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진(秦)나라가 실정하자 진섭(陳涉)이 먼저 일어났다. 이어서 천하의 호걸들이 벌떼처럼 그 뒤를 따라 서로 다투었으니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 그러나 당시 항우는 한 치의 영토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진나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들판에서 일어나 세력을 잡고 3년 만에 다섯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멸했다. 그는 천하를 나누어 휘하의 장수들을 왕과 후에 봉했으며, 모든 정령은 그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패왕이라 칭했으니, 비록 그의 권세가 끝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그와 같은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1. 개요
기원전 206년 음력 2월, 당시 중국의 패권을 장악했던 초(楚)나라의 항우가 취한 일련의 분봉(分封) 조치.
2. 배경
동아시아의 정치 형태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을 왔다갔다하며 발전해 왔다. 고대 중국은 역사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정치 집단의 출현을 기록하고 있다. 지방 분권 제도는 봉건 제도, 반대로 중앙 집권 제도는 군현제 등을 들 수 있다.
고대 주나라(周)는 기원전 11세기 무렵의 고대 국가로 봉건 국가였다. 왕권이 약하고 지방에 상대적으로 큰 권한이 있었다. 심지어 전대 왕조였던 상의 유민들에게 제후국(송)[1] 을, 하나라 유민들에게 제후국(기)[2] 도 따로 만들어 줘야 했을 정도.
주나라는 황제의 혈육을 제후로 삼거나 아니면 혼인 관계를 맺어 봉건 제도를 완성했다. 각 제후는 경쟁적으로 바깥으로 세를 확장해 갔다. 이를 통해 고대 중국은 보다 빠르게 확장 발전할 수 있었다. [3]
그러나 대를 거듭하며 제후들과 주 왕실의 혈연 관계는 멀어졌고, 점차 이민족들도 세를 갖추고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면서 중국으로의 침입도 늘었다. 이를 막지 못한 주 왕실은 동쪽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는데 이를 원래의 주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동주라고 부른다. 주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제후들은 이제 서로 세력 확장과 분쟁을 벌였으니 이것이 춘추전국시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초나라처럼 전혀 다른 문명이, 주 제후국과 상관없이 중국사에 개입한 나라들도 있었다.[4]
그런데 기원전 350년, 진나라의 군주 효공(孝公)의 재위 기간에 법가(法家) 사상가인 재상 상앙(商鞅)이 나라 안의 작은 촌락을 41개의 현으로 정리하면서 군현제도의 기틀을 만들었다.[5] 군현제는 황제가 관리를 파견하는 제도로 국토는 제후가 아닌 황제의 것이다.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始皇帝)는 이사(李斯)의 계책을 수용해 천하를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지나친 법가 정책과 잦은 토목공사, 대외원정, 정비되지 않은 수도 지방간 교통 등으로 인해 지방의 힘있는 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진시황 사후 호해가 폭정을 계속하자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조(趙)나라 · 연(燕)나라 · 초(楚)나라 · 위(魏)나라 · 제(齊)나라가 부활했다. 명장 항우는 초나라에서 몸을 일으켜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항우는 초나라의 장수로 왕은 아니었지만 가는 곳마다 승리해 차기 황제로 누구나 생각했다.
싸움을 거듭한 끝에 결국 진나라 명장 장한(章邯)마저 거록대전에서 항우에게 항복하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패공(沛公) 유방에게 떨어져 진나라는 멸망했다. 거록대전의 승리로 거의 모든 중국의 제후들을 복종시킨 항우는 신안대학살 이후 홍문연에서 힘으로 유방을 굴복시키고 진나라의 잔재를 쓸어버렸다.
항우는 초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이고 군현제로 정비되었던 통일 진나라의 영토를 주나라 때처럼 제후들에게 스스로 분봉했다. 항우 자신도 서초(西楚)라는 제후국을 스스로 만들었다. 이제 중국은 지방 분권 정치 형태로 돌아갔다.
