데 보통 '돼지꼬리(변발을 말한다.)를 거부하면 죽음을 당했다'이라는 식으로 언급하곤 했다. 한편 변발령 시행과 아울러 청나라는 한족의 복식을 종래의 한푸에서 자신들의 복식인 치파오로 바꾸는 역복(易服)도 강제했는데, 체발은 즉시 집행되었으나 역복은 옷감과 실의 수급 문제가 있으므로 1년의 유예 기간을 두고 그 이듬해에 본격 시행되었다.
청나라는 산해관 입관 후 이듬해 남명 정권을 붕괴시키고 명나라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자 전국에 변발령을 내리면서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留頭不留髮),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겨 두지 않겠다(留髮不留頭)"'''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엄포가 아닌, 말 그대로 '천명'이었으며, 이에 불응하는 것은 천명에 거스르는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청나라는 변발령을 결연한 의지로 밀어붙여 체발(剃髮)에 불응하는 자가 새벽에 잡혀 오면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저녁에 잡혀 오면 저녁 해가 지기 전에 가차없이 처형했고, 변발령에 저항하여 일어난 봉기들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진압하였다. 한편 변발령을 집행하는 관리가 마을을 방문할 때 체발 도구와 함께 먼저 거쳐 온 마을에서 체발에 저항하다 참수된 자들의 수급을 다발로 엮어서 가지고 왔다고도 하며, 고을 안에 변발을 하지 않은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고을의 관원들도 한 묶음으로 처벌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록 체발을 했더라도 규정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면 역시 처벌되었는데, 위의 사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앞머리를 체발하고 뒷머리를 남겨 놓은 소위 음양두(陰陽頭)는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것으로서, 원래 변발은 동전 크기만한 면적의 머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체발하는 소위 금전서미(金錢鼠尾)로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머리는 동전 크기만 남기고 모두 체발하며, 남겨 놓은 머리를 땋았을 때 그 굵기가 쥐꼬리와 같이 얇아서, 동전을 꿰는 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되어야 했다. 금전서미(金錢鼠尾)의 뜻 자체가 금전(金錢)이 동전을 뜻하고, 서미(鼠尾)는 쥐꼬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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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야 한다. 서미라는 말 그대로 쥐꼬리와 닮았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매일매일 빛나는 민머리로 관리하는 건 현대에서도 보통 고역이 아닌데 하물며 청나라 시대때는 그러한 관리가 더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소에 중요한 일이나 잔소리할 사람이 없으면 그냥 뒤통수에 금전서미만 남긴 상태의 민머리를 '방치'하여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입영장정 스타일에 꽁지머리만 달린 정도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황제나 팔기의 높으신 분들을 중요한 일로 만나야 하면 급히 이발사 불러다 빡빡 깎거나 관모 써서 적당히 가리고, 공무가 해결되면 그냥 신경 끄고 지내는 식.[4] 심지어 황제들도 어진을 잘 보면 관모만으로는 잘 안 가려지는 옆머리는 현대의 군인들처럼 검은머리, 흰머리로 묘사되기도 하며, 옹정제의 젊은 시절처럼 머리 길이가 대머리라기보다는 현대의 군인머리 정도로 꽤 자랐는데 모자로 가리지도 않은 초상화마저 남아있는걸 보면 사람들의 귀차니즘이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5] 그리고 부모의 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머리를 깎지 않고 길러서 상중에 있음을 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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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황제의 딸의 등장인물들. 후기의 음양두를 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제작된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절 남자들의 머리 모양이 당시의 금전서미가 아닌 청 말기에 나타난 음양두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만일 진짜로 '''그들 시대에 음양두를 하고 있었다면 당장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차라리 강철의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버커니어 대위의 머리 스타일이 원래의 변발에 가깝다.[6] 한편 이러한 변발령에서 예외인 자들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승려'들이었다. 이때문에 변발을 피해 승려가 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비교적 종교에는 관대한 유목민 왕조의 특징인지 일부 도사들도 제외되었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시대, 그것도 한창 변발 보급하던 초창기가 아니라 변발이 정착된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예전 한족 옷을 입고 속발을 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 도사다.