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락스칼텍
1. 개요
멕시코 성립 이전에는 테노치티틀란의 바로 동쪽, 현 멕시코 기준으로는 틀락스칼라 주에 주로 거주하던 원주민 민족. '''사실상 메소아메리카 부족 최후의 승자이자 생존자'''.
에르난 코르테스 등의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을 도와 아즈텍 제국의 멸망에 기여해 '메소아메리카 공통의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지만, 현명한 외교술로 식인압제자 아즈텍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이들이라고 틀락스칼텍 입장에서는 자기보신을 위한 행동이라고 반론한다.
2. 정치 체계
틀락스칼텍은 민족이라기보다는 국가의 개념에 더 가깝다. 각각 나와틀, 오토미, 피노메어를 쓰는 3개의 민족이 현 틀락스칼텍에 자리를 잡고 연방제로 공동 의회[1] 를 만들어 하나의 정치 체계를 이루는데, 중앙 아메리카의 대세에 따라 나와틀 민족이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를 틀락스칼텍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정치 체제가 어떠한 형태를 띄고 있었는지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데 스페인어 위키백과에서는 República de Tlaxcallan(틀락스칼란 '''공화국''')이라고 되어있고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トラスカラ王国(틀락스칼라 왕국)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틀락스칼텍을 대표할 지도자를 둔 적은 없었기에[2] 이로쿼이 연맹과 비슷하게 부여, 고조선, 이스라엘 왕국 같은 초기 왕국이 되기 직전 과도기 상태의 부족 연합 상태였다고 보는게 제일 적절하다.
3. 역사
3.1. 아즈텍의 인간 목장
이들의 불행은 중앙아메리카에 나와틀 버프를 받아 만들어진 국가는 틀락스칼라 하나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로 옆인 텍스코코 호수에도 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곳이 후에 아즈텍 제국이 되는 테노치티틀란이었다.
원래 틀락스칼텍인들과 테노치티틀란은 그다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두 국가가 발원한 14세기경 중앙아메리카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치치멕 세력과 신흥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틀 세력의 각축장이었고, 같은 나와틀 계열이었던 틀락스칼라와 테노치티틀란은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동맹을 맺고 주변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
그런데 테노치티틀란이 너무 커져버려서 틀락스칼텍의 처절한 몰락이 시작되었다.
이미 15세기 당시 테노치티틀란, 즉 아즈텍은 멕시코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틀락스칼라를 점령할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적/종교적 이유로 인육을 필요로 했던 아즈텍 제국은 수도 바로 옆에 있던 틀락스칼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남겨 놓고서 인신공양 때마다 툭하면 전쟁을 걸어 포로를 잡아 인신공양의 제물로 희생시킨 다음 인육으로 먹었다. 이게 그 유명한 꽃 전쟁.[3] 틀락스칼라는 그야말로 가축 취급을 당하며 테오티틀란 등과 함께 아즈텍 내의 위요지가 되어 가축상태로 연명하게 된다.
단어가 비슷해 틀라카틀올리란 인육을 넣어만든 옥수수죽 음식이 틀락스칼텍인으로 만든 요리란 오해를 사는데 해당 요리 자체는 희생제물로 바쳐진 인육을 옥수수죽과 섞어 만든 음식으로 딱히 틀라스칼텍인만으로 만드는 요리가 아니다.
아즈텍은 꽃 전쟁뿐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 이득을 위한 전쟁도 수행했기에 이 과정에서 떼죽음을 당했고, 전시가 아닐 때는 막대한 공물을 바치게 하는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틀락스칼텍인들에게 아즈텍인들은 증오의 대상이자 악마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국력에서 아즈텍의 상대가 안 되는 데다 아즈텍 남쪽은 건질 게 쥐뿔도 없는 정글이고 북쪽의 치치멕은 황야[4] 에서 허덕이며 수렵으로 연명하는 수준으로 문명이 발달치 못하였으며 아즈텍 내부의 결속은 단단하니 붙기만 하면 털려서 틀락스칼텍인으로서는 정말 꿈도 희망도 없던 상황.[5] 구세주가 도래해 아즈텍을 멸망시키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는데…….
