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츠나요시

 


'''[image] 에도 막부 5대 정이대장군
とくがわつなよし
德川綱吉

도쿠가와 츠나요시
'''
[image]
'''생몰년도'''
1646년 2월 23일 ~ 1709년 2월 19일 (63세)
'''신장'''
'''124cm'''[1]
'''재위년도'''
1680년 ~ 1709년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와 쇼군 집권기 초기
2.2. 본격 동물 애호가[2] 쇼군
2.3. 재정 부담과 상인 대두
2.4. 사망
3. 조선과의 관계
4. 평가
5. 여담
6.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등장한 작품
6.1. 드라마
6.2. 영화
6.3. 만화
6.4.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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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民)은 나라의 근본이다.

-쇼군 취임식에서 한 연설에서


1. 개요


에도 시대 제5대 쇼군. 제3대 쇼군도쿠가와 이에미츠 측실의 아들로 넷째 아들에 해당하고,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에겐 배다른 동생이었다. 형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거쳐 쇼군이 되었다. 일본 대중에겐 '''개 쇼군'''이라는 좀 중의적인 의미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쇼군.
메이지 시대에는 후술된 정책들 덕분에 암군이란 평을 받았고, 실제 동물 우대 정책과 재정 낭비 등 논쟁거리도 있지만, 현대 들어선 동물 보호, 인명 중시 사상을 주입하고자 노력했던 현군(賢君)이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있다. 실제로 그가 통치하던 시기는 '겐로쿠 호황', '''텐나의 치세(天和の治)'''[3]라고 불리는 일본 전근대사 최대의 경제 호황기였다. 참고로 츠나요시가 암군으로 본격적으로 평가절하(平價切下)된 것은 에도 막부를 깍아내리고 천황가를 추켜 세우고자 했던 메이지 정부 이후부터다.

2. 생애



2.1. 유년기와 쇼군 집권기 초기


어릴 때 부터 총명해서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학문에 힘쓰라고 권해서, 유학(유교)과 불교에 심취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학문 외에도 노(일본), 서화 등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직접 그린 서화가 남아있다. 여러 영지를 거쳐 1661년, 고즈케 다테바야시 25만석의 영주가 된다.
태어날 때부터 쇼군의 후계자 계승 자리와는 연이 멀었지만, 배다른 형이 후사가 없자, 35살의 나이에 뜻하지도 않게 쇼군이 되었다. 아버지 이에미츠 시기에는 도쿠가와 에도 막부에 대해 아직도 반감이 남아있는 다이묘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가이에키(改易)와 참근교대 제도를 도입하는 등 반발하는 세력을 거세하고 견제하는 철권통치로 쇼군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했으나, 츠나요시가 다스리는 시기는 도쿠가와 쇼군 정권이 자리를 잡고 안정된 시기라 이전의 공포정치를 풀어주고 문치주의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다. 권력의 중앙집권화과 재정문제, 기강 확립에 주력하고 이를 위해 유학을 융성하게 하고 덕치에 의한 정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 유학을 널리 퍼트려서 명분을 무사의 윤리 의식(일본식 무사도)을 심어주려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스스로도 유학에 관심이 많아, 자신이 나서서 주역을 강의했을 정도였다. 이때 강항에게서 주자학을 배운 하야시 가문이 중용했다. 유학적 이데올로기의 확립을 위해서 주자학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학교인 유시마성당(湯島聖堂, 탕도성당)을 세워 고위 관료들의 자제가 다닐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에 조사관을 파견해서 부정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평판이 나쁜 다이묘와 대관(代官: 하급 하타모토)을 유능하고 성실한 인재로 교체했다. 대관의 교체율은 80%. 가이에키(개역 : 영지를 뺏기는 것) 처분을 당한 다이묘가 40명. 인재선별에는 능력주의 정책으로, 도자마 다이묘도 대우하였으며 막부의 관리로 등용되는 도자마 다이묘가 나온 것도 이 시점부터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던 가신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澤吉保)를 소바요닌(側用人, 측용인)에 임명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때가 1685년.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1687년 쯤부터 그의 행보에 논쟁이 시작된다.

