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로마
1. 개요
로마 제국이 분열되고, 멸망하는 과정에서 '과연 누가 로마 제국을 계승한 나라인가?'에 대해 제기된 주장들이다. 지중해 지역을 천 년 넘게 지배한 로마 제국의 이름값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이 망해가는 와중에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서 흥기한 세력들은 로마 제국이라는 일종의 챔피언 타이틀을 얻고 싶어하였다. 자기네들의 주장만 늘어놓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병림픽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어느 나라가 짱인가?'라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반복 중인 떡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구주(歐洲, 유럽)에서 황제라고 부른 것은 나마(羅馬,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일이만(日耳曼, 게르만)과 오지리(奧地利, 오스트리아)는 나마의 옛 땅으로서 황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덕국(德國, 독일)은 일이만 계통을 이어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의관과 문물은 모두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니 그 계통을 이어서 칭호를 정한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일이만과 오지리가 나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로마 계승 의식은 혈통적인 계승이나 민족주의 사관의 계승 의식과 다르다. 예를 들어 오토 1세 시절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민족적 의미의 로마인과 랑고바르드인, 프랑크인 등을 구분했고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총대주교좌를 유지하고 정교회를 법적으로 보호하였다. 즉 오토 1세의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나 오스만 제국 술탄의 '로마 황제' 칭호는 '서방의 지배자', '지중해의 패자', '기독교[2] 의 보호자'라는 의미이지 혈통 조작 같은 게 아니다. 그러므로 제3의 로마란 개념은 당대의 타이틀이자 통치, 대외적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제3의 로마'라는 명칭을 처음 쓴 것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당대 대공이었던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조이 팔라이올로기나와 혼인한 명분을 앞세워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로마 노바)에 이어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자칭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인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나 제2차 세계 대전 등에서는 각자 동로마 제국의 후계국을 자칭한 러시아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번외로 나폴레옹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해체 이후 서로마 제국, 신성로마제국에 이은 세 번째 제국을 주장한 사례들이 있는데 프랑스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당된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이미 로마는 서양사 그 자체라는 것으로 결론이 나와 있으며 이는 서양의 일반 대중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다. 따라서 역사학계에서는 스스로를 제3의 로마라고 주장했던 나라들의 로마 계승 담론을 중립적으로 연구하는 경우는 있어도, 제3의 로마가 어디느냐 하는 것을 진지하게 따지지는 않는다. 고대 로마가 민족적인 모습을 탈피하기 시작한 건 이미 공화정 말기에서부터 단초가 있었고, 3세기에 가면 로마는 이미 행정적인 기능을 거진 상실한 지경에까지 가는데 이후로도 로마 제국은 천 년 넘게 존속했다. 따라서 로마의 영역 내에 있던 모든 국가와 민족들은 한때나마 로마인이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어느 민족이나 국가가 로마의 적통이고 다른 민족은 짝퉁이니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21세기 역사학계는 민족주의 감정이나 개인의 기호에 좌우될 정도로 그렇게 만만한 분야는 아니다.
청나라에 의한 명나라의 멸망 이후 동아시아 각국의 소중화 사상과 비교해 볼 만하다.
2. 동로마 제위 계승
마지막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죽은 후, 그 마지막 혈통이었던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는 황제 직위를 프랑스의 샤를 8세, 스페인의 이사벨 1세&페르난도 2세 부부왕 등에게 팔았으나 정작 프랑스나 스페인 왕들은 이 칭호를 거의 쓰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에 위치해 있던 그리스인들은 19세기까지 스스로를 '''로마인'''이란 뜻으로 로메이(Ρωμαίοι)라고 불렀다. 오히려 현대 그리스어로 자신들을 부르는 '엘리네스'(Ελληνές)는 중세 시대에는 '''이교를 믿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쓰였다.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 터키인들은 그리스인들을 '로마인'이란 뜻으로 룸(Rûm)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이 용법은 남아 있어서 터키 국적을 갖고 있고 터키 내에서 거주하며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은 룸라르(Rumlar), 터키 내에 거주하며 이슬람을 믿는 그리스인은 기리틀리(Giritli), 그리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인은 유난(Yunan)이라고 칭한다.[5]
2.1. 불가리아
역사상 최초로 차르 칭호를 사용한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칭제한 것에는 그의 아버지인 칸[6] 보리스 1세의 개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보리스는 외교적 고립[7] 에서 벗어나는 것과 종교적 통합[8] 이라는 2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는데, 밀라노 칙령 이래 로마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세속 군주 가운데 서열 1위였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형식상으로나마 로마 황제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9] 그래서 이전까지 대등한 관계였던 동로마 황제를 비록 명분일 뿐이지만 불가리아 칸보다 상위의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불가리아인들의 저항 때문에 기독교화 정책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저항의 중심에 선 인물은 바로 보리스의 첫째 '''아들''' 블라디미르였다. 블라디미르는 보리스의 재위 기간 중에는 기독교화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자신에게 양위하자 본색을 드러내고 반기독교 정책을 펴며 이교도 국가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보리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장남을 폐위하고 동로마식(?)으로 눈을 뽑아버린(...) 후, 주교였던 삼남을 환속시켜 즉위하도록 했으니 그가 바로 '''시메온 1세'''였다.