3.2. 콩키스타도르와의 동맹
그 '''구세주가 정말로 나타났다'''! 16세기에 스페인 콩키스타도르가 메소아메리카에 들어간 것이다. 콩키스타도르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적 소양을 가진 에르난 코르테스는[6] 1,000명도 되지 않는 군사력으로 인구 수백 만에 수 만의 군대를 가진 아즈텍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대담하게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한다.
베라크루스와 푸에비아 지역을 지날 때까지 별 어려움 없이 텍스코코 호수에 도달할 뻔했던 스페인 군대를 주춤하게 한 것이 바로 틀락스칼텍인들이었다. 틀락스칼텍인 군대는 기습을 주로 활용했고 흑요석 검과 천갑옷을 사용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콩키스타도르들이 마주하지 못한 강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틀락스칼텍인의 군대는 아즈텍의 다른 군대와는 달리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고 한다. 당시 틀락스칼텍인들은 패배하면 '''스페인인들도 테노치티틀란 놈들처럼 자기들을 잡아먹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철갑옷과 철검으로 무장하고 총과 대포를 쏴대는 콩키스타도르들 앞에서는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갔지만, 이들은 강자에게 산 채로 붙잡혀서 산 제물로 바쳐져 잡아먹히느니 차라리 전투 중에 비명횡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매우 필사적이었다.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는 척하면서 진영을 염탐하게 하는 기만전술을 펼치기도 하고, 정체 모를 스페인군의 무기에 대한 공포와 피해를 줄이려고 야간습격을 기도하거나, 수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등 아무리 죽어나가도 포기하는 법 없이 저항했다. 이들의 용맹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말 위에서 내지른 기병창을 손으로 붙잡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다음 다른 전사가 흑요석 검으로 후려쳐 중상을 입은 기수는 며칠 후에 사망했다.
모른 외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악에 받혀 죽으려고 달려드는 틀락스칼텍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코르테스는 거짓 화친에, 야음을 틈탄 매복기습까지 실패한 뒤에야 고개를 숙인 틀락스칼텍의 사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틀락스칼텍을 이루는 세 개 부족 중 두 부족의 족장은 이 강력한 이방인들과의 동맹에 찬성했지만, 가장 세력이 큰 나와틀 부족의 지도자 젊은 치코텐카틀[7] 은 반대했다.코르테스 군대의 뛰어난 기수인 페드로 데 모른은 다른 기병 3명과 함께 원주민 전사들의 대열로 돌진하다가 기병창을 적에게 붙잡혔다. 그가 창을 빼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원주민 전사가 그들이 사용하는 날이 넓은 흑요석 칼로 페드로에게 중상을 입혔다. 기수가 타고 있던 암말을 내리 베어서 몸에서 머리가 잘려나가 가죽만 붙어 매달린 상태에서 말은 곧 쓰러져 죽었다.
- 베르날 디아스 디 카스티요의 기록
하여튼 합의제에 따라 틀락스칼라는 스페인의 동맹이 되었고, 이후 틀락스칼텍인들은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코르테스의 원정에 8000명 가량의 틀락스칼텍인 전사들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슬픔의 밤으로 쫓겨난 코르테스를 오툼바 전투까지 지원하던 몇 안 되는 부족들 중 하나였다.
이어진 아즈텍 정복 전쟁에서 스페인을 위해 가장 중요한 지형정보를 주는 건 물론이고 각종 물자와 인적 자원을 아낌없이 제공했으며,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될 때는 최대 20만 명의 병사를 지원했고 반란을 일으킨 젊은 치코텐카틀을 붙잡아 코르테스에게 넘기기까지 한다.
3.3. 누에바에스파냐의 자치령
이 공으로 틀락스칼텍인들은 코르테스로부터 보상과 자유를 보장받았다. 코르테스가 스페인으로 압송된 뒤에도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의 '파트너'로서 스페인 왕실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다른 원주민들과는 달리 말을 탈 권리, 총기를 휴대할 권리, 귀족 신분을 유지할 권리(= 기병과 총병을 보유하고 기존 통치구조를 유지할 권리) 등을 인정받았으며, 스페인 왕가로부터 문장과 권리를 하사받기도 한다. 심지어 가장 먼저 코르테스 일당과 동맹을 맺고 병력을 제공한 베라크루스 일대의 토토낙인들도 이 정도 대우는 못 받았다.