2.2. 본격 동물 애호가[4] 쇼군


1685년, 5대 도쿠가와 츠나요시 쇼군은 '쇼군이 지나가도 개와 고양이가 다녀도 괜찮다. 앞으로는 묶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한다. 그리고 1687년부턴 본격적으로 동물의 살생을 금지하는 "쇼루이아와레미노레이(生類憐令, 생류연령)"라는 법령을 발표하게 된다.
이런 법령들이 발표된 이유는, 쇼군의 어머니 케이쇼인[5] 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쇼군에게 적자(嫡子)인 후계자 아들이 생기지 않자, 적자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생을 금하고(不殺)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積善) 승려 류코우(隆光)의 말을 믿고 이런 정책을 실행하도록 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류코우가 에도에 있지 않은 때였던 탓에 현재 이 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있지만, 그 전부터 류코우가 에도 성에 출입한 기록이 남아있다. [6]
특히 츠나요시는 에게 지나칠 만큼 관대했는데, 그가 개띠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개를 때리거나 죽이는 건 당연히 금지됐고, 여기에 수명을 다한 개는 주인이 직접 좋은 장지를 골라 묻어주도록 법제화했는데, 심지어 개가 병사(病死) 등으로 우연히 죽어도 주인을 처벌했다고 한다. 1695년(화폐개혁을 한 해)에는 호적대장을 만들어 개를 관리했고(개는 물론 고양이, 소, 말까지), 에도성에서 서쪽으로 8킬로 떨어진 곳(현재의 나카노지역)에 약 100만 평(여의도 넓이의 1.14배) 넓이로 유기견 보호시설을 만들었다. 떠돌이 개 약 10만 마리를 치료하고 먹여주며[7] 재워주는 관청도 설치한다. 개를 먹이는 데 연간 금 9만 8천 냥[8]이 들었다. 또한 애완견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밤에도 산책을 시켜주는 직속 관리를 따로 두며, 야행시에는 고래기름으로 등불을 밝혔다. 참고로 고래기름으로 등불을 밝힐 수 있으려면 적어도 어용상인급의 재력이 있어야 했던 시절임을 감안할 때 한마디로''' 개팔자가 상팔자'''였던 시기. 다만 이런 정책을 시행한게 당시 사람들이 기르기를 포기하고 버려진 개들이 들개 무리가 되어 에도 마을을 돌아다니면 아이들과 사람들을 물면서 큰 문제가 된 것에 대한 대책의 일환이었다는 평도 있다.
개에 관해서는 1685년, '쇼군이 길에 지나갈 때 개와 고양이가 다녀도 괜찮다. 앞으로는 묶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령이 발표된다. 7년 후인 1692년에는 '강아지는 말이나 사람에게 밟히지 않도록 개집에 넣어둘 것', 1694년에는 개를 버리지 말 것, 그리고 '버려진 개는 주운 사람이 길러라.' 라는 정도였지만[9] 그러나 지켜지지 않아서 점점 법령으로 처벌 사항을 넣게 되었다. 애완견이나 군마, 가축까지 상처 입히면 처벌받도록 법이 점점 강화됐다. 이후 , 조개, 새우 요리를 금하더니 60회의 포고령이 더해지면서 조개, 장어 등의 채취, 판매까지 금지된다. 급기야는 어떤 생물이든 학대하면 인간이 처벌받는 법으로 발전한다. 을 키우는 것은 괜찮지만 달걀을 먹는 것은 금지됐다. 자식의 병에 특효약이라는 민간요법에 따라 제비를 잡아 먹인 아비가 처형되고 그 자식도 추방됐다. 개나 고양이 등을 죽였다가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이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동물들에게 짐을 싣는 행위도 금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도 알고보면 도쿠가와 에도 막부를 깍아내리기 위해 후대인 메이지 시대에 '''조작된 정보'''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상술된 '심지어 개가 병사(病死) 등으로 우연히 죽어도 주인을 처벌했다고 한다.'는 것도 타인의 개를 훔쳐서 그 개를 죽인 악질적인 경우에 사형 판결(사죄(死罪))을 내린 것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정보들이 현대 역사 연구가들에 의해 거짓일 확률이 높다고 부정되고 있다.
때문에 이 정책이 좀 일방적이고 극단적이긴 해도 그냥 쇼군 한사람의 취향만을 위해 만든 비현실적이고 엽기적인 법안만은 아니라는 평도 나온다. 끝없는 정복 전쟁으로 광기가 폭발해서 생명체를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던 전국시대는 끝나긴 했어도, 직업군인들의 이러한 '''생명 경시 사상이 워낙 팽배했던 중세 일본의 살생 분위기를 일소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던 것 아니냐는 평. 게다가 지금보다는 중앙 통제력이 약했던 시대이니만큼 생류연령이 민간에서도 엄격하게 집행되는 사례는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역사가들이 법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부풀려서 기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이 법령은 135차례나 발표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24년간 실제 처벌된 건수는 72건'''으로 1년에 3건 꼴이었다.
게다가 츠나요시의 정책 중엔 단순히 개나 동물을 보호하자는 것을 넘어,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생활고로 어린이와 병자(病者)를 버리는 풍습으로 발생한 문제를 나라에서 보호하고 기르라는 령도 있었다. 이 법이 현재에 와서 츠나요시가 재조명받는 한 요인이기도 한데, 교고쿠 나츠히코우부메의 여름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면서, 에도 시대에는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죽은 아이는 장례 공양도 해 주지 않았고[10] 현대에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자 윤리가 된 '''아동 인권'''에 대한 의식이 전무했던, '아이를 버리지 말라.'는 법령이 ‘악법’이라는 소리 듣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고 설명했다.[11]
그 외 위생상태가 형편없어 병들어 죽는 경우가 많았던 감옥 생활을 하는 죄인들에게도 한 달에 5번은 목욕을 시키라고 명하는 등, 츠나요시는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생명 경시 풍조가 팽배했던 에도 막부 초기의 사회 분위기를 유교불교 사상에 입각한 생명 존중, 인권의식 함양 사회로 바꾸고자 한 것이 목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12] 하지만 현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채식을 그것도 공권력이 강요한다는 것은 분명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한국이 개고기 먹는 국가라고 어설프게 디스하다 욕만 바가지로 먹은 브리짓 바르도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동물 보호라는 가치는 숭고하나 접근법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반발을 살 수 있다는 것.
물론 이와 더불어 츠나요시의 가치 자체가 함부로 폄하되거나 비아냥의 대상이 될 순 없다는 것 역시 맞는 말이다. 1682년 츠나요시는 '충효에 힘써, 부부, 형제, 친척이 사이좋게 지내고, 하인들도 소중히 여겨라.'는 령도 내리는데, 이것은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그의 바램이 담긴 것이었다.

