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석유 발견 사건
1. 개요
1975년 박정희 정부 시절에 경상북도 포항(영일만 일대)에서 석유 원유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한 해프닝.
2. 배경
경상북도 포항 지역은 예전부터 석유 부존 가능성이 제기되던 곳이었고, 이미 1964년에 정OO씨가 사적으로 설립한 회사 및 국립지질조사소에서 합동으로 시추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천연가스는 소량 발견되었지만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이 내려져서 중단되었다.
이전부터 포항 지역이 지목된 근거는 다음의 2가지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 삼국유사 기록이 진실이라는 근거는 없다. [2]
- 해당 지층이 3기층이기는하나 퇴적층이 너무 얇고 화강암 위주이다.
수많은 지질 관계 전문가들이 모두 가능성이 없다고 반대했음에도 박정희는 "하느님은 아마도 자원을 골고루 나눠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기름이 어디엔가는 숨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정부 주도로 석유 시추를 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따라 1975년에 또다시 포항 영일만 일대 지역에 석유시추가 재개된다.
1975년 비밀리에 시작된 포항 석유 시추는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중앙정보부가 맡아서 'OO산업공사'라는 위장 회사 명칭으로 진행하였고, 앞서 언급한 형 정OO씨가 참여하는 형태로 이루어 졌는데 실제로는 시추 현장에서 형 정OO씨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고 전해진다. 갑자기 중앙정보부가 등장하는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한국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군부독재 정권이며 특히 10월 유신으로 박정희가 종신집권 체제를 완성한 직후였고, 중앙정보부는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절대권력자인 박정희의 지시아래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를 좌지우지하던 무소불위의 기관이었다. 심지어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서 한때 양지 축구단도 직접 운영했을 정도로 당시 정보부는 안끼는데가 없었다.[5] 이런 이유로 막대한 자금과 보안이 필요한 석유 탐사도 중앙정보부가 직접 맡게 된 것이다.
3. 석유가 나왔다!!!
1975년 5월 중앙정보부는 포항 영일만 인근에 시추공 3개(편의상 A, B. D공)를 뚫기 시작했다. A공은 지하 1,150m 지점에서 단단한 화강암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석유는 퍼석한 퇴적암층이라야 발견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파도 파도 퇴적암층은 안나오고 강철같은 화강암층만 나오니 현장의 전문가들이 "그만 끝냅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이어 B공도 12월까지 지하 1,400m을 팠지만, 결국 화강암층에 막히고 말았다. 정OO씨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현장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으로 시추를 종료하려고 했다.
그러던 1975년 12월 3일 새벽, 갑자기 B공에서 시커먼 액체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단단한 화강암층을 통과하던 B공 시추봉이 지하 1,475m 지점에서 갑자기 푹 꺼지더니 2m 정도를 더 파고들었고, 여기에서 원유로 추정되는 액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양은 많지 않았으니 다 합쳐봐야 드럼통 한 개 정도의 소량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시추 현장은 난리가 났고 현장 근로자들은 이 액체를 정신없이 퍼담았다. 시추 성공 사실은 즉시 청와대에 보고되었으며, 이 원유(?) 샘플은 부랴부랴 직접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정부 각료들은 모두 기뻐했고, 일부는 직접 맛을 보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기분이 좋아진 박정희 대통령은 보안이 필요했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공식행사에서 원유가 나온것 같다는 사실을 슬쩍슬쩍 흘렸다. 결국 포항에서 석유가 터졌다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포항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 매장량 등은 정부에서 확인중이니 국민들은 차분히 기다려 주실 것"이라는 요지로 공식 발표를 해버린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제2경제 수석비서관[6] 을 불러 책상 위의 재떨이에 채취한 기름을 직접 붓고 불을 붙여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오원철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4. 사실은 아니었다