3. 제후 분봉
'''진(秦) 영역'''
- 한왕(漢王) 유방(劉邦): 파(巴)·촉(蜀)·한중(漢中)[6] , 수도는 남정(南鄭).현재의 한중시 남정구에 해당 된다.
- 옹왕(雍王) 장한(章邯): 함양 이서, 수도는 현재 싱핑시에 위치한 폐구(廢丘)
-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 함양 동쪽에서 황하 사이, 수도는 현재 서안의 옌량구에 해당 되는 약양(櫟陽)
- 적왕(翟王) 동예(董翳): 상군(上郡) 전역, 수도는 현재 옌안으로 불리는 고노(高奴)
- 대왕(代王) 조헐(趙歇): 본래 조왕趙王이었지만 대왕으로 옮긴다. 수도는 현재 신저우시에 위치한 대현(代縣)
-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 수도는 지금의 허베이 성 싱타이 시(邢台市) 서남 부근인 양국(襄國)
-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 하동(河東) 일대, 수도는 평양(平陽, 초기 전국시대 한나라의 도읍). 지금은 린펀이라 불리는 곳. 전국시대 후기 위나라의 도읍인 대량과 그 동쪽 지역은 서초에 뜯겼다.
-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수도는 상나라와 전국시대 위나라의 옛 수도인 조가(朝歌). 현재는 허난성 치현 일대.
위표는 위나라 지역의 20여 성을 장악하여 항우에게 위왕으로 임명되었다가 항우가 관중으로 진입할 당시 약삭빠르게 함께 해서 서위왕이 될 수 있었다. 사마앙은 하내(河內)를 평정한 공을 인정받았다.
'''한(韓) 영역''''''제(齊) 영역'''
- 교동왕(膠東王) 전시(田市): 본래 제왕(齊王)이었지만 교동왕이 되었다. 수도는 현재 산둥성 핑두(平度)시 남동에 위치한 즉묵(卽墨)
- 제왕(齊王) 전도(田都): 수도는 현재 쯔보시가 된 임치(臨淄)
-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8] : 수도는 타이안(泰安)시 남동에 위치했던 박양(博陽)
-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구강군(九江郡)과 여강군(廬江郡)으로 지금의 안후이 성 경내의 회하(淮河) 이남과 공강(贛江) 유역 이동 및 장쑤 성 대부분, 수도는 지금은 루안(六安) 시라 불리는 육(六)
-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형산군(衡山郡). 수도는 현재는 황강(黄岡) 시가 된 주(邾)
- 임강왕(臨江王) 공오(共傲): 남군(南郡), 검중군(黔中郡), 장사군(長沙郡). 수도는 과거엔 초나라의 옛 수도들중 하나였던 영(郢)이였으며 현재는 징저우시에 위치한 강릉(江陵)
-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 9개의 군을 봉지로 삼았는데, 이설이 있지만 사천군(四川郡)·탕군(碭郡)·설군(薛郡)·동해군(東海郡)·동군(東郡)·회양군(淮陽郡)·남양군(南陽郡)·회계군(會稽郡)·장군(鄣郡) 등으로 여겨진다. 수도는 현재 쉬저우의 일부가 된 팽성(彭城)
그밖에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남피(南皮) 주변의 3개 현을 봉읍으로 받았고, 오예의 부장 매현(梅鋗)은 10만 호의 제후가 되었다.
칠국 중 조, 위, 한은 진(晉)에서 갈라진 나라였기에 삼진(三晉)이라고도 불렸다.
4. 고찰
항우의 제후왕 분봉은 어느 정도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한 정책이다. 당시 기준에서 진나라의 군현제는 심각하게 붕괴되어 '실패한 정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혹독한 진나라의 정책이라는 점이 선입견으로 작용해서 좋게 보이기도 힘든 마당에 진나라가 망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진을 멸망시킨 신생 초나라는 진의 군현제를 유지할 의지가 없었거니와, '''실행할 수 있는 능력조차도 없었다'''. 이미 신생 초나라 외에 각지에 여러 세력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항우가 진나라의 숨통을 끊어놔 중국 최고 패권자가 됨으로써 그가 결정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란으로 인해 중원 각지에 신생 육국을 비롯한 군벌들이 이미 자리잡았기 때문에 항우가 아무리 군신패왕으로서 이름을 떨친다고 한들 이제 막 일어선 초나라의 국력으로 타국을 모두 제압해 병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 판국에 초나라가 군현제를 실행하면 중원을 통째로 차지한다는 뜻이니 18로 제후왕 분봉 이상의 갈등을 불러왔을 것이다.
