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Carl Gustav Jung'''
1875년 7월 26일 ~ 1961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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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프로이트와의 관계
3. 말년
4. 의의, 한계와 영향
6. 기타


1. 개요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투르가우 주 케스빌 태생.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큰 줄기를 만든 학자이다. 프로이트의 수제자라 불릴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엔 아들러의 사상을 받아들여[1]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을 창시해냈다. 콤플렉스 심리학 혹은 분석심리학의 선구자.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의 영혼(정신)이란 각각 대극, 대립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요소들은 대립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는 이야기이다. 건전한 정신이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의 영혼이라는 말. 또한 집단무의식, 콤플렉스, 그림자, 페르소나, 아니마아니무스 등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신경증 환자가 그 나름의 법칙을 갖고 있다는 통찰을 입증하기 위해, 융 자신이 치료경험이나 그 당시 심리학에서 무관한 신화, 종교, 연금술, 신비주의 등 여러 분야를 끌고 와서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에 문제의 여지를 보인다는 주장이 있다. [2] 하지만 이런 분야들이 심리학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는 아니다. 왜냐하면 별자리와 신화, 종교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물의 결합이고 그 상상 속에서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인간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과학적인 접근으로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와 인간, 문화, 현실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헌학적,심리학적,현상학적인 가치가 상당하다.[3]신비주의에 탐닉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생애 전반을 지배했던 원형적인 꿈과 환상과 같은 무의식적 범람이 신비주의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으므로 어쩌면 신비주의에 눈이 가는건 당연하다. [4] 사생활이 다소 문란하고[5], 약물에도 손을 댔던 것을 생각하면 정신적으로 불안정했었을 수도 있다.
융은 동양사상에 대응하는 서구사상의 원류[6]연금술을 재발견하였다. 연금술을 물질의 변화가 아닌 영혼의 연성으로 해석하였으며, 상징들이 가진 의미를 추적하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상징들에 대한 해석은 꿈이나 환자에게서 채집할 수 있는 인간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상징들과 연결되어 사례 해석의 뒷받침이 되었다.

2. 프로이트와의 관계


처음엔 프로이트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났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친밀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 관련 논문[7]을 읽고 융은 크게 감명을 받아 공식적으로 프로이트를 지지하였다. [8] 그러자 학계에서 명망있는 유명인과 학자들은 융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일갈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모두 거절한 뒤 프로이트를 만나러 갔다. 만나자마자 13시간이나 대화를 나누었고 편지도 자주 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사실 들을 안 프로이트는 융에게 고마운 감정을 가졌을 것이고 그에게 융은 아주 각별한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이 설립되고 제2인자로 융을 아들처럼 아끼고 늘 옆에 데리고 다녔다.[9] 미국 여행도 같이 갔었다. 하지만 미국 여행 이후에 무슨 이유인지 사이가 나빠져서[10][11], 서로 연락도 안 하더니 융이 프로이트를 무시하기 시작했다.[12] 그러다 결국 견해 차이로 결별하게 되었다.[13] 이후 융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부정한다.[14] [15]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이론을 자신의 학파의 핵심 이론으로 지켜야 한다 했으나, 융은 아니라고 보았고 결국 견해 차이로 결별. [16]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산하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많이 갈라섰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융을 살짝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화'''
1.어느날 융은 프로이트와 초심리학에 관한 논쟁을 펼쳤는데 그때마침 공교롭게 방 자체가 울릴 정도에 큰 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러자 융은 "지금 소리가 난 후 얼마있다 이거와 같은 크기의 소리가 방 안을 덮칠 것이다"라고 말했다.[17]그리고 몇초 후 엄청난 폭음이 방 안에 또 울렸다고 한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아연실색하며 융을 바라보았고 융에게 유령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18] 그날 이후 그 사건은 두번 다시 프로이트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19]