2.3. 재정 부담과 상인 대두


츠나요시는 씀씀이가 큰 편이라 우선 불교 사찰 수리에 재정을 팍팍 지출했다. 여기에 천황가를 우대하는 차원에서 역대 천황의 무덤 중 66개를 재건하는 사업도 벌인다. 그런데 문젠 이러다보니 상인들에게 손을 벌리는 크기가 커져 막부의 경제적인 부담이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사업을 너무 많이 벌여서 1695년 화폐주조령을 내리게 된다. 이 율령에 의해서 1706년, 1710년에 걸쳐 2번 겐로쿠금은(元綠金銀)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당초 막부의 경제가 어려운 상태여서 금과 은의 순도는 낮아져 악화가 주조되었고, 일시적으로나마 재정이 회복되는 듯이 보였지만 물가의 상승만 일어났다. 덕택에 실물경제를 쥐고 있었던 금은좌(金銀坐)[13]와 나카마(仲間, 막부시대 상인동맹조합)들만 큰 이익을 보게 되어 막부의 경제는 사실상 상인들이 지배하게 된다. 오죽하면 봉행(奉行, 막번의 무사들이 다이묘쇼군으로부터 받는 급료)도 상인들이 주게 된다. 현대사회에 대입해서 본다면, 공무원들의 급여가 민간기업을 통해 지급될 정도로 정부가 민간기업에게 잠식당한 꼴인 셈.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상인들이 득세한 덕에 이후 일본의 문화소비자는 무사계급에서 상인계급으로 전환된다. 전국시대의 무사들이 즐기던 노(能)와 농민들이 즐기던 덴가쿠(田樂)가 당시 일본의 문화를 대표하다가 상인의 이야기를 주된 스토리 라인으로 잡는 가부키가 등장하게 된 것도 츠나요시때부터다. 막부 재정을 팍팍 낭비한 결과 죠닌(町人)문화의 밑거름이 된 격이니 좋게 봐야 할지 나쁘게 봐야 할지(…).

