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스크 함 침몰사건

 


''Kursk'' submarine dis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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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41 쿠르스크[1]
1. 개요
2. 발단
3. 경과
3.1. 사고 파악
3.2. 구조 지연
4. 수습 이후
4.1. 부적절한 언론대응
5. 원인
5.1. 재앙의 씨앗: 어뢰
5.2. 재앙의 확대: 격실
5.3. 테러? 체첸의 개입?
6. 후일담
7. 대중문화에서
8. 같이 보기


1. 개요



해당 사건의 추모곡인 ДДТ의 '콜레스니코프 대위(Капитан Колесников, 2007)'
후술될 콜레스니코프 대위의 편지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다.
2000년 8월 12일 노르웨이 바렌츠 해에서 발생한 잠수함 침몰 사건. 수 차례의 인양 시도가 있었지만 생존자는 없었던, 세계 해군 역사에 남을 비극. 러시아군의 부족한 예산 하의 열악한 군용장비 운용이 빚어낸 인재였다.
원잠 침몰 사실은 러시아 정부언론이 아닌 서방 소식통들을 통해 먼저 세계에 알려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끌던 당시 러시아 정부는 사고가 나자 쉬쉬하기에 바빴다. 러시아 정부는 사건이 보도되고 이틀이 지나서야 침몰 사실을 인정했다.
사고 당시 원잠 안에 118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었는데, 침몰 뒤에도 상당한 시간 동안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러시아는 보안을 이유로 들며 승조원 구출작업에 늦장을 부렸고 서방의 구조작업 지원 제안도 거절했다. 가라앉은 원잠에 먼저 접근, 승조원들이 모두 '''질식해 숨져있음'''을[2] 확인한 것은 노르웨이 해군 구조대였다. 대통령 취임 100일 전야에 대형 악재를 만난 푸틴은 자국 군인들의 생명보다 위신을 챙기려다 최악의 참사를 자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비운의 러시아 핵잠수함, 커스크호 다큐멘터리

2. 발단


2000년 8월 12일 토요일. 러시아 해군 북방함대 소속 오스카급 핵잠수함 쿠르스크 함이 노르웨이 바렌츠 해에서 군사 훈련 중 침몰했다. 당시 쿠르스크 함은 북방함대 기함키로프급 순양함 표트르 벨리키 함을 향해 두 발의 모의 어뢰를 발사할 예정이었다.
오전 11시 29분 잠수함 함수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 어뢰 덮개 등을 날려버렸다.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긴급부상 시스템을 이용해 즉시 부상할 수 있었지만 이 폭발로 함장 등 주요 장교들이 몰살당해 지휘체계가 붕괴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2분15초 뒤엔 이보다 더 큰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로 선체엔 2㎡의 구멍이 뚫렸다. 이 폭발의 규모는 쿠르스크 함의 원자로가 견딜 수 있는 최대 충격과 거의 일치했다. 따라서 조금만 폭발이 더 강했어도 원자로가 파손되어 방사능이 누출될 수 있었다. 길이 154m, 3층 높이에 배수량 13,400t인 쿠르스크 함은 1,000m 수심 해저에서도 견디도록 설계돼 있었다. 그러나 격실들로 물이 초당 9만ℓ씩 쏟아져 들어왔고 선체는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108m 해저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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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과



3.1. 사고 파악


사고 당시 폭발음은 훈련 함선들이 감지하였으나 훈련에 따른 폭발음으로 여겨 보고하지 않았다. 당일 저녁이 되어 쿠르스크로부터 응답이 없는 것을 염려하기 시작했고, 거듭된 교신 실패로 늦은 저녁에는 수색구조작전이 발령되었다. 사고 다음날인 13일 아침 파손되어 가라앉은 쿠르스크의 선체가 발견된다.

