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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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전 검찰총장,법무부 장관으로 유신헌법을 사실상 만든 사람이다.
2. 생애
1927년,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다.
1946년 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육대학교)와 한국대학(현 서경대학교, 과거 국제대학) 법과를 졸업[2]# # 하고 육군 법무장교로 임관하였다. 박정희가 5사단장일 때 참모장이 김재규였으며, 법무참모로 근무하기도 했고,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3]
박정희와의 인연으로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비서관이 되고, 1961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63년 7월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 불과 '''36세'''의 나이로 검찰총장이 되어 1971년 6월까지 재직하였는데,[4] 검사장들이 이에 반발하여 검찰총장 취임식에 불참하기도 하였지만, 군사정권 시절에 중앙정보부 차장까지 지낸 사람이 낙하산 인사로 내려오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당선에 공을 세워 법무부장관으로 영전하였다. 한편 제 7대 대통령 선거 중 실세 검찰총장으로 있으면서 명목상의 윗사람인 배영호 법무부장관과 갈등을 빚었다. 이후 법무부장관으로 있으면서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과 함께 유신헌법 작업에 관여했다.
1973년 12월 '''제갈조조''' 이후락의 뒤를 이어 제7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김재규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껄끄러운 점이 김재규가 제5보병사단 참모장을 지낼 때 신직수가 김재규의 밑에서 법무참모를 하였는데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중앙정보부 차장이 됨으로써 상하 관계가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1976년 12월 코리아게이트 사건 와중에 중앙정보부 요원이던 주미대사관 김상근 참사관이 망명하자 중앙정보부장직에서 경질되었으나, 그대로 몰락한 것이 아니고 곧 청와대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으로 공직에 복귀했다.
사망 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기타
- 유신정권 기간 동안의 인권유린 문제에 있어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 그가 검찰총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동백림 사건, 유럽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등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과 장준하 의문사 사건이 일어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