2.프로이트는 칼융과 논쟁을 하면 자주 실신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일로 1912년 뮌헨에서 정신분석학회가 열렸는데, 어떤 학자가 아메노피스 4세(이그나톤)에 관한 화제로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그 요점은 아메노피스가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아버지를 기리는 기념비를 모두 파괴했다라는 것이다. 이에 융은 개인적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를 우러러보는 마음으로 기렸다고 했다. 프로이트 눈으로 보기엔 '아버지의 기념석주 파괴 행위'를 옹호하려는 듯한 융이 눈엣가시였다.그리고 논쟁이 끝나자마자 바로 실신했다고 한다. 융은 그를 부축하여 옆 방 소파에 뉘었다. 반쯤 회복한 프로이트가 융을 보며 융이 마치 아버지라도 되는 양 나약한 모습으로 융을 올려다 보았다라는 일화가 있다.(...) [20]
3. 브레멘에서 출발한 미국행 여행에서 서로 매일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꿈을 분석했다고 한다. 그러다 프로이트가 어떤 꿈을 꾸었다. 융은 그가 사생활에 관해 좀더 상세한 정보를 나에게 제공해준다면 꿈의 해석이 더욱 풍성해지겠다고 말했다. 융의 말에 프로이트는 갑자기 기묘한 시선, 의심이 가득 담긴 그런 시선으로 융을 째려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 순간 융은 반박을 해보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감안해 물러났다고 한다. 이 일화는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를 아주 사실적으로 드러낸 유명한 일화다. 융의 자서전에선 이 사건 이후 프로이트와 결별이 얼마 남았지 않다고 직감했다고 한다. [21] 하지만 프로이트의 깊은 통찰과 폭 넓은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던 융은 그런 프로이트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한편으론 융의 성격상 [22] 권위를 잃었지만 권력을 부리려는 연장자를 따르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3. 말년


중년 이후 자신을 위한 집을 스스로 짓기 시작했다. 조금씩 지어가며 마음가는 대로 덧붙이고 하는 공사여서 깔끔하지는 않으나 완결은 지은 듯 하다. 내부는 스스로 그린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다하며 자신의 저서 레드북[23]과 마찬가지로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이 집에 관한 일화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인 1Q84에서 언급되어 있는데 집의 입구에 '차가워도 차갑지 않아도 신은 여기에 있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내용이다. 이 글귀의 영문 번역은 'Cold or Not, God is Present'인데 카를 융의 집에 새겨져 있는 실제 문구는 'Called or Uncalled, God is present'(실제 문구는 라틴어 Vocatus atqua non vocatus deus aderit.) (“불리었든 불리지 않았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로 번역되며 영어 번역의 발음이 비슷할 뿐 뜻은 상이하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자료가 있다면 1Q84 문서에 첨부하길 바람.
말년에는 언동이 지리멸렬해진 탓에 정신분열증을 앓은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이 있는데 검증된 바는 없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만한 사항은 아니다.[24] 83세 당시 특집으로 기획된 BBC 인터뷰에 정정한 모습이 영상으로 남아있다. https://youtu.be/bs3HK3pxVAY인터뷰 내용은 결코 정신분열증인 사람이 말할 수 없는 통찰력 있는 내용이다. 말년에 그는 깊은 통찰력과 분석을 통한 사회비평으로 명성을 날렸다.[25]

4. 의의, 한계와 영향


그의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은 현대 철학이나 (문화)인류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의 무의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쓰인 것은 아니며, 같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신화, 설화, 상징 등의 내포된 의미를 분석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는 질베르 뒤랑의 저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조지프 캠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등에 영향을 미쳤다.
현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 융의 영향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융의 학설 자체는 재검증을 거쳐서 현재는 원형 그대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현대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심리학과는 차이가 많다는 것. 프로이트의 이론도 현대엔 문제점이 많이 발견되어 대부분이 사장되었는데, 그래도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서 서양철학사에도 중요하게 이름을 남긴 프로이트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어서 융보다는 훨씬 더 많이 나온다. 개론서에선 융에 관한 내용이 한 줄 정도 나오는 것도 길게 나오는 편이라는 말도 있다.[26]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브컬처계에서는 융이 가장 유명하고 자주 인용된다. 서양에서는 오죽하면 서브컬처 오덕끼리 논쟁 직전에 "우리 융 얘기는 하지 맙시다. 당신들이나 나나 할 얘기가 뻔하니까."라고 규칙을 정할 정도.[27] 사실 융의 저서들은 읽어보면 오컬트 계열 서브컬처에서 써먹을 만한 소재들이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저명한 심리학자라는 인지도까지 있으므로 창작물의 리얼함과 설득력을 증대시키는 효과까지 있다.