3.2. 구조 지연


러시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물론이고 어떤 외국의 지원도 일체 거절했다. 해난 구조 능력에 있어서는 서방이 훨씬 앞서 있었고, 러시아 단독으로는 시간 안에 승조원 구조는 커녕 사고 수습조차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었음에도 러시아 정부는 어째서인지 자국 단독 대응만을 고집했다. 이는 냉전시대 적국이자 현재의 가상적국인 미국과 냉전 내내 대치한 나토 국가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와 자국 해군의 최중요 전력 중 하나인 오스카급 핵잠수함을 외국에 내보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이유가 겹쳤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이는 귀중한 초동대응 시간을 허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러시아의 태도에 대해 생존자가 있음에도 구조에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심해 탐사선 겸 구조선인 켈디시 호가 타이타닉 호 탐사를 위해 임대되어 대서양에 나가 있어, 해군의 구형 해난구조함 프리즈 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 다음날인 13일 프리즈 함이 쿠르스크 함의 9번 격실 탈출해치에 도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화요일목요일은 악천후를 이유로 시도를 하지 못했고, 금요일에는 도킹을 했으나 여압에 실패했다. 러시아는 16일에야 영국노르웨이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이들 구조대는 17일 노르웨이를 출발해 19일 현장에 도착했다. 20일에는 노르웨이 해군의 심해잠수사들이 탈출해치에 도달했지만, 그 때는 이미 9번 격실이 침수된 후였다. 해치를 열었을 때 기포가 올라와서 성분을 분석했는데 연기와 부패 가스가 섞여 있었다. 즉, 이미 오래 전에 승조원들이 사망하여 그들의 시체의 부패가 진행 중이었다.

4. 수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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Ольга! я тебя люблю, не переживай сильно.

12 08 2000 15.15.
Здесь темно писать, но наощупь попробую
шансов похоже нет, %10-20 будем надеяться, что кто-нибудь прочитает.
Здесь список л/с[3]

отсеков, которые находятся в 9-м и будут пытаться выйти.
Всем привет, отчаиваться не надо

Колеснико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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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4]

사랑하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2000년 08월 12일 15시 15분
편지를 쓰기에는 너무 깜깜하지만 감각으로나마 시도를 해 본다.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는 걸로 보인다. 누군가 이 글을 읽기만을 바란다.
여기 9번 격실에 있으며, 살아남기를 바라는 인원들의 명단을 첨부한다.
모두에게 인사를, 절망할 필요 없다.

콜레스니코프

침몰 직후, 생존해 있던 승조원들 중 최선임자였던 드미트리 콜레스니코프 기관대위(당시 27세)의 시신에서 나온 메모의 일부. A4 크기의 종이 2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번째 장에는 위의 내용이, 두 번째 장에는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선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시 인양팀 측에서는 원본을 보내주겠다고 콜레스니코프의 아내에게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해당 내용을 복사한 종이를 보내주었기에 콜레스니코프의 아내는 매우 큰 좌절을 겪었다고 언론에 말한 바 있다. 또한 지금까지도 실제 편지는 이보다 더 많으며, 나머지는 러시아 정부의 위신에 좋지 않기에 일부러 러시아 측에서 감추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승조원 118명 대부분은 폭발과 함께 순직했지만, 함 후미에 23명의 생존자가 있었다. 앞서 언급되었던 드미트리 콜레스니코프 대위의 메모에 "6, 7, 8번 격실의 전 인원이 9번 격실으로 이동했다. 여기에는 23명이 있다. 이 사고의 결과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우리 중 아무도 수면 위로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나는 지금 어둠 속에서 적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100미터 정도는 구조가 가능한 수심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여서 구조를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그들을 구조해줄 것을 믿으며....
부검 결과 이들은 사고 후에 최대 8시간 정도 생존해 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9번 격실의 화재 흔적과 내부에서 발견된 타버린 이산화탄소 제거 카트리지로 추정해 볼 때, 승조원들이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 위해 이산화탄소 제거 카트리지를 이용하려 시도했는데[5] 하필이면 이것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이것이 기름이나 물과 접촉하면 격렬한 화재를 일으키는 성질이 있어서 화재가 발생, 전원 질식사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그렇게 그들의 고통이 8시간만에 끝난 것이 다행일지도.[6]

