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대 황제
IMPERATORES ROMANI
ΟΙ ΒΑΣΙΛΙΆΔΕΣ ΤΏΝ ΡΩΜΑΊΩΝ
1.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1.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1.2. 네 황제의 해
1.3. 플라비우스 왕조
1.4.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1.5. 다섯 황제의 해
1.6. 세베루스 왕조
1.7. 3세기의 위기
1.8. 사두정치
1.9. 콘스탄티누스 왕조
1.10.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2. 서방
2.1. 테오도시우스 왕조
2.2. 서방영토 상실 전
3. 동방
후기로 갈수록 황제의 이름이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로 표기되는 경우가 잦은데, 이 시기에 영토가 동방으로 한정되면서 제국 안에 남아있는 군중들이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3.1. 테오도시우스 왕조
3.2. 레오 왕조
3.3.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이 왕조는 80여 년간 5명의 황제를 배출한, 왕조교체가 잦았던 로마 기준으로는 그렇게 짧지만은 않은 왕조인데도 불구하고[44] , 부자상속은 전혀 없이, 연달아서 숙질 계승이 2번[45] , 장인-사위 계승이 2번씩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3.4. 이라클리오스 왕조
3.5. 20년간의 혼란
3.6. 이사브리아 왕조
3.7. 니키포로스 왕조
3.8. 아모리아 왕조
3.9. 마케도니아 왕조
3.10. 두카스 왕조
3.11. 콤니노스 왕조
3.12. 앙겔로스 왕조
3.13. 라스카리스 왕조(니케아 제국)[79]
3.14. 팔레올로고스 왕조
[1] 지방정권들의 분립기이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여 환도에 성공했으므로 정통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후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요안니스' 황제 4명이 니케아 시절의 3세, 4세에 연이어서 5세 ~ 8세로 넘버링이 붙었다. 반면 트라페준타(트레비존드) 제국, 이피로스 군주국 등은, 수도를 수복했던 니케아와는 달리 내내 지방정권이었으므로, 무슨 임금 x세 이런 넘버링을 동로마 본국에서 아예 분리해서, 그리고 처음부터 따로 센다. [2] 소 아그리피나에 의한 암살설도 있다.[3] 로마 역사상 최초의 공동 통치.[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루키우스 베루스와 마찬가지로 형제가 공동으로 제위에 올랐다. 모두 동생이 먼저 죽고 형이 이후 단독통치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차이점은 루키우스 베루스는 자연사, 게타는 카라칼라의 손에 죽었다.[5] 이 사람은 세베루스 황제의 일족이 아니다.[6]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신 몸.'''[7] 전쟁 중에 쳐놓은 천막에 '''벼락이 떨어지는 안습이 일어났다'''. 하지만 사인이 너무 우연적이기 때문에 번개에 의한 죽음은 사실 암살을 은폐하기 위한 연막이었다는 주장도 있다.[8] 암살범은 친위대장 이페르로 추정. 이때 경호대장이 디오클레스였다. 이가 바로 훗날의 디오클레티아누스.[9] 디오클레티아누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던 중에 부하에게 심장을 관통당해 죽었다. 이유는 부하의 아내를 유혹했기 때문이라고.[10] 부황제에 있었던 기간 역시 통치 기간으로 정의한다.[11]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퇴위한 경우.[12]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진 퇴위할 때 같이 퇴위.[13] 자칭 '''다키아 황제'''(...). 항목 참조[14] 역시 부황제에 있었던 기간도 통치 기간으로 정의한다.[15] 나머지 둘은 위에 서술한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이기 때문에 생략한다.[16] 현장(아드리아노플 근교, 313.4.30)에서 전사한 건 아니고, 저 멀리 소아시아 남동부의 타르수스에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Poison이 확실히 언급된 것으로 보아 사후 독살이나 독을 이용한 자살로 보인다.[17] 막시미아누스-막센티우스에게 항복한 이후 몇 달 있다가 307.9.에 처형.[18] 퇴각하다가 테베레 강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런 강물과 다리 자체가 전장이었으므로 사고사라기보다는 전사로 보는 것이 더 맞는다. 바다나 강에서 선박끼리 해전을 치루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사고사가 아니라 전사로 보는 것과 같다.[19] 갈레리우스 사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인물. 콘스탄티누스 1세와 324년까지 강화를 맺었으나 결국 밀려난다.[20] 324.9 완전 항복 이후 다음해인 325년에 고트족과의 결탁을 구실로[21]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로 기독교 공인이나 동방천도(당시에는 정식 천도보다는 행정수도 건설에 가까웠지만) 등 역사의 물줄기를 많이 돌림. 기독교 쪽에서는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라 부른다.[22]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로 기독교 공인이나 동방천도(당시에는 정식 천도보다는 행정수도 건설에 가까웠지만) 등 역사의 물줄기를 많이 돌림. 