[7] 그리고 이는 유달리 한족들과 회족들에게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청나라 치하의 몽골족도 자신들의 알타이식 변발을 만주족의 퉁구스식 변발로 바꾸도록 강요당하지 않았으며, 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은 4품 이상의 관리들만 퉁구스식 변발을 하였고 나머지는 몽골족과 마찬가지로 알타이식 변발을 그대로 유지했다. 티베트족 또한 변발령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머리의 경우 가짜 변발이라도 붙여야 했다.''' 사실 아예 머리털이 없는 사람은 극소수고 대다수의 탈모가 있는 사람들은 정수리와 앞머리가 없으니 뒷머리만 길러서 땋으면 되었다. 다만 무모증같이 진짜로 없으면 가발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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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적인 머리모양이지만 후기에 유행한 음양두는 오히려 약점이 되기도 한 듯. '변발을 잡히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래서 군인같은 경우 초~중기의 변발을 했다[8] .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이렇듯 엄청난 반발이 있었는데, 변발을 행한지 몇 백여년 간의 오랜세월이 흐른 까닭에 점차 '역시 남자라면 변발이 멋져야지' 같은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발을 전문으로 가꿔주는 직업이 등장하는 등 한족들, 특히 화북 지역 중국인들의 경우 만주족들의 풍습처럼 중히 여기게 된다.[9] 그래서 신해혁명을 전후로 혁명의 의미로 변발을 자르고 민간에도 '변발 금지령'을 내렸는데 여기에 대해서 다시 저항이 있어 가위를 들고 변발을 잘라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북방민족에 동화된 일부 지식인들과 변발이 전통 한족의 풍습이 아니란 걸 몰랐던 일반인들이 '변발은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것이므로 자를 수 없다'면서 반발했다고 한다(...). 사실 화남 지역은 예로부터 한족 전통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었고 그에 따라 청나라 초기의 변발령이 화남 지역에서 특히 반발이 심했으며 반청복명사상도 화남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 반면 화북 지역 한족들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예로부터 북방 유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10] 그에 따라 다른 지역 한족들에 비해 변발에 적응하는 속도도 상대적으로 빨랐기 때문에, 변발령과는 반대로 화북 지역에서 특히 반발이 심했다. 사실 이런 경향은 현대에도 이어져서 중국인 남성들은 아주 젊은 층을 제외하면 머리를 잘 기르지 않으며, 노년층들은 민머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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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청나라 사람들의 미국 이주가 활발해졌는데, 미국인들은 중국인의 변발을 보고 돼지 꼬리(pig tail)라며 조롱했다. 능지처참과 마찬가지로 이런 머리를 하는 중국인은 야만적이므로 우리가 개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널리 이용되기도 했다. 쑨원 등의 혁명가들은 외국인 친구들에게 변발은 원래 중국의 풍습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오해를 풀고 다녔다고 한다. 청나라 유학생들도 변발을 부끄러워하여 해외에서 거주할때 변발을 자르고 단발을 하고 다녔다.[11] 1917년 장훈복벽으로 12일 간 청나라가 복고되었을 때는 변발의무가 폐지되어 신민의 자유에 맡긴다고 포고하기도 했는데 뭐 12일 동안이니 의미는 없고...극단적인 경우 원래 한족의 상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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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국에서는 아무래도 전통 한족의 문화는 아닌데다가 비주얼적(...)으로 좀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에서도 변발을 비난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얼른 변발 같은 유목민족의 풍습이 아니라 전통 한족의 모습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사실 한족 민족주의 지식인들 입장에서는 절대 치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자민족의 헤어가 아닌 오랑캐의 헤어가 한족의 것으로 외국에 알려져 있으니(...).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변발이 북방 오랑캐들이나 하는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지만, 고려의 원간섭기 시절에 충렬왕이 변발을 틀고 귀국하면서부터 몽골의 문화가 전파되어 고위층들과 관료들 사이에서 변발과 몽골풍 옷을 입는것이 유행했다. 물론 초기에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라서 충렬왕의 모습을 직접 본 백성들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신하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쏟아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백성들에게까지 변발이 유행하였다. 다만 고려는 '''변발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강제되었던 건 아니기에'''(쿠빌라이 칸의 불개토풍 약속[12] ) 청나라와는 다르게 대다수의 일반인과 유학자들은 여전히 상투를 틀었으며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로는 고위층들에게 변발을 풀고 다시 상투를 틀도록 명하고 자기 자신도 상투를 틀며 변발의 유행은 1세기도 안가 사그라들었으며 다시 이전처럼 변발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 취급을 받는다.