이후 천하를 통일한 한漢에서도 중앙의 경제력과 통제력이 크게 성장한 한무제 시대에 가서야 봉건제의 잔재를 털어낼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유방이 한신과 팽월 같은 지방 세력을 숙청하고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에(그리고 뒤이어 여후도 공신 세력을 숙청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10] 또한 장량의 젓가락 설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영웅들을 따른 부하들은 모두들 '왕' 혹은 '제후' 정도는 바라면서 공적을 세웠던 것이다. 중앙의 경제적 능력이 미약한 당시로서는 그런 부하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별 수 없이 땅을 떼어주고 나라로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여건을 고려하면 봉건제로의 회귀는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항우에게 다른 대안을 제시할 능력과 실행할 의지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심지어 이후 등장한 유방마저 군현제를 완전히 쓸 수가 없어 적당히 혼합한 형태인 군국제를 써야 했을 정도였다. 즉 봉건제 회귀는 나름대로는 현실을 반영한 조치였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것은 항우를 따라온 제후 연합군의 장수들이 본국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각 나라들이 원군을 주고 장수를 보낸 목적은 진나라의 예봉을 어느 정도 꺾어놓고 자기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쳐 자립할 수 있게 되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원군을 이끌고 온 장수들은 항우와 같이 싸우면서 진나라를 아예 멸망시켜버렸고, 그 포상으로 '분봉'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제나라로 가면 문제가 더 심각했는데, 여기서는 아예 조나라를 구원할 생각이 없었음에도[11] 장군 전도가 제멋대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던 것이다.
이런 당시 상황을 바라보면 결국 분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모두 한 가지로 쏠려 있었으니, 그들이 바라는 보답을 해주는 것 또한 우두머리의 역할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분봉 과정에서 사람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혼란의 씨앗만 잉태한 셈이었다.
'''요약하면 제후왕 분봉에는 나름의 당위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시행하는 항우의 일처리가 너무 심각하게 개차반이었다.'''
5. 문제점
천하의 질서를 다시 잡기 위해서 항우가 분봉을 고려해야 할 대상은 다음과 같았다.
- 재건에 성공한 여섯 나라: 진나라가 육국의 종묘사직을 끊은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았고 이들이 여섯 제후국을 다시 세워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이 또한 각 지역 유지들의 명분 쌓기일 뿐이었다. 제나라에서 촌수가 먼 방계 왕족 전담이 죽은 후, 정통성 있는 제나라 마지막 왕 전건의 동생 전가가 제나라 본국에서 옹립되었으나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전담 일족이 전가를 무찔러 내쫓은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12]
애초에 이 부분은 첫 시작부터 꼬였는데 진승·오광의 난만 봐도 진승은 초나라 부활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정작 그 자신이 초나라 왕이 되었다. 첫 스타트부터가 이 모양이었으니 당연히 후발주자들도 마찬가지일 수밖에[13]