블라디미르의 폐위와 시메온 1세의 즉위는 불가리아의 기독교화가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시메온 1세에게 한 가지 과제를 던져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라는 명분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한 해결책은 바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했던 것처럼, 로마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었고, 913년에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면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의 칭제는 기독교 세계의 성직자 서열 1위였던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은 카롤루스의 칭제보다도 명분이 떨어졌기에, 그는 동로마의 어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황제의 장인으로서 공동 황제가 됨으로써 진짜 로마 황제가 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섭정단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콜라오스와의 밀약을 맺음으로써 실현되는 듯했으나, 니콜라오스가 쿠데타로 실각[10] 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러자 시메온 1세는 또다시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동로마 해군 제독 출신의 로마노스 레카피노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이 되어 공동 황제 로마노스 1세로 즉위한 뒤에는 더더욱 그 야망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시메온 1세는 무력으로 로마노스 1세를 축출하기 위해 이슬람 세력인 파티마 왕조를 끌어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로마노스가 파티마 왕조의 사신을 회유하면서 실행하지 못했고, 더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시메온 1세는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것을 포기하고, 로마노스의 제위를 인정하는 대신, 로마노스는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은 묵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시메온 1세은 비록 진짜 로마 황제가 되진 못했지만, 황제 칭호를 인정받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가 된다는 목표는 달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유일한 불가리아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시메온 1세가 이룩한 전성기는 동로마의 혼란기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기에, 시메온 1세 사후 동로마가 중흥을 이루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1014년의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불가리아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클레이디온에서 차르, '사무일'을 제압한일명 '불가록토노스' 바실리오스 2세[11] 는 여유롭게 불가리아를 천천히 말려죽이면서 1018년에 불가리아 제1제국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했다.
이후 불가리아는 100년 이상 동로마의 지배를 받았는데, 동로마는 보편 제국답게 불가리아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같은 로마인으로 대했으나, 불가리아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차르를 자칭한 인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반란은 동로마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동로마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마누일 1세가 사망한 후 즉위한 황제들이 실정을 거듭하자 기회가 찾아왔다.
1185년에 막대한 세금과 부역에 반발하며 차르를 칭하고 봉기한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 형제는 진압에 나선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100년 이상 지속된 동로마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쟁취하고 불가리아 제2제국을 건국했다.
1331년부터 1371년까지 재위하며 불가리아 제2제국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끈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의 시대에, 불가리아의 수도 터르노보는 화려함을 인정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라고 인정받을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이후 이반 알렉산더르도 터르노보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여기게 되었는데 ,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말은 곧 '제3의 로마' 가 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을 계승했노라고 자처한 인물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가리아 제2제국은 무너졌다. 이반 알렉산더르가 첫 번째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 이반 슈랏시미르가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황후로 맞아들인 것에 반발하여 독립 왕국을 세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반 알렉산더르의 뒤를 이어 정통 황제로 즉위한 이반 시슈만은 즉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데다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강력한 지방 귀족이 도브루자 공국이라는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 형 이반 슈랏시미르는 이반 시슈만을 돕기는커녕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매일반이었고, 결국 삼분된 불가리아 제2제국은 하나씩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다.
이후, 1393년에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투르노보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 러시아로 망명한 불가리아 성직자들이 이 개념을 소개하여 러시아도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불가리아는 거의 50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878년에 불가리아 공국이 수립되어 부분적인 독립을 승인받았고, 1908년에 불가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해외에서는 불가리아를 왕국이라고 칭하고 불가리아의 군주를 왕이라고 불렀으나, 불가리아인들 스스로는 그들의 군주를 차르라고 부르면서 불가리아 제국의 계승을 표방했다.[12] 그러나 불가리아 왕국은 2차 대전에서 추축국 편에 참전하였다가 패전하여 마지막 차르가 폐위됨으로써, 건국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말았다.
2.2. 라틴 제국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킴으로써 동로마를 일시적으로 멸망시키고 수립한 라틴 제국도 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는데, 정식 명칭이 '''로마니아 제국'''이었다. 여기서 로마니아는 동로마 제국의 별명으로 '''로마인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고, 이를 통해 역설적이지만 동로마를 멸망시킨 세력이 동로마가 로마 제국임을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서방 세력이 카롤루스의 대관식 이래 동로마를 '그리스인들의 제국'이라고 폄하하던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좋든 싫든 동로마가 로마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고, 동로마의 땅을 정복하고 로마를 계승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동로마가 로마임을 몸소 입증한 것이다.