스페인이 멕시코 다른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할 때는 군사 지원을 했으며, 오히려 다른 원주민들을 공격하는 데에 가담하고, 심지어 스페인의 지원 하에 치치멕이 지배하던 구역[8] 으로 이민 가서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다.[9] 테노치티틀란 함락 때 살아남아 투항한 아즈텍인들도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철천지 원수들이 한 깃발 아래 싸우는 웃지 못할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 식민정부와 또 협상을 해서 특권을 따냈는데, 그 결과가 개척지 영구 보유 및 세금과 부역 완전 면제였다. 그 잉카 제국 정복 당시 모든 잉카인들을 멸족 직전까지 몰아넣었던(잉카 제국 문서 참고) 스페인이 여기선 이렇게까지 유화적으로 굴었다는 사실에 놀랄 지경.[10]
스페인은 멕시코 독립전쟁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참견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식인풍습[11] 만큼은 교정했고, 가톨릭 국가답게 가톨릭 전도도 지속적으로 했지만, 그래도 16세기의 중앙아메리카의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집단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멕시코인 중에서 원주민식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틀락스칼텍인 조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원주민 문화가 스페인의 정복으로 뿌리뽑힌 지금에는 라이벌이자 숙적인 아즈텍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틀락스칼텍인을 연구하는 몹시 미묘한 일도 일어난다. 특히 틀락스칼텍인들과 아즈텍은 같은 언어를 썼기 때문이다.[12]
다만 동맹이라고 해서 없던 면역력이 생기는 건 아니니 스페인인이 들고 온 전염병에 의한 피해를 가장 크게 봤다. 한때는 틀락스칼라의 틀락스칼텍인들이 500명까지 줄어들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상술했다시피 이민 등으로 인구가 많이 빠져나갔던 것도 컸고 혼혈이 잘 이루어지다 보니 그만큼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3.4. 멕시코 독립 이후
그러나 이런 전성기는 스페인이 멕시코에서 쫓겨나자마자 와장창. 멕시코 연방은 끝까지 친스페인파였던 틀락스칼텍에 대해 연방에 참여하도록 압박을 가한다. 틀락스칼텍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사방이 멕시코 땅인 시점에서 200년 전처럼 꽃 전쟁을 계속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자치권을 넘겨주고 멕시코 연방에 편입된다. 물론 멕시코 연방은 아즈텍만큼 막장이 아니라서 편입되고 나서 큰 탈은 없었고 지금까지 틀락스칼라 주의 멕시코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인프라는 해당 지역에 대해 덜 신경 써서 그런지 멕시코 중부지역 중 취약한 편에 속한다.[13] 아무래도 아즈텍 제국을 치켜세우고 틀락스칼텍을 깎아내리는 멕시코 전체(틀락스칼라 주 제외)의 상황이 현재까지도 틀락스칼라 주를 고립시키는 것 같다.
4. 평가
멕시코사에서의 이들의 모습은 '스페인의 창녀 말린체와 그 아들들'로 상징되지만, 이들은 정말로 스페인에게 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웃나라 아즈텍의 착취에 시달리고 그들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는 적어도 자신들을 고기 취급하지는 않는 이방인의 동맹이 되는 편이 훨씬 나았다.
