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덕
[image]
김만덕 표준영정(제82호_2010.7.21.| 윤여환 作)
金萬德, 1739 (자세한 날짜 불명)~1812.10.22
조선시대 제주도의 거상. 남존여비 사고관이 만연해 있던 조선에서 드물게 대부호이자 대인이였던 것으로 유명했다.
양인(良人)인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이름 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고 두 오빠는 목동이 되어 막일을 하며 외삼촌 집안에서 얹혀 살다가 은퇴한 기생에게 수양딸로 맡겨져 기생 수업을 받았다. 이후 제주 관가의 기생이 되었지만 가문에 누가 된다는 친가 쪽의 강요를 받고 그만두었다.[1]
다시 양인 신분으로 돌아온 뒤 중간 상인에 해당하는 객주 일을 시작했고 본토와 제주도 사이의 물자 유통에 수완을 발휘해 제주도에서 알아주는 대부호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객주들의 시기심 때문에 부정축재로 허위 신고를 당해 투옥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의 상소로 풀려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당시 심로숭이라는 문인은 제주목사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김만덕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글로 남겼는데 "만덕이 기생 노릇을 할 때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남자가 돈이 많으면 따랐다가 돈이 떨어지면 떠나되 옷가지마저 빼앗아서 그녀가 지닌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었다고 한다. 그 바지를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을 보고 동료 기생마저 침을 뱉고 욕했다. 그렇게 벌어서 만덕은 제주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라는 글을 썼다. 아마도 김만덕과 경쟁 관계였던 객주들이 퍼트린 루머 중 하나인 모양.[2]
1795년[3] 태풍이 제주도를 강타하면서 가뜩이나 식량 생산이 저조했던 도내 농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때문에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본토에서 쌀 500섬을 사와 제주도민의 구호에 써달라고 관가에 헌납했다. 이 소식은 얼마 후 제주 전임 목사였던 유사모에 의해 조정에도 전해졌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제주목사를 통해 소원을 물으니 "한양에 1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김만덕을 불러 명예 관직인 의녀반수에 봉하고 직접 만났으며 [4] 금강산 유람을 하고 싶다는 청도 받아들였다.
기생 출신 양인이 왕을 알현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고[5] 이 때문에 당대 지식인이자 정치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채제공은 김만덕의 생애를 다룬 만덕전을 집필했고 정약용 같은 실학자와 김정희,[6] 조수삼 같은 문인들도 김만덕의 구휼 사업을 칭송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금강산 유람을 마친 뒤에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 했고[7]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양아들을 들여 키웠다. 1812년 고향 제주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으로 양아들의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장례는 고으니므로[8] 라는 곳에서 치뤘으나 현대에 도로 공사로 인해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오름 근처로 이장했다. 김만덕의 묘와 사당은 모충사라는 이름으로 성역화되고 김만덕 묘 외에도 공덕비[9] 와 기념관이 있다. 비교적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공덕비에 비해서 묘와 기념관은 구석에 초라하게 있어서 조금 안쓰럽다. 현재는 산지천 일대에 기념관을 크게 지어 전시물을 옮겨 전시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외모는 체구가 크고 칠순의 나이에도 얼굴과 머리가 신선이나 부처와 같았다고 한다. 당대에는 겹눈동자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정약용이 직접 만나 확인한 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경세유표에 기록을 남겼다.
황진이나 신사임당, 허난설헌 같은 여타 조선사를 장식한 여성들 만큼의 이름값은 아직 없지만, 혼자 힘으로 사업을 시작해 부자가 되었다는 입지전 스타일 인물에 대인배 업적까지 더해져 전근대시기의 한계를 극복한 '자수성가한 여성'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도 1976년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 경내에 김만덕기념관을 만들고 1980년부터 매년 탐라문화제 개최일에 맞추어 만덕제라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04년에는 김만덕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국내외 소외 계층들에 대한 지원과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 8일에는 국립합창단에서 한국 합창곡 창작 지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극작가 김문환과 작곡가 이영조에게 위촉한 칸타타 '만덕할망'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달 22일에는 순천시에서도 공연되었다.
제주도에선 "김만덕 할망"으로 불리며 도내 유치원, 초등학교 등에서 지역위인들을 가르칠 때 많이 언급되어 온데다, 70년대 고두심[10] 주연의 MBC 드라마 <정화> [11]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어 신사임당만큼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2020년 9월 경에 출생지와 관련하여 용역 연구를 한 결과 현재의 이도동에 해당되는 제주성 내로 밝혀졌다.
김만덕을 다룬 문학작품을 분석한 결과 김만덕의 출생지는 크게 2군데로 언급되어 있다고 확인했는데, 제주성 내[12] 와,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13] 다.
그런데 연구팀은 김만덕 당대 사료와 후대 사료, 후손들의 증언에 기초했을 때 김만덕의 출생지는 "제주성 안"이라고 결론냈다. 정비석 작가가 책 머리말[14] 에서 보일 수 있는 (김만덕 자료 수집 차 제주를 방문해)"김만덕 후손들을 직접 취재했다"는 기록이 없었다(...)는 점을 밝힌 건 덤으로. #원문기사
대항해시대 5에서 나온다. 스킬은 재고 회복으로 무난히 사용할 수 있다.
