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가
1. 개요
公家(くげ)
원래는 천황이나 그를 모시는 조정을 가리켜 「고케(こうけ)」또는「오야케(おおやけ)」라고 했지만, 가마쿠라 시대 이후 무력으로 조정에 봉사하는 막부측의 사람을 무가武家로 칭하게 되면서 이에 대응하여 조정의 일반 공무를 맡아하는 문신 귀족과 관리를 공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귀족이면서 공경에 오르는 집안이 한정되고 후지와라 가문에 의한 섭관정치 확립에 따라 가문의 서열이 고정되어 가마쿠라 시대 전기까지 공가 사회가 형성되었다. 여기서는 가문의 서열에 의해서 승진할 수 있는 관직이 한정되었다.
가마쿠라 시대를 거치면서 주로 군사 경찰권과 동부 지방의 통치를 담당하는 무가 정권(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의 일반업무와 서쪽 지방의 지배를 관장하는 문신 정권(조정)이 서로 협조, 제휴하면서 정무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부터는 점점 권한이 약해져서 유명무실하게 된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공가 사회는 막부의 보호를 받게 되었지만, 천황과 공가를 규제하는 법도가 확립되어 이를 바탕으로 에도시대의 공무관계가 규정되었다. 문신 사회는 에도 막부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때 해체되어 공가의 대부분이 화족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쇼켄 황후와 데이메이 황후, 쇼와 덴노의 황태자비 후보 중 이치조씨를 보면 관습은 한동안 남아있던 모양이다.
간단히 말하면 에도 시대, 즉 근세까지 이 사람들은 귀족사회를 유지하면서 골품제를 고수하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귀족사회라는 점에 있어서는 중국 문벌귀족과도 비빌 수 있을 듯...[1]
2. 역사
헤이안 시대부터 중앙집권적인 율령국가를 구성하기 위해 통용된 명칭으로 그 이전부터 귀족 세력은 존재하긴 했지만 이 시기부터 공가 안에서도 귀족의 격식 및 지위의 고하가 고착돼서 똑같은 공가라 할지라도 하위에 위치한 공가는 상류층으로 편입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찌보면 신라의 골품제와도 비슷한 부분.
이후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를 거치면서 천황처럼 세력을 잃고 정치적 실권 없이 오직 가문의 명예와 신분만으로 먹고사는 잉여집단으로 전락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능한 집단은 아닌게, 이들은 적어도 정치적 식견을 상당부분 갖춘 계층으로 막부 시대에도 막부에 반대하는 무사와 손을 잡고 막부 타도를 구상하기도 하는 나름의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막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는 얄짤없이 썰렸지만(...). 대표적인 사례가 남북조시대에 남조에서 덴노를 옹립한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덴노가 실권을 쥐고 있던 겐무 신정 시기에 그의 권력을 찬탈하고자[2] 선빵친 것에 대응하기 위해, 요시노로 피신한 고다이고 덴노와 그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뭉친 것에 가까워서, 먼저 공가 측에서 막부 타도를 실시한 것은 아니다[3] . 그래도 어찌됐건, 이런 시도가 전혀 헛된 건 아니라서, 이들이 지속적으로 벌여온 근왕주의 운동은 뒷날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 출신의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과 함께 공가가 일본의 개화운동을 주도하고 막부를 타도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유신 이후로 공가의 절대다수가 고위급 사무라이들과 함께 일본의 기득권층을 이루는 귀족 계층인 화족이 되어 실권을 되찾게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귀족이라는 신분의 정통성과 권위 덕분에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중에서도 공경의 딸과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고 거기다 양자 제도라는 편법을 써서 신분의 제약을 벗어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임에도 코노에 가문의 지위를 빌어 관백의 위치에 오르는데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무사계층도 본인들의 무식함과[4] 신분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서[5] , 교토에 있는 천황과 귀족들에 대립한다기보다는 잘 보여서 관위를 받아낸다거나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또 귀족들은 출신 특성상 학문과 예술, 예법에 통달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초빙해 문화적 열등감을 해결하려는 무장들이 매우 많았다. 현실 정치에서의 실권은 없었더라도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는 말. 게다가 막부 정권이 몰락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고노에 후미마로처럼 귀족출신 총리대신도 배출할 정도가 된다. 센고쿠 시대 때도 공가의 귀족들은 종종 다이묘들에게 고용되어 책사 노릇을 하기도 했고, 우에스기 가문의 경우처럼 돈 좀 만지는 공가는 칼을 잡고 다이묘를 자칭해서 사무라이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도 막부 때도 공가는 굉장히 높은 대접을 받아서, 고셋케에 속하는 가문들은 황족들과 함께 대대로 딸을 쇼군에게 시집보내면서 권세를 누렸고, 그보다 낮은 직위의 가문도 사무라이들에게 예법이나 다도를 가르치면서 부를 쌓았다. 그 유명한 추신구라 사건도 쇼군이 천황과 공가가 보낸 사절을 대접하는 도중에, 대접 업무를 담당한 사무라이들끼리 쪼인트를 까다가 벌어진 사건이었다.