하지만 융의 저작들은 프로이트의 저작들에 비해 진입 장벽이 높아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다. 프로이트의 저작이 정신의학분야에 문외한인 사람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끔 쓰여진 데다 문체도 비교적 깔끔한 편이지만, 융의 저작들은 정신의학은 물론 종교, 신화 등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독일 철학서들만큼이나 문체가 난삽하기로 악명이 높다. 현재 한국 융 연구원에서 융의 저작들이 일부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칼 융의 이론과 분석이 허무맹랑한 서브 오컬트 계에 속한다고 하지만 이는 저서를 잘못 해독(?)했거나 오해가 오해를 만든 가짜뉴스가 대부분이다. 실상 그의 인격 통찰과 이론을 본다면 결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실을 담고 있다. 즉 서브 오컬트 및 특정 단체[28]가 칼 융의 극악무도한 글 솜씨에 의해 이해를 못하고 혼용하거나 맥락과 상관없이 빌려다 쓴 것이다. 소위 말하는 낭만적 낙관주의, 리비도와 육체의 오묘한 이치들 은 칼 융이 말하고자 한 핵심도 이론도 아니다. 그는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곳에서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있다라는 이른바 잔인한 현실주의적 가치담론을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조던 피터슨 왈).[29]
그러나 전반기에 콤플렉스에 대한 방대하고 과학적인 연구와는 반대로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 창조한 원형등의 이론등은 너무 정신적인 측면에서만 다루며 그것을 심리치료에 가져오거나 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의 콤플렉스에 대한 연구는 정말 천재적이다. 원형은 허무맹랑한 것이 맞다. 통찰은 대단하지만 불필요한 설명을 만들어낸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순수히 정신적인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사회심리학적, 정신적, 환경적 등 다양한 차원에서 존재하고 이 차원들은 서로에게 정보를 준다. 원형을 본능처럼 생리학적이나 생물학적 기능과 너무 동떨어진 인간 집단지성 속에 있는 고대의 이미지를 저장하고 있는 영혼 같은 측면이 있다고 하는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정신분열증이 있는 환자나 생리학적 원인으로 인해 정신이 무너진 환자에게 '자기'라는 원형은 왜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던 것인가? 또한 남성 환자를 치료할 때 그의 무의식 속에는 아니마가 있기에 어머니의 이미지에 문제가 있구나 라고 정의를 하고 그 정의를 가지고 치료하면 엄청난 오류를 범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조던 피터슨의 강의를 듣고 융을 배울때 바로 원형에 대한 것을 들어가거나 '아이온',등의 후반기에 창조한 내용에 먼저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융인 듯 착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융의 원형적 이론은 융 자신의 문제점들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기처방이었다. 융을 이해하려면 융의 신화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몰라서 생기는 문제점들이 바로 레드북을 마치 신성한 정신의 비밀을 담은 위대한 책이라고 여기던지 등이다. 레드북은 융 자신이 자신의 신화를 이해하기 위해 창조한 자기입문서였다. 그래서 그는 레드북이 대중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금지했지만.... 독자는 그래서 레드북부터 들어가선 안되고, 아이온도 안되며, 집단무의식의 원형도 안된다. 가장 좋은 융 입문서는 'Memories, Dreams, Reflections." 융의 신화를 알게 된다. 융의 창조물들의 배경신화를 알게된다.'자기'라는 원형을 창조한 이유는 융 자기자신의 정신분열증을 방지하기 위해 내면의 신의 이미지라는 완전체를 창조한것이었다. '아니마'라는 요소를 창조한 이유는 엠마 융, 자신의 부인에 만족을 못하는 자기 자신에 합리화를 하기 위해 만든 내면의 이상적 여성 이미지라는 구조였다. 물론 아니마는 남성에 여성 이미지가 아니긴 하지만, 융의 아니마는 그러하였다. 융이 원형을 정신적인 측면에서만 정의하면 상당한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조던 피터슨의 강의에도 이러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융은 천재였지만 문제점도 많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융의 신화를 알지 못하고 단순히 조던 피터슨의 강의를 듣고 융의 원형, 그림자 속에 필요한 것, 이러한 내용에 빠지는 것은 융 그조차도 혐오했을 만한 것이 분명하다. 융의 신화를 자신의 신화하고 착각하지 말자. 융에게는 '자기'라는 원형이 자기 신화를 완전하게 하는데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다른 인간에게는 필요없을수 있다. 그리고 이는 조던 피터슨의 관점을 통해서 보는 일이다. 그러하니 조던 피터슨의 강의를 듣고서 융을 배웠다고 착각하지 말고 융의 초기작과 그에 따른 해설을 보며 공부하자

5. 융의 이론들


자세한건 분석심리학 항목으로.