그런데 라틴 제국은 여기에 언급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안습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건국된 지 1년 만인 1205년에 초대 황제 보두앵 1세가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13] 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황제 피에르가 동로마 유민들이 건국한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의 군대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 안습한 역사가 계속되었다. 결국 라틴 제국은 4차 십자군의 물주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의존하며 간신히 연명하다가, 건국 60주년도 되기 전인 1261년에 동로마 유민들의 나라인 니케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이 부활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직접 라틴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진 않았으므로, 본 문서에서 논하는 국가적 차원의 로마 계승 의식과는 무관하다.
2.3. 세르비아
중세 세르비아도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했는데, 세르비아는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력을 크게 키운 왕 스테판 우로시 4세[14] 가 1346년에 황제를 칭했다. 그냥 단순히 '세르비아 황제'라면 별문제가 아니었겠지만, 그 칭호가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였기에 세르비아는 제3의 로마를 칭한 나라가 되었다.[15] 실제로 그는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려고도 했지만, 세르비아와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은 피하려는 베네치아의 반대로 백지화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 제국은 1355년에 뒤를 이은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아직 어렸던데다가 무능했기에 1371년에 그가 죽으면서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세르비아의 지방 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세르비아 공국을 창건하고 그 아들인 스테판 라자레비치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나름 번영을 누리지만, 그 다음 대인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죽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됐다.
2.4. 오스만 제국
한편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 2세 역시, 로마 황제(Kayser-i Rûm)를 칭하며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는 두 가지였는데, 먼저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세력이 줄곧 보아온 쪽은 서유럽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당연히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권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라 부르며, 프랑크인들이 보내온 사자가 '''그리스의 왕''' 따위 운운하면 참교육을 시전해주었다. 이슬람권 입장에서도 중세 로마는 예언자 무함마드 시절부터 지목해 온 '''신학적 차원에서 언젠간 정복해야 할 거대한 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제도적, 과학적 측면에선 또 스승뻘인 문명이기도 했기에 적으로서 권위라도 중세 로마의 로마로서 권위를 떨어뜨리는 건 본인들에게도 용납할 수 없었다. 즉 '로마제국의 수도를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수도로 정한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 '이스탄불'로 이름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으나[16]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일단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10세기 아랍의 기록에 이미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도시로', 또는 '그 도시에' 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이스 틴 폴린(εις την Πόλιν)' 에서 유래한 것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전에도 이미 튀르크인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었다. 오늘날처럼 이스탄불이 공식 명칭이 된 것은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인 1930년의 일이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에 가장 널리 보이는 명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을 오스만 터키로 발음한 '콘스탄티니예(Konstantiniyye)' 이며, 이 밖에도 이스탄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스탐불', '스탐볼',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인 '이슬람볼' 등이 쓰였다. 18세기 이후 오스만인들 스스로가 프랑스어로 표기한 이스탄불 지명을 보면 Constantinople(콩스탕티노플) 혹은 Stambul(스탕불)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한성이 서울로 자주 불렸음에도 공식명칭은 한성이었듯이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공식 명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이었고, 이스탄불은 비공식 애칭 정도일 뿐이었다.[17]
두 번째 근거는, 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따져 보면 사실 먼 친척이라는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2대째 군주인 오르한은 1346년에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의 딸과 결혼한 일이 있는데[18] , 오르한이 자신의 조상인 만큼 동로마 황녀도 자신의 조상이고. 즉 동로마 제국 황실은 자신의 친척이라는 주장이다.[19]
오스만에서는 아시윽파샤자데(Âşıkpaşazâde), 기독교 측에서는 동로마 망명 역사가였던 테오도로스 스판두니스(Θεόδωρος Σπαντουνὴς)를 비롯한 15세기부터 전해 오는 역사서들은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 북서쪽 비티니아 지방 일대에서 활동하던 네 명의 베이가 연합하면서 세워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네 명 중 한 명이 바로 지도자 격이자 이후 오스만 황가의 시조가 된 오스만 가지(Osman gazi)이고, 다른 한 명은 투라한 베이(Turahan bey), 나머지 두 명은 미하일 코세스 베이(Mikhael Kosses bey)와 에브레노스 베이(Evrenos bey)라고 전하는데, 미하일 코세스나 에브레노스 모두 그리스어로 된 기독교식 이름이다.