에도 막부 시기에도 별다른 활약은 없이 그저 평상시처럼 잘 지내오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화족 세력으로 편입되는데 이렇듯 정치적 실권은 전무하나 어느정도 일본 역사에 적지않게 개입을 해 왔던 집단이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
3. 가격(家格)
교토 고쇼의 미나미비사시(南廂, 귀족이나 시종들이 천황을 알현하기 위해 대기한 장소)에 오를 수 있는 쇼덴(昇殿)의 자격을 허가받은 당상가와 쇼덴의 자격이 없는 지하가로 나뉘었는데 에도 말엽에 당상가는 137가, 지하가는 460여가가 있었다.
3.1. 셋케(摂家-섭가)
섭정을 맡을 수 있는 다섯 가문으로 모두 후지와라 씨족이며 그 중에서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적통 계열인 미도류(御堂流)에 해당하는 가문들이다. 섭관가(셋칸케-摂関家), 집병가(싯페이케-執柄家), 고셋케(五攝家-오섭가)라고도 부른다. 유신 이후 공작이 되었다. 이들의 가업은 유소쿠코지츠(有職故実)[6] 이다.
- 코노에(近衛) : 모든 후지와라 씨족[7] 의 종가. 에도 시대 봉록은 2,860석이며, 문장은 코노에보탄(近衛牡丹)이다.
- 타카츠카사(鷹司) : 코노에의 분가로 후지와라 派로는 고노에 다음. 에도 시대 봉록은 1,500석이며, 문장은 타카츠카사보탄(鷹司牡丹)이다.
- 쿠죠(九条) : 12세기 경 코노에, 마츠도노(松殿)와[8] 함께 갈라진 분파 중 하나로 근세 황후 자리를 독점. 에도 시대 봉록은 3,043석이며, 문장은 쿠죠후지(九条藤)이다.
- 이치죠(一条) : 쿠조의 분가로 쿠조와 함께 근세 황후 자리를 독점, 에도 시대 봉록은 2,044석이며, 문장은 이치죠후지(一条藤)이다.
- 니죠(二条) : 이치조와 같은 시기[9] 에 갈라진 쿠조의 분가로 후지와라 派로는 이치조 다음. 에도 시대 봉록은 1,708석이며, 문장은 니죠후지(二条藤)이다.
3.2. 세이가케(清華家-청화가)
초기에는 태정대신까지 오르고 황후 자리도 내놓았으나 에도 시대로 가면 태정대신의 자리는 섭관가만이 오를 수 있었던 섭정, 관백을 역임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만 임명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좌대신까지만 오를 수 있게 된다. 본래 화족華族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들만을 칭하던 명칭이었다. 유신 이후 후작이 되었다.
- 쿠가(久我) :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10] 분파 중 적통으로 취급받는 토모히라 친왕의 계보인 나카노인류의 종가로 분가로는 다이진케의 나카노인(中院), 우림가의 로쿠조(六条), 이와쿠라(岩倉), 치구사(千種), 히가시쿠제(東久世), 쿠제(久世), 우메다니(梅溪), 아타고(愛宕), 우에마츠(植松) 총 9개 가문이 있다.[11] 가업은 피리이며, 에도 시대의 봉록은 700석이다. 문장은 쿠가린도(久我竜胆)이다.
- 산조(三条) : 후지와라 북가(北家),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숙부 후지와라노 킨스에[12] 의 후손들인 칸인류(閑院流)의 분파로 분가로는 대신가의 오기마치산조(正親町三条)->사가(嵯峨)와 산조니시(三条西), 우림가의 시게노이(滋野井), 아네가코지(姉小路)가 있다. 가업은 피리와 장속(装束). 에도 시대의 봉록은 469석이다. 문장은 가라비시바나(唐菱花)이다.