북방민족이 중국을 지배한 마지막 정복왕조인 청나라는 조선에게는 예외로 두었으나 명나라의 한족들한테는 이 변발을 강요했다. 그 이유와 관련해서 연암 박지원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처음 홍타이지가 조선의 항복을 받고 난 뒤에 청에 투항한 한족 관리들이 나서서 "조선인들도 한족한테 하는 것처럼 변발시키고 만주족처럼 옷을 입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홍타이지는 "그랬다가는 의관이라는 것에 목숨 거는 조선놈들이 더 날뛸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우리처럼 활동이 편리한 옷을 입고 나면 쓸데없이 군사력 증강이나 실용 기술 도입 같은 다른 것에 관심 돌릴지도 모르잖아. 그냥 지금 쟤들 하는 대로 치렁치렁한 넓은 소매나 상투에 목숨 걸면서 예법이네 전통이네 따지느라 다른 건 말도 못 꺼내는 저런 식으로 살게 놔두는 게 낫지."라고 했다고. 사실상 조선인들에게 변발을 굳이 강요하지 않은 것이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변발과 호복을 하지 않은 것은 조선으로써는 다행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조선을 문약하게 만들어 도리어 청에게 이익을 주었다"고 평했다. ## 허생전에도 허생이 북벌에 대한 계책을 물으러 온 이완에게 "청나라 오랑캐들한테 원수 갚겠다는 놈들이 치렁치렁한 넓은 소매에 큼지막한 갓이나 쓰고 다니면서, 그런 옷으로 어디 전쟁이나 할 수 있을 것 같냐?"라고 까는 대목이 나오기는 한다. 연암의 글에 나오는 내용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 특히 박제가의 글에서도 "조선 의복은 갓도 큼지막하고 옷소매도 넓어 쓸데없이 불편한데 그걸 예법이네 전통이네 이러면서 고수하고 앉았으니 답답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면 조선의 실학자들도 당대 조선식 의복의 불편함을 인식하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들은 청나라의 변발 풍속을 오랑캐의 미개한 짓이라고 여겨 무척이나 혐오했는데,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지원(朴趾源 1737~1805년)이 직접 청나라를 방문하여 보고 들은 일을 적은 기행문인 열하일기를 보면 초반에 많은 조선 사신단이 모이는 자리에서 어느 선비가 "도대체 중국에 볼 만한 것이 뭐가 있느냐? 천자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오랑캐의 변발을 했지 않았느냐? 만약 나한테 10만 대군이 있다면 산해관을 넘어 중국으로 쳐들어가 오랑캐가 남긴 더러운 유산을 모두 없애버릴 것이다."라고 열변을 토하며 북벌론을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겼다는 내용이 언급된다.[13]
3. 그 외
중국에서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찍을 때는 어설프게 대머리 가발을 씌우지 않고 '''진짜로 머리를 삭발한 다음''' 그 위에 변발을 씌운다. 황제의 딸을 보면 얼마나 빡빡 밀었는지 머리에서 광이 날 정도.(...) 이 때문에 중화권 남배우들은 청나라 시대 사극을 찍는 걸 꺼릴 정도로 변발이 중국 남자 배우들에게 주는 마음의 상처는 매우 크다.(...) 이례적으로 이연걸처럼 변발이 잘 어울리는 배우들이 있기는 하지만 비주얼의 50% 정도를 날려버리기 때문에 젊은 남자 배우들이라면 청대 사극 찍기 전에 고민 좀 한다고 한다. 그나마 중국 드라마의 특성상 100% 사전제작인지라 촬영을 끝낸 후 드라마 제작보고 기자회견이나 홍보용 토크쇼 같은 자리에서부턴 조금씩 길러서 활동할 수 있다는게 위안이랄까.[14][15] 또한 누르하치부터 시작해 홍타이지와 도르곤의 삼각관계, 도르곤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순치제의 복수와 로맨스 등등 대대로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청대 사극임에도 시청자들의 입덕을 가로막는 가장 큰 심리적 장벽이기도 하다. 원나라 배경 사극의 경우 진짜 몽골식 변발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예 순화된 머리모양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원나라 배경은 아니지만 토목의 변이라는 시대적 배경상 몽골계 유목민족 오이라트부가 등장하는 명나라 배경 드라마 여의담윤현 속 에센 타이시의 헤어스타일은 그 중에서도 백미로, 거의 락스타나 아이돌 수준의 폭풍간지를 자랑한다.