게다가 이 '재건에 성공한 여섯 나라'도 옛 왕실이 그대로 재건된 것은 아니라서 확실히 초나라, 한나라, 제나라. 위나라는 옛 왕실이 돌아왔지만[15] 조나라, 연나라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달라서 조나라는 그나마 조왕을 칭한 무신이 죽은 후 조나라 왕족이던 조헐이 옹립되었지만 연나라는 결국 이 때까지 또 그 이후로도 연나라 왕실이 연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 '재건에 성공한 여섯 나라'도 옛 왕실이 그대로 재건된 것은 아니라서 확실히 초나라, 한나라, 제나라. 위나라는 옛 왕실이 돌아왔지만[15] 조나라, 연나라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달라서 조나라는 그나마 조왕을 칭한 무신이 죽은 후 조나라 왕족이던 조헐이 옹립되었지만 연나라는 결국 이 때까지 또 그 이후로도 연나라 왕실이 연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육국 부활이 적어도 초창기에는 마냥 거짓이거나 완전히 힘이 없던 것만은 아니다. 예시로 초나라 왕가가 아닌데도 왕이 되었다가 초라하게 몰락한 진승에 비해 초의제를 세운 항량은 큰 호응과 지지를 샀으며 그 반면 항우는 그 초의제를 죽였다가 명분을 잃고 패망했으며 진승의 난 도중 위구가 어쨌거나 주불의 다섯번에 걸친 추천으로 왕이 된 것, 조나라 왕 무신이 죽은 후 조헐이 옹립된 것 어쨌거나 육국의 후예들도 분봉받았고 개인적으로는 장량이 유방 휘하에서 큰 관심을 가진 것이 한나라 부활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그 명분이 비록 유력자들에게 이용당하거나 허울뿐이었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 공적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고 본국에서 이탈해 항우를 따라온 장수들: 다시 말하지만 당시 군벌들은 자신이 공적을 세우면 왕후(王侯)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진 제국의 붕괴로 전 중국의 경제와 중앙통제가 완전히 박살난 현실에서 봉국을 떼주는 것 말고 따로 상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었다.[16]
- 나라까지는 아니지만 뿌리를 박는 데 성공한 군벌들: 이런 세력들은 어느 정도 달래서 회유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전도·전안은 항우의 입관에 협력했고, 팽월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 항우와는 별도의 경로로 입관을 시도한 제후들: 여기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항우가 그토록 꺼렸던 유방. 그 외에도 사마앙·공오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 마지막으로는 항우의 직속 부하들이 있겠는데, 이들 중에 왕으로 봉해진 것은 영포뿐이었다.
항우가 내린 결론은 사실 어느 정도는 자기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이 있었고, 또한 어느 정도는 타협적인 것이었다. 진나라 멸망에 가장 큰 공훈을 한 건 자신이고 항우 자신이 분봉의 결정권이 있다는 것은 당시 전 중국에서 넘버 원은 항우고, 항우의 힘이 전 중국에서 가장 세다고는 하나 나머지 군벌들을 압도할 수준은 아닌 만큼[18] 어느 정도는 대우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항우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면서, 동시에 과거 정통 육국의 후예에 대해서는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본거지에서 쫓아내고 한지로 몰아내며 영토를 깎아내리는 조치를 취했다. 정통성이 없고 자신에게 공적도 세우지 않은 군소 군벌들은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이는 방향성이 불분명한 결론이었다. 확실하게 명분론에 따라서 옛 춘추전국시대의 봉건제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며, 실리론에 따라서 항우의 부하들이 전국을 지배하겠다고 명백하게 선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모습을 보면 춘추시대의 체제(허수아비 천자+제후들의 난립+제후들 중 제일 힘있는 존재가 패자가 됨)와 비슷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항우가 회맹같은 것을 주창한 것도 아니요 명목상으로나마 초의제를 잘 섬기는 척을 한 것도 아니다. 춘추오패들과 항우가 같은 점이라면 힘이 있다는 것 정도였는데, 항우는 스스로 패왕이라 칭했지만 정작 그 유래가 된 '패자'의 자격과는 완벽하게 정반대였다.[20]
그렇다고 이미 각지에 토착 군벌 세력이 자리잡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봉건제로 회귀하자면 초의제를 겉으로나마 잘 섬겨야 하는데 항우 성질머리에서는 될턱도 없고 다른 왕들도 겉으로라도 잘 섬길거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고[21] 항우가 제 부하들로만 전국의 지배를 확실히 하자니 앞에서도 보았듯 항우의 군세가 전국을 장악할 정도가 아니니 그것도 불가능했다.