- 사이온지(西園寺) : 후지와라 북가 칸인류의 분파로 분가로는 세이가케인 토인(洞院, 이후 단절), 이마데가와(今出川)/키쿠테이菊亭와 우림가의 시미즈다니(清水谷), 무로마치(室町), 하시모토(橋本), 오오미야(大宮) 등이 있다. 가업은 비파이며 에도 시대의 봉록은 597석이다. 문장은 히다리미츠도모에(左三つ巴)이다.
- 도쿠다이지(徳大寺) : 후지와라 북가 칸인류의 분파로, 사이온지 가문과의 동족 의식이 강하여 후일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 사이온지 긴모치는 도쿠다이지 가문에서 태어나 사이온지 가문으로 입양되어 대를 이었다[13] . 가업은 피리이며 에도 시대의 봉록은 약 410석이다. 문장은 모코하나비시후센아야(木瓜花菱浮線綾)이다.
- 카산노인(花山院) : 후지와라 북가, 미도류의 방계인 모로자네류(師実流)의 분파로, 카잔 덴노의 처소 카잔인花山院/히가시노이치조인(東一条院)에서 따왔다. 분가로는 우림가의 나카야마(中山), 노노미야(野宮), 이마조(今城)가 있다. 가업은 생황과 필도(筆道)이며 에도 시대의 봉록은 약 750석이다. 문장은 카키츠바타비시(杜若菱)이다.
- 오오이노미카도(大炊御門) : 후지와라 북가 모로자네류(師実流)의 분파로 카산노인과 같은 시기에 갈라졌다. 가업은 필도, 와카, 와곤(和琴), 피리, 장속. 에도 시대의 봉록은 약 400석이다. 문장은 비시니카타바미(菱に片喰草)이다.
- 이마데가와(今出川)/키쿠테이(菊亭) : 후지와라 북가 칸인류의 분파로 사이온지 가문의 분가이다. 가업은 비파이며 에도시대의 봉록은 1655석이다. 문장은 미츠카에데(三つ楓)이다.
- 다이고(醍醐) : 후지와라 북가 셋칸류(摂関流)의 분파로 에도 시대에 고셋케 이치조 가문에서 분가하여 세이가케에 추가되었다.
- 히로하타(広幡) : 에도 시대 초기 천황인 오오기마치 덴노의 분가 오오기마치 겐지(正親町源氏)의 분파로 무가였다가 교토로 돌아와 세이가케에 추가되었다. 봉록은 약 500석이며 문장은 주로쿠라기쿠(十六裏菊)이다.
다이고와 히로하타의 2가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세이가케에 편입된 가문이기 때문에 같은 세이가케라도 초기부터 세이가케였던 다른 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취급을 받았으며 2가문을 제외한 나머지 가문을 7가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3.3. 다이진케(大臣家-대신가)
세이가케 다음가는 가문. 본래 세이가케의 서류 가문으로, 세이가케에 준하여 승진한다. 대신직에 결원이 발생할 경우, 대신가 구성원은 대납언에서 근위대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내대신으로 승진할 수 있다. 그러나 세이가케와 달리 근위대장을 대신과 겸직할 수 없다. 명목상 승진 한계는 태정대신이지만 우대신까지 승진한 예도 드물고, 내대신을 넘어 승진한 사례는 매우 적다. 유신 이후 백작이 되었다.
- 오기마치산조(正親町三条)->사가(嵯峨) : 후지와라 북가 칸인류의 분파로 세이가케 산조(三條)가의 분가이다. 가업은 유소쿠코지츠이고, 에도 시대 봉록은 355석이며, 문장은 오오기마리렌교(正親町連翹)이다.
- 산조니시(三条西) : 후지와라 북가 칸인류의 분파로 남북조시대 무렵 오기마치산조에서 분가했다. 가업은 향도(香道), 유소쿠코지츠, 와카이고, 에도 시대 봉록은 502석, 문장은 야츠쵸지쿠루마(八つ丁字車)이다.
- 나카노인(中院) :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계통으로 세이가케 쿠가(久我)의 분가이다. 가업은 유소쿠코지츠이고, 에도 시대 봉록은 500석이며, 문장은 무츠바나린도쿠루마(六つ花竜胆車)이다.
