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노 오이와노스쿠네
'''紀 生磐宿禰 '''
'''紀 大磐宿禰 '''
일본과 한반도에서 활약한 인물. 일본 겐조 덴노 3년 및 백제 동성왕 9년인 487년에 벌어진 반란의 주동자이다. 키노 츠노노스쿠네(紀 角宿禰)의 자손으로 키노 오유미노스쿠네(紀 小弓宿禰)의 아들이다.
키(紀)는 우지(氏)이고, 스쿠네(宿禰)는 카바네(姓)이기 때문에 순수한 이름은 '오이와(生磐)'. 따라서 현대식으로 읽자면 '키 오이와(紀 生磐)'가 된다.
이름의 한국식 독음과의 유사성 때문에 칠지도의 기생성음(奇生聖音)이란 구절과 엮기도 하는데 이건 이름이 아니라 그냥 구절로 추정된다.[1] 애초에 이름이 음독으로 읽는 게 아니라 '오이와(生磐)' 혹은 '오오이와(大磐)'라는 이름을 훈차한 건데 기생성음(奇生聖音)은 앞 2자인 기생(奇生)까지는 '키 오이'로 비슷하게 읽을 수 있지만[2] 뒤 2자인 성음(聖音)은 아무리 일본어 한자의 음과 훈이 다양하다 해도 DQN 네임이 아닌 이상 훈독으로나 음독으로나 '와(노)스쿠네'로 읽을 수가 없다.[3][4]
근초고왕 이래 백제는 원래 한반도의 패권을 손에 넣고 가야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백제-가야-일본으로 이어진 동맹을 통해 고구려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줄곧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리다 끝내 장수왕이 벌인 대대적인 남진으로 한성 일대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가야의 중심이었던 금관국마저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인해 막대한 타격을 입어 힘을 잃어가자 가야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때 금관국의 영향력이 전보다 줄어들면서 반사적으로 반파국과 안라국이 가야 지역의 맹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내외부적인 요인이 겹쳐 가야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가야 지방의 세력가였던 키노 오이와노스쿠네는 지금의 충청도 일대까지 남하한 고구려와 손을 잡고 스스로를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칭하며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백제-가야-일본 동맹의 힘은 아직 건재했에 결국 토벌되었고 오이와노스쿠네는 가야로 후퇴했다가 일본으로 넘어간다.
기록에 있음에도 그닥 유명하진 않은데 흔한 사건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당대 한반도와 일본의 쟁쟁한 세력들이 모두 엮인 사건이어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을 뒷받침하는 듯한 고고학적 증거로, 금강 상류인 전라북도 장수군 지역에서 가야계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것을 들기도 한다.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와 내통 혹은 호응한 가야계 세력이 금강을 따라 금산군, 진안군 권역으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시기 백제는 개로왕이 한성 함락 당시 붙잡혀 전장 한복판에서 처형된 이후 무령왕 이전까지는 어지러운 상황에 빠져서 이렇게 앞마당까지 위협당하는데도 적극적인 대처가 힘들었다.
이걸 왜국이 임나(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엮으려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시도도 있었지만[5] , 오이와노스쿠네가 스스로 삼한의 왕이 되겠다고 카미(神聖)라고 자칭한 것부터가 왜국의 지배를 부정하겠다는 것인데 왜국에서 임나를 통치하려고 보냈다는 사람이 왜국를 부정하는 반역을 일으킨 꼴이 되는 것이라서 임나일본부에서 주장한 임나에 대한 왜국의 통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물론 왜국에서도 반란이 자주 일어났었으니 비슷한 케이스로 볼 수도 있긴 하지만.