분봉 조치 자체의 영향을 본다면, 분봉 조치는 결과적으로 '''엉망이었다'''. 광무 대치 당시 유방의 비난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항우가 제후들을 분봉한 기준은 순전히 '''자신과 친하거나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더 챙겨주는 게 당연하고, 항우 자신도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할 필요성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을 챙겨주는 과정에서 정통성 있는 육국의 제후들은 영토가 반토막나는 등의 피해를 입었고,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부하 장수들이 감복해서 항우에게 충성을 바칠 정도로 통 크게 쏴줬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결국 이는 처음에는 잠재적인 불만을, 나중에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물론 당시 상황이 육국 후예, 중소군벌, 자신의 부하 등등 매우매우 구성요소가 다양한 이들을 분봉시켜야 하는 만큼 모두가 만족할 만큼 분봉해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하다못해 자기 부하들조차 불만을 가질 정도로 분봉해놨다는 건[22] 항우의 분봉 조치가 대실패임을 보여준다.
- 회왕이 관중왕 약속을 할 때 먼저 관중에 들어와 진왕 자영의 항복을 받아내어 관중왕 자격이 있던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파, 촉, 한중 땅으로 내몰았다.[23] 관중은 전국시대 옛 육국을 제외한 진나라 영토를 가리키는 말로 파촉이 이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파촉에 내몬 것이다. 하지만 파촉은 춘추전국시대 진秦에게 정복되기 전까지 다른 문명이 있던 이민족 영토로[24] 진 덕분에 생산력은 있었지만 중원에서 완전히 소외된 땅이었다. 파촉 방어와 관중 진출의 교두보인 한중 분지는 장량이 항백을 설득시켜 겨우 받은 것이었다. 당시 패공 군벌은 현대 중원의 동쪽 끝인 장쑤 성, 안후이 성 일대인 패(沛) 출신인데 서쪽 끝인 쓰촨 성에 던져버리고 10만 군사 중에 3만 명만 파촉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파촉으로 가는 길도 험난해서 병사들이 대거 탈영한 건 덤.
-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진의 항장들을 영주로 임명한 삼진(三秦)을 설치했지만 삼진의 영주들은 진나라 사람들에게 매국노 취급을 받았고, 항우가 진왕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의 사직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젠 진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육국과 같은 '망국'으로 여기게 되었다. 여기에 진나라 수도를 때려부수는 등 엄청난 민폐끼친건 덤
- 어쨌건 정통성은 있었던 옛 육국의 왕들을 한구석에 처박고 그 자리에 신하들을 왕으로 세워 기존 세력과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 장이는 상산왕이 되고 장이의 부하였던 신양과 사마앙도 왕이 되었는데, 조나라의 대장군이자 장이와 비슷한 명망을 가지고 있던 진여는 터무니없는 대우를 받아 크게 분노했다.[25][26]
- 팽월(彭越)은 나름대로 세력이 있었지만, 항우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논공행상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팽월이 이로 인해 불만을 가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오예의 지휘 아래 싸운 백월 역시 철저하게 백안시당했다. 이래놓고 또 오예의 부하인 매현에겐 무관 공략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10만호나 줬지만, 무관 함락의 주인공인 유방은 파촉으로 쫓겨나서 일관성이 부족했다.
- 제나라의 일개 장수였던 전도는 제나라 왕이 되고, 본래 왕이었던 전시는 교동왕으로 쫒겨났는데 전시를 앞에 세우고 제나라의 실세 노릇을 하던 전영은 엄청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6. 결과
항량 사후부터 사실상 적대관계였던 제나라 전영 계열은 제외. 회왕에게 붙은 배신자들 또한 논외. 한때 의형제였고 공도 세운 유방과 그 라인도 홍문연으로 정적이 되었으니 논외... 이렇게 시작부터 가지치기에 견제만 하다보니, 정작 분봉된 사람들은 대부분 급이 떨어지는 인물들 뿐이었으며,[27] 하나같이 소외된 쪽을 상대로 땅을 지켜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당연히 봉토를 받은 자들과 이들과의 분쟁으로 이어졌고, 심지어 이런 사람들이 본래는 군신관계였던 경우가 많아서 하극상이 수시로 벌어지며 명분 등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유방은 항우 때문에 반란하지 않는 신하가 오히려 멍청한 놈 소리를 듣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평했다.