그의 이론 중 가장 중요한 점을 미리 소개하겠다.
  • 에난티오드로미(Enatiodromie)
심적 대극의 반전 현상으로, 주로 인생 후반기에 일어나는 급격한 심리적 변화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외향적 감정형이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그 대극인 내향적 사고형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극단적인 심리적 변화를 잘 감당하지 못하면 정신질환에 걸리기 쉽다.
  • 무의식(das Unvewubte, the unconsciousness)
자아에 속하지 않으며 자아와 아직 연관되지 않고 있는 모든 심리적 경향과 내용을 일컫는 말이다.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나뉜다. 개인무의식은 개인의 출생 이후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개인에 따라 성격이 다르다. 집단무의식은 선천적인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류 보편적 성격을 띠고 있다.
  • 상징(Symbol)
원형은 상징을 통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상징을 무의식의 방대한 정보를 압축해놓은 압축파일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무의식의 원형적 상징은 절대 인물의 특성이 아니다. 주로 원형하면 '영웅' '나이든 현자' 등으로 이해하는데 원형은 신화적 과정이다. 영웅을 영웅의 과정에서 빼면 그 어떤것도 남지 않는다. 드라마 각본을 연기하는 연기자라고 봐도 좋다. 특히 자기원형은 수학적 도형적 상징을 통하지 않고는 스스로 모습을 나타낼 방도가 없다.

1)꿈의 상징
자기 상징들을 꿈에서 만나게 된다. 꿈의 해석은 상징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징 해석은 자기의 메세지를 듣기 위한 필수과정인 셈이다. 꿈은 성욕의 왜곡된 소원성취라는 면도 있지만 예시적인 면이 더 강하다. [30]
2)종교상징
종교도 상징을 통해 근본진리를 나타낸다. 태곳적 때부터 인간의 무의식적 범람과 대극적 활동의 표현을 종교를 통해서 드러냈다고 한다. 종교가 일종의 그릇 역할인 셈이다. 그리고 종교의 신성적 상징들의 변화와 역사를 보면 당시의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유추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진행 방향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31] 그러한 상징을 잘 활용할 때 종교의 긍정적인 기능이 발휘되는 법이다. 종교상징을 제거한 개신교는 그런 점에서 가톨릭에 비해 빈약한 면이 있다.
3)만다라(Mandala)상징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원륜(圓輪)'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힌두교와 탄트라불교에서 종교 의레를 거행하거나 명상할 떄 사용하는 상징적인 그림을 가리킨다. 만다라는 기본적으로 통합된 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합상징이라고도 한다. 대개 원이나 사각의 형태를 띤다. 만다라 상징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나며, 미술치료를 받는 정신병 환자들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 정신병 환자들의 경우, 만다라는 해체된 정신을 통합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를 담고 있다. 중세 연금술에서도 신, 즉 통합상징을 원이나 구로 나타냈다.


6. 기타


  • 한국 분석심리학의 선구자인 이부영 교수는 아쉽게도 근소한 차이로 융 본인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당시 장학생 신분으로 유학중이던 이부영 교수는 우연에 가까운 이유로 분석심리학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도착 당시 융 본인은 몇 개월 전에 사망. 따라서 지도교수는 마리아 폰 프란츠가 되었다.