4.1. 부적절한 언론대응


러시아 해군은 가족들에게도 냉담했다. 처음엔 언론을 통해 잠수함에 ‘경미한 기술적 문제'[7][8]가 있다고 밝히며 말을 아꼈고,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밝혀내라 재촉하는 유가족들을 몰아냈다. 덕분에 착잡한 장면 여럿이 나왔는데, 한 예로 8월 18일 쿠르스크 함 승조원 세르게이 대위의 어머니는 무르만스크 해군기지에서 쿠르스크호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던 중 별다른 구조 의지가 없음에 분노에 휩싸여 "그가 왜 죽어야 하느냐", "당신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등의 소리를 지르다가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후 간호사에게 진정제를 맞고 기절해 끌려 나갔다. 유튜브 링크 이는 정부가 재난에 대한 대중의 비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불렀다.

5. 원인


인양한 선체를 해체, 분석해 폭발 원인을 찾던 합동조사반은 선체의 머리에 눈길을 모았다. 바로 어뢰실이 완전히 날아갔고, 거기서 연결된 선체의 다른 부분이 특히 피해를 입었기 때문. 특히 어뢰 발사관 덮개가 함미 뒤쪽에서 발견된 것이 결정적이였는데 이는 어뢰 발사관에서 폭발이 처음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고는 러시아 해군의 고질병인 '낡은 장비'와 '안전을 생각지 않은 설계'가 얽혀 만든 인재로 드러났다.

5.1. 재앙의 씨앗: 어뢰


어뢰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모든 어뢰는 추진제로 산화제와 연료를 사용하는데, 산화제로 과산화수소(정확히는 과산화수소 85~98% 물 2~15%로 구성되는 High-test peroxide)를 사용하는 추진제는 금속과 반응성이 대단해서 장전 상태 및 통상 보관 상태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이 때문에 서방에서는 이미 과산화수소 어뢰를 퇴역시켰지만 당시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사용중이었다. 하지만 쿠르스크 함이 침몰할 때 진행된 훈련은 구 소련 붕괴 후 10여 년간 엉망진창이던 '''러시아군'''답게 거의 주먹구구식에 가까웠고,[9] 훈련용 병기가 지급되는 과정 가운데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구형 어뢰가 쿠르스크 함에 들어갔다. 어뢰는 장전하는 순간 용접이 잘못되었던 부위가 부서져 추진제가 서서히 누출됐고, 발사관 안에 과산화수소 증기가 차올랐다. 그리고 임계에 이른 증기가 연료로 장입된 등유와 반응해 폭발하면서 어뢰실과 통제실을 날려버렸다. 폭발 위험이 있는 어뢰실은 격벽과 안전문으로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지만 설계가 잘못되어 함장과 대부분의 장교들이 있던 통제실이 동시에 날아가버렸다.

5.2. 재앙의 확대: 격실


장전관이 터진 순간 쿠르스크 함은 가라앉지 않고 어영부영 살아있었다. 그러나 전투정보실은 이미 1차 폭발의 충격으로 제대로 움직일 인원이 없던 터라 화재를 제대로 진압할 수 없었다. 잠수함은 비상 상황이 일어나면 격실 단위로 불길과 유독가스를 차단하도록 설계됐지만 쿠르스크는 이 격실 차단 체계가 허술했다. 엎친 데에 덮쳐 선체의 머리 끝부터 꼬리 끝까지 배기구가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1차 폭발 때 어뢰실 격벽이 이 폭발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폭발이 배기구를 통해 전투정보실을 덮쳐 함장과 주요 장교들을 몰살했다.

5.3. 테러? 체첸의 개입?


