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역사
1. 개요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2. 고대사
발트어족에 해당하는 리투아니아인들은 고대부터 중세 초까지 발트해 일대 늪지대에 고립되어 살았다. 고대 리투아니아인들은 슬라브인과 비슷한 고대 다신교 신앙인 발트 신화 다신교를 신앙하고 있었다. 고대 슬라브 신화의 페룬에 해당하는 최고신 페르쿠나스(Perkūnas)를 숭배하는 전통이 무려 '''14세기'''까지 '''국교로 이어져왔다.''' 리투아니아인 뿐만이 아니라 인근의 프루센인, 리보니아인들도 기독교가 아닌 다신교를 믿고 있었다. 게르만인이나 슬라브인들과 다르게 로마 제국의 쇠퇴 이후에도 민족 대이동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늪지대에 고립되어 살았던 이들 발트족에게는 기독교가 도입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발트어족 상당수가 기독교 대신 고유의 다신교를 믿는 상황을 핑계로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발트어족들의 영토를 침략해 들어왔다.[1] 튜튼 기사단은 오늘날 칼리닌그라드 일대의 프루스인들을 정복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와중에 너무 많은 프루스인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해서 프루스인들의 이웃해있던 리투아니아인들이 튜튼 기사단을 무척 경계하고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유럽 최신의 무기와 갑주, 성채 건축술을 보유한 튜튼 기사단이었지만 늪지대가 많은 리투아니아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자 곤란을 겪었다 한다.
3. 중세: 리투아니아 대공국
[image]
리투아니아인들은 다른 발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12세기까지 부족끼리 갈라져 통일이 되지 않는 상태였지만, 튜튼 기사단의 위협 때문에 전 부족들이 하나로 단결하고 튜튼 기사단의 전법과 무기를 받아들이며 점점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민다우가스에 의해 1235년 흑루테니아의 도시 나바흐루다크를 정복하고 1236년 부족 통일이 된 후 리투아니아 군주들은 결혼 동맹을 빌미로 상속을 주장하는 한편 가톨릭이나 정교회로 개종하는 척 하면서 타타르인들이나 튜튼 기사단을 기습공격하길 즐겼다. 키예프 공국이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리투아니아인들은 과거 키예프 루스의 영토에 해당하는 영역으로 재빠르게 확장하여 타타르인들을 몰아내면서 오늘날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까지 영토를 확장했다.[2] 하지만 튜튼기사단에서는 리투아니아인들의 배신과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여러차례 십자군을 보내서 리투아니아를 침략하기를 멈추질 않았다.[3] 알기르다스의 지휘를 받는 리투아니아인들이 루테니아 일대로 영토를 계속 확장하는 동안 사모기티아인들이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본토를 필사적으로 방어하였다. 이들은 리투아니아 본토를 방어해내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지만, 대신 메멜 지방에 십자군이 세운 요새를 탈환하는 것은 실패했고, 메멜란트 일대의 리투아니아인들은 튜튼 기사단의 농노가 되어 한동안 비참하게 살게 되었다.[4]
이들의 다신교 신앙은 1386년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가 결혼할 때까지 이어졌다.[5] 알기르다스 대공의 아들인 요가일라[6] 는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서 '''폴란드인들의 주선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수도 빌뉴스의 페르쿠나스 신전과 그 주변을 둘러싸던 삼림[7] 을 죄다 밀어버림으로써 기독교 국가로 이행하게 된다. 당시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와 동군 연합을 이룬데에는 튜튼 기사단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폴란드의 귀족 문화가 리투아니아인 지도층에게 매우 매력적인 최신 문화로 비쳤던 점도 컸다고 한다.
여하튼 12세기 통일한 이래 리투아니아는 동유럽 지역의 큰 손으로 자라났고, 앞서 언급된 정치적 수법을 통해 13세기 무렵 킵차크 칸국의 루테니아 영토를 지속적으로 털어먹으며 영토를 확장하였고, 결국 몽골의 침략과 키예프 공국의 멸망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우크라이나 지역까지 집어삼킴으로써 오늘날의 지도만 보면 상상도 되지 않는 대국으로 거듭난다. 비타우타스 대공 치세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였다.
