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항공 981편 추락사고
Türk Hava Yolları'nın 981 sefer sayılı uçuşu (Türk Hava Yolları Uçuş 981)
Le vol Turkish Airlines 981, Vol 981 Turkish Air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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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전 1972년 2월에 맥도넬 더글라스 공장에서 공정 당시 찍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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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7일 전 1974년 2월 24일에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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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 사진.
1. 개요
-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항공사고 중 4위 기록.
- 현재까지 단일 항공기 사고중 2위 기록[2]
- 346명 전원 사망.
-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사고.
- 터키 항공 역사상 최악의 사고.
- 사고 당년(1974년) 최악의 항공사고.
- DC-10 기종 관련 사고 중 최악의 사고.
- 후일 DC-10의 신뢰도를 추락시켜 제조사인 맥도넬 더글라스를 파산시킨 사고.[3]
1974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이 추락사고는 위에서 말한 화물실 도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고였다. 도어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승 중에 기압차가 발생해 기내의 공기가 도어를 날려버렸고, 동시에 위에 자리한 객실의 바닥까지 날려버리면서 조종계통을 손상시킴으로써 결국 조종불능에 빠져 추락, 탑승자 346명 전원이 사망했다.
터키 항공 사고는 사실 예견되어있던 사고로서, 이미 2년 전 유사한 사고[4] 가 발생했던 적이 있었다. 1972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윈저에서 이륙한 아메리칸 항공 96편 DC-10이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화물칸 도어가 떨어져 나갔고 이와 동시에 기체 내부와 외부의 압력차로 주요 케이블이 있던 윗층 승객실 바닥까지 꺼지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수직미익에 위치한 2번 엔진이 정지하고, 수직미익의 방향타가 오른쪽으로 고정되는 치명적인 상황에 처했으나, 유압이 완전히 나간게 아니었기에 기장이 기지를 발휘해 착륙할 수 있었다. 당시 관계자들은 맥도넬 더글라스에게 화물칸 도어를 고칠 것과 화물칸과 객실 사이에 통풍구를 뚫을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맥도넬 더글라스사는 아주아주 간단한 조치만 취한 채 방치했고 아메리칸 항공 96편 사건과 똑같은 원인에 의해 터키 항공 981편의 DC-10의 화물칸 도어가 떨어져 나갔고 이로 인해 터키 항공 981편은 추락하고 말았다. 아메리칸 항공 96편과 유사한 사고였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터키 항공의 DC-10은 유압 자체가 박살이 난 상황이라 조종사들이 어쩌해볼 도리가 없었다.
후에 이 사건으로 열린 청문회에서 맥도넬 더글라스사는 1972년 아메리칸 항공 96편 사고보다 훨씬 전인, DC-10을 설계할 때부터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큰 파문을 낳았다. 이후 벌어진 손해배상 소송은 미국 법정 역사상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이 때문에 맥도넬 더글라스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후에 DC-10을 완전히 개수하기는 했으나 이미 신뢰도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2. 전조
196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대표적인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 더글러스, 그리고 록히드 간의 신형 광동체(廣胴體) 여객기 개발 경쟁이 시작되었다.
신형 광동체기 개발은 완전히 광란의 레이스 수준이었고, 항공 시장은 유럽의 전후 복구로 인한 유럽인들의 여행수요 증가와 미국의 경제 대호황으로 인해, 서민들까지 비행기 타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기에 가능해졌다. 수요가 종전의 2배, 3배, … 이런 식으로 늘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보잉 707같은 협동체 비행기로는 한 번에 태울 수 있는 승객 수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공사들은 새롭고 더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비행기를 항공기 제작사들에게 요구했다.
이 경쟁의 성패는 누가 더 먼저 차세대 대형 비행기를 먼저 내놓느냐에 달려 있었다. 출시만 한다면 바로 전세계 항공사들이 엄청나게 사갈 것은 뻔했고, 이 시장을 선점하는 자가 돈방석에 앉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광란의 개발 레이스의 산물로 나온 게 바로 DC-10이었다.
DC-10이 1등으로 나오고, 그 유명한 보잉 747 점보기가 2등, 영국 롤스로이스 엔진 장착 문제로 꽤 진통을 겪던 록히드의 L-1011 트라이스타가 3등으로 시장에 나오게 된다. 최초로 나온 대형기, DC-10에 대한 항공사들의 관심은 엄청났으며 여러 회사에서 문의가 들어오고, 아메리칸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 같은 곳에서는 수십 대를 바로 질러 버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광속 개발과 양산 뒤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화물칸 문의 설계 오류였다.