사실 왜인이 임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호응을 얻었다는 것 자체가 왜국과 임나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경계인이거나 임나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다. 어찌 보면 위만과 비슷한 경우일 수도 있다. 6세기에 백제에서 나솔(奈率) 키노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6] 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노노베씨(物部氏)처럼 키씨(紀氏)도 일부가 백제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김현구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이카카노키미(爲哥可君)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현구 외에도 한국 학계에서는 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이다. 교토대학에서 박사를 받은 이재석 한성대 교수도 같은 주장을 펼친다.[23] 이카카노키미(爲哥可君)는 성씨 혹은 칭호에 해당하는데 백제본기에서는 위가기미(爲哥岐彌, 이카키미)라고 표기되어 있고 이름은 유비기(有非岐, 우히키)라 하였다. 카와치노아타이(河内直)씨의 선조이며 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의 말을 듣고 가야에서 포학을 잔행했다고 한다.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와 본명이 닮았으며 행적이 비슷하기 때문에 반란에 동참했거나 혹은 그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매우 유력시되는 인물. 김현구의 원문에서 정확히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小弓宿禰)=목군유비기(木君有非岐, 키노키미 우히키)로 보고 또 목(木)은 일본어 훈독에서 키(き)로 읽히므로 키(紀)씨를 백제의 목(木)씨로 보는 설이라고 했는데 정작 사서에서는 이카카노키미(爲哥可君)가 목(木)씨라는 기록, 또 목(木)씨의 카바네(姓)가 키미(君)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위에 언급된 사료 중 흠명기 5년 2월조 기사를 보면 분주(分注)에서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카와치노아타이(하내직)의 조상들 이름을 나간타갑배와 가렵직기갑배라고 하고 있다. 나간타갑배는 현종기 3년 시세조 기사에서 기생반숙녜의 선동으로 함께 반란을 일으킨 임나의 나기타갑배와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기생반숙녜의 난 기사는 백제입장에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것은 왜군이 아니라 백제군이었으며, 반란 주체 세력들이 "동도(東道)를 막고 ...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더니 백제왕이 화를 내며 백제군을 출동시켰다고 하였다. 즉, 동도를 끊어 고생한 것은 백제군이며, 임나 주둔 백제군까지의 보급로를 '''동도'''라고 표현하였다면 그 중심은 백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신공기(神功紀) 49년조의 남만 침미다례 원정에 대한 해석에서 침미다례 원정의 주체가 백제 근초고왕이라는 근거 중 하나로 백제 중심의 방위 관념이어야 침미다례가 남만일 수 있다는 것을 드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따라서 이 반란 기사의 원 출처는 백제측 사료임을 알 수 있고, 이를 근거로 이재석은 위가가군(또는 위가기미) 유비기는 기생반숙녜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생반숙녜가 백제의 장군이고, 이 반란이 백제 장군 기생반숙녜가 임나인들을 포섭하여 백제 동성왕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이었음을 주장한다. 다만 기생반숙녜=목만치라는 주장은 정황상 가능한 가설 중 하나라고 소개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실 정확한 국적은 사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는데, 키노 오이와노스쿠네의 행적이 목협만치(木協滿致)와 동일인물이라는 의심을 받는 백제의 장수 목만치(木滿致)와 비슷하여 목만치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목만치는 소가노 마치(蘇我満智)와 동일인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즉 목만치=목협만치=키노 오이와노스쿠네=이카카노키미(爲哥可君)=소가노 마치로 의심되는 가설이 존재한다. 자세한 건 목만치 항목 참조. 하지만 당시 백제, 가야, 왜인들은 각자 서로의 조정에서 복무하기도 하는 경우가 보이는 등 특정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이 근대 국민국가와는 달랐던 점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기생반숙녜가 무조건 왜인이 아니라 백제인이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 것 자체가 근대적 관념의 소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서기 현종기 반란기사를 살펴보면 이 반란 자체는 왜가 개입되지 않은 백제와 임나 간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해당 사료를 자세히 읽어보자. 국적 미상의 기생반숙녜를 제외하면 왜인과 왜국 관련 인물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전(戰前) 근대 일본 사학계가 이 기사를 임나일본부설의 강한 근거 중 하나로 제시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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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과 한반도에서 활약한 인물. 일본 겐조 덴노 3년 및 백제 동성왕 9년인 487년에 벌어진 반란의 주동자이다. 키노 츠노노스쿠네(紀 角宿禰)의 자손으로 키노 오유미노스쿠네(紀 小弓宿禰)의 아들이다.