2.4. 사망


1709년에 향년 63세로 사망했다. 유언은 "100년 뒤에도 이 법이 존속되게 하라"였지만, 그가 죽은 후 생류연령은 열흘 만에(...) 폐지되었다.[14] 사인은 천연두로 알려졌다.[15]
아들은 측실 오덴노카타(お伝の方)로부터 낳은 도쿠마츠(徳松)라는 아들이 있었는데[16] 츠나요시가 쇼군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 이 아들만 건강하게 살아있었더라면 그 소동은 안 일어났을 것이다. 어쨌든 직계 자손이 없다보니 후계자는 츠나요시의 이복형제의 아들이었던 츠나토요(이에노부)가 지명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이에노부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쓰구(재임 1713~1716)도 얼마 못가 죽으면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직계 후손은 대가 끊기고 이후에는 방계인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3. 조선과의 관계


그의 치세는 조선숙종(1674~1720) 재위기와 일치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강길(源綱吉: 미나모토노 츠나요시)'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숙종실록에서 그가 쇼군직을 승계받은 이듬해(1681년 - 숙종 8년) 조선에 통신사를 다시 요청하는 기록이 나온다.[17] 재미있는 점은 츠나요시가 덕후였던 것처럼 숙종 또한 상당한 고양이 덕후였다는 것.[18]
또한 독도 문제로 안용복이 일본에 가서 일본인들의 불법 조업을 항의하고 사과를 받고 돌아온 것도 바로 츠나요시가 쇼군으로 있을 때였다. 일부 기록에는 이때 안용복이 일본의 관백(간파쿠)을 만나고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에도까지 가서 쇼군인 츠나요시를 직접 만나고 돌아온 셈'''인데 정황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안용복이 만났던 인물은 백기주(伯耆州;호키 국 - 돗토리 현)의 영주였고,[19] 안용복은 일본어가 원어민 수준이 아니었던 데다가[20] 일본을 잘 몰라서 백기주를 에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다만 안용복의 담판 이후 쓰시마 측에서 '앞으로 찝적대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서가 조선 조정에 도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유학 덕후라 그런지,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데 가장 많은 돈을 쓴 쇼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가르치는 '''"조선통신사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라는 요지의 글이 있다면 그건 주로 츠나요시 때의 이야기. 그러나 이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데 드는 돈은 오롯이 다이묘들의 몫(...)이라서 쓰시마 번부터 에도에 이르는 길의 다이묘들이 많이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허나 츠나요시 사후에는 상기했듯 검약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카스테라[21] 같은 비싼 음식이나 접대가 사라져서 뿔난 통신사마저 생겼을 정도였다(...).[22]

4. 평가


일단은 재위 기간 화폐 개혁에 실패했고, 추신구라(忠臣藏, 충신장) 사건이나 호에이 대지진, 후지산 분화, 대화재 같은 재해 사고도 이시기 있었던지라, 상기한 동물 살생금지령까지 겹쳐져 안티들이 많아서인지 암군 혹은 괴짜 쇼군이란 평이 오랜 기간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츠나요시의 집권기는 그 유명한 겐로쿠 시대, 즉 일본 전근대사 최대의 호황기'''였다. 현대 들어 츠나요시 재평가설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23] 또 상기했듯 동물 살생금지령 역시 단순한 괴짜 정책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동물 보호, 인명 중시 사상을 주입하고자 노력했던 것[24]이란 반론이 만만치 않다.
그 외 상인동맹조합 나카마들의 힘이 쎄져 무사에게 봉행(급료)까지 주게 된 이후부턴 사무라이가 예전보다 많이 얕잡아 보이게 되었으며, 무사가 '''투잡''' 뛰는 일도 발생하기 시작하는 등 사농공상[25] 신분제 붕괴의 전조가 이 시대에 나타난 것 역시 사실이다. 다만 근대적 의미로는 현대 사회의 밑거름이 형성되었던 시기이지만, 당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쇼군의 지시들이 사회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