원래 원유는 휘발유·등유·경유·중유와 가스 기타 성분이 골고루 뒤섞인 물질이다. 그래서 원유에 불을 붙이면 가스 성분이 펑 하면서 불꽃을 일으킨다. '''그런데 포항 석유는 얌전하게 탔다.''' 여기서 오원철 수석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7]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 원유가 담긴 병을 달라고 해서 가져온 뒤 정밀 분석을 맡겼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석유화학회사인 호남정유(현 GS칼텍스) 및 미국 굴지의 석유회사 칼텍스에까지 샘플을 보내서 분석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경유''' 성분만 유별나게 많은 이상한 것이었다. 원유를 증류시험하면 그래프에 각 성분별로 골고루 나와야 정상인데, 포항 기름은 그래프에 거의 경유 성분만 찍혀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물러서기가 어려웠던 중앙정보부는, 이게 과연 원유가 맞는지, 그리고 얼마나 매장량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탐사를 계속했다. 일단 처음에 기름이 올라온 B공 북서쪽으로 5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DS1 공을 뚫기 시작했다. 그런데 분명히 B공에서 기름이 나왔다는 그 심도를 통과했는데도 겨우 수십미터 떨어진 DS1 공에서 기름 한방울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B공 남쪽 불과 20m 떨어진 곳에 DS2 공을 뚫었으나 역시 기름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 그 뒤로도 주변 일대에 여러 시추공을 더 뚫었으나 결과는 동일했다. 맨 마지막에 뚫은 DS4 공은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강암층을 무려 3,117m나 뚫었다고 하니 그때 기술자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도 전문가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원유가 매장된 퇴적층은 보이지도 않고 화강암층만 계속 나오자 "이곳에서 원유 나올 일 없으니 그만 탐사 끝내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 냈다고 한다. 그러나 정권 최상층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업이라 중앙정보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땅만 계속 파들어갔다. 당시 시추 현장에는 미국에서 초빙해 온 유전 탐사 전문가들도 여러명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이 한심한 광경을 보다 못해 "당신들은 차라리 금을 찾는게 낫겠다"고 말했다고. 애시당초 원유가 매장된 유전은 수~수십km 면적에 걸쳐 같은 지층에 걸쳐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추공에서 기름이 안나온다고 불과 몇십 미터 간격으로 다른 시추공을 뚫은 건 이미 석유 탐사도 뭐도 아니며 세계 석유 개발 역사상 이런 시추는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참고로 일반적인 원유 시추에서는 수~수십km 면적으로 구획을 나눈 뒤, 그 구획에 불과 시추공 한두개로 탐사를 끝낸다. 이 사건 뒤의 우리나라 대륙붕 탐사에서도 그렇게 했다. 이런 원유탐사의 정석에 익숙한 미국의 오일맨들은 불과 몇십미터 간격으로 굴착공을 뚫는 모습에 실소가 터졌을 듯.
이러한 과정을 상세히 추적하여 최초로 보도한게 당시 부산에 기반을 두고 있던 국제신문 사회부 조갑제 기자였다.[8] 그리고 이 보도를 일본의 산케이 신문이 받아서 다시 보도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이 소동이 알려지게 되었다. 조갑제 기자는 포항 석유 발견 사건 당시의 취재 자료를 가지고 아예 '''"한국의 석유개발: 비공개 자료의 분석에 의한 전망과 제언"'''이라는 논문을 써서 관계기관에 보냈다. 논문의 결론은 해당 지역 지형을 분석한 결과 등을 토대로 "可採(가채)매장량은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약 3,000만 배럴. 경제성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매장량은 적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설사 포항 지역에 원유가 진짜로 있다 하더라도 미국과 같은 산유국의 오일맨들이었다면 경제성이 전혀 없으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유전 개별 여부는 경제성으로 판단한다. 아무리 원유가 발견되어도 본격적 시추 개발에 따른 수익이 나지 않으면 시추하지 않는다. 석유 시추를 하다보면 소량의 원유는 자주 발견되나, 실제로 경제성이 있는 유전 발견은 전체 2% 정도에 불과하다.
신문보도 및 논문 작성을 끝내고 나서 조갑제 기자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불려가 석유 시추를 취재한 경위에 대해 조사를 받게 된다. 당시는 석유 탐사 소식이 너무 부풀려진 나머지 중앙정보부 주도로 언론통제에 들어간 때였다. 그런데 보도가 터져나왔으니... 막간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때 조갑제 기자를 담당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과장이 바로 10.26 사건의 주역 중 한명인 박선호였다. 조갑제 기자는 뒷날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았고(아마 자신이 기자여서 그랬겠지만), 박선호는 날카롭지만 신사다운 풍모를 지녔었다"고 평가했다. 결국 조갑제 기자는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신문사에서 쫒겨났다가,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에서 김재규로 바뀐 뒤에야 소문내지 않는 조건으로 조용히 복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래는 조갑제 기자가 1980년대 들어 작성한 당시의 포항 석유 발견 사건에 대한 기사로 본 문서도 이 기사에서 많은 내용을 참고하였다.
포항 석유 조작설의 진상(1) 월간조선 1984년 5월호
포항 석유 조작설의 진상(2)
결국 당시의 국민들은 정부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발표를 듣고 우리나라가 산유국이 되었다는 기쁨에만 넘칠 뿐이었다. 그런데 석유는 사실 없었으니 1976년 박정희의 연두 기자회견으로 각 일간지와 방송들이 '포항 석유 발견'이란 빅 뉴스를 터뜨린 뒤에도 석유는 나올 줄을 몰랐다. 이후 그해 여름부터 국민들의 관심이 식어가며 그렇게 석유 해프닝은 끝이 났다.