통합된 멕시코의 민족주의 사고관에서 이들은 멕시코의 문화를 말살하고 자원을 약탈한 열강을 끌어들인 배신자이지만, 멕시코는 1810년 독립전쟁을 시작하는 그 시점에도 통합된 민족 개념이 없었다. 틀락스칼텍인 입장에서 멕시코(아즈텍)[14] 자체가 그 열강이었고 틀락스칼텍인들은 아즈텍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즈텍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멕시코에서는 틀락스칼텍인들을 매국노 취급하고 있다. 이를테면 베라크루스에는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으며 악수하는 늙은 치코텐카틀의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의 이름이 '''아즈텍을 팔아넘기는 틀락스칼텍인들'''이다. 후세의 멕시코 국민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현대 멕시코가 아즈텍에서 정체성을 찾긴 하지만 실제 현대 멕시코인 혈통은 아즈텍인보다는 아즈텍에게 고기 취급 당하던 다른 부족들의 혈통이 더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즈텍인들은 코르테스의 정복과정에서 원한의 칼을 갈아온 동맹 부족민들에게 많은 숫자가 학살당해 후대에 혈통을 많이 남길 수도 없었다. 그 중에서도 틀락스칼텍은 코르테스에게 수만 단위 병력을 제공할 만큼 인구가 되었기에 현대 멕시코인의 핏줄에도 틀락스칼텍인의 혈통이 많이 흐를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잡아먹힌 이들의 후손'이 오히려 '잡아먹은 이들'을 옹호하고 자기 선조들을 배신자라 욕하는 것이다.
물론 몇몇 욕 안 먹는 틀락스칼텍인들도 있다. 바로 코르테스에게 반항하고 교수형당한 젊은 치코텐카틀[15] 로, 끝까지 동맹을 반대한 데다가, 스페인인과의 첫 교전에서 콩키스타도르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포위하기까지 한 업적을 세웠다. 포위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16] 결과적으로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사에서 유일하게, 소수의 원주민으로 그 코르테스에게 패배를 안겨준 젊은 치코텐카틀은 그 극적인 업적과 실패, 사망과 더불어, 배신자의 민족에서 나온 최고의 영웅이라는 드라마틱함 때문에 멕시코의 민족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다분히 근대의 것으로,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주장이다. 코르테스 편을 든 원인은 아즈텍 제국의 식인 등 폭정이다. 만일 아즈텍이 주변국들과 원만히 지냈다면 계속해서 들어올 서구 열강을 당해내지는 못해도 수백에 불과한 코르테스의 원정대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는 날 수만의 아즈텍인이 복수심에 가득찬 원주민 동맹군에 학살당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아즈텍 제국은 주변국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했고, 아즈텍 바로 옆에 자리한 틀락스칼텍인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막심한 자들이었다.
대대적인 문화 말살정책과 신화 날조로 잔혹행위를 정당화한 몬테수마 1세에 의해 인신공양의 규모가 전례 없이 커진 시점만 기준으로 잡아도 백수십 년간 틀락스칼텍은 평시에는 아즈텍 고위장교들의 갑옷을 비롯한 각종 공물을 만들어 바치느라 신음했고, 전시에는 자신들이 수탈당한 갑옷으로 무장한 아즈텍군에게 도륙당하고, 포로로 잡힌 이들은 도시로 끌려가 산제물이 되었다. 틀락스칼텍에게서 가장 용감한 전사들은 산 채로 심장이 뽑히고 사지가 잘려 아즈텍 고위층의 식탁에 바쳐졌다. 여인들은 가죽이 벗겨져 사제의 의복이 되었다. 어린 아이들은 갖은 학대와 고문 속에 처절하게 고통받다 목이 잘리고 그 피가 아즈텍의 토양을 적셨다.
스페인의 압제는 아즈텍의 멕시카인들에게 가해졌지, 틀락스칼텍은 스페인에게 압제를 당한 적이 없다. 되려 그 아즈텍에게 당했다. 그리고 통합된 민족 개념이 없었던 시대에 틀락스칼라 밖의 부족들은 아즈텍과 크게 다를 거 없는 남이었다. 증오스런 원수를 치는 데 협력한 대가로 자치권과 세금면제 혜택, 작위를 받아 200년 만에 고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 이들은 코르테스가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도 코르테스와 함께했는데, 이에 대한 감사로 코르테스는 오툼바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즈텍 총사령관의 깃발을 선물하며 '''영원한 동맹'''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실제로 지켜져 이들의 특권들은 스페인에게서 독립할때까지 유지됐다.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훨씬 자유로워진 21세기 들어 역사가들이 이런저런 지적을 하고는 있으나 멕시코의 몇몇 세력에서는 "아즈텍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제물로 바쳤으니 그 시대에 남녀평등을 실현한 선진국가"[17] 라 주장하면서 아즈텍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며 틀락스칼텍인들을 폄하한다.[18] 그러나 아즈텍 제국은 테노치티틀란의 정복전쟁으로 형성된 국가일 뿐더러 아즈텍 황실이 민족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피지배민족들을 인신공양의 희생양으로 삼아 이들의 반감만 더욱 키웠기 때문에, 아즈텍 제국 주민들 간에는 동족의식이 생겨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5. 기타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의 몬테수마 캠페인에서도 플레이 문명인 아즈텍의 주적으로 등장한다. 첫 시나리오를 제외한 모든 시나리오에서 등장하기에 오히려 스페인보다도 더 질기고 짜증나는 존재.