5. 여담


전해지는 일화들을 보면 츠나요시는 두려움이 많은 성격이었던 듯 하다. 한 번은 천장에서 물체가 떨어진 사건을 들은 츠나요시가 자신의 머리 위에도 뭔가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도성 기둥이란 기둥을 줄로 동여매는 일을 시켰는데 이 줄의 두께가 약 30cm였다고(...)
32살이 되어서도 천둥을 무서워하여 천둥을 멈추게 하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한다. 츠나요시의 총애를 받아 이례적인 출세를 한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는 천둥이 칠 때면 심야던 이른 아침이던 츠나요시의 침소로 달려가 그를 달래주었다고 전해진다. 집으로 돌아가서 쉴 때도 천둥이 치면 잽싸게 성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고. 흡사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은 방법이라 놀라운데, 가신인 야나기사와가 12살 연하라는 점은 더더욱 놀랍다(...).
벌레도 무서워해서, 벌레가 나타나자 가신들에게 얼른 잡으라고 했는데 처리를 못하고 쩔쩔매자 기분이 상해서 신경질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나름 뜻을 담아 선포한 살생금지령 때문에 오히려 동물 학대가 더 심해지는 일이 일어나자, 츠나요시는 몹시 힘들어 했다 한다. 어떻게 하면 동물학대를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솔개나 까마귀 같은 해조를 수백 마리 잡아다가 방생하는 뻘짓을 하기도 했다.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와 다른 측실을 끌어들여 난교를 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그런데 플레이(...)를 할 때는 야나기사와만이 안는 역을 했다고 전해진다. 즉 쇼군인 츠나요시가 였다.
쇼군이 되기 전부터 자신을 섬겼던 충신 마키노 나리사다의 부인인 아구리와 딸인 야스코를 NTR했다는 설도 있다. 일종의 야사이지만 사극 오오쿠요시나가 후미의 만화판 오오쿠에서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드라마판 오오쿠에서는 어렸을때 자신을 다정하게 잘 돌봐줬던 시녀 출신인 아구리를 어렸을 적부터 좋아해서 연회 핑계를 대고 그녀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강간을 해놓고선 이미 시집 가서 남편이 있던 그녀의 딸마저 자신의 첩으로 데리고 오는 막장 행보를 보여준다. 덕분에 아구리는 자살하는데 저래놓고서는 딸인 야스코에게 내가 니네 엄마 아빠한테 돈도 주고 비단도 주고 영토도 주고 정말 잘 해줬는데 왜 죽어버렸냐며 징징거린다.
위패가 매우 작은데, 쇼군위패가 키에 비례한다는 관례에 따르면 그의 키는 124cm(...)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 평균인 155cm로는 31cm가 차이가 나며 그것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그가 왜소증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6.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등장한 작품



6.1. 드라마


1995년 NHK 대하드라마 《8대 쇼군 요시무네》 배우:츠가와 마사히코
2005년 후지TV 드라마 《오오쿠~화의 란~》 배우:타니하라 쇼스케

6.2. 영화


2012년 영화 《오오쿠~영원~[에몬노스케·츠나요시 편]》 배우:칸노 미호

6.3. 만화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의 주인공 사와다 츠나요시의 이름을 이 인물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바우와우#s-2에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꿈에서 등장한다.
파워퍼프걸Z에서도 등장하는데 35화의 B파트[26]에서 의 검은 가루로 영혼 상태로 부활해서 메이어 시장님에게 빙의해서 몬스터 보호명령(モンスター 憐れみの令)[27]을 내려서 도쿄 시티를 무법천지로 만들었다.[28] 몬스터를 저지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하고 연구소마져 공격 당할 위기에 쳐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핫도그'''를 먹여 시장님의 몸에서 분리한다. 물리적 공격이 안 통했지만[29] 고토쿠지 미야코의 버블 캐쳐에 붙잡히고 마츠바라 카오루의 스윙 소닉에 날아가서 자신의 무덤으로 다시 들어간다. 한국판에선 '''도그마 개오르개'''라는 심히 기괴한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오오쿠도 등장. 이쪽 세계관상 여자로 등장했다. 하나 뿐인 자식 마츠가 죽고 카스가노 츠보네개삽질을 그대로 행하는 친부 케이쇼인 때문에 개법도 만드는 등 어떻게든 아기를 가질려고 수난을 격다가 오오쿠에 있던 시종 중 가족이 개에 물렸는데도 개를 처리하지 못해 죽은 원한으로 습격까지 당한다. 케이쇼인과 에몬노스케가 죽고 어떻게 잘 정리하다 했더니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암살당한다.[30]

6.4. 게임


게임 오보로 무라마사의 배경이 이 쇼군 때다. 당연히 최종보스로 등장하며 한번 털리면 이누가미로 변한다(...).
추신구라 사건이 소재인 에로게 ChuSingura 46+1에서는 로리TS되어 등장, 골이 띵한 개빠 쇼군인건 같은데 강아지들을 이용해서 자위행위를 한다(...).