한국 사극에서는 최근 주요 인물들에게서 변발이 필수인 드라마들[16] 의 경우 대놓고 변발을 무시하고 어이없는 머리스타일로 등장하기 시작해서 욕을 먹고 있다. 심지어 엽기적인 그녀는 주연급도 아닌 비중이 그저 그런 청나라 태자조차도 변발을 안 하고 나온다. 머리를 밀지 않더라도 변발 가발이 달린 청나라 전통 모자 소품을 썼으면 해결될 일이었는데 말이다.
장철 감독의 영화 자마(刺馬)[17] 에서는 머리를 밀지 않고 그냥 땋은 정도로 우리나라의 댕기머리와 상당히 비슷한 변발을 등장시키는 혁명(?)적인을 방법을 제시했다. 그 당시까지는 만주인의 청나라 자체가 재평가받기 전이라 부정적인 이미지인데다 비주얼(...)도 좀 그런 탓에 아예 변발이 등장하는 자체가 선호받지 못했다. 등장하더라도 악당의 상징. 청나라가 중국 사극의 단골배경이 된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시간적으로는 청나라를 다룬 작품을 보면 변발에 대해 있던 듯 없던 듯 왠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한 민국시대같은 비주얼이다. 고증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 던듯도 한데 이소룡의 정무문이나 성룡의 취권이 이런 예.[18] 시간적 배경은 청나라 말기인데 비주얼은 민국 시대같다. 어쨌든 이런 암묵적인 징크스를 최초로 깬 작품인 셈. 이 비주얼과 나름의 고증을 동시에 가지는 시도는 제법 성공해서 이후 80년대 청나라 시대극을 이러한 '''순화 변발(...)'''로 찍는 게 유행했다.
청나라 배경의 시대극도 조금씩 흥하기 시작한다. 이소룡이 찍을 뻔 했던 연갱요도 '자마'의 영향을 받았는데, 돌아다니는 스틸컷의 의상이 바로 자마 촬영에서 적룡이 입었던 것. 이 시기의 무협물들이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며 일본 만화에도 영향을 줘 중국무술만화가 유행하거나 인기소재가 되었고, 이미지를 정착시켜서 일본 작품에서 이러한 순화 변발(...)을 차용한 중국풍 캐릭터를 제법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란마 1/2의 주인공 사오토메 란마 등이 있을 듯. 주성치 주연의 청나라 배경 영화들(녹정기, 무장원 소걸아, 구품지마관 등)은 모두 자마에서 영향을 받은 댕기머리식 변발로 등장한다. 이후 90년대에는 서극 감독의 '''황비홍'''의 음양두가 엄청난 임팩트를 선사하여 변발의 상징으로 남았다.