키(紀)는 우지(氏)이고, 스쿠네(宿禰)는 카바네(姓)이기 때문에 순수한 이름은 '오이와(生磐)'. 따라서 현대식으로 읽자면 '키 오이와(紀 生磐)'가 된다.
이름의 한국식 독음과의 유사성 때문에 칠지도의 기생성음(奇生聖音)이란 구절과 엮기도 하는데 이건 이름이 아니라 그냥 구절로 추정된다.[1] 애초에 이름이 음독으로 읽는 게 아니라 '오이와(生磐)' 혹은 '오오이와(大磐)'라는 이름을 훈차한 건데 기생성음(奇生聖音)은 앞 2자인 기생(奇生)까지는 '키 오이'로 비슷하게 읽을 수 있지만[2] 뒤 2자인 성음(聖音)은 아무리 일본어 한자의 음과 훈이 다양하다 해도 DQN 네임이 아닌 이상 훈독으로나 음독으로나 '와(노)스쿠네'로 읽을 수가 없다.[3][4]
2. 상세
근초고왕 이래 백제는 원래 한반도의 패권을 손에 넣고 가야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백제-가야-일본으로 이어진 동맹을 통해 고구려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줄곧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리다 끝내 장수왕이 벌인 대대적인 남진으로 한성 일대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가야의 중심이었던 금관국마저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인해 막대한 타격을 입어 힘을 잃어가자 가야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때 금관국의 영향력이 전보다 줄어들면서 반사적으로 반파국과 안라국이 가야 지역의 맹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내외부적인 요인이 겹쳐 가야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가야 지방의 세력가였던 키노 오이와노스쿠네는 지금의 충청도 일대까지 남하한 고구려와 손을 잡고 스스로를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칭하며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백제-가야-일본 동맹의 힘은 아직 건재했에 결국 토벌되었고 오이와노스쿠네는 가야로 후퇴했다가 일본으로 넘어간다.
기록에 있음에도 그닥 유명하진 않은데 흔한 사건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당대 한반도와 일본의 쟁쟁한 세력들이 모두 엮인 사건이어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을 뒷받침하는 듯한 고고학적 증거로, 금강 상류인 전라북도 장수군 지역에서 가야계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것을 들기도 한다.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와 내통 혹은 호응한 가야계 세력이 금강을 따라 금산군, 진안군 권역으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시기 백제는 개로왕이 한성 함락 당시 붙잡혀 전장 한복판에서 처형된 이후 무령왕 이전까지는 어지러운 상황에 빠져서 이렇게 앞마당까지 위협당하는데도 적극적인 대처가 힘들었다.
이걸 왜국이 임나(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엮으려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시도도 있었지만[5] , 오이와노스쿠네가 스스로 삼한의 왕이 되겠다고 카미(神聖)라고 자칭한 것부터가 왜국의 지배를 부정하겠다는 것인데 왜국에서 임나를 통치하려고 보냈다는 사람이 왜국를 부정하는 반역을 일으킨 꼴이 되는 것이라서 임나일본부에서 주장한 임나에 대한 왜국의 통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물론 왜국에서도 반란이 자주 일어났었으니 비슷한 케이스로 볼 수도 있긴 하지만.