원래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뻔'''했다. (조종사의 실수를 제외한) 꽤 많은 수의 "기계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된 항공사고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즉 제작사가 상상도 못한 이유로 인해 사고가 터지지만 이 일은 아니었다. 더글러스 사에게 하청을 받아 비행기 후부동체를 제작하던 컨베어[5] 사의 공학자들은 설계도를 검토하고, "어, 뭔가 문제가 있는데" 하며 문제를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화물칸 문의 설계가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비행기는 화물칸이 '''안으로 열리는 구조'''였다. 안으로 열리는 구조는 문과 문틀 사이의 결합에 문제가 생겨도 어느 정도 보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문의 크기가 문 틀보다 훨씬 크고, 비행기 내부의 높은 기압이 문을 계속 바깥쪽으로 밀어내기 때문에, 잠금 장치가 고장 나더라도 문틈이 기압의 힘을 대신 버틸 수 있었다. 욕조 마개가 배수구보다 훨씬 크기에, 배수구가 좀 망가져도 배수구로 좀처럼 빨려나가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잠금 장치가 고장 나더라도 웬만큼 심각해지지 않는 이상은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는데, 문을 열고 닫기 위해서 문이 안쪽에서 움직일 만큼의 공간을 남겨둬야 하므로 그만큼 '''짐 적재량이 적어진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것이, 문을 닫고 화물을 적재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항공 수요가 늘어나면서 승객과 그들의 짐도 덩달아 늘어나고, 항공 화물도 늘어났으니 항공사 입장에서는 이 버려지는 조금의 공간도 아까웠다. 따라서 맥도넬 더글러스 사는 항공사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DC-10의 화물칸 문이 '''바깥쪽'''으로 열리도록 설계하여 제작, 출시했다. 이 설계 덕에 항공사들은 문을 열고 닫는 데에 낭비되었던 공간이 새로운 이익 창출의 공간으로 변했고, 이제는 그 버려졌던 공간에 화물 한 상자, 승객 가방 하나라도 더 실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DC-10과 경쟁기체인 B747, L-1011, A300등 모든 광동체 여객기는 화물칸 도어를 기체 밖으로 열리도록 개발을 하기 시작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이 방식이 통상적인 화물칸 도어 적용방식으로 정착되었다.[6]
'''하지만 어디든지 완벽한 설계는 없었다'''. 이 외부로 열리는 방식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바깥쪽으로 열리는 문은 기압의 힘이 오로지 잠금 장치에만 작용하게 된다. 만약 화물칸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으면, 높은 고도에서 비행기 내외부의 기압 차로 인해 문이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밀려서 뜯겨 나간다'''는 정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2.1. 아메리칸 항공 9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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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월 12일,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를 이륙한 아메리칸 96편(생산 2호기) DC-10이 캐나다 온타리오 주 원저 상공을 지나가는 중 화물칸 문이 기체에서 뜯겨나가 압력차로 객실 바닥이 뚫리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수직미익에 위치한 2번 엔진이 정지하고, 러더가 오른쪽으로 고정됐으나, 다행히 유압 장치가 전부 파괴되지는 않아서, 조종사의 조종술과 노력으로 '''승객과 승무원 67명이 전원 생존한 상태로''' 간신히 회항(回航)하여 착륙하였다.
사건 후 이 사고를 조사한 교통안전위원회 수사관들은, 화물칸 문 잠금 장치에 문제가 있다고 조사 결과를 보고했고, DC-10의 화물칸 문 잠금장치 변경과 화물칸이 뚫렸을 때 생기는 압력차로 객실 바닥이 뚫리지 않도록, 객실 바닥에 통풍구를 설치하라고 더글러스 사에게 권유했다. 그러자 더글러스 사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량을 하였고, 그리고는 DC-10 화물칸 문 폭발 사고는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과정에서 컨베어 사의 애플게이트 대표가 보고서에 자필 메모로 '''"이 항공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개선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대형 참사가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라고 의견을 남겼으나, '''깔끔히 무시당했다. 그리고 2년 후...'''