[1] 당시 일본인 평균키인 155cm보다 31cm가 차이나며 역대 쇼군 중에서도 키가 가장 작다![2] 천황가를 추켜 세우고 에도 막부를 깍아내리는 경향이 있던 메이지 시대에는, 츠나요시를 동물을 비정상적으로 사랑한 정신병 환자(Zoophilomanie)(...)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츠나요시를 암군이라는 이미지로 몰아간 것도 이 시기로, 에도 막부 시절에 제일 트집잡기 쉬운 짓을 한 쇼군이었기 때문이다.[3] 현대 일본어로는 天和는 텐와(てんわ)라고 읽어야 하지만, 이 경우는 텐나(てんな)라고 읽는다. 츠나요시 집권 초기의 연호가 텐나(天和)라서 붙은 이름[4] 천황가를 추켜 세우고 에도 막부를 깍아내리는 경향이 있던 메이지 시대에는, 츠나요시를 동물을 비정상적으로 사랑한 정신병 환자(Zoophilomanie)(...)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츠나요시를 암군이라는 이미지로 몰아간 것도 이 시기로, 에도 막부 시절에 제일 트집잡기 쉬운 짓을 한 쇼군이었기 때문이다.[5] 정확하지는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1627년생. 교토의 가난한 서민 출신으로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길바닥에서 야채 행상을 하던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오타마(お玉). 절세 미녀여서 13살 때 오오쿠에서 스카웃, 오만노카타(お万の方)의 측근 시녀로 일했다. 이윽고 이에미츠의 측실이 되고 20살 때 츠나요시를 낳는다. 25살때 이에미츠 사후 관습에 따라 에도 성을 나와 비구니로 출가한다. 54살 때 쇼군의 어머니가 된다. 79살에 영면.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신데렐라 석세스 스토리라고 하면 ''' 타마노코시(玉の輿 오타마가 탄 가마)'''라고 말한다. 젊었을 적 오만노카타의 측근 시녀였던 것을 바탕으로 창작물에서는 케이쇼인 역시 오만의 신변 시중을 들기 위해 같이 오오쿠로 따라 들어온 비구니라는 설정이 붙기도 한다.[6] 『密教大辞典』(法蔵館)・『真言宗年表』(国書刊行会)によると貞享3年(1686年)10月3日に江戸城黒書院で安鎮法を修しており、生類憐れみの令以前より江戸城に出入りしていたため誤りである。[7] 1마리 당 하루 세 끼 흰 쌀밥과 말린 정어리와 된장국[8] 당시 막부 수입 80만 냥의 11%. 그 대부분은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부담했다.[9] 사실 여기서 비현실적인 부분이 나오는게, 전반적인 농업 생산력이 좋지 않았던 시대에 사람을 부양하기도 빠듯한 식량을 개에게까지 나눠주는건 여유가 있는 지배계급이 아닌 이상 무리였다. 개가 버려지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것.[10]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7살 이하 아이들은 '신의 아이'라며 그런 아이들이 죽으면 사람이 죽었다기보단 신에게 다시 되돌아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마비키 문서 참조.[11] 뭔가 이상해 보이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악평을 들을 만한 것이 일본은 공식적 세율이 조선의 실질적 세율보다도 가혹했다. 조선은 공식적 세율은 매우 낮은 편이었지만 그 공식적 세율만으로는 위로는 나라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고 아래로는 지방 괸리들, 아전들이 나라에서 나오는 녹봉이 매우 적거나 없어 녹봉만으로는 먹고살기가 곤란하여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방식으로 떼먹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인데도 '''일본의 공식적인 세율보다는 낮았다.''' 즉 일본의 세율은 엄청나게 살인적이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먹을 입을 줄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피임이라도 잘 알려져 있다면 모를까 피임방법이 잘 알려져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로서는 그닥인 방법 천지였기에 아이는 계속 태어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먹을 것은 없으니 결론은 잇키나(에도 막부 시절 발생한 잇키는 총 3천여회에 달하는데 이는 막부 존속기간을 생각해 보면 1달에 한번은 잇키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조선시대에 민란이 3천번 일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조선은 민란은 조선 후기에 거의 집중되었고 그나마도 철종 이전에만 해도 단지 '소동' 이라고 불릴 규모였으며 철종 시기의 민란조차 적어도 나라의 관리까지 때려죽이는 시도는 없었다.) 