사실 왜인이 임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호응을 얻었다는 것 자체가 왜국과 임나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경계인이거나 임나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다. 어찌 보면 위만과 비슷한 경우일 수도 있다. 6세기에 백제에서 나솔(奈率) 키노오미 미마사(紀臣 彌麻沙)[6] 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노노베씨(物部氏)처럼 키씨(紀氏)도 일부가 백제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3. 기록
(465년) 여름 5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大磐宿禰)가 아버지[7]
가 이미 돌아가신 것을 듣고 신라로 가서 오카이노스쿠네(小鹿火宿禰)[8] 가 거느리는 병마(兵馬)와 선관(船官) 및 여러 소관(小官)을 맡아 마음대로 지휘하였다. 오카이노스쿠네(小鹿火宿禰)는 오이와노스쿠네(大磐宿禰)를 크게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카라코노스쿠네(韓子宿禰)[9] 에게 “오이와노스쿠네(大磐宿禰)가 나에게 ‘나는 마땅히 머지 않아 다시 카라코노스쿠네(韓子宿禰)가 거느리는 병사들을 맡을 것이다.’라고 하였소. 원컨대 굳게 지키시오.”라고 거짓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오이와노스쿠네(大磐宿禰)와 카라코노스쿠네(韓子宿禰)는 틈이 생겼다. 이에 백제왕은 야마토(日本)의 여러 장군들이 작은 일로 인해 틈이 생겼다는 것을 듣고 사람을 카라코노스쿠네(韓子宿禰) 등에게 보내, “나라의 경계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청컨대 왕림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카라코노스쿠네(韓子宿禰) 등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갔다. 강에 이르렀을 때 오이와노스쿠네(大磐宿禰)는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이때 카라코노스쿠네(韓子宿禰)가 뒤에서 오이와노스쿠네의 안장 뒷부분에 화살을 쏘았다. 오이와노스쿠네(大磐宿禰)가 이에 놀라서 뒤돌아보고 카라코노스쿠네(韓子宿禰)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니, 흐르는 강속에 빠져 죽었다. 이 세 신하는 전부터 서로 다투어 가는 도중에 소란을 피우니, 백제왕의 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해(겐조 덴노 원년)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가 미마나(任那)를 점거하고 고려(高麗)와 손을 잡았으며, 서쪽에서 장차 삼한(三韓)의 왕 노릇을 하려고 관부(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카미(神聖)'''라고 칭하였다. 미마나(任那)의 좌로(左魯)[10]
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11] 등이 계책을 써서 백제(百濟)의 적막이해(適莫爾解)[12] 를 니린(爾林)에서 죽이고【니린(爾林)은 고려(高麗)의 땅이다.】[13] 시토로모로노사시(帯山城)[14] 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왕이 크게 화가 나, 영군(領軍)[15] 고이해(古爾解)[16] ·내두(內頭)[17] 막고해(莫古解)[18]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시토로모로노사시(帯山城)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담력(膽力)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트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미마나(任那)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百濟國)이 좌로(左魯)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 등 300여 인을 죽였다.
'''《일본서기》 권 15 현종천황 3년(487) 시세조'''
여기서 미마나는 임나,즉 가야를 말한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413#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B%82%98#……카와치노아타이(河內直)에게[19]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직 너의 악평만 들어 왔다. 너의 선조들도【백제본기에는 '그대의 선조 나간타갑배(那干陀甲背), 가렵직기갑배(加獵直岐甲背)'라고 하였다. 또한 '나기타갑배(那奇陀甲背), 응기기미(鷹奇岐彌)'라고도 하였는데, 말이 변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20] 다 같이 간계를 품고 거짓을 말하였다. 이카카노키미(爲哥可君)[21] 가 그 말을 믿고 국난을 걱정하지 않고 내 뜻에 반하여 방자하게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22] 때문에 쫓겨났으니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다. 너희들은 미마나(任那)에 머물면서 항상 나쁜 짓을 하였다. 미마나(任那)가 나날이 쇠퇴해 간 것은 오로지 너희들 때문이다. 너희들은 비록 하찮을 지라도 작은 불이 산야를 태우고 마을로 번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희의 악행 때문에 미마나(任那)가 패망한 것이다.