5. 그때 나온 기름은 무엇이었는가
포항 B 시추공에서 어쨌든 소량의 기름이 나온건 사실이었으므로 이 기름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당시에도 제기되었다.
오원철 경제수석은 1) B공 지하 1,475m에 空洞(공동)이 있었고, 2) B공 가까운 곳에서 A공을 먼저 시추할 때 냉각수로서 물을, 윤활제로서는 경유를 상당량 고압으로 주입시켰으며 3) 이러한 '기름 섞인 물'이 바위 틈을 타고 이동해서 모여든게 B공 지하 1,475m 공동이었고, 4) 그야말로 우연히 B공 시추기가 여기를 뚫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갑제 기자도 오원철 경제수석과 거의 비슷하게, 이때 발견된 기름은 화강암층 속의 파쇄된 바위틈 속에 우연히 작은 우물처럼 괴어 있었던 것이고, 이 기름 포인트를 적중시킨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고 분석했다. 다만 조갑제 기자는 자연적으로 미량 생성되어 고여있었을 특이한 원유일 가능성, 시추 과정에서 흘러들어간 윤활제 경유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부인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석유가 나왔다고 조작한게 아니냐는 의심이 꽤 있었으나, 조갑제 기자는 항간에 알려진것과는 달리 절대 인위적인 조작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일본의 세계적인 석유지질학자 기노시타(木下浩二) 박사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정제된 경유일 가능성이 높으나 원유일 가능성도 있다. 원유라면 매우 특수한 타입"이라는 것이었다. 즉 시추하면서 흘러들어간 경유일수도 특수한 원유일수도 있었다는 이야기.
결과적으로는 이때 나온 기름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사실 논의할 실익도 없었다. 그 양은 불과 1드럼 정도에 불과했고, 그게 설사 탐사과정에서 흘러들어간 정제 경유가 아니라 진짜 원유라 하더라도 그정도 원유는 탐사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6. 기타
저 소동과는 별개로 포항 남동쪽 앞바다에서의 석유 탐사는 사업성이 있었기 때문에, 먼 훗날 2004년 한국석유공사가 실제로 포항과 멀지 않은 울산 동해-1 가스전에서 천연가스와 초경질유[9] 상업 시추를 성공하여 한국은 큰 의미는 없지만 산유국 지위를 확보해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는 벗어났다.[10] 이 가스전은 매장량이 적어 2020년 고갈을 앞두고 있지만 순이익이 발생된 성공한 사업이다. 이 동해 가스전은 2008년 무한도전 촬영으로 일반에 잘 알려지기도 했다. 이 외에 2014년 동해 8광구 및 6-1광구 탐사 결과 동해-1 가스전보다 9배 큰 규모의 가스전(최대 3,600만t)이 발견되어 개발이 진행중이다.
7. 번외편: 불의 정원
[1]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 퇴적층 지형이다.[2] 삼국유사 자체가 관찬사서 삼국사기에서 빠져있는 많은 기록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으로 변한다는 단군신화 내용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화적 기록도 가감없이 실었기 때문에 사실로서의 역사를 연구한다면 문구 그대로 100% 받아들이면 안 되는 부분이 많다. 즉 불길이 솟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가스불 분출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면 단군설화에도 적용하듯이 다른 사실사건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기사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물론 삼국사기 등 다른 전근대 사서도 다소 설화적인 내용이나 윤색된 티가 나는 기록을 종종 싣기는 했지만 삼국유사는 편찬 목적과 특성상 특히 많은 편이다.[3] 주로 김종필 국무총리를 대상으로 석유 부존 가능성을 역설했다고 한다.[4] 사실 이때 민간인 정씨 형제의 주장과 그 뒤로 포항 석유 탐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과 유사한 모습이 보인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과학적 증거를 들어 아니라고 해도 일부 민간인들이 고집을 피우면서 조사를 계속할 것을 주장하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5] 북한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이란 놀라운 성과를 거두자, 무조건 북한보다 더나은 성과를 거두겠다는 목표로 김형욱 정보부장이 창설하였다. [6] 중화학공업, 방위산업 담당.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1970년대 근성의 무기개발사 같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오원철 수석이 관여한 근성의 자주국방 노력은 번개사업 문서를 참조.[7] 오원철이 다름아닌 화학공학 전공자였기에 가능했다.[8] 지금의 극우 이미지와는 달리, 1970~80년대 조갑제 기자는 정권 비리와 각종 사건사고 탐사보도의 끝판왕으로서 지금의 어지간한 기자들도 그 당시 조갑제의 위명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었다.[9]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일반적인 새까만 원유가 아니라 천연가스로 기화하기 전 단계의 노르스름한 기름으로 성질은 항공유에 가까운 매우 고순도의 기름이다.[10] 보통 한국의 경제발전을 언급하거나 자원 절약을 설파할 때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라는 이런 관용어구를 많이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