3. 사건의 발단
1974년 3월 3일, 승객 346명이 탄 터키항공 981편[7] 이 프랑스의 파리 오를리 공항을 떠났다.[8] 원래 이 노선은 평소에 이렇게 많은 승객이 탑승하는 노선이 아니었는데, 그 당시 영국해외항공(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 현 영국항공의 전신.)이 파업 중이었기 때문에, 해외항공사가 터키항공의 표를 구해서 200명의 승객들이 탑승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이렇게 많은 승객이 탑승한 것이다.
이륙한지 10분이 지난 후,약 10000피트(약 3,000m)에 도달할 무렵 화물칸 문이 뜯겨나가고, 객실과 화물칸 사이 압력 차이에 의해 객실 후부 바닥이 뚫리면서 6명의 자리가 사라지고, 동체 거대한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또한 객실 바닥이 무너질 때 생긴 충격으로, 기체 뒤편의 케이블 선과 시스템에 심각한 손상을 일으켜, 비행기를 조종하는데 필요한 유압(油壓)을 모두 상실했기 때문에, 조종사들은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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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재현한 CG.
폭발과 동시에 감압으로 인해 수많은 물건과 승객 및 개인 소지품들이 비행기에서 빨려 나가버렸다. 공기가 빠져나가고 승객들의 비명이 들리는 혼란 속에서, 기장과 부조종사, 그리고 항공기관사 트리오는 왼쪽으로 기울어 급하강하기 시작하는 DC-10을 살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9] 실패했다.
물론 화물칸 폭발 후 겨우 16초 후에 두 조종사가 정신을 차리고 비행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앞은 잘 보이지도 않고, 귀를 찢는 소음이 들리고, 온갖 물건들이 조종실 문을 넘어 밖으로 빨려나가는 등 눈도 제대로 뜨기 어려운 이런 상황에서, 공황에 빠지지 않고 정신을 제대로 차린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유압을 잃은 981편은 결국 프랑스 국유림인 에메노빌에 추락했다. 추락할 당시 시속 700km가 넘는 엄청난 속도로 떨어졌기 때문에 온전한 시신이 거의 없었으며, 프랑스 당국이 발견한 시신 조각만 해도 2만 조각이 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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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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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Y981편의 문 설계도.
위에서 언급했던 아메리칸 96편 DC-10 사고의 수사관이었던 척 밀러는 조사에 참여하자마자, AA96편과 비슷한 사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프랑스의 조사관들도 그 의견에 동의했고, 조사관들의 초점은 981편의 화물칸 문(cargo door)에 맞춰졌다. 비행기의 화물칸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AA96편과 똑같은 사고였다. 밖에서 보기에는 잘 닫힌 것처럼 보였지만, 화물칸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실제로는 '''아예 반쯤 열린 상태'''였다. 조금만 압력이 가해져도 그냥 툭 열리고 날아갈 정도로 약하게 닫혔던 것이다. 오히려 그간 DC-10으로 했던 여러 비행에서 '''단 한 번밖에 문제가 안 생겼다'''는 것이 더더욱 기적으로 보이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왜 맥도넬 더글러스 사는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았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미 연방항공국(FAA)과 맥도널 더글라스 사의 상층부 간에 맺어진 신사협정 때문이었다. NTSB는 조사 및 개선점을 권고할 권한만 있었고, 후속 조치를 실시하는 건 FAA의 일이었으나 이 신사협정 때문에 FAA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맥도널 더글라스도 도덕적 해이를 저지른 것.
사실 그들이 개선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게 '''밖에서 문이 잠겼나 확인할 수 있는 조그만 아크릴 창, 단 하나 뿐'''이란 게 문제지. 하지만 이 창은 '''별 쓸모가 없었다'''. 지상근무 직원들 중에 이 창을 보라고 교육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거니와, 심지어는 수사관들이 화물칸 문에 난 창이 무엇에 쓰는지 혹시 아냐고 묻자, "'''이 창이 뭐 하는데 쓰는 겁니까?'''" 라고 되물은 사람도 있었다. 지상 직원들 중 화물칸 문의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 창 옆에 쓰여있던 안내문은 오직 영어로만 되어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더 나타났다. 공항에서 일하는 직원들 중, 승객을 직접 마주치거나 승무원/조종사를 직접 대하는 직업을 가진 노동자는 영어를 잘 하지만, 반대로, 짐을 싣고 옮기는 일을 하는 직원들은 '''상대적으로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영국 길거리에다 터키어로 주의 표지판 붙여놓은 격이다.