건국 전승 자체가 이러할 만큼 오스만 제국은 성립 바로 전만 해도 동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 중 하나였던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통혼과 개종을 통해 수많은 동로마인들을 흡수하여 계승 의식을 주장했다. 그 와중에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상당히 유연하게 이루어졌고, 심지어 렘노스 섬의 영주들을 필두로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 동로마계 영주들은 '''15세기 말까지도 개종을 안 하면서''' 술탄에게 그 지위와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받으며 버틸 만큼 최대한 마찰 없이 동로마 제국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흡수하였다.
오스만 제국 내의 동로마 세력 역시 오스만 제국을 동로마 제국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는 오스만 왕가의 기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첫번째 설은 오스만 1세의 할아버지인 쉴레이만 샤가 콤니노스 왕조의 후예라는 것이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조카인 요안니스 콤니노스가 소아시아 원정 중 음해를 당해 셀주크 제국으로 망명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인 카메르가 후일에 쉴레이만 샤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설은 오스만 왕가가 동로마 제국의 미천한 농민의 후예라는 것이다.
위의 두가지 이야기 모두 신빙성은 없지만 첫번째 설은 동로마 귀족 출신들 사이에서 퍼진 내용이고, 두번째 설은 동로마 평민 출신의 예니체리 사이에서 퍼진 내용이다. 이를 통해 동로마 제국의 유민들 역시 오스만 왕가의 기원을 동로마 제국에서 찾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연구는 이곳에 소개되어 있다. 이밖에 모굴한국이나 히바 한국 등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주로 룸(Ruhm / Rum)으로 칭했다.
반면 서유럽인들은 대체로 오스만을 로마 제국의 후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오스만같은 이교도 국가는 기독교 국가인 로마의 정통성을 계승할 수 없었다. 다만 그리스 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이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고 보았는데, 당장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제국 내 반가톨릭 성향의 중심인물이었던 옌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를 임명한 일이었으며 원래 로마 황제가 주는 은십자가까지 손수 장만해서 제공했다.
그러나 위의 오가사와라의 주장처럼 오스만 제국이 로마 계승성을 표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스만에서 로마에서 유래한 칭호를 과시용으로 쓰기는 했지만 그것을 로마 계승 의식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스만 시절에도 오스만의 황제는 임페라토르나 바실레우스를 칭하는 게 아니라 이슬람의 칭호인 술탄과 튀르크 고유의 칭호인 ‘칸’을 칭했었다. 자신들도 진지하게 자기들이 멸망시킨 나라를 계승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또한 메흐메드 2세 이후의 술탄들이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로 “로마의 카이사르(카이세리 룸)”라는 칭호(당연히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유래한 말이다)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제 비석 등에는 “카이사르”라는 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또한 “카이사르”는 하나의 문장 안에서 고대 이란의 왕을 가리키는 말인 “키스라(Kisrā)”와 대구로 쓰일 때가 많았는데, 이를 보았을 때 “카이사르”란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동서 바다의 왕을 겸할 만큼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자의 좁은 식견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을 나라로 적극 평가하는 문서 역시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의 지배층이나 문인에게 오스만 제국이란 아바스 왕조에서 시작된 무슬림 왕조와 오구즈 칸에게서 시작된 튀르크계 왕조를 계승하는 존재였을 뿐, 거기에 로마 제국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카이사르는 칸이나 술탄보다 사용 빈도가 훨씬 더 낮았다.
≪오스만 제국≫ - 오가사와라 히로유키
현대의 터키 공화국은 터키의 로마 계승성을 부정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과 단절하고 근대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계승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터키 민족주의를 통한 국가 수립 및 통합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문서를 참고할 것. 현대 터키 공화국은 로마 제국보다도 오스만 제국과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다만 공화국 시대에도 문화적으로는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계승성을 인정하기도 했고, 터키 관광청 같은 정부기관의 홍보서적이나 학술 서적에서도 이에 대한 담론들을 다루기는 한다.
2.5. 러시아
근현대에 보여준 강대국의 면모로 동로마계 후계제국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례. 구글에 '제3의 로마'를 검색하면 러시아를 말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러시아의 이반 3세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부르며 동로마 제국을 계승했다 주장했다. 당대의 러시아가 로마 제국의 뒤를 이었다고 주장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인데, 먼저 이반 3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결혼 전에는 조이 팔레올로기나)가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이었다. 보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의 신하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20] 의 공작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이었는데, 그 딸이 소피아였던 것.