- 대항해시대 3에서 이벤트로 재현이 가능하다. 보통은 아즈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으로 바로 가는데 아즈텍 제국을 발견하면 황제 몬테수마 2세가 플레이어를 보고 놀라면서 '당신은 신인가?'라고 질문한다. 여기서 신이라고 대답하면 플레이어에게 제위를 선양하겠다면서 태양석과 금화 1만 닢, 그리고 플레이어 측 국가로 테노치티틀란 남쪽에 있는 도시 트라파를 넘겨준다. 신이 아니라고 하면 금화 2만 닢을 주지만 태양석도 도시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틀락스칼라에 먼저 들르면 도시 사람들이 신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면서 같이 아즈텍을 멸망시킬 것을 제안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실제 역사대로 아즈텍의 압제를 받던 도시국가들과 연합해 아즈텍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정복 플레이로 이어진다. 이 경우 대도시였던 테노치티틀란은 완전히 박살나 중소도시 멕시코로 변해 버린다. 연합을 거절하면 "맙소사, 신께서는 우리 보고 죽으라고 하신다!"라고 한다. 사실 테노치티틀란을 먼저 들러서 아즈텍을 발견하더라도 역사대로 코르테스가 결국 아즈텍을 멸망시켜 버린다.
-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아메리카스 캠페인에서 플레이 가능 세력으로 나오는데 주변 영토가 다 아즈텍에 둘러싸여 있어 심히 암울하다. 그래도 시작시 풀 군단 4개가 주어지고 아즈텍 군은 도시마다 소규모 군단이 주둔하니 각개격파로 쳐부수자. 원래 역사대로 뉴 스페인과 동맹 맺는 플레이도 도움이 된다. 사실 플레이어가 어느 쪽을 잡느냐에 따라 운명이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플레이어가 틀락스칼텍이라면 초기에 주어진 풀 군단으로 아즈텍을 각개격파해 버릴 수 있지만 아즈텍을 잡으면 흩어진 병력을 모아 1~2턴 내에 틀락스칼텍의 풀 군단을 뭉개버리고 멸망시킬 수 있다.
- 틀락스칼텍이 대표로 주목받을 뿐이지 아즈텍이 정복지에서 저지른 여러 횡포로 인해 이들을 증오하던 치치멕이나 마야계 부족들은 거의 전부가 코르테스와 협력했고 많은 혜택을 받았다. 당시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여타 멕시코 지역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아즈텍은 진짜 악마였고, 그로 인한 원한은 상상을 초월했다.