'''《일본서기》 권 22 흠명천황 5년(544) 2월조 카와치아타이(河内直)에의 비난'''
4. 백제 내란 및 백제인설
역사학자 김현구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이카카노키미(爲哥可君)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현구 외에도 한국 학계에서는 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이다. 교토대학에서 박사를 받은 이재석 한성대 교수도 같은 주장을 펼친다.[23] 이카카노키미(爲哥可君)는 성씨 혹은 칭호에 해당하는데 백제본기에서는 위가기미(爲哥岐彌, 이카키미)라고 표기되어 있고 이름은 유비기(有非岐, 우히키)라 하였다. 카와치노아타이(河内直)씨의 선조이며 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의 말을 듣고 가야에서 포학을 잔행했다고 한다.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와 본명이 닮았으며 행적이 비슷하기 때문에 반란에 동참했거나 혹은 그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매우 유력시되는 인물. 김현구의 원문에서 정확히는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小弓宿禰)=목군유비기(木君有非岐, 키노키미 우히키)로 보고 또 목(木)은 일본어 훈독에서 키(き)로 읽히므로 키(紀)씨를 백제의 목(木)씨로 보는 설이라고 했는데 정작 사서에서는 이카카노키미(爲哥可君)가 목(木)씨라는 기록, 또 목(木)씨의 카바네(姓)가 키미(君)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위에 언급된 사료 중 흠명기 5년 2월조 기사를 보면 분주(分注)에서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카와치노아타이(하내직)의 조상들 이름을 나간타갑배와 가렵직기갑배라고 하고 있다. 나간타갑배는 현종기 3년 시세조 기사에서 기생반숙녜의 선동으로 함께 반란을 일으킨 임나의 나기타갑배와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기생반숙녜의 난 기사는 백제입장에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것은 왜군이 아니라 백제군이었으며, 반란 주체 세력들이 "동도(東道)를 막고 ...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더니 백제왕이 화를 내며 백제군을 출동시켰다고 하였다. 즉, 동도를 끊어 고생한 것은 백제군이며, 임나 주둔 백제군까지의 보급로를 '''동도'''라고 표현하였다면 그 중심은 백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신공기(神功紀) 49년조의 남만 침미다례 원정에 대한 해석에서 침미다례 원정의 주체가 백제 근초고왕이라는 근거 중 하나로 백제 중심의 방위 관념이어야 침미다례가 남만일 수 있다는 것을 드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따라서 이 반란 기사의 원 출처는 백제측 사료임을 알 수 있고, 이를 근거로 이재석은 위가가군(또는 위가기미) 유비기는 기생반숙녜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생반숙녜가 백제의 장군이고, 이 반란이 백제 장군 기생반숙녜가 임나인들을 포섭하여 백제 동성왕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이었음을 주장한다. 다만 기생반숙녜=목만치라는 주장은 정황상 가능한 가설 중 하나라고 소개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실 정확한 국적은 사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는데, 키노 오이와노스쿠네의 행적이 목협만치(木協滿致)와 동일인물이라는 의심을 받는 백제의 장수 목만치(木滿致)와 비슷하여 목만치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도 있다. 목만치는 소가노 마치(蘇我満智)와 동일인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즉 목만치=목협만치=키노 오이와노스쿠네=이카카노키미(爲哥可君)=소가노 마치로 의심되는 가설이 존재한다. 자세한 건 목만치 항목 참조. 