3.4. 우린케(羽林家-우림가)
대신가 다음으로 명가와 동렬이며, 에도 시대 무가관위에서 각 다이묘 가문에 주어지는 가격에 상당한다. 근위소장 및 중장을 겸해 참의에서 중납언, 최고 대납언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우림"이란 "날개(우)와 같이 빠르고 숲(림)과 같이 많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북두성을 수호하는 별의 이름이다. 그것이 변하여 황제를 지키는 궁중 숙위장 이름이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근위부의 당명을 우림이라 하여 근위장을 겸하는 가문들을 "우림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신 이후 자작이 되었다.
3.5. 메이케(名家-명가)
우림가와 동렬로 대납언이 승진 한계인 것은 우림가와 같지만, 우림가가 근위중장 등의 무관직계를 거쳐 대납언으로 승진한 반면 명가는 시종, 변관 등의 문관 사무직을 통해 중납언, 대납언으로 승진했다. 히노 류는 시종을, 카쥬지 류는 정중좌를 초임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막부 말 당시 명가는 30가문 정도 남아있었는데 이 중 히노, 히로하시, 가라스마루, 야나기하라柳原[14] , 다케야, 우라마쓰, 간로지, 하무로, 간쥬지, 마데노코우지, 세이칸지, 나카노미카도, 보우죠는 십삼명가十三名家라고 불렀다. 유신 이후 자작이 되었다.
3.6. 반가(半家)
당상관 자리를 차지하던 가문 중 최하위로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를 비롯하여 특수한 기술로서 조정을 섬겼다. 벼슬은 우림가와 명가에 준하여 승진하지만 공경에 올라도 비참의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유신 이후 자작이 되었다. 그래도 종4위~5위의 당상관 자리를 차지하던 만큼 결코 한미하지는 않았는데, 조선의 당상관이 정3품 이상이라는 것과 전근대 일본의 관위가 30개나 된 걸 생각하면 대충 감이 올 것이다.
- 후지와라藤原 : 타카쿠라, 도미노코우지
- 세이와 겐지清和源氏[15] : 다케노우치
- 우다 겐지宇多源氏[16] : 이쓰쓰지, 지코우지
- 카잔 겐지花山源氏[17] : 시라카와白河
- 간무 헤이시桓武平氏[18] : 니시노토우인, 이와이
- 스가와라菅原[19] : 다카쓰지, 고조五條, 가라하시, 히가시보조, 기요오카, 구와하라
- 키요하라清原氏[20] : 후나바시, 후세하라, 사와
- 오오나카토미大中臣[21] : 후지나미
- 우라베卜部[22] : 요시다, 하기하라, 니시고리, 후지이
- 아베安倍[23] : 쓰치미카도土御門, 구라하시
- 단바丹波[24] : 니시키코우지
- 오에大江[25] : 기타코우지
4. 공경(公卿)
공가 중에서도 일본의 율령에 의거하여 국정을 담당하는 다이죠칸(太政官)[26] 의 간부급 고관들은 특별히 공경(公卿-쿠교)이라고 불렀다.
공경은 문자 그대로 삼공구경(三公九卿)[27] 의 약칭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율령이 같지 아니하였으므로 정확히 같지는 않았지만,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사다이진(左大臣), 우다이진(右大臣)을 공이라 부르고[28] , 다이나곤(大納言) 이하 종삼위 이상의 비 산기(非参議)를 경이라 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거의 모든 율령이 그러하듯 공경이 되는 데는 엄격한 기준이 있었고, 이는 능력보다는 혈통에 근거한 것이었다. 일례로 당상관 가문이 아닌 집안에서 공경이 나온 경우에는 공경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앉아 회의를 할 수 없었다. 이는 율령에 의해 정해진 공경보다 관례로 내려오는 전상(殿上)/지하(地下)가의 구분이 더 엄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지하가나 무가에서 공경이 나온 예는 극히 드물다.[29]
공경은 다음과 같은 관직으로 구성된다.
4.1. 다이진
大臣(대신)
율령제 하에서 중요한 정치결정을 담당하는 다이죠칸의 장관(長官[30] )이다. 아주 드물게 귀족이나 무가 등에서 나오는 경우가 있었으나, 대부분은 셋케(摂家), 세이카케(清華家), 다이진케(大臣家) 출신자들이 차지했다.