사실 이 결혼은 당시의 교황이 제안하여 이루어졌다. 당시 토마스와 그 가족은 1460년에 모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함에 따라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교황으로서는 러시아에 가톨릭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최종적으로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노린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역효과가 났던 셈이다.[21]
이반 3세가 내세운 또 다른 주장은 종교가 같다는 것이었는데, 러시아의 국교인 정교회는 키예프 공국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재위: 980~1015)가 동로마 황제의 누이를 대공비(妃)로 맞이하며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대주교좌가 총대주교좌로 위상이 격상되고, 동로마 제국과 여러 동유럽 정교회 왕국들이 본질적으로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하고 상하관계에 놓이면서 러시아는 독립을 지킨 정교회 세계에서 유일하게 건재한 곳이 되었다.
이 외에도 로마가 7개 언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모스크바도 7개의 언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근거 중 하나로 썼으며, 근거로 실질적으로 활용되진 않았지만 러시아 역시 동로마 멸망 후 동로마의 유민들을 흡수-보호하였다는 점도 고려할 만 하다.
이반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칭하며 동로마 제국의 관직명이나 궁정 의례 등을 대거 받아들였으며, 차르라는 칭호를 러시아 군주의 칭호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들인 이반 4세가 처음으로 차르라는 칭호를 썼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반 3세는 국내적으로만 차르라는 칭호를 썼을 뿐 그것을 대외적으로도 사용하지는 못했다. 이걸 대외적으로도 공식화한 사람이 이반 4세.
이후 표트르 1세의 대에 이르러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교황을 제외한 총대주교들의 인정을 받음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방식으로 동로마의 제관이 러시아 차르의 머리 위에 올라가게 된다. 종교적 중립성을 띄고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이 가톨릭에 의한 서로마의 계승자라면, 이쪽은 정교회에 의한 동로마의 계승자가 되는 셈. 물론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동로마 황제 주장을 처음에는 대놓고 무시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국력을 차츰차츰 키워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파리를 점령한 뒤부터는 외교 문서에도 꼬박꼬박 황제라고 써주면서 대충 황제 대접은 해주었다.[22]
이후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여섯 차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 주장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는데, 예카테리나 2세는 그리스 계획을 표방하여 새로이 정복한 옛 크림 칸국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오데사,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등 그리스식 이름을 붙였다. 또한 이교도의 폭정 하에 신음하는 발칸 반도의 정교회 신자들의 해방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복을 천명하며 여섯 번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러시아군은 최종목표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가까운 지점까지 진군했다. 마지막 전쟁인 6차전(1877~1878)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서쪽으로 불과 16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혁명으로 전복 될 때까지 러시아 제국 영토에서 옛 로마 제국 영토였던 지역은 동로마 제국에서 변방지역인 크림반도 남부 일대, 조지아, 아르메니아 지역이었다.
러시아 혁명 후 적백내전이 터지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밀린 백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제4의 로마로 선포하기도 했다.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세운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이 로마의 계승성을 주장하지 않았고 쌍두독수리 문장도 낫과 망치로 바꿔버린다. 그러나 암암리에 러시아인들의 계승 의식 자체는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 재미있는 점은 막상 로마의 계승성을 주장하지 않았던 소련 시절이 러시아 역사에서 유일하게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과거의 로마 제국 같은 패권 제국에 가장 가까운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공산권의 맹주국으로서 가진 정치적인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으로도 소련식 공산주의 문화가 지구 절반에 퍼져 있던 시기다.
현재의 러시아 연방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신성 로마 제국을 자처하지 않는 것처럼 로마라고 스스로 지칭하지 않지만 러시아 제국에서 쓰는 쌍두독수리 문장을 부활시키는 등 소련 시절 보다는 로마의 연관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3. 서로마 제위 계승
3.1. 동로마 제국
의외로,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킨 자로부터 황제의 권한을 이양받아 '''서로마의 정통 제위를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로마 분열기에도 한쪽의 황제가 공석이면 다른 쪽의 황제가 다음 황제를 정하는 전통이 있었기에, 이러한 퍼포먼스가 없더라도 '''서로마 제국위는 자연스럽게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다.'''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토 재정복 사업을 통해 서로마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한 시기가 있었으며, 라벤나에 서로마의 본토였던 이탈리아를 담당하는 총독부를 설치하고 지배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으로 인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동로마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8세기에는 라벤나 총독부까지 함락되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이 남부로 축소되었다. 이후에도 이탈리아 남부는 지속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지만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인해 위태로워졌고, 11세기에는 이슬람 대신 노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다. 그리고 1071년에 로베르 기스카르에 의해 동로마의 마지막 이탈리아 영토인 바리가 함락되었고, 이후 동로마는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 남이탈리아 탈환 시도를 하긴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3.2.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상 파괴 운동 등으로 교황과 마찰을 빚자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씌워줌으로 인해 서로마 제위가 이중계승되게 되며 이와 관련된 문제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간의 갈등이 빚어진다. 교황 측의 근거인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는 이후 위조문서임이 드러났기에 이는 사실상 교황에 의해 서로마 제국위가 새로 만들어 버린 셈인데, 문제는 황제위를 만든 교황은 동서 대분열 전까진 동로마 제국 라벤나 총독부에 성직자 임명 등을 보고하는 등 동로마 제국에 종속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동서 대분열을 통해 동로마와 로마의 종속 관계가 끊어져 이러한 종속 관계는 끊어지게 된다.