  • 전혀 연관이 없겠지만... 타이토의 슈팅게임 다라이어스 외전의 곡들(VISSIONERZ, SELF등)이 융의 심리학에 영향을 받았다.
  • Jung을 영어식으로 "정"으로 잘못 읽는 예가 있다.
  • 과거 일밤 코너였던 '전원정답! 참! 잘했어요!'에서 이계인이 이 사람의 명언을 언급하자 방송 나간 이후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 리처드 도킨스가 만든 이론 중 하나가 그 유명한 가설인데, 이 밈 가설은 융의 집단적 무의식,원형과 상당히 유사하다.
  • 융은 언어에 대단히 능통해서 최대 5-6개국어[32] 가능했다. 심지어 아프리카어 [33]로 의견 전달 정도까지 할 수 있었으니 말 다했다. (....)
  • 정치적 성향은 중도진보이며 개방적인 자유주의자로서 외국인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그런 성향인지 타민족과 대화를 하면 상대방 나라의 언어를 이용한 언어유희 및 농담을 하며 서슴없이 지냈다.(...?)
  • 융이 스스로 평가하길 자신의 인생은 늘 고독했다고 말한다. 늘 주변 사람들이 그의 곁에 많았지만 말이다. [34]
  • 융의 할아버지는 바젤 대학교 의대 교수였다.[35] 그리고 융의 외가쪽 선친이 괴테라는 전설이 있다. 그의 자서전에선 융은 그런 전설을 듣고 의심쩍이면서 동시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 융의 취미는 호수에서 보트 타기이다.
  • 그의 저작 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대표적인 예로 니체에 관한 논문을 써서 지금 시중에 책으로 나와있다. 칼 융, 차라투스트라를 분석하다는 450쪽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실제 논문을 지금 구성되어있는 책 분량으로 계산하면 약 1천장을 훌쩍 넘는다고 한다. (....)
  • 예일 대학교의 테리강연(1930, 종교와 심리학에 관한 강연)에서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천명한 융은 그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종교 일반과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발표하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발언 중 하나가 삼위일체에서 을 추가해서 사위일체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신학계에서 엄청난 논란을 일었던 발언이었고 비판이 거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반박을 못했다. 왜냐하면 그 강의 당시 융은 종교적 상징에대한 문헌적[36] ,역사적 사료[37]들을 대거 준비했고 이 방대한 자료들이 일관된 방식으로 융의 주장을 뒷받침해서그 누구도 반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 융은 저서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1912)[38]을 쓰기 마음 먹었을 때는 이미 프로이트와 이별하기를 마음 먹었었다. 마지막 장의 이름이 희생인데, 그 희생은 자신을 뜻하기도 한다고 전해진다.[39]
  •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르만 헤세는 1916년에 처음 융을 만났고, 그의 대표적인 소설 황야의 늑대(1927)는 분석심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평가된다.
  •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볼프강 파울리는 융보다 25세 연하였지만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특히 융의 '동시성 연구'에 관심을 갖고 공동연구를 했다.
  • 나치 정권에 보호를 받았다라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 연합군에게 히틀러의 정신감정을 해줬고 [40] 뿐만 아니라 연합군 스파이와 협조를 하였다.