1977년 MBC에서 김만덕의 일대기를 다룬 '정화(情火)'라는 일일드라마가 방영했다. 주연은 고두심.
2010년에 KBS에서 거상 김만덕을 방영하기도 했는데[15] , 위기의 코드가 다 읽힐 정도로 뻔한 과제를 설정 해 놓고, 주인공들이 문제를 너무나 쉽게 해결하여 재미를 반감시켰다는 지적이 있어서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
2017년, 제주시와 뮤지컬 제작사 미소에서 창작 뮤지컬 '만덕'을 공동 제작했다.
조선왕조실톡 223화에 나왔는데, 이때는 주식회사 만덕그룹(...)의 CEO로 나왔다.
김만덕 표준영정(제82호_2010.7.21.| 윤여환 作)
金萬德, 1739 (자세한 날짜 불명)~1812.10.22
1. 개요
조선시대 제주도의 거상. 남존여비 사고관이 만연해 있던 조선에서 드물게 대부호이자 대인이였던 것으로 유명했다.
2. 생애
양인(良人)인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이름 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고 두 오빠는 목동이 되어 막일을 하며 외삼촌 집안에서 얹혀 살다가 은퇴한 기생에게 수양딸로 맡겨져 기생 수업을 받았다. 이후 제주 관가의 기생이 되었지만 가문에 누가 된다는 친가 쪽의 강요를 받고 그만두었다.[1]
다시 양인 신분으로 돌아온 뒤 중간 상인에 해당하는 객주 일을 시작했고 본토와 제주도 사이의 물자 유통에 수완을 발휘해 제주도에서 알아주는 대부호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객주들의 시기심 때문에 부정축재로 허위 신고를 당해 투옥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의 상소로 풀려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당시 심로숭이라는 문인은 제주목사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김만덕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글로 남겼는데 "만덕이 기생 노릇을 할 때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남자가 돈이 많으면 따랐다가 돈이 떨어지면 떠나되 옷가지마저 빼앗아서 그녀가 지닌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었다고 한다. 그 바지를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을 보고 동료 기생마저 침을 뱉고 욕했다. 그렇게 벌어서 만덕은 제주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라는 글을 썼다. 아마도 김만덕과 경쟁 관계였던 객주들이 퍼트린 루머 중 하나인 모양.[2]
1795년[3] 태풍이 제주도를 강타하면서 가뜩이나 식량 생산이 저조했던 도내 농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때문에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본토에서 쌀 500섬을 사와 제주도민의 구호에 써달라고 관가에 헌납했다. 이 소식은 얼마 후 제주 전임 목사였던 유사모에 의해 조정에도 전해졌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제주목사를 통해 소원을 물으니 "한양에 1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김만덕을 불러 명예 관직인 의녀반수에 봉하고 직접 만났으며 [4] 금강산 유람을 하고 싶다는 청도 받아들였다.
기생 출신 양인이 왕을 알현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고[5] 이 때문에 당대 지식인이자 정치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채제공은 김만덕의 생애를 다룬 만덕전을 집필했고 정약용 같은 실학자와 김정희,[6] 조수삼 같은 문인들도 김만덕의 구휼 사업을 칭송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금강산 유람을 마친 뒤에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 했고[7]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양아들을 들여 키웠다. 1812년 고향 제주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으로 양아들의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장례는 고으니므로[8] 라는 곳에서 치뤘으나 현대에 도로 공사로 인해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오름 근처로 이장했다. 김만덕의 묘와 사당은 모충사라는 이름으로 성역화되고 김만덕 묘 외에도 공덕비[9] 와 기념관이 있다. 비교적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공덕비에 비해서 묘와 기념관은 구석에 초라하게 있어서 조금 안쓰럽다. 현재는 산지천 일대에 기념관을 크게 지어 전시물을 옮겨 전시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외모는 체구가 크고 칠순의 나이에도 얼굴과 머리가 신선이나 부처와 같았다고 한다. 당대에는 겹눈동자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정약용이 직접 만나 확인한 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경세유표에 기록을 남겼다.
3. 사후
황진이나 신사임당, 허난설헌 같은 여타 조선사를 장식한 여성들 만큼의 이름값은 아직 없지만, 혼자 힘으로 사업을 시작해 부자가 되었다는 입지전 스타일 인물에 대인배 업적까지 더해져 전근대시기의 한계를 극복한 '자수성가한 여성'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도 1976년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 경내에 김만덕기념관을 만들고 1980년부터 매년 탐라문화제 개최일에 맞추어 만덕제라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04년에는 김만덕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국내외 소외 계층들에 대한 지원과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 8일에는 국립합창단에서 한국 합창곡 창작 지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극작가 김문환과 작곡가 이영조에게 위촉한 칸타타 '만덕할망'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달 22일에는 순천시에서도 공연되었다.