아무래도 성립 배경의 특성상 볼테르를 비롯해서 후대인들에게 반쯤 조롱이 되어버린 감도 있지만, 그래도 로마市를 포함한 당대 서방인들에게는 로마로 대접받기도 했다. 자세한 건 신성 로마 제국/오해 문서 참조.
3.2.1. 프랑스 제국
아이러니하게도 신성 로마 제국을 무너트린 나폴레옹의 제국이 프랑크 왕국 시절의 신성 로마 제국위 계승으로 정당화되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후예가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셈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프랑스 제국을 프랑크 왕국의 후계국이라고 자처했으므로 억지로나마 서로마 제국 계열로 분류할 수도 있다. 혁명 프랑스를 토대로 한 막강한 국력으로 유럽을 평정했기에, 힘으로 주변국을 찍어누르고 제국의 칭호를 얻은 국가라 할 수 있다.
서유럽에선 이전에도 제국을 칭할 법한 강대국들이 많았지만, 프랑크 왕국 이후로 한 국가가 유럽으로 인지되던 지역의 거의 전부를 완전히 압도했던 적이 없어서 함부로 황제의 칭호를 주장하지 못했다. 예외적으로 가톨릭의 공인을 받은 독일 제후들이 있긴 하지만, 이는 상당히 예외적인 자리였다. 나폴레옹 이전의 프랑스 왕국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자리를 노렸으나, 그 때마다 독일 제후들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견제를 받아서 실패했다.
그런데 혁명기 프랑스는 독보적으로 강했고 혼자서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힘으로라도 제압할 수 있었기에 황제 칭호를 교황에게 강요하여 가져온 것이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황제 칭호를 칭하는 근거가 지정학적인 과거 프랑크 왕국의 위치에 프랑스가 있다는 점과 순전히 '압도적인 군사력' 뿐이고, 혈통이나 정치체계 계승을 통해 갖춰지는 정통성도 없었기 때문에 위에서도 언급했듯 주변국들이 참칭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나폴레옹 시대 이후 로마 제국의 후예를 함부로 자칭하는 분위기는 수그러들었지만,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편법으로 황제를 자처하는 식민 제국 국가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서 '황제 인플레 현상'이 19세기 이후에 벌어지게 된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뒤 인도 제국을 수립해서 대영 '제국'을 자처한게 좋은 예이다.
3.2.2.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의 압력을 받아 해체된 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는 신성로마제국의 계승을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부터 합스부르크 황가는 오스트리아 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쓰고 있었다. 오해하기 쉬운데 합스부르크 왕가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사실상 세습 독점하다시피 했어도, '합스부르크 왕조=신성 로마 제국' 그 자체는 아니었다. 명목상으로나마 합스부르크 왕가가 '선거'를 통한 황제에 추대된 일종의 동군연합 형태로 존속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복잡한 부분이니 신성 로마 제국 문서를 참고할 것.
그런데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 해산을 선언하게 된 마당에 다시 황제 칭호를 쓰기는 조금 뭣하니 적어도 그것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를 내세워 1815년의 빈 회의 이후에 결성된 독일 국가들의 회의기구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 되어 독일 통일을 주도하려 했지만, 보오전쟁에서 패하며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 연방에서 축출된다. 그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개편한 오스트리아는 1차대전에서 패망하고, 군주제 폐지와 영토 상실을 겪으며 사라진다.
여담으로 의외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24] 가문은 동로마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혈통이 모계로나마 섞여 있긴 하다. 바로 몬페라토 후국을 계승했기 때문인데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8세의 딸 비올란테가 이리니라는 이름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후 이리니의 남동생으로 몬페라토 후작이 된 조반니 1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버려 남계 후손이 없어지자 몬페라토 후작위는 안드로니코스와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돌아갔고, 그 후 몬페라토 후국은 약 200년간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는데 1533년, 몬페라토의 팔레올로고스 가문도 남계 후손이 끊겨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9세의 딸이었던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는 만토바 공작이었던 페데리코 곤차가와 혼인하여 몬페라토 후작위는 곤차가 가문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후 페데리코 곤차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는 로렌 공작 앙리 2세와 혼인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프랑수아즈는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증조모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아주 미약하게나마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이걸 내세운 적이 없으며 동로마보다는 서로마, 신성로마제국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편이었다. 다만 동로마 황실과의 혼인으로 동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오스만의 사례에서 볼 때 오스트리아도 나름의 명분을 주장할 여지는 있었다.