기독교 쪽에서는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라 부른다.[23] 콘스탄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바로 '''형제싸움'''.[24] 휘하 장군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었다.[25] 콘스탄티우스 1세는 바로 할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26] 배교자란 뜻의 아포스타타란 별칭이 붙고 최후의 '이교도' 황제로 일컬어지지만 엄밀히 따지면 아니다. 그의 이후로도 공개적으로 이교도를 자처한 황제가 한 명 더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로마 제국만 로마 제국이란 생각에서는 맞다고 볼 수 있겠지만.[27] 사실 서로마 제국 황제 가운데, '이교도 황제' 는 한 사람 더 있다. 밑의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말 에 나오는 에우게니우스라는 사람인데, 다만 그는 정식 황제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전혀 인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황제가 아니었고 그래서 이교도 황제로 부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더군다나 소위 동서분열인 395년 이전이기도 하고.[28] 콰디족 사절단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고 열받아서(...) 죽었다고 한다.[29] 형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공동황제로 임명되어 동로마를 통치했다.[30]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참조.[31] 일리리쿰에 주둔한 군인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다. 387년 형 그라티아누스를 죽인 찬탈자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동로마로 망명을 갔고, 곧바로 동제 테오도시우스와 함께 서로마의 통치권을 되찾았으나, 서방의 유력한 장군인 아르보가스트에게 (높은 확률로)암살당했다.[32]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하고 황제에 오른 찬탈자다. 내전을 우려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일단은 황제로 인정받았다가, 동쪽으로 망명한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테오도시우스에 서방 진군에 의해 패사한다.[33]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동로마 황제로 임명되었다가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암살로 죽은 이후 아르보가스트와 그가 세웠던 대립황제 에우게니우스가 있었던 서로마를 공격해 394년 최후의 통일황제로 남게 되었다.[34] 콘스탄타누스 가문과는 큰 연관이 없다. 그냥 이름이 같은 것뿐.[35] 2년간의 공백이 생긴 이유는 이때 동로마 제국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36] 사실 암살이라고 하기도 뭐한 게 반달족의 근거지가 된 아프리카에 대한 원정에 실패한 뒤 귀환하던 그의 일행을 리키메르의 군대가 대놓고 공격해 몰살시켰기 때문. [37] 일부 사료에서는 자연사했다고 하고 다른 사료에서는 리키메르에게 독살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38] 아래에 나오는 올리브리우스가 추대되면서 내전이 일어났다. 최대의 정적이었던 리키메르의 군대가 안테미우스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안테미우스는 거지로 분장해서 성당에 숨어들었다가 발각되어 살해되었다.[39] 레오 1세는 절대로 이 사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40] 리키메르의 조카인 군도발트가 실권을 잡은 뒤 암살했다.[41] 군도발트가 올린 허수아비 황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지정한 율리우스 네포스가 쳐들어오자 항복했다.[42]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폐위된 후 연금받고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사망년도는 불명. 보통 율리우스 네포스가 다시 제위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역사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43]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44] 위의 플라비우스 왕조는 27년밖에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772쪽 분량의 'Flavian Rome', 624쪽 분량의 A Companion to the Flavian Age of Imperial Rome이라는 단행본이 있을 정도이다. 특히 후자의 'A Companion to ~' Blackwell이라는 학술 전문 출판사가 특정 주제에 포커스를 맞춰서 내는 시리즈다. 즉 27년짜리의 짧은 왕조도 학계와 출판계에서는 진지한 학술적 분석의 대상이라는 이야기다.[45] 그것도 두 번 다 부계 숙질이 아니라 모계 숙질, 즉 외삼촌과 생질의 관계였다.