제일 먼저 파촉에 처박혔던 유방은 항우가 초나라로 떠나자마자 뛰쳐나와 관중을 장악해버렸다. 관중의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여 진나라의 영역을 쉽게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자기가 진 영토를 다스린 것도 아니었고 진 영성 조씨들을 내세운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히 금방 털릴 수밖에. 항우가 이에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제나라의 전영 또한 동시에 항우에 반기를 들면서 각지에 쑥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항우를 편들어 제나라의 왕 자리를 인정받은 전도와 전안은 사실 항우 편에 선 이유부터가 전담 일족을 반대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고, 전영과 원래부터 사이가 나쁜 항우는 이들을 후원하여 전영을 견제하려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담 일족의 힘은 항우가 예상한 것을 넘는 것이었다. 전영은 먼저 제나라 왕으로 부임하기 직전인 전도를 두들겨서 초나라로 쫓아버리고,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겁을 먹어 달아난 전시까지 쫓아서 살해한 뒤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었다'''. 더 나아가 서쪽으로 진군해 제북왕 전안까지 살해해버린 뒤, 항우에 대해 불만이 누구보다 많은 '''팽월을 회유하여 양나라 땅에서 헬게이트를 열도록 사주'''했는데, 초한대전 당시 팽월이 항우를 엄청나게 괴롭힌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또한 장이는 왕이 되었는데 자신은 왕이 되지 못해 불만이 큰 진여도 전영의 지원을 받아 장이를 날려버렸고, 장이는 이 때문에 유방에게 합류하며 항우가 세운 천하는 개판 5분 전의 상황이 되었다. 항우는 전영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출진하여 전영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지나친 학살로 제나라 전역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 덤으로 애매한 입장이었던 형산왕 오예도 항우에게 다짜고짜 땅을 빼앗기는 바람에 북월 측도 마찬가지로 항우의 적이 되었다. 그리고 이 틈을 노리지 않고 한신 등을 앞세워서 동진해온 유방은 초나라의 핵심지역인 팽성까지 장악해버렸다.
항우가 꽂아넣은 사람들은 유방의 진격에 싸우려는 시늉도 하지 않고 항복하기 바빴으며, 항타와 용저 등이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이들만으로는 언발에 오줌누기 수준이었다. 그전까지 각종 악행의 행동대장이던 영포도 당장 유방에게 붙지만 않았을 뿐 마치 항우가 알아서 망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팽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요지부동이었다.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파촉에 처박아 놓고 유방을 감시하기 위해 삼진을 설치했지만, 정작 유방이 동진할 당시 삼진은 놀라우리만큼 유방의 진격을 막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물론 항우는 이후 팽성대전에서 한나라 군대를 대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기반을 확실하게 굳혀놓은[28] 한군은 한두 번의 패배로 괴멸되지 않았다. 관중도 관중이지만 오창 등의 곡창지대가 끝내 유방에게 넘어가버렸기 때문. 결과적으로 항우의 분봉은 천하의 대란을 단 1년도 막지 못했다.
초한대전 중 역이기의 제안을 논파한 장량으로 인해 봉건제와 군현제도 사이에서 길을 찾은 유방은, 대전 이후 군·국제도 하에서 위협적인 이성왕들을 숙청하여 개국 초기의 위협을 분쇄하고 군현제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남은 동성왕들의 위협은 한경제 시절 오초7국의 난에서 분쇄되었고, 한무제는 주보언(主父偃)의 제안을 바탕으로 추은의 영(推恩-令)을 내려 제후들의 세력에 결정적인 최후의 타격을 날렸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인해 전한(前漢)은 마침내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문경지치로 얻은 경제적 능력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서방의 로마 제국과 맞먹는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군현제도는 이후 2000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중국을 지탱하는 거대한 하나의 축으로 남게 되었다.