위의 자마와 달리 리메이크작이라 할 수 있는 명장(영화)에서는 꼬박꼬박 변발이 나오며, 그것도 전쟁중에는 밀어버린 앞머리 부분에서 뾰족뾰족 머리카락이 올라오다가 난이 평정되고 생활이 안정되니까 앞머리가 반짝반짝 광이 날 정도로 깔끔하게 밀려있는 등 깨알같은 디테일을 보여준다. 특히 유덕화, 금성무가 연기한 조이호, 강오양은 이연걸이 연기한 관군 출신 방청운과 달리 산적 출신이었던지라 그냥 오늘날 훈련병들과 비슷해보일만큼 대책 없이 방치(...)된 변발이 중화권 최고 미남들의 비주얼(...)로 한껏 버프를 받았다.[19]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후에는 남경 거리에서 한족들이 기껏 길러놓은 머리를 다시 변발로 밀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만주족 가수로 유명한 중국의 가수 송희동宋熙東(만주명 악샨ᠠᡴᡧᠠᠨ)은 평소에도 음양두를 하고 다닌다.
최근까지도 쉽게 볼 수 있던 중국의 거리 이발사는 청나라 때 변발을 깎으려고 파견한 하급관리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4. 변발을 한 인물
4.1. 실존인물
- 로드리고 팔라시오 - 음양두가 아닌 금전서미 형태이다. 참고로 로드리고 팔라시오는 이탈리아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인 팔라시오 가의 후예이며, 특유의 변발도 가문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한다.
- 원 간섭기의 고려 국왕
-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
- 마루에몽
- 카이 그린 - 본인의 미적인 선택으로 변발을 즐겨한다. 아놀드 클래식 등에서 하는 포징을 보면 변발이 움직이는 연출에도 상당한 연구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금전서미 형태는 아니고 밧줄처럼 풍성한(?) 변발을 좋아한다.
--여진족—
4.2. 가상인물
- 사극에 등장하는 유목민족 등 오랑캐 남성 대부분
-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남성 등장인물 거의 전부
- 동구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의 카자크 남성들
-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 - 이핀
- 강철의 연금술사 - 버커니어 대위
- 근육맨 - 라면맨
- 노블레스(웹툰) - 9장로
- 록맨 6 - 윈드맨
로봇이므로 정확히는 변발 모양의 머리부품. 중국 출신 로봇이라서 협화어를 쓴다.
사실 모발이 아니라 신경삭이라는 신체 외부 기관으로 머리 뒤에 길게 뻗어 있다. 일종의 텔레파시 기관이며 이를 통해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 - 루퍼스
- 아바타 아앙의 전설 - 소카, 주코
- 알라딘 - 지니
- 워크래프트 시리즈 - 오크[20] , 감시관[21]
- 원피스(만화) - 퀸(원피스)
- 파이널 판타지 4 - 양 팡 라이덴
- 요리왕 비룡 - 수많은 엑스트라들
특수기로 변발권이라는 기술도 있다.
[1] 본디 일본도 가마쿠라 막부이전인 아스카 시대나 헤이안 시대때는 머리스타일이 머리를 길게길어 양쪽으로 묶거나 중국처럼 상투를 틀었다. 그러나 무사들의 시대가 시작되자 전국에서 내란이 잦아졌고 촌마게를 하게 된것이다.[2] 대체로 스텝, 사막, 혹은 강수량이 적은 냉온대기후 지역들. 굳이 스텝기후가 아니더라도 화북이나 만주 지방은 겨울이 매우 건조하다.[3] 정확히는 당시 섭정이던 예친왕 도르곤의 명이었다.[4] 청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중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한인 민초들이 이런 모습으로 많이 묘사된다. 속발까지는 아니지만 머리가 삐죽삐죽 자라서 단정하지 못한, 민초라는 말 그대로 '잡초 같이 자란' 머리로, 현실적으로는 모든 배우들에게 머리를 밀라 강요하지는 못해서였겠지만 변발이 정석대로 하려면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머리라는 점에서는 100% 틀린 고증은 아닌 셈. [5]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초상화에다 이렇게 머리를 자주 드러낸 결과 탈모의 흔적까지 전해지고 말았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옹정제 문서 참조.[6] 물론 정수리에 모히칸 머리처럼 남긴 부분은 밀어야 한다.