[1] 융이 직접 말하길 프로이트 성이론과 아들러의 이론 모두 긍정한다.[2] 현대에 이르러 신화학과 고고학의 발달로 융의 신화,종교에 관한 통찰, 이론은 성별선택론,진화심리학과 조화가 가능하다. 실제로 그의 저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논리의 비약이 부분적으로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나 대부분의 내용은 사회과학으로서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조던 피터슨의 신화, 종교 강의를 보면 간접적으로 융의 사상을 알 수 있다. [3] 예를 들어 예수는 물고기 자리에서 태어난 메시아인데, 예수의 고대 로마어로 ‘이야수’로 표기돼왔다. 공교롭게도 고대 그리스의 물고신의 이름과 유사하며 그 밖에 고대 국가의 물고기 신의 이름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저서 아이온에서 방대한 문헌자료와 역사,어원학을 자료로 무겁게 다루어진다 [4] 융의 친아버지는 목사였고 융의 외가는 영매자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그에게 선천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었던건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관관계가 있어보인다. 조던 피터슨이 융은 현대버전의 무속인으로서 계몽시대 이후 최초로 종교와 이성의 조화를 꾀하려 했던 학자라고 평했다.[5] 여대생이나 환자와 성관계를 맺는다거나, 연애를 한 적이 있다.[6] 일종의 신토불이. 당시 불교 사상이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융도 티베트 사자의 서 같은 번역서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7] 1900년- <꿈의 해석> 1901년-'일상 생활의 병태 심리' 1905년-'성 이론에 관한 세 논문'과 '위트와 무의식과의 관계[8] 당시 프로이트의 평판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20세기 큰 획을 그은 위인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조촐한 유대 집안 출신이였으며 학계에서 따돌림 당하는 외톨이 신세였다. "정신병은 여자만의 병이 아닌 인간의 병으로서 남자도 걸릴 수 있다"라고 발언 후 학계에서 파문 당하고 생활고에 빠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주류 의사와 동료학자들은 그를 업신여겼다.[9] 융의 친아버지는 융이 바젤 대학교에 입학 한 후 얼마있다 별세했다. 그래서 융에게 있어 프로이트는 아버지였고 실제로 부자관계처럼 보일 정도로 친했다고.[10] 여행 중 서로가 꿨던 꿈들을 해석을 했는데 프로이트는 자신의 권위를 무너트리고 1인자를 빼앗아 갈거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며 암시적으로 융을 경계했다고 전해진다. 융의 자서전을 참고했을때 그 당시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 권력화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이론이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본인을 동일시 하였던 것으로 추측했다. 평소에 융에게 존경받는 아버지로서 대접을 받았던 프로이트는 그리스 신화처럼 아들에게 (권력)살해를 당할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 [11] 융이 프로이트의 꿈을 해석 시도를 하던 중, 사생활에대해 얘기해달라고 말하자, 프로이트는"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 없어!"라고 성질을 부렸다고 전해진다. 그 순간 융은 프로이트가 그 말을 하며 스스로 권위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칼 융 기억 꿈 사상 자서전 295p[12] 미국여행을 갈 때 두 사람은 '우리가 미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할 거다!'며 갔는데 스승이었던 프로이트는 일반석에 '''제자'''였던 융은 귀족층이 타는 '''1등석'''에 타고 갔다고 한다. [13] 제드 레벤펠드의 소설 살인의 해석에서 미국 여행을 온 지그문트와 카를 융이 왜 사이가 틀어졌는지에 대한 팩션을 다뤘다.[14] 융의 자서전을 참고하면 프로이트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더 넓은 의미로서의 이론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그는 분석심리학을 창설. 비판한 이유는 대략적으로 두가지인데,첫번째는 프로이트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을 교조화시키려 했고 융에게 암시적으로 부탁한다는 늬앙스를 풍겼다는 것. 이미 정신분석학의 최고 권위자이자 연장자였던 프로이트가 융에게 후계자를 내외적으로 표했던 일화를 보면 당연한 사건이다. 두번째는 프로이트의 과도한 성집착 이론으로는 인간의 정신현상을 모두 설명한다는 것이 융에게 있어서 불합리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는 것[15] 자서전 중 "내가 프로이트의 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일반에 널리 잘못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와 반대로 성은 내 심리학에서 정신 전체의 본질적인(유일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표현으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그러나 나의 주요한 관심은 성의 개인적인 의미와 생물학적인 기능을 넘어서서 그것의 정신적인 측면과 신성체험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설명하는데 있다." [16] 프로이트의 결별은 융만의 진리추구 열망이 만들어낸 일이다. 