여담으로 사건 원인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을 무렵 체첸 반군을 지휘하고 있던 샤밀 바사예프가 뜬금없이 쿠르스크 함의 침몰은 자신들에게 포섭된 승조원 한 명이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를 즉각 부인했다. 또 국제적으로도 바사예프의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6.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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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의 선체는 2001년 네덜란드의 인양업체인 스미트 샐비지와 중량물 수송업체인 마오에트에 의해 절단작업 후 대부분이 인양되어 로슬랴코바 해군기지로 운반되었다. 총 94구의 시신이 인양되었고 그 중 3구는 화재로 훼손이 심해 신원확인이 불가능하였다. 함장을 포함한 31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해군 국립묘지에 안치되었으며, 이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쿠르스크의 모항 자파드나야 리츠카에 세워졌다.
2002년 러시아 해군은 해저의 쿠르스크 함의 미인양 잔해를 폭약으로 수중폭파하였다.[10] 이에 따라 관련 음모론도 생겨났다. 가장 널리 퍼진 음모론은 쿠르스크가 훈련을 몰래 정찰하던 미국 또는 영국 해군 핵잠수함과 충돌하여 그 충격으로 어뢰가 폭발했다는 설.[11] 좀더 막나간 음모론으로는 아예 쿠르스크가 미 해군 공격원잠과 교전을 벌여 격침되었다는 설까지 있다. 이 음모론들은 천안함 음모론 등 유사한 사례들과 달리 러시아 정부 차원에서 직접 나왔다는 것이 특이하다. 물론 근거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러시아 내부에서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승조원들을 죽게 내버려뒀다는 비난이 강해지자 불만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긴 했다.
추모행사 중 사고 해역을 향해 꽃을 던지는 유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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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이 사건은 불가리아 출신의 한 예언자의 예언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바바 반가라는 불가리아 예언자가 1979년 tv 프로그램에서 "2000년 8월, 쿠르스크가 물 속에 잠길 것이다."라고 예언한 것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7. 대중문화에서


폴란드의 게임개발사인 주주브(Jujubee)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KURSK'''라는 게임을 발표했다. 장르는 서바이벌 어드벤쳐로, 해당 사건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게 될 것이며 '''영화 같은 경험'''과 '''게이머를 사로잡은 게임플레이 방식'''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한다. 트레일러가 공개되었다. 픽션의 스토리로 잠수함내에 잠입한 미국 스파이 시점에서 게임이 진행된다. 스팀의 유저평가는 복합적.
2018년에는 <쿠르스크>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으며, 2018년 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한국에도 공개되었다. 주연은 마티아스 스후나르츠, 레아 세두, 콜린 퍼스. 한국에서 2019년 1월 16일 개봉했다.
예고편

8. 같이 보기



[1] 보면 알겠지만 선체에 부착 된 흡음타일이 떨어져 나가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러시아군의 예산 부족 때문에 교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 118명의 승조원 중 대부분은 폭발과 동시에 사망했지만, 어뢰와 멀리 떨어져 있던 후미쪽 승조원들은 사고 직후 오랜기간 생존해 있음을 의미한다.[3] 인원(Личный состав)의 약자 - 번역자 주[4] 콜레스니코프 대위의 아내. 당시 결혼한 지 4개월이 막 지난 후였다.[5] 9번 격실 내부의 산소로 며칠은 견딜 수 있었지만 이산화탄소가 쌓이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제거가 필요했다.[6] 그들에겐 다행이었을지도 몰라도 남은 유가족의 입장에선 이 사고가 정말 하늘이 내린 가장 큰 벌로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저 깊은 바닷물 속의 밀폐된 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질식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들은 당장 울음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다.[7] 몇 해외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쿠르스크 함의 선체 자체의 문제로 사고가 일어났으리라 추측했다.[8] 당장 거대한 핵잠수함 하나가 폭발해서 가라앉았는데 이게 인재일거라고 생각하기가 힘든게 당연하다[9] 당시 러시아군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당장 본 사건에서도 쿠르스크 함의 침몰 보고가 크렘린보다 미국 국방성에서 먼저 올라왔을 정도인데 설명이 필요한가.[10] 그림에 나와있듯이, 앞부분을 인양 전에 잘라내고 나머지 부분만 인양하였다. 앞부분에서 추가 폭발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11] 물론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LA급을 필두로 한 서방제 공격원잠에 비해 2배 이상의 배수량을 가진 쿠르스크 함과 서방 잠수함간의 충돌이 있었다면, 서방 측의 피해가 은폐가 가능할 정도로 가벼웠으리라고 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