[46] 그 이전에도 부대 단위로서 메로스(그리스어)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부터 이미 들어와 있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황제들의 인명 역시 그리스어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다만 라틴어식 표기를 아주 저버렸던 것 역시 아니니 유의. 그리고 첨언하자면 이후로도 표기 언어만 바뀐 것일 뿐, 법통은 당연히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넘버링(무슨 황제 몇 세 할 때의 그것, 영어로는 Enumeration.) 또한 고대 로마와 절대 따로 하지 않고 같이 한다. 예컨대 동로마 제국 시대 마케도니아 왕조 때의 알렉산드로스 2세가 '2세' 인 이유는, 고대 로마 세베루스 왕조 때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같은 알렉산데르(알렉산드로스)이기 때문에 그를 1세로 꼽기 때문이다. [47] 이라클리오스의 첫째 아내의 아들[48] 독살 의혹도 강하게 존재함.[49] 이라클리오스의 둘째 아내의 아들, 그런데 그 둘째 아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조카딸이다(...). 어지간한 문화권에서는 3촌 숙질 간의 근친관계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당시의 제국도 마찬가지라서 총대주교 등 종교계와 수도 시민들로부터 근친혼이라고 비난받는 등 인기가 없었고, 여기에 강하게 제기되는 독살 의혹까지 겹쳐져서, 몇달 못 버티고 반대파를 등에 업은 콘스탄스에게 퇴위당한 후 신체훼손을 당한다.[50] 콘스탄티노스 3세의 아들, 별명: 털복숭이[51] 별명: 코가 없는 자[52] 이사브리아에서 출생해서 이 황제의 별칭이 이사브리아인이다.[53] 별명 : 똥싸개... 아기 때 세례받으면서 세례반에 똥을 쌌기 때문.[54] 하자로스. 어머니가 하자르족이었기 때문에 하자르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55] 눈이 뽑힌 후에 죽은 것은 사실인데, 자료마다 죽은 시기가 제각각이다.[56] of Athens라는 뜻. 아테네 출신이어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57] 불가르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해골은 은도금되어 크룸의 술잔이 되었다.[58] 불가르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퇴위 3개월 후 사망.[59] 최초의 성을 가진 황제.[60] 아르메니아 출생[61] 사냥을 하다가 사슴뿔에 들이받혀 죽었다고 하는데 암살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62] 별명 : 현자[63] 독살로 추정됨[64]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에게 살해당했다.[65] 별명: '치미스키스'는 별명. 쿠르쿠아스 가문 출신이다. 어머니가 니키포로스 2세의 여자 형제였으므로 니키포로스 2세의 친조카에 해당한다.[66] 독살로 추정됨[67] 불가르인의 학살자라는 뜻[68] 미하일 4세가 그를 암살하고 조이와 재혼해 황제가 되었다.[69] 파플라고니아인[70] 별명: 땜장이[71] 미하일 4세의 조카로 그의 양자가 되어 즉위[72] 성. 이후부터 모든 황제들은 성이 있음. 왕조가 있는 경우 그 왕조 구성원이 아닌 인물만 성 표기[73] 마이너스 1/4이란 뜻으로, 노미스마 금화로 전에는 밀 1되를 살 수 있었는데 이 황제의 치세 이후 3/4되 밖에 살 수 없어서(...)[74] 만치케르트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75] 사냥 도중에 화살촉에 찔려 중독되어 패혈증으로 사망[76] 안드로니코스에게 살해당한 뒤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짐[77] 성[78] 별명[79] 지방정권들의 분립기이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여 환도에 성공했으므로 '''정통'''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후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요안니스' 황제 4명이 니케아 시절의 3세, 4세에 연이어서 5세 ~ 8세로 넘버링이 붙었다. 반면 트라페준타(트레비존드) 제국, 이피로스 군주국 등은, 수도를 수복했던 니케아와는 달리 내내 지방정권이었으므로, 무슨 임금 x세 이런 넘버링을 동로마 본국에서 아예 '''분리해서, 그리고 처음부터 따로 센다'''. [80] 정식황제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가 11세가 되었다.[81] 성 : 세오도로스 1세의 데릴사위. 따라서 아들 세오도로스 2세의 성은 라스카리스[82] 반란으로 즉위했으나 폐위당했다[83] 별명: 어머니의 성. 자신을 드라가시스로 칭하는 것을 좋아했다.[84] 참고로 이 사람의 조카 딸인 조이가 러시아의 이반 3세와 결혼해서, 이반 3세는 이걸로 자신이 '제3의 로마'의 황제라고 자칭했다.[85] 다만 오스만 제국 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 가운데에는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도시가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끔살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86] 다만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인 조이 팔레올로기나가 러시아로 시집을 갔고(시집간 뒤엔 소피아로 개명), 그녀의 핏줄은 이후 1610년까지 이어졌다. 다만 그녀가 낳은 아이들의 성(姓)은 이미 팔레올로고스가 아니었으므로, 팔레올로고스 황가가 조이(소피아)를 통해 이어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