[1] 약 50명에서 200명 가량의 공동 대표가 의회를 구성했다.[2] 누에바에스파냐의 자치령이 된 후에는 사실상 스페인 국왕이 틀락스칼텍의 군주 역할을 했다.[3] 나와틀어로는 xōchiyāōyōtl(소치야오요틀)이라고 한다. 스페인어로는 guerra florida, 영어로는 flower war로 보통 번역된다.[4] 정글에 살던 원주민 기준으로 뉴멕시코와 텍사스 지역은 황야나 다름없었다.[5] 서쪽에 아즈텍의 경쟁국인 타라스칸 왕국이 있기는 했으나 청동제 무기와 산악 지형에 의지해 자기 땅이나 겨우 지키는 정도지 원정에서 아즈텍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6] 정치력이란 부분이 중요하다. 당대 콩키스타도르 치곤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코르테스는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가능한 현지 부족들과 협상하여 동맹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썼다.[7] 사실 그의 아버지인 늙은 치코텐카틀이 부족장이고 그는 전쟁지도자였지만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젊은 치코텐카틀은 아무래도 갑자기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온 스페인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고 끝까지 스페인 세력과의 동맹을 반대하다가 훗날 부족원들에게 잡혀 코르테스에게 압송되었고 반기를 들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8] 지금의 미국 뉴멕시코, 애리조나 주들. 이들의 상당수는 현지 백인과 결합하여 완전히 백인화하였다.[9] 스페인은 이 지역을 개발하여 농경지로 만들고 싶어했는데, 스페인 본토인들은 이 지역의 기후와 맞지 않았고 현지인들은 치치멕 등의 유목민이어서 복속시켜도 노동력으로 써먹기 힘들었다. 그래서 정주민족이었던 틀락스칼텍인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농경지로 개척하도록 한 것이다.[10] 잉카 제국 또한 스페인군이 잉카 제국의 착취와 학대에 이를 갈던 페루와 에콰도르, 칠레 등 잉카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남미 지역의 피지배 원주민 부족들을 앞세워서 잉카 정복에 나서거나 회유했을 정도였다.[11] 아즈텍처럼 가죽 벗기고, 피 뿌리며, 만 단위로 잡아들이는 인신공양의 극한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틀락스칼텍인들도 식인 풍습은 가지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동맹을 체결한 부족들에게 식인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딱 한번, 테노치티틀란 포위전 때 사기진작을 위해 아즈텍 전사자들의 시신을 동맹군 병사들이 가져가 포식하는 걸 허용했다. 정확히 말하면 허용이라기 보단 묵인에 가깝다. 틀락스칼텍에게 있어 코르테스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이자 소중한 동맹인 건 맞지만 신처럼 군림하는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 무려 200년 동안 쌓인 원한이다. 동맹군이 승리할 경우 아즈텍에게 가해질 보복을 막을 수 없고 어줍잖은 수의 콩키스타도르로 이 원한 어린 보복을 막으려 들었다간 자기들이 되려 끔살당할 수 있었다는 건 코르테스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12] 사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말과 지역 사투리 정도의 차이일 뿐 아즈텍과 틀락스칼텍인들은 서로 소통이 됐다고 한다.[13] 버스를 예로 들면, 멕시코 시티로 가는 버스는 있어도 케레타로로 가는 버스는 아르코 노르테(Arco Norte)가 개통되고 나서도 생겨나지 않았다. ADO와 IMASA 경계를 나누는 과정에서 틀락스칼라는 배제된 것.[14] 멕시코라는 국명은 아즈텍을 건설한 나와틀 부족의 분파인 멕시카 부족으로부터 따왔다.[15] 이건 원주민식 이름이고, 영어권에서는 치코텐카틀 2세라고도 부른다.[16] 콩키스타도르들을 포위한 상황에서, 동맹에 찬성한 오토미와 피노메 부족들이 군대를 빼버렸다. 하지만 남은 나와틀 부족만으로도 콩키스타도르의 10배 가까운 숫자였기에 치코텐카틀 2세는 승리를 자신하고 공격했지만, 빈틈을 포착한 코르테스에 의해 실패, 그대로 휴전을 맺게 된다.[17] 아즈텍 제국의 남녀평등이란 건 그냥 스파르타를 생각하면 편하다. 극도의 군국주의 사회로 모든 자유민 남성들을 전사로 육성하다 보니 전사가 될 아이를 낳는 임신과 출산이 성스러운 전투로 여겨져 여성들도 대우를 받은 것으로 역시 군국주의 사회였던 스파르타의 여성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타 폴리스 여성들보다 외부 활동이 잦았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주변 도시국가와 원주민들을 착취해 이룩한 군국주의 사회의 부산물이지 절대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의무교육기관인 칼메칵의 남녀 과목만 봐도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18] 현대 멕시코인 대다수는 아즈텍 제국 피지배민족의 후손이다. 진짜 아즈텍 제국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아즈텍 제국의 지배세력이었던 테노치티틀란 사람들의 후손인데 테노치티틀란 사람들부터가 아즈텍 제국 전체 인구 중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아즈텍 제국 피지배민족들의 복수로 대거 학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