제주도에선 "김만덕 할망"으로 불리며 도내 유치원, 초등학교 등에서 지역위인들을 가르칠 때 많이 언급되어 온데다, 70년대 고두심[10] 주연의 MBC 드라마 <정화> [11]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어 신사임당만큼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2020년 9월 경에 출생지와 관련하여 용역 연구를 한 결과 현재의 이도동에 해당되는 제주성 내로 밝혀졌다.
김만덕을 다룬 문학작품을 분석한 결과 김만덕의 출생지는 크게 2군데로 언급되어 있다고 확인했는데, 제주성 내[12] 와,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13] 다.
그런데 연구팀은 김만덕 당대 사료와 후대 사료, 후손들의 증언에 기초했을 때 김만덕의 출생지는 "제주성 안"이라고 결론냈다. 정비석 작가가 책 머리말[14] 에서 보일 수 있는 (김만덕 자료 수집 차 제주를 방문해)"김만덕 후손들을 직접 취재했다"는 기록이 없었다(...)는 점을 밝힌 건 덤으로. #원문기사
4. 매체에서
대항해시대 5에서 나온다. 스킬은 재고 회복으로 무난히 사용할 수 있다.
1977년 MBC에서 김만덕의 일대기를 다룬 '정화(情火)'라는 일일드라마가 방영했다. 주연은 고두심.
2010년에 KBS에서 거상 김만덕을 방영하기도 했는데[15] , 위기의 코드가 다 읽힐 정도로 뻔한 과제를 설정 해 놓고, 주인공들이 문제를 너무나 쉽게 해결하여 재미를 반감시켰다는 지적이 있어서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
2017년, 제주시와 뮤지컬 제작사 미소에서 창작 뮤지컬 '만덕'을 공동 제작했다.
조선왕조실톡 223화에 나왔는데, 이때는 주식회사 만덕그룹(...)의 CEO로 나왔다.
5. 관련 문서
[1] 야사에 나온 이야기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 밑에 자라다가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난 뒤 계모의 재혼으로 새아버지를 모시게 되지만 양부모의 잦은 학대에 시달리다 결국 양부모가 퇴기에게 팔아버린 뒤 어진 목사가 주민들에게서 사연을 듣고 기생에서 양인으로 돌려보내 주었다.[2] 이 설을 전한 심로숭이 노론이다보니 노론의 꼴통스러운 보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간혹 들먹이고는 하는 듯하다.[3] 간지로 갑인년인데 제주에 "갭인년 숭년에두 먹당 남은 게 물이여(갑인년 흉년에도 먹다 남은 게 물이었다=갑인년 흉년에도 물 없어서 고생한 적은 없었다)."라는 속담이 남아 있을 정도. 여기서 말하는 갑인년이 바로 만덕 당시의 갑인년 흉년이다.[4] 의녀반수 자체는 그야말로 명예직이지만 왕인 정조를 만나려면 뭐든 벼슬을 달아야 하는데 여성인 김만덕에게 내리기에는 가장 적당한 벼슬이기도 했다. 일성록 정조 20년 11월 25일 기사를 보면 '제주(濟州)의 기녀(妓女) 만덕(萬德)을 내의원의 차비 대령(差備待令)인 행수 의녀(行首醫女)로 충원하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나서 되돌아갈 때 연로(沿路)에 분부하여 양식과 경비를 넉넉히 주게 하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도 같은 날 김만덕에 대한 기사가 있다.[5] 더군다나 제주도 출신 여성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인조 7년(1629년)에 내려진 출륙금지령 때문에 제주에서 태어난 이상 평생 섬을 나갈 수가 없었다. 사실상 김만덕은 제주 여자로써 이례적으로 한양을 밟아본 거의 유일한 여성인 셈. 출륙금지령이 폐지된 것은 김만덕 사후 11년이 지난 순조 23년(1823년)의 일이다.[6] 김정희는 나중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대정현(지금의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7] 김만덕의 객주 터는 제주항에서 내려서 시내 쪽으로 걸어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갈림길 왼쪽으로 보인다. 이 김만덕 객주 터를 지나는 길은 제주 올레길 제18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35억 원을 들여 2016년에 복원.[8] 오늘날 국립제주박물관 남쪽. 거로마을과도 관련있다.[9] 김만덕 공덕비 외에도 제주도 항일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가 공덕비도 같이 모셔져 있다.[10] 고두심은 실제로도 제주도 출신이다.[11] 76년 일일드라마로 방송. 거상 김만덕의 오리지날 격[12] 김태능 작가의 1971년 소설 '김만덕전'과 김봉옥 작가의 1989년 작품 '구원의 여인상 김만덕' 등[13] 정비석 작가의 1977년 소설 '제주기 만덕'이 대표적[14] '작가의 말'로 보인다.[15] 전작 명가부터 KBS의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는 1TV에서 9시 40분에 방송되었으며 <명가>가 그랬던 것처럼 2TV 수목 미니시리즈 추노와 같은 퓨전 사극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