[7] 영화 무인 곽원갑에서도 중간에 순식간에 지나가긴 하지만 도사로 추정되는, 변발이 아닌 속발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중화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어떤 드라마에도 다른 남자들은 다 단발을 하고 있는데 도사인 듯 유독 혼자서 속발을 한 사람이 나와 뭐라뭐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런 게 괜히 나온 것일 리도 없고...비록 속발이 청에 의해 금지되고 일부 도사에게만 허용되긴 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의외로 변발이 없어진 것보다 더 뒤일지도 모르겠다.[8] 머리채를 잡히면 상대가 원하는대로 본인과의 거리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며, 특히 '''등 뒤'''에서 머리채를 잡히면 냉병기 시대에는 치명적이다.[9] 그 사례로 펄 벅의 작품 '대지(the Good Earth)'의 주인공 왕룽은 화북 지방 사람인데, 한족임에도 변발을 목숨같이 아낀다. 이발사가 장난삼아 '요즘 변발 자르는 게 유행이라더라, 이 변발만 자르면 흉한 농부 꼴은 면할 것이다'라고 하자, 기겁할 정도. 그런데 정작 나중에 기생 연화(롄화)에게 빠져 그녀가 촌스럽다고 하자 순식간에 잘라버리고, 아내 오란은 기겁한다.[10] 당장 화북 지역 한족들은 유전적으로 몽골인들과 비슷하며 동북 3성 한족들은 유전적으로 만주족과 비슷하다.[11] 나중에 귀국할때는 변발을 함부로 자른 죄가 처벌당할수 있어 일부러 가발을 쓰고 귀국하기도 했다.[12] 不改土風. "고려의 고유한 풍속을 바꾸지 않는다"는, 고려와 몽골의 강화 교섭 당시 고려가 내세운 조건 가운데 하나. 충렬왕은 모든 신하들에게 몽골식으로 변발호복할 것을 강제하고 따르지 않는 신하들은 회초리로 때리기까지 했지만, 정작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서 몽골식으로 변발하고 호복을 입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내가 고려 풍속은 안 바꿔도 된다고 했잖아? 쟤 왜 저렇게 오버해?"라고 의아해했을 정도다.[13] 다만 연암의 소설 허생전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연암 개인은 그 선비를 다소 냉소적으로 생각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연암 살아생전 강건성세의 청나라는 조선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고.[14] 한국의 경우 스님 역할을 제외하면 사극에서 삭발할 일이 없다.(일본도 촌마게를 재연하려면 삭발해야 하는건 마찬가지.) 게다가 스님 역이라도 그냥 분장으로 머리를 가리는 경우가 더 많다. 예외적으로 장기간 진짜 머리를 밀었던 사례는 태조 왕건에서 궁예 역를 맡은 김영철. 이쪽은 궁예가 죽기 직전까지 삭발을 한 채 나오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서 그냥 머리를 민 것이다.[15]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헝가리는 훈 제국이나 헝가리 대공국 초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훈족이나 마자르족의 변발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의 사극에서는 상술한 카자크의 변발을 볼 수 있다.[16] 기황후와 왕은 사랑한다가 있다. 다만 해당 작품들도 일부 몽골 남성 캐릭터들은 제대로 된 몽골식 변발은 아니지만 일단 부분적으로 머리를 밀어낸, 대충 북방 유목민족을 연상시키는 머리모양으로 나오긴 했다.[17] 진가신 감독의 영화 명장의 원작격인 작품.[18] 이 두 작품의 주인공은 각각 곽원갑의 제자와 아무도 신경쓰지도 않고 아무래도 상관없고 알지도 않지만 황비홍이다(...).[19] 픽션이 아니라 실존인물인 옹정제 역시 즉위 이전으로 보이는 젊은 시절 이런 훈련병 머리로 묘사된 초상화가 있다. 이런 이발소 가기 직전(...)의 변발은 오늘날 사람들이 보기엔 오히려 상투 올린 머리보다도 친숙해보인다. [20] 물론 모든 오크들이 다 변발인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다 변발이다.[21] 마이에브 섀도송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반 감시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