하지만 당시 백제, 가야, 왜인들은 각자 서로의 조정에서 복무하기도 하는 경우가 보이는 등 특정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이 근대 국민국가와는 달랐던 점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기생반숙녜가 무조건 왜인이 아니라 백제인이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 것 자체가 근대적 관념의 소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서기 현종기 반란기사를 살펴보면 이 반란 자체는 왜가 개입되지 않은 백제와 임나 간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해당 사료를 자세히 읽어보자. 국적 미상의 기생반숙녜를 제외하면 왜인과 왜국 관련 인물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전(戰前) 근대 일본 사학계가 이 기사를 임나일본부설의 강한 근거 중 하나로 제시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1] 기생성음을 기이하게 성음으로 태어났다고 해석한 경우도 있는데 출처가 불분명하다.[2] 생(生)을 오이로 발음하는 사례로는 효고현(兵庫県) 아이오이시(相生市)가 있다.[3] 성(聖)은 음의 경우 오음으로는 쇼(しょう), 한음으로는 세이(せい)로 읽히며, 훈의 경우 상용내는 없고, 상용외로 히지리(ひじり), 키요-이(きよ-い), 키요-라카(きよ-らか)로 읽을 수 있으며, 이름만의 독음으로는 흔하지 않은 사례까지 합쳐서 키요(きよ), 사토시(さとし), 세(せ), 타카(たか), 타카시(たかし), 타다(ただ), 히로(ひろ), 마사(まさ), 미(み)로 읽을 수 있다. 음(音)은 음의 경우 오음으로는 온(おん), 한음으로는 인(いん)으로 읽히며, 훈의 경우 상용내로 오토(おと), 네(ね)로 읽을 수 있고, 상용외는 없으며, 이름만의 독음은 특별히 따로 없다.[4] 애초에 칠지도의 기생성음을 키노 오이와노스쿠네와 엮는 게 무리인 게 칠지도가 제작된 건 4세기 중순의 근초고왕 대이고 오이와노스쿠네가 활동한 건 5세기 후반의 동성왕 대라 시차가 100년이 넘는다. [5] 대표적인 인물은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 保和).[6] 키(紀)가 우지(氏)이고 오미(臣)는 카바네(姓).[7] 키노 오유미노스쿠네(紀 小弓宿禰).[8] 오유미노스쿠네(小弓宿禰)의 아들이라 즉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의 형제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키씨(紀氏)라는 설이 있지만 상세하게는 불명이다.[9] 소가노 카라코(蘇我 韓子).[10] 훈은 '사루'.[11] 갑배(甲背)는 칭호로 보인다. 갑배(甲背)의 칭호는 전부목리불마갑배(前部木刕不麻甲背) 성방(城方)갑배매노(甲背昧奴)의 인명을 보아 백제의 칭호임을 알 수 있다. 훈은 '나카타코하이'.[12] 훈은 '차쿠마쿠니게'.[13] 학계에서는 현재 위치를 천안시나 김제시로 추정한다.[14] 일본식 발음으로 적혀있지만 현지 언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일본어 이름은 아니다. 시토로가 대(帯), 모로가 산(山), 사시가 성(城)에 각각 대응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을 대산현(帶山縣)으로 기록해 놓았기에 학계에서는 태인면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15] 백제의 중앙군으로 추정된다. 훈은 이쿠사.[16] 훈은 코니게.[17] 내두좌평. 고이왕 때 설치한 재정 담당 관직.[18] 근초고왕 24년(369년)에 고국원왕이 침공하자 태자와 함께 출전해 막아낸 장수와 이름이 동일하다. 훈은 마쿠코게.[19] 카와치(河內)가 우지(氏), 아타이(直)가 카바네(姓)에 해당한다.[20]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에게 영합해 백제-가야-일본 동맹에 반기를 든 나기타갑배(那奇他甲背) 등의 가야인들을 말한다. 카와치(河內)는 지명이라 카와치(河內)씨에는 혈연적으로도 연관성이 없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여기서의 카와치노아타이(河內直)씨는 반란에 동참했던 가야인의 후손들로 보인다.[21] 『백제본기』에 의하면 위가기미(爲哥岐彌, 이카키미)라 적혀있으며 이름은 유비기(有非岐, 우히키)라고 한다.[22]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의 반란 시기는 487년 경이다. 성왕이 아닌 동성왕 대에 일어난 일이므로 어째서 성왕의 뜻에 반했다고 했는진 알 수 없다. 혹은 오이와노스쿠네(生磐宿禰)의 반란으로 인해 성왕의 뜻인 임나 재건이 방해가 되었단 소리가 아닐까 싶다.[23] 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 동북아역사재단, 201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