마비키... 이 마비키가 얼마나 극성이었는지 당대 동아시아 중 일본은 결코 빈곤한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인구가 정체되었다. 쇼군이 아무리 "애를 버리지 말라"고 외쳐도 농민들 입장에서는 "그럼 세금이라도 줄여주든가 아니면 피임 방법이라도 알려주든가!" 라고 외칠 수 있는 입장이었다.[12] 여담으로 이 정도까진 아니지만, 현대에도 서남아시아에 위치한 불교 강세 국가 부탄이 이와 비슷한 경향의 정책을 펼친다. 그 덕분에 소나 개 같은 동물들이 도로를 맘껏 누비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육식도 이웃나라 인도 등에서 수입한 음식만 허가한다.[13] 막부의 명령 아래 화폐주조에 관한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던 상인들의 통칭. 금화를 주조하는 상인이 금좌, 은화를 주조하는 상인이 은좌였다. 서양의 역사에 빗대어보면 Goldsmith, Silversmith에 해당하는 금은공예상공회와 비교 가능하다.[14] 사문화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관리들이 봐도 모른척 한 것. 바로 문서상으로 지워버리면 막부의 권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는 말도 있다.[15] 다만 다른 기록에 의하면 정실(미다이도코로)인 노부코가 츠나요시를 어떤 방으로 오게 한 뒤에 무리심중, 즉 강제 동반자살의 형태로 죽었다는 의혹도 있다. 실제로 노부코는 츠나요시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사망 기간이 밀접한지라 이런 의혹이 제기된걸로 보인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기 때문에 그저 설일 뿐. 정실인 노부코와 사이가 안좋았던게 이런 소문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커보인다.[16] 이 도쿠마츠의 탄생 축하행사가 11월 15일에 이루어지면서 시치고산의 유래가 되었다고들 한다.[17] 실록에 의하면 일본에서 1666년(현종 7년)부터 이 때까지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지 않았다고 한다.[18] 고양이 한마리를 금손이라고 이름 짓고 직접 먹이를 주며 키웠다. 심지어 금손의 어미 고양이의 장례식까지 치러줬을 정도.[19] 당시 돗토리 번을 다스리던 이케바 가문의 고쿠다카는 32만석 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니 꽤 큰 가문.[20] 어려서부터 왜관에서 자라서 일본말을 잘하긴 했다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던 모양.[21] 일본인들이 기록한 조선인들이 좋아하던 음식 목록에 당당히 들어가있다.[22] 1717년 조선통신사였던 신유한은 그의 저서 해유록에서 병농공상의 야만족 집단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이전의 통신사들이 츠나요시의 숭유정책에 감탄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23] 다만 반대로 호황기였기 때문에 쇼군의 저 뻘짓(...)들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불황기였을때 쇼군이 뻘짓을 해서 벌어진 사건은 오닌의 난 참조.[24] 실제로 동물 살생금지령이 어느 정도 적용되기 시작하자 츠나요시는 그동안 횡행하던 아동,노인,병자를 버리는 풍습도 금지하고 이를 막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들을 내세웠으며 애시당초 츠나요시는 어렸을 때부터 유학과 불교에 심취한 사람인 데 이러한 학문들은 기본적으로 생명 존중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25] 일본은 '사'에 선비 대신 무사(사무라이)가 들어가 병농공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26] 한국판에선 처음엔 방영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방영했다.[27] 위에서 언급한 '''쇼루이아와레미노레이'''의 몬스터 Ver이다.[28] 이 에피소드의 모티브는 도쿠가와 츠나요시 + 프린세스가 시장이 된 에피소드로 보인다.[29] 연구소에서 영혼 분리 장치를 이용해 분리하려고 했지만 분리하지 못했다.[30] 요시야스가 원한을 가져서 그런건 아니다. 츠나요시가 누구한테 죽는 꼴을 볼 봐에 자기한테 죽는게 낫다며 질식사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