학자로서 권위와 명성보다는 개인적인 진리추구를 우선시 했다. 물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워졌지만 말이다.[17] 융이 말하길 "촉매에 의한 외면화 현상의 한 가지 예가 될것입니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헛된소리 하지마시오!" 말했다. 융이 다시 답하길 "잠시후 또 폭음이 나리라는 것을 지금 예고합니다." 하며 프로이트의 두 눈을 계속 응시했다고 전해진다. 자서전(영문판) -289p [18] ‘'유령'이라는 단어가 유치하기 때문에 우스운 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융에게는 진지한 체험으로서 '동시성 현상'으로 논문까지 만들었다.[19] 정신분석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포섭시키기 위해 프로이트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그의 과학적 이론화는 정신분석학에 생존이 달린 문제였기에 이런 사건들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얼마나 황당하고 소름이 돋는 얘기일 지 짐작할 수 있다. [20] 기억 꿈 사상 -292p[21] 융은 권위 찬탈의 두려움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임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또한 그 발언으로부터 프로이트 자신 스스로가 권위를 상실하게 했다고 서술했다. 기억 꿈 사상-295p[22] 극단적인 과학적 교조화에 대한 혐오, 지적 반항기질[23] RED BOOK. 카를 융이 말년에 지은 저서로, 원래 제목은 새로운 책이라는 뜻의 Liver Novus였으나 붉은 표지를 염두해둔 카를 융이 별칭으로 레드 북이라고 부르던 것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해당 책에 포함된 삽화도 모두 카를 융 본인이 그렀다. 다만 미완성으로 남았으며 원고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 2001년에 심리학자들에 한해서 공개되었으며 2009년에 들어서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공개되었다.[24] 말년에 융은 신화적 상상과 환상을 직접 느끼고 글로 많이 남겼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보기엔 문제 가 있어보이지만 이는 그의 정신적 결함이라기 보다는 중년 때부터 겪었던 이미지 환상과 꿈이 나이를 먹으면서 더 풍부해지고 강해졌다고 보는게 맞을 듯하다.[25] 융의 말년엔 이미 프로이트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위인으로 세손가락 안에 뽑히고 철학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으니 그와 중요한 관계 였던 융도 더 유명해졌다. 인텔리층에서의 윗어른으로 모시는 분위기가 상당했다고 전해진다[26] 한 줄은 과소평가한거고, 개론서의 성격 파트에선 한 단락으로 짚어보고 넘어간다. 왜냐면 MBTI를 설명하기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프로이트의 성적 발달 이론을 소개하면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같이 소개하는데, '''엘렉트라 컴플렉스는 융이 만든''' 개념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남성 중심으로 설명한다.[27] 이런 작태를 미국 애니메이션 《패밀리 가이》에서도 한번 깠다. 그리고 너드일반인을 분류하는 방법으로 프로이트와 융 중에 누가 더 대단한 학자임? 이라고 물었을 때 융이라고 대답하면 너드라고 한다.[28] 신비주의 단체, 히피, 서브 종교 분파[29] 대극의 상대성을 통한 통합, 개성화 추구/ 신화적 상징과 그림자를 통한 인격 발달 등이 있다[30] 비유를 하자면 프로이트는 꿈이 일종의 가면의 역할을 하여 진실된 내용을 왜곡한다는 것, 그에 반해 융의 꿈은 때로는 가면 역할과 예시(豫示)역할, 보충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31] 이는 <<아이온>>,<<기억 꿈 사상>>에서 언급되는데 가령 하나님이라는 선에 집착한 인간은 '악'을 만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해 발생하는 모순점들을 타락천사 혹은 적그리스도라는 형태로 후천적으로 만들어내 대극의 평행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이런 균형 메커니즘은 종교계에서 파문당한 스피노자가 실제로 사회비평을 할 때도 사용된다. [32] 영어, 스위스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뿐만 아니라 몇몇 부족의 간단한 아프리카어, 고대어로 문헌독해가 가능했다[33] 정확히 무슨 아프리카어였는지는 모르겠다.[34] 이런 발언을 통해 그의 고민을 유추할 수 있다. 내적인 환상과 종교상징에 대한 호기심과 외경심을 느끼며 이를 탐험하고자 했지만 현실적 조건이 늘 발목을 잡아 노심초사했다는 것.[35] 근데 정작 융의 가정은 가난해서 할아버지 빽과 아버지의 소문난 덕성 덕분에 대학등록금을 받았다고 한다[36] 정통신학, 영지주의, 연금술, 기타 서브종교[37] 어원,민간신앙,신화,예술품,문학,에세이[38] 프로이트가 반대했다고 한다[39] -저서 <꿈 기억 사상>[40] 궁지에 몰리면 자살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