4.1.1. 다이죠다이진
太政大臣(태정대신)
정원 1명. 훈독으로는 '오오이마츠리고토노오오마에츠기미(おほいまつりごとのおほまへつぎみ)' 라고 한다 -. 관위 상당은 일품(황족) 또는 정일위, 종일위(인신). 요로령의 직원령()에서 규정하고 있는 다이죠다이진의 직무는 "한 사람의 사범으로서 사해의 모범이 된다. 나라를 다스리고 도를 논하며 음양을 섭리한다. 적당한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비워 둔다(師範一人、儀形四海、経邦論道、燮理陰陽、无其人則闕)" 라 하였고, 여기서 마지막 두 자를 따와서 측궐이라고도 불렀다. 율령에서 정해놓은 권한대로라면 중국의 삼사와 삼공을 모두 합쳐놓은 것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도 공석으로 놔둔 기간이 길었다.
4.1.2. 사다이진
左大臣(좌대신)
정원 1명. 훈독으로는 '히다리노오오이마치기미(ひだりのおおいもうちぎみ)' 라고 한다. 관위 상당은 정이위, 종이위. 이치노카미라고 하여 실제 국정을 담당하는 대신 중 최고위였다. 또한 단죠다이에서 규탄할 수 없는 사건 등도 규탄할 수 있었다.
4.1.3. 우다이진
右大臣(우대신)
정원 1명. 훈독으로는 '미기노오오이마치키미(みぎのおほいまちきみ)'. 직장은 사다이진과 동일하되, 사다이진이 결원중이거나 사정이 있어 출사하지 못한 경우, 사다이진이 칸파쿠 등을 겸하고 있을 경우에 다이죠칸을 통솔한다.
4.1.4. 나이다이진
内大臣(내대신)
정원 1명. 율령에는 규정이 없으나 직장은 사다이진, 우다이진과 같다. 다이진케의 승진 한계선.
4.2. 나곤
納言
納言이란 말을 모은다는 뜻인데, 아랫사람들의 말을 위에 상주하고, 윗사람의 말을 아래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모노모스츠카사(ものまうすつかさ)'라고도 한다. 나곤직에는 다이나곤, 츄나곤, 쇼나곤이 있으나 직무가 많이 다른 쇼나곤은 일반적으로 나곤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4.2.1. 다이나곤
大納言
정원 없음. 훈독으로는 '오오이노모노모스노츠카사(おほいものまうすのつかさ)'. 관위 상당은 삼품, 사품(황족), 정삼위(인신). 상하의 말을 전달하고 대신과 함께 정무를 담당하며, 달리 아상(亜相)이라고 한다.
다이진은 극히 적은 수의 특권층만이 오를 수 있었던 것에 반하여 다이나곤은 그 밑의 귀족들 또한 오를 수 있는 관직이었기 때문에 항상 과밀상태였다. 이로 인하여 본래 2명이었던 정원이 10명까지 불어났다가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결국 정관(正官)을 없애고 권관(権官)[31] 만을 두기에 이르렀다. 우린케(羽林家), 메이케(名家), 한케(半家)중 일부의 승진 한계선이 보통 다이나곤이었다.
4.2.2. 츄나곤
中納言
정원 없음. 훈독으로는 '나카노모노모스츠카사(なかのものまうすつかさ)'라고 한다. 별칭은 황문시랑(黄門侍郎). 관위 상당은 종삼위, 직장은 다이나곤과 같다. 정원의 추이 또한 비슷한데, 본래 산기를 15년 이상 지낸 자에 한하여 승진 자격이 주어졌으나, 이를 채우는 귀족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기준이 유명무실해졌고, 이와 함께 정원도 본래의 3명에서 10명까지 늘어났다가 남북조 시대 이후 정관을 폐지하였다.
승진의 기준이라고 하는 산기 15년 재임 이외에도 산기로서 사다이벤(左大弁), 우다이벤(右大弁)[32] 을 겸하는 자, 산기로서 코노에츄죠(近衛中将)[33] 를 겸하는 자, 산기로서 케비이시벳토(検非違使別当)[34] 를 겸하는 자는 연공서열만으로 츄나곤을 지내는 자보다도 우선적 또는 단기간에 승진할 수 있었고, 이후 다이나곤에 이를 가능성도 더 컸다. 그리고 이 모든 기준보다 우선하는 것은 텐노, 셋쇼, 칸파쿠 등 높으신 분의 마음에 드는 것.
4.3. 산기
参議
정원 없음. 조정에서 다이진, 나곤 다음으로 높은 관직. 훈독으로는 '오오마츠리고토おほまつりごと'. 참정조의(參政朝議)의 약칭으로, 다이진, 나곤 등과 함께 국사를 논하는 것을 직책으로 한다. 관위 상당 없음[35] . 그러나 업무가 업무인만큼, 산기에 오른 자는 위계가 종삼위에 이르지 못하였더라도 공경으로 취급한다. 산기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던 만큼 승진 조건이 까다로왔는데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쿠로우도노토[36] , 사다이벤, 우다이벤, 코노에츄죠[37] , 사츄벤, 시키부노스케를 지낸 자.
