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리투아니아 관계
1. 개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오늘날 양국은 교류와 협력이 활발하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고 반러성향이 있는 편이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중세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385년 크레보 연합을 통해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며 1386년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의 결혼으로 야기에우워 왕조가 세워진다.[1] 이후 동군연합은 동유럽 내 킵차크 칸국의 잔재를 일소하고 발트해 너머 동유럽으로 확장하던 튜튼 기사단국을 격파하였다. 튜튼 십자군에 맞섰던 리투아니아였지만 폴란드의 영향으로 리투아니아는 천주교로 개종했고 리투아니아어는 폴란드어 그리고 폴란드 가톨릭에 의한 라틴어와 폴란드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440년부로 야기에우워 왕조의 카지미에시 4세 제위 시기를 기점으로 폴란드의 국왕은 동시에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동시에 양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당시에는 폴란드 의회와 리투아니아 의회가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후 루스 차르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갈등으로 1569년 7월 1일부로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일한다. 폴란드인 귀족과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았고 연방의 영토는 우크라이나 중부에서 핀란드-카렐리야까지 이어졌다.
폴란드와 동군 연합으로 엮이게 된 이후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야드비가와 요가일라의 혼인을 통해 리투아니아 측이 공식적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일 당시, 폴란드에서 빌뉴스로 가톨릭 사제들을 파견하였고 성당이 폴란드 문화를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인 귀족들과 루테니아 귀족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폴란드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는 빌뉴스의 리투아니아인들에게 폴란드어를 사용하고 폴란드인과 통혼하면서 상당수가 몇 세대 이후 폴란드인과 완전 동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2.2. 근세
루블린 조약에 의한 연방제 통일 이후 17~18세기에는 리투아니아어보다 폴란드어가 리투아니아 귀족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었다.[2] 동유럽에서 폴란드 귀족 문화는 첨단 호화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동군연합 당시부터 수도 빌뉴스의 상류층들이 이를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상당수 귀족 가문들이 폴란드식 성으로 개명하기 시작했다. 국제 도시로 성장한 빌뉴스와 그 근교에서는 주민들이 수백여년에 걸쳐 폴란드인들과 통혼하며 폴란드어를 사용하다가 폴란드인으로 동화되었다.
18세기말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분할을 통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폴란드 동북부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 서북부와 리투아니아 마이너 일대는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았다.
2.3. 19세기
19세기에 나폴레옹 연합군의 도움으로 폴란드와 함께 잠시 독립했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폴란드 분할 상황은 고착되었었다. 독립 운동 당시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인들이 서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으로서 정체성을 공유하는 편이었지만, 일반 농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정체성이 희박한 편이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모두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서 문화, 언어 등을 탄압받았다. 하지만 탄압받는 상황에서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로부터 문화와 언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폴란드가 자랑하는 국민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출신인데, 본인은 폴란드어로 시를 썼지만 리투아니아 쪽에도 애정을 보이곤 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인들도 미츠키에비치를 자국 시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당시 리투아니아 계열 귀족은 폴란드 친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인의 정체성은 상당히 늦게 생긴 편에 속한다.
2.4. 20세기
20세기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양국은 다시 수교를 했다. 하지만 당시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근교 지역은 폴란드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이를 이유로 폴란드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의 영토였던 빌뉴스를 점령하면서 이른바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양국간에 갈등이 생겼다.
제2차 세계대전당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공화국으로 편입되고 폴란드도 소련의 영향으로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세워졌다.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된 뒤에 리투아니아는 독립국이 되고 폴란드도 80년대말에 민주화가 되면서 공산정권이 붕괴되었다.
2.5. 21세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90년대말에서 2000년대까지 유럽연합, 나토에 가입하게 되었다. 양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공통점이 많은 편이다. 특히 양국은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현재도 리투아니아 내에는 폴란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최대 규모 소수민족은 폴란드인으로 전체 인구의 5.4% 정도를 차지한다.[3] 리투아니아 폴란드인 선거운동(AWPL)이라는 정당이 국회 141석 중 8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역사적인 이유로 일부 갈등이 존재하지만[4] , 전반적으로는 교류, 협력이 활발하다. 2014년에 러시아가 크림 합병을 하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군사협력을 추진했다. 그리고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미수 사건때에는 러시아 외교관 추방정책에도 참여했다.
3. 관련 문서
- 폴란드/외교
- 리투아니아/외교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유럽 연합
- 폴란드/역사
- 리투아니아/역사
- 폴란드/경제
- 리투아니아/경제
- 폴란드인 / 리투아니아인
- 폴란드어 / 리투아니아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북유럽 국가
[1] 정작 야드비가 왕비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유증으로 아이와 함께 죽었고, 이후 야기에우워는 재혼한다.[2] 심지어 리투아니아의 도시인 빌뉴스는 1945년 소련이 지배하기 전까지 인구의 80%가 폴란드인이었고, 1920-39년 사이에는 폴란드가 괴뢰국을 세워 두었다가 아예 자기 땅으로 만들었다.[3] 동남부에는 리투아니아인보다 폴란드인이 많은 지역도 있다.[4] 20세기 초중반 시기에 폴란드가 독립한지 얼마 안 있어 벌어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과정에서 폴란드가 리투아니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침공, 강탈한 탓에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내내 싸워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