3.2.3. 독일 제국
1871년에 독일을 통일한 독일 제국은, '카이저' 라는 칭호[25] 를 사용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뒤를 이었노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주장들과는 달리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가톨릭 군주가 통치했던 서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독일 황제는 개신교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프로이센에게 군사적으로 털렸다지만, 최소한 독일계 가톨릭 국가들의 맹주 노릇은 하던 오스트리아를 빼놓은 통일이라는 점에서도 굉장히 까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독일주의 논의는 하필이면 훗날 나치와 엮여버리는 바람에, 2차대전 이후는 거의 금기시되고 있다. 따라서 현 독일연방공화국은 로마의 계승을 전혀 주장하지 않고 있다.
3.2.3.1. 나치 독일
나치 독일은 독일 민족국가의 적통임을 주장하며 신성 로마 제국을 제1제국, 독일 제국을 제2제국, 자신들을 제3제국이라고 주장하였다.
안슐루스를 통해 오스트리아와 하나가 되면서 독일계 양대 국가를 통일하였기 때문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황제도 없고, 총통이던 히틀러는 종교관이 의심을 받으나 가톨릭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으며, 나치 독일의 패악질로 인해 깔끔하게 묻혔다. 게다가 당시 나치는 독일 민족국가의 적통임을 주장하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4. 기타
4.1. 이탈리아의 주장
한편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본토였다는 것과 오스만 제국과 유사하게 로마를 수도로 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먼저 이탈리아 통일 당시의 운동가인 주세페 마치니의 구호 가운데 '황제들의 로마 다음에 교황들의 로마가 있었고, 이제 인민들의 로마가 올 것이다' 라는 것[26] 이 있고, 마치니는 이 구호를 내걸고 공화제로서의 이탈리아 통일을 주장하고 튀니지를 식민지화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이탈리아가 지중해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무솔리니가 이것을 차용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제3의 로마(Terza Roma)' 라고 했는데, 황제의 로마와 교황의 로마 다음에 파시스트 로마가 도래했다고 연설한 것. 그리고 역시 마치니의 주장을 빌려와 영토 확장을 부르짖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했다.
한편 '''로마 공화국'''의 정체성을 계승했으며, 이 유지를 자국이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공화정 로마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저서에서 알 수 있듯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제국으로서 로마가 아닌 공화국 로마의 가치를 지향했던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은 상당히 유서 깊으며 영향력 있는 지식인 세력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이나 14세기 로마 민중 봉기의 지도자였던 콜라 디 렌초처럼 혈통, 권위, 국력, 지정학적 요소 등으로 연속성을 주장했던 위의 군주국들과는 다른 의미로 로마의 공화주의와 시민 중심의 정치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27][28]
현 이탈리아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하지 않고 있으나 위에 나왔듯이 민간 대중 사이에서의 로마에 대한 계승성과 자부심은 강하게 남아 있다.
4.2. 그리스의 주장
19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 왕국은 스스로를 동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발칸 반도 남쪽 끝부분의 영토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인'이 살고 있는 지방 모두를 우리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를 '대그리스주의'. 또는 당시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을 따라 '위대한 이상(메갈리 이데아, Μεγάλη Ιδέα)'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리스인' 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역사적, 인종적으로 그리스와 관련된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로 잡았다는 것. 이에 따르자면 오늘날 그리스는 물론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 존재하는 소아시아 해안은 물론이며 그리스인이 숨어살던 카파도키아 고원과 그리스계 폰투스인이 사는 폰투스까지 모조리 정복해야 한다. 즉 발칸 반도 남단 전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해야 하는 셈. 바로 아래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대국민회의와 전쟁을 벌여 아나톨리아를 탈취하려 했던 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나왔기 때문. 이것은 터키 민족으로서는 지극히 곤란한 것이었는데, 대그리스주의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물론 멀리는 트레비존드와 안티오키아까지 점령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터키인의 거주지역과 완전히 겹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잔당을 모아서 반격한 아타튀르크에 의해서 분쇄 되었고 신생 터키와의 협상을 통해서 인구교환을 통해서 소아시아 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철회한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또한 당시 영국군이 주둔중이라는 특성상 점령에 실패하여 새 로마를 점령하는 것 또한 실패하였다.