2. 5개국의 코쿠시를 무사히 지낸 자.
3. 삼위의 위계를 가지는 자.
또한, 벤칸[38] 이나 쿠로우도노토를 지낸 참기는 실무자로 취급받았다.
4.4. 비 산기
非参議
비 산기는 관직명이 아니라, '산기가 아니지만 산기를 지내도 될 만한 자' 정도의 뉘앙스를 가진다. 넓은 의미로는 이하의 1~3을 전부 가리키나, 공경의 구성원을 가리킬 때에는 1만을 지칭한다.
1. 산기를 지내지 아니하였으나 위계가 종삼위 이상인 자.
2. 이미 산기를 지낸 종삼위 미만인 자.
3. 산기 임용 자격을 가진 사위의 자.
5. 구가와 신가
가격안에 또 가격이 있는데, 자세히 구가(旧家)와 신가(新家)로 나뉜다. 구가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던 가문들이고, 신가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에도 시대가 성립할 즈음에 생긴 가문들이다. 137개의 당상가문 중 절반 가까이인 68개 가문(단, 세이카케인 히로하타가와 다이고가를 포함시킬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이 신가에 속하였다. 그러나 당상가문들을 구가와 신가로 나눈건, 1750년 관위어정(官位御定)에서 나눈것이 시초이다.
신가가 생기게 된 계기는 도쿠가와 막부의 대조정 정책으로 고쇼(御所, 천황·황후·원 등의 거주지)가 다수 생겨났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레이겐 천황의 고쇼·고사이 덴노의 법황고쇼·히가시후쿠몬인(고미즈노오 덴노의 황후 도쿠가와 마사코)의 고쇼·고미즈노오 천황의 고쇼·메이쇼 천황의 고쇼 등 5개 이상의 고쇼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어, 각 고쇼를 섬기는 공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종래의 공가만으로는 이러한 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던 차에, 막부에서 공가의 영지를 더 늘려 새로운 공가를 설립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래서 이 에도 초기에 집중하여 신가의 설립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만 신가가 대부분 우림가·명가·반가에 속해 있어 구가에 비해 공경으로 승진해도 비참의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하치죠노미야에서 신적강하한 히로하타 가와 이치조 가에서 분가한 다이고 가문에서 대신까지 승진한 사람도 있어 이 둘은 대부분의 다른 신가와의 대우 차이는 매우 달랐다. 이 때문에 이 두 집안을 신가로 묶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시하는 설도 있다.
6. 창작물에서
창작물, 특히 막부 시기를 다룬 작품에서 공가의 귀족들은 대부분 겉으로 보기에는 놀고 먹기만 하는 니트이지만 속으로는 과거 헤이안 시대 귀족정치의 영화를 꿈꾸며 막부를 타도하고 땅에 떨어진 조정의 권위, 정확히는 자신들의 권위를 되찾기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는 흑막이자 하라구로 속성을 띄고 있다.
일본 창작물에서 묘사된 공가 귀족들의 스테레오 타입은 다음과 같다.
- 1인칭은 마로(麻呂, 麿)
- 높으신 분들을 상징하는 화려한 옷 혹은 카리기누(狩衣)와 같은 헤이안시대 풍 의상.
- 눈썹을 미간에 가까운 쪽만 남기고 모두 밀었다.[39]
- 언제나 놀고 먹으면서 여자만 밝히기 때문에 세속 정치에는 관심없어 보인다.
- 쥘부채를 들고다니는데 하라구로 속성을 드러낼 때마다 부채를 입에다 갖다대고 굉장히 음흉하게 웃는다.
- 이를 검게 물들임. 실제로는 헤이안 시대가 끝난 이후부터는 보통 여성들만 이렇게 했다.