[1] 이 송나라가 송양지인의 고사에 나오는 송양공의 나라 그 송나라 맞다.[2] 이 나라는 기우라는 고사성어 속 기나라 사람 할 때 그 기나라다.[3] 한반도로 치면 부여의 5가 제도, 고구려의 5부 제도가 이에 해당한다.[4] 이런 국가로는 초나라 외에 오나라 월나라 등이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인해서 다른 나라들은 아무리 그래도 왕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런 나라들은 왕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타국에서는 이들을 낮게 보기도 했다.[5] 물론 이런 생각을 상앙 하나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초나라, 진나라 등에서 이미 비슷한 제도를 시행했었다.[6] 한왕은 한중의 한수(漢水)에서 딴 왕호다.[7] 항우의 부하이며 오현(吳縣)의 현령 출신이라 한다. 유방이 장한을 격파하고 폐구에서 포위한 후 이를 막기 위해 항우가 왕으로 임명했다. 한왕 성은 이쯤 죽었다.[8]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손자.[9] 그러나 위치가 요서 지역의 우북평군에 속하고 연나라 수도 계와 너무나 가까워서,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에서는 무종현이 요동국의 수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10] 그럼에도 기껏해야 이성왕을 동성왕으로 대체한 것이 전부일 뿐 한경제 시절 오초7국의 난이 벌어지기 전까지도 한나라 내에 존재하는 여러 동성왕들의 나라는 서로 '다른 나라'로 취급되었고 동성왕들의 인사권도 승상 빼면 다 자기가 직접 뽑을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이 주어져 있었다.[11] 재상 전영(田榮)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원군 출정에 계속 반대하고 있었다.[12] 항우 본인부터 반진전쟁 때는 초나라 부활을 명분으로 내세워 거병해놓고 정작 초나라 왕실의 정통 후손이기에 옹립된 회왕 웅심에겐 명목상 천자 직함만 줬을 뿐, 끝까지 바지사장 취급만 하다가 그냥 죽여버리고 자기가 실질적인 초왕이 되버렸으니 육국의 부흥이라는 명분은 이미 허울뿐이었던 것이다.[13] 애초 반란을 일으키며 내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도 결국은 육국을 그대로 인정하지만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물론 진승은 위구를 위나라 왕이 되는걸 허락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는지 진승의 부하인 무신이 조나라 왕을 칭하고 또 그 부하인 한광이 연나라 왕을 칭하는 등 난장판이었다.[14] 특히 위나라는 그 실권자가 왕이 될 수도 있었다. 본인이 거절했지만[15] 그렇다고 사정이 서로 다 같던건 아니다. 대부분은 실권자 따로 명목상 군주 따로였고[14] 제나라의 경우 그나마 실권자도 군주도 그래도 같은 전씨였다.[16] 식읍 같은 방법도 있었겠지만 식읍도 어디까지나 중앙정부가 어쨌든 전국의 주인이 될 권위가 있어야 택할 방법이고 전국에 군웅들이 들어찬 상황에서 식읍 같은건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이 점에서는 유럽 중세의 봉건제와 유사한데 봉건제라 하면 군주가 신하들에게 땅을 하사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은 오히려 신하가 차지한 땅의 소유를 군주가 특정 조건을 내걸고 인정한 것에 가까웠다. 이 점에서 제후왕들 중 이미 특정 지역에 알박아놓고 분봉 형식으로 소유를 인정받은 경우가 많은 것이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닮았다.