현대 그리스에서는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 비잔티움 제국)'나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동로마 제국)' 같은 표현이 쓰인다.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후술하지만 로마와 연관이 되는 동로마 제국조차도 잘 안 쓰이고, 그냥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해놓은 걸 볼 수 있다. 위의 '바실리아 톤 로메온'이란 말은 그냥 '로마 제국' 정도의 뜻이라서 현대 그리스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그냥 '로마 제국'으로 칭해 버리면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2세기 중반(BC 146년)[29] 에서,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하는 1830년까지 무려 2천 년 가까이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으로 보일 수 있다. 현대 그리스의 공식 입장은 대체로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 계승성을 강조한다. 이는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화된 국가라기보다는 다민족 제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최근 학계 연구 성과와는 대치되는 주장이다.
현대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로마성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오스만 제국의 다문화적인 모습은 부정하는 현대 터키인들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4.3. 루마니아의 주장
루마니아는 자국어로 '''로므니아''', 영어로 '''Romania'''[30] 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의 땅'''을 뜻하며, 동로마 제국의 별명이며 라틴 제국의 정식 명칭에 사용된 명칭인 '''로마니아'''와 일맥상통하는 명칭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루마니아는 국호에서부터 대놓고 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는 나라인데, 그 근거는 루마니아인이 고대 로마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에 속하고, 루마니아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로마 계승 의식은 루마니아 국가에서도 나타나는데, '''아직도 이 핏줄 속에 흐르는 로마인의 피를'''이나 '''전투의 승리자가 된 트라야누스의 이름이 있음을'''이라는 가사가 대표적이다.
한편 루마니아는 로마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로마에게 정복당한 선주민들의 나라인 다키아 역시 계승했음을 주장하고, 로마군에 저항하다가 자결한 다키아의 마지막 왕 데케발루스를 민족 영웅으로 추앙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금의 루마니아의 정체성은 아우렐리아누스가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면서 남겨진 로마 정체성을 가진 다키아 사람들이 현 루마니아 지역에 남아서 만들어진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둘의 계승성을 주장한다 하여도 심하게 모순되지는 않는다. 이런 나라들은 유럽에 무수히 많고, 아랫동네인 불가리아에서 트라키아인, 남슬라브족, 불가르족을 자신들의 3대 조상으로 여기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4.4. 특이 사례 1- 미국
미국은 로마 제국의 계승과는 전혀 무관한 근대의 신생국이고 미국 스스로도 대내외적으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적이 없다. 국장과 같은 상징물이나 표어 등에서 로마의 그것을 따라한 흔적은 약간 있으나 어디까지나 단순한 모방 및 변형에 불과하며 진지하게 로마의 정통성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국가의 위치와 성격 면에서 로마와의 유사성을 진지하게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다. 로마 공화정의 정치 요소를 미국의 정치 체계가 근대식으로 계승하였음은 물론이고 다민족-다인종 사회를 기반으로 한 보편 제국이란 성격을 똑같이 가지고 있으며 압도적인 국력을 통해 이룩한 미국 중심의 1극 패권 체제인 '팍스 아메리카나'는 로마 제국의 그것인 '팍스 로마나'와 사실상 동일하다.
이 때문에 학계에선 미국을 '21세기의 로마'로 표현하는 사례가 많다. 즉 위에 언급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다른 국가들이 통치 및 외교상의 이데올로기이자 정통성이란 명분의 성격이라면, 미국은 그 실질적인 위치와 위상 면에서 로마와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5. 특이 사례 2- 유럽연합
유럽연합 역시 통합의 기원은 로마제국의 역사성과는 전혀 무관하며, 유럽연합 스스로도 대내외적으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적이 없다. 허나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다시 유럽이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면서, 유럽연합이 장차 새로운 로마제국의 형태를 띌 수 있다는 진지한 분석들이 많았다. 유로화가 등장하고 유럽의 통합 과정과 그 효과가 특출하게 나타났던 1990년대 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자주 나왔던 분석이다.
그러나 그리스 경제위기를 비롯한 유로화 사태, 그리고 영국의 EU 탈퇴인 브렉시트를 거치면서 유럽연합이 과연 성공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다. 이로 인해 유럽연합과 로마의 비교는 수그러들고 있다.
한편 유럽연합 내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매우 커지면서 유럽연합이 독일의 '제4제국'이 되어가고 있다는 다른 방향의 주장도 있다. 본래는 소설가와 음모론자들이나 하던 주장이었으나 이후 반 EU 성향의 극우 정치인들도 이 표현을 사용하며 독일의 영향력을 비판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유럽연합 문서 참조.
5. 여담
- 붕당의 이해 버전 #
- 뜬금없이 대한민국이 진정한 로마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드립도 있다. 본 문서에 계속 나오듯이 이 제3의 로마란 주제는 역덕후 사이에서 끊이지 않고 재생산되는 떡밥이자 밈이 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아예 더더욱 막나가서 한국까지 후보로 등장시키는 것. 물론 이 지경까지 가면 진지한 논쟁이 아니라 그냥 개드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