- 대부분 싸움을 굉장히 못하고 두뇌싸움에 능하지만 의외로 호신을 위해 스스로 검술을 연마해서 주인공과 대등한 무력을 소유한 경우도 있다. 이것도 어느정도 자리잡은 클리셰
- 자신의 신분을 굉장히 강조하며 제 아무리 강대한 힘을 지닌 실력자가 앞에 있다 할지라도 이를 거리낌없이 과시한다. 이 때문에 실력자에게 발리고 굴복하는 경우가 다반사
7. 일본의 역사상 존재한 귀족 목록
8. 같이 보기
[1] 다만 당나라의 선비족 한족 혼혈의 이씨 황실도 최고 서열로 취급하지 않던 문벌귀족들과 달리 신격화+단 한 차례의 왕조라는 역사보정 덕분에 무시는 당해도 최고 가문 취급은 받았다.[2] 덴노 자리를 노렸다는 얘기가 아니니, 주의할 것.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그 자신이 사무라이 출신이자, 미나모토 가문의 후손인 만큼, 쇼군의 지위와 함께 막부 역할을 할 영지를 달라고 했는데 이를 고다이고 덴노가 씹어버리자, 직접 막부를 창설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봉기한 뒤에 북조만의 덴노를 따로 옹립한 것이다.[3] 또다른 사례가 고토바 덴노가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실권을 되찾고자 일으킨 조큐의 난이다. 이쪽은 진짜로 일본 황실과 공가가 먼저 무가 측에 선빵을 친 게 맞지만, 고토바 덴노의 장렬한 삽질로 인해 그냥 박살이 났다(...).[4] 전국시대에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만 해도 한자만 알아도 엄청난 지식인으로 대접받았기에, 어릴 적부터 각종 학문과 예법을 수련해왔던 공경들이 우대받았다. 물론, 에도 막부 시기부터는 칼 잘 써서 사무라이가 되는게 아니라, 사무라이 집안에서 나고 자라야 사무라이가 되었기 때문에 공가의 중요성은 다소 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사무라이들이 유교 경전을 익히고 이에 따라 각종 행정처리를 도맡아 했으므로, 아메노모리 호슈나 미토 코몬의 경우처럼 유학자를 겸하는 사무라이가 있다거나, 조선이나 청나라, 네덜란드 등지에서 수입해온 서적을 번역하고 주석까지 다는 무사 출신자도 있을 만큼, 무사계층의 전반적인 학식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전통 예법이나, 천황을 비롯한 황족들에 대한 의례를 아는 건 공경들 뿐이었으므로, 공가 출신자들은 사무라이들의 전속 예절교육 강사 노릇을 하는 등, 무사들의 흠모를 받았다.[5] 우에스기 가문같은 공가 출신 가문도 있었고, 일본 역사상 가장 먼저 득세했던 미나모토 가문이나, 다이라 가문은 아예 천황가의 먼 방계 후손들이었으므로,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성골이나, 진골같은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무라이 가문은 이런 귀족 출신은 매우 드물고, 거의 다 지방의 듣보잡 호족 세력이 군벌화한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거기다가 하급 사무라이들일수록, 탈영병이나, 부랑자 출신인 사람들도 많았고, 개중에는 나중에 고위 사무라이들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일단 가계도 상 귀족출신 가문은 아니니 사무라이 가문들의 최고봉이던 공가 출신 사무라이 가문들이나, 진짜배기 공가에 비하면 혈통 상의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과거 세탁을 좀하고자, 공가를 우대하는 경우가 많았다.[6] 옛 조정이나 무가의 예식, 전고, 관직등을 연구하는 학문[7] 더 정확히는 후지와라 북가 계통. 후지와라 남가가 형님 가문이다. 물론 후지와라 북가가 훨씬 성공했다. 후지와라 남가의 종가인 타카쿠라(高倉, 반가의 타카쿠라 가문과 관련없음)가는 전국시대에 한 번 단절 되었다가, 에도 시대 초기에 부활하여 칸인류 게통의 야부가로 부활했지만, 종가의 이미지와 달리 정작 격이 떨어지는 우림가에 속한다.[8]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자식 3명의 분쟁 끝이 갈라진 가문들 중 하나로 타다미치의 5남이자 3명 중에서는 둘째에 해당하는 마츠도노 모토후사를 시조로 하는 가문. 원래대로면 코노에나 쿠조와 마찬가지로 셋케의 지위를 유지했을 혈통이지만 초대 모토후사가 급성장하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대립한 끝에 다자이후로 좌천되고 이후 후손들은 남북조시대에 남조의 편을 드는 등 정치적인 실패가 누적되어 가문이 쇠퇴했고 결국 센고쿠 시대에 가문 자체가 단절되었다.