[17] 반대로 유방은 이미 분봉할 당시 천하의 제후들을 어느정도 제압해놨고 가장 강력한 제후 항우마저 죽은지라 제후들이 반항하기가 좀 더 어려웠다.[18] 분봉 당시 항우의 힘은 전중국에 미칠 수준은 아니었다. 훗날 초의제를 시해한 것을 보면 항우는 전중국에 걸쳐 세력을 떨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에는 그럴만한 조건이 못 되었는데 먼저 진승의 난 당시 중구난방으로 일어난 반란세력들이 아직도 난립해 있었고 둘째 이를 항우가 미리 제거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고 셋째 그 이유로는 고작 진승 따위(...)에게 다 죽어가던 진나라에서 장한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서자 진승이 죽고 장초가 망했으며 이어서 위구가 죽고 위나라가 망하는 일이 벌어졌기에 제후들 입장에서 가장 위협적인 적은 진나라였기에 진나라를 제압하는게 먼저지 군웅들을 제압하는게 먼저가 아니었다. 그나마 거록대전에서 장한을 개발살냈기에 항우가 분봉할 힘이라도 있던것이 옳은데 당장에 유방은 초의제가 말한대로 함곡관도 먼저 들어가고 함양에도 먼저 입성했지만 관중에서 받은 곳은 고작 한중 뿐이었다. 하지만 당장 분봉받은 직후에는 항우에게 뭐라 하지도 못한 채 파촉으로 가야만 했다.[19] 백등산 전투에서 한나라가 그 꼴을 당한 것은 초한전쟁 당시 항우가 해놓은 짓거리들 때문인데 아직까지는 항우의 파괴행위가 기껏해야 진나라 지역에 집중되었으니 백등산 전투같은 꼴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제후들 견제도 할 수 있고 존왕양이도 실현할 수 있으며 항우 자신도 전쟁을 잘 하니까 항우 자신이 나서서 흉노를 패퇴시킬 가능성도 높다.[20] 패왕은 기본적으로 '''존왕'''양이를 내세우게 되어 있다. 이보다 수년 후 묵돌의 흉노족을 생각해 보면 초의제만 잘 섬기면 존왕양이에 따라 초의제를 섬기며 흉노와 전쟁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겠지만[19] 초의제를 시해하여 존왕을 버렸고 너무 일찍 패망하여 양이도 못했다.[21] 가장 큰 문제는 초나라가 은근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초인목후이관에서 보듯 초나라 사람은 무시당하기도 했다. 비록 진나라 멸망 과정에서 초나라 부활을 외친 진승, 초의제를 옹립한 항량, 장한을 깨부순 항우, 진왕의 항복을 받아낸 유방 등 초나라 출신들이 큰 활약을 해냈지만 그 사고가 한순간에 뒤집히긴 힘들 것이라는걸 감안하면 과연 초나라 황제를 명목상으로라도 자기네 군주로 받들지는 의문이다.[22] 더 심각한 문제는 위에 있는 왕들 항목 중 유일하게 항우의 부하이면서 왕으로 봉해진 사람은 영포 하나뿐인데 그 영포마저도 불만을 가졌다.[23] 현 사천성과 섬서성 남부 일대로 후대 촉한의 영토와 거의 비슷하다.[24] 진나라가 파촉을 정벌한 것은 기원전 316년, 즉 항우의 제후왕 분봉에서 겨우 110년 전의 일이다.[25] 게다가 또 하필 장이와 진여는 사이가 나빴다.[26] 그렇다고 장이가 만족할 정도로 화끈하게 쏴준 건 또 아니라서 결국 장이도 유방에게 투항해 버렸다.[27] 애초 항우를 상대로 대립적이라는 것부터가 어느정도 급이 있다는 의미다. 급이 정말 떨어진다면 원래부터 나름대로 세력이 있든가 항우 혹은 다른 큰 군벌들에게 붙든가 했을 것이다.[28]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 당시 소하는 진나라 왕궁을 뒤져서 천하의 지리와 산물 등에 대해 기록된 장부를 항우가 태워먹기 전에 죄다 빼내서 들고 튀었다고 한다. 사실 이 장부야말로 진나라가 가진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존재한 덕에 소하는 항우와 싸우던 유방에게 효율적이고 지속적으로 보급을 하는 것이 가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