게다가 설계 과정에서 컨베어 사가 압력 실험을 한 결과, 화물칸 문이 일정한 기압차에서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맥도널 더글라스에 화물칸 설계가 잘못됐다는 보고를 보냈지만, '''더글라스 사는 이를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사실이 조사 과정에서 드러나고, 여기에 전술한 애플게이트의 메모 또한 한 언론인에 의해 공개되면서 비난의 강도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5. 이후
사건 발표가 끝나고 모든 책임이 맥도넬 더글라스 사로 돌아간 이후, 맥도넬 더글라스 사는 최악의 시기를 겪었다. 미 연방 법원에서는 당시 돈으로 6천 5백만 달러, 현재 돈으로도 700억 원이 넘는 금액을 벌금으로 부과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수많은 유족들이 건 엄청난 소송에서 연달아 패소해서, 수많은 유족들에게 거액을 배상해야 했고, 터키항공 에게도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반면 터키항공은 그저 잘못 설계된 비행기를 속아서 임차해 승객과 직원들 그리고 회사자산을 잃은 피해자가 되었고, 책임져야 할 잘못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이 비행기는 원래 터키 항공에 갈 비행기가 아니었다. 원래 이 비행기의 소유주는 일본 기업인 미쓰이 소유로 전일본공수의 국내선 전용으로 도입될 예정이었지만, 록히드의 뇌물 공세로 전일본공수가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로 발주를 변경하면서 거의 다 만들어진 비행기가 공장에서 재고가 되자, 1972년 12월 10일 터키 항공으로 리스(임차)되었다.
더글라스 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주식이 반 토막 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사를 향한 항공사들의 불신으로 꽤 오랫동안 재정 위기를 겪었다. 다행히도 부랴부랴 내놓은 개선된 DC-10이 경제성 있고 조종하기 편한 항공기로 평가되어 여러 곳으로 팔리는 선전을 하기는 했지만[11] , 결국 보잉 747의 아성을 꺾지 못하고, 마지막 회심의 역작으로 출시한 후계기 MD-11마저도 보잉 777과 신흥 강자로 떠오르던 에어버스의 A330에 완전히 관광당하면서, 1997년, 비실거리던 맥도넬 더글러스(맥도넬사와 합병했었음)는 보잉에 합병되어서 그 긴 긴 역사를 끝내게 되었다.
지금도 파리 근교의 항공기가 추락했던 그 숲에는, 무고한 346명이 희생당한 사고를 추모하기 위해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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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1974년 3월 3일에 있었던 대참사의 희생자들을 기리며…"
하지만 이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나이티드 항공 811편 사고가 일어난 것. 다른 회사의 다른 기종의 사고이지만, 원인은 잘못된 화물칸 문 설계로 동일하다. 같은 예로 애버그린 17편 사고도 있다.
현재도 상당수의 항공기가 화물칸 문이 밖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잠금 장치도 매우 안전한 데다, 객실 밑에 통풍구가 뚫려 있어서 이런 사고를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참고] A B 위키백과마다 승객과 승무원 수가 차이난다.[1] 원래는 전일본공수에 인도될 예정이었다.[2] 1위는 탑승자 524명중에서 520명이 사망한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계 최악의 단일 항공기 참사랑 최악의 항공사고였다.[3] 물론 다른 사고들도 있었으나, 이 사고가 맥도넬 더글라스를 파산시킨 결정타이다.[4] 유사한 사고라고 적혀있지만 발생 원인이 똑같은 사고였다.[5] Convair, CV-880/990의 제작사로 유명하다.[6] B737등 예외도 존재하긴 한다.[7] 이스탄불발 런던행으로 파리를 중간에 경유했다.[8]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이 개항하기 닷새 전이다.[9] 하강하면서 속도를 얻어 기수가 올라가자 그걸 이용해 고도를 올리려 시도했다.[10] 뜯겨져 나간 비상구 안에 보이는 형상은 조사 및 현장 수습을 진행하고 있는 인원 중 한명으로 시신이 아니다.[11] 이 회사 중에는 '''대한항공'''도 포함 되어 있었다. 하지만 15년 후인 1989년에 조종사의 과실로 사고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