[9] 13세기 싯켄 호조씨가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던 무렵으로, 요리토모 직계의 혈통이 끊겨 옹립되었던 4대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츠네의 형제들이 각각 이치조와 니조의 초대 당주이다.[10] 무라카미 덴노(村上天皇)의 후손에서 갈라진 미나모토 씨족[11] 그 외에도 4대 당주의 자식 대에서 나카노인과 같은 시기에 분기한 츠치미카도(土御門), 호리카와(堀川) 등의 분가들이 있었으나 두 가문 모두 무로마치 시대에 단절되었다. 가격은 본가와 같은 세이가케.[12] 통칭 간인다이진(閑院大臣). 위에서 언급된 쿠가의 시조인 무라카미 덴노가 킨스에의 외숙부에 해당하며, 동시에 누나인 후지와라노 안시가 무라카미 덴노의 중궁이었는데 킨스에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생모이자 무라카미 덴노의 친누나이기도 한 야스코 내친왕이 죽었기 때문에 중궁인 누이 안시에 의해 어릴 때부터 다른 황자들과 함께 궁에서 자랐다. 킨스에 본인은 미치나가 정권 하에서 태정대신까지 올랐으나 그의 적손인 킨나리가 츄나곤에 그치는 등 정권의 중심에서 멀어질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킨나리의 딸 시게코의 아들이 즉위에 성공해 시라카와 덴노가 되고 이후 토바 덴노 등 칸인류를 외가로 둔 천황이 여럿 즉위하면서 자연스럽게 칸인류는 후지와라의 여러 분파들 중에서도 미도류 다음가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13] 다만 이는 족보상이고 실제 혈통상 사이온지 긴모치는 황실 방계인 간인노미야의 후손이다.[14] 다이쇼 덴노의 생모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가문[15] 세이와 덴노清和天皇에서 갈라진 미나모토 씨족[16] 우다 덴노宇多天皇에서 갈라진 미나모토 씨족[17] 카잔 덴노花山天皇에서 갈라진 미나모토 씨족[18] 간무 덴노桓武天皇에서 갈라진 타이라 씨족[19] 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씨족이다.[20] 일본 역사상 최초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와 천황天皇의 칭호를 사용한 덴무 덴노天武天皇의 아들이자 준닌 덴노의 아버지淳仁天皇 추존 스도진쿄 황제崇道盡敬皇帝 토네리 친왕舎人親王의 후손으로, 세이 쇼나곤이 키요하라 씨족 출신이다.[21] 아스카 시대 신도神道에 관한 일을 맡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집안 나카토미中臣 씨족의 분가로, 후지와라 씨족의 시조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덴무 덴노의 사생아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아들이기에 후지와라의 사촌뻘쯤 되는 집안이다.[22] 아스카 시대부터 조정에서 활동한 오래된 호족으로 이름처럼 헤이안 시대까지 신도, 음양도와 관련된 일을 주로 맡았다.[23] 아베 신조의 가문이 아니라 아스카 시대부터 정계의 중진이었던 대호족 아베 씨족을 말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주로 음양도의 음양사 일을 관할했고, 아베노 세이메이가 이 씨족 출신이다.[24] 아스카 시대부터 꾸준히 활약하던 호족 집안으로, 단바 국丹波國이 발원지였다.[25] 아스카 시대부터 꾸준히 활약하던 호족 집안으로 오에大江 일대가 발원지였다.[26] 태정관.[27] 명칭의 유래는 중국의 진한시대의 관위인 3공9경으로 3공은 승상, 어사대부, 태위이고 9경은 태상, 광록훈, 위위, 태복, 정위, 대홍로, 종정, 대사농, 소부를 가리킨다.[28] 사실 공석이었던 적이 많았던 다이죠다이진을 빼고 나이다이진을 넣어 삼공이라고도 한다.[29] 관위 인플레가 있던 토요토미 정권 시절에도 히데요시의 근친만이 누릴 수 있는 지위였다.[30] 율령 하의 사등관 중 최상위. 사등관은 카미, 스케, 죠, 사칸의 순서이다.[31] 임시 관직이라는 의미이다.[32] 각 성청을 관리하는 실무직[33] 중앙군 부사령관[34] 쿄토의 치안 및 민정 총괄[35] 따라서 위계보다 높은 관직을 맡을 때 붙이는 守나, 이와 반대의 경우에 붙이는 行을 붙이지 않고 산기 종이위, 산기 종사위하 등으로 지칭한다.[36] 텐노의 비서실장.[37] 장기간 근속에 한함.[38] 사다이벤, 우다이벤 등.[39] 동그랗게 점을 찍은 모양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