[image]
낙후되고 인구도 적었던 리투아니아인들이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금새 대국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의 혼란한 시대 상황 즉 '''몽골-타타르'''의 '''철저한 파괴와 약탈'''로 과거 키예프 루스 땅에 살던 주민들 대부분이 '''생지옥'''을 체험하는 마당에, 서쪽에서는 '''튜튼 기사단'''이 철저한 파괴에 기반을 둔 '''무자비한 정복정책'''을 벌이던 상황이 있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정복 과정에서 적어도 철저한 파괴 행위는 하지 않았고, 과거 키예프 공국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서 리투아니아인들을 해방자로 열렬히 환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8] 때문에 폴란드와의 동군 연합과 가톨릭 개종 이전 초창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루테니아와 같은 문화와 정체성을 공유했다.
중세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다룬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서에는 비타우타스 대공이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 그리고 발트 다신교 숭배자 이렇게 3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소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세 리투아니아에서는 즉 다양한 정체성이 어우러진 국가였다. 리투아니아인의 가톨릭 개종 이후에도 리투아니아 민중 사이에서는 발트 토속 신앙과 가톨릭이 이중 신앙 형태로 공존했으며,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들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폴란드와는 우크라이나 지방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관계였으나, 결과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리투아니아 쪽. 이런 리투아니아의 전성기는 이와 같은 영토 확장이 중지되고, 동쪽에 모스크바 대공국이라는 강국이 들어서면서 끝나고, 모스크바와의 패권 다툼에서 지속적으로 밀리자 단순히 동군연합의 개념이었던 폴란드와의 관계에서 아예 나라를 합치는 연합왕국 체제로 들어가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4.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
[image]
1569년 7월 1일 루블린 조약이 서명됨으로써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일되었다. 폴란드의 왕이 연합국가를 통치하고, 왕은 크라쿠프의 세임(Sejm)에서 선출되도록 하였다. 다만 법전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법전을 근간으로 하였다. 리투아니아의 대공 선출 제도와 빌뉴스의 의회는 폐지되었다. 양국은 국경의 세관을 철폐하였으며 단일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폴란드와 연합 이후 리투아니아는 대홍수 이전까지 전성기를 누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루테니아 지역에 퍼져나간 리투아니아인들이 문화적으로 폴란드에 완전히 동화되면서 리투아니아어가 사용되는 영역은 점차 축소되어갔다.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빌뉴스는 주민의 대다수가 폴란드인 및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들과 아슈케나짐 유대인들로 가득차다시피 했다. 빌뉴스를 비롯한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 주요 성당들은 대부분 폴란드인 사제들이 관리하였고, 성당은 폴란드/문화를 전파하는 첨병 역할도 겸했던 것이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의 리투아니아인들의 입지는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와 연합한 이유는 동쪽 러시아의 압박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론 리투아니아 왕이 폴란드 여왕과 결혼한 동맹 국가여서 리투아니아 귀족도 폴란드 귀족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문제는 두 나라의 국력을 고려할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서 주도권을 폴란드가 갖는 것은 자연스러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 합병된 것이기도 하다. 반 폴란드 성향의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폴란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폴란드에서 군대를 일으켜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리투아니아 대공국 산하 우크라이나의 관할권을 폴란드로 이관시켰다.
또한 과거 용맹한 전사들이었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점점 빚을 내서 사냥과 연회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군인으로 참전하면서 권리를 증대시켰던 리투아니아 자영농들은 소귀족으로 편성되어 백수 생활을 하거나(...) 운이 나쁘면 농노가 되기도 하였다. 폴란드에서는 농노들의 신분 상승을 제한하기 위해서 유대인과 독일인과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대거 정착시키고 이들에게도 종교와 신분을 핑계로 제한적인 권리만을 허용했는데, 이 덕분에 리투아니아인들이 자생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9] 재판 농노제의 도입으로 리투아니아인 농노들의 생활도 더욱 힘들어졌다.[10] 그래서 사실 리투아니아인들은 지금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마냥 전성기라고 좋아하진 않는다.[11]
이러한 상황에서 최초의 리투아니아어 인쇄물은 16세기에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간되었다. 가톨릭에서는 민족어 대신에 라틴어를 고집한 것과 반대로[12] , 동프로이센의 개신교 목회자들은 리투아니아인 농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를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리투아니아어로 된 개신교 교리 책자들을 인쇄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독일인들이 리투아니아인들보다 우대받던 프로이센이었지만[13] 이러한 연유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는 리투아니아인 교수들이 임용되었다.
종교개혁의 영향은 리투아니아 마이너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도 전파되었다. 지기스문트 2세의 참모였던 미칼로유스 라드빌라 유오다시스[14] 는 대공국 도시 곳곳에 개신교 교회와 부속 초등학교들을 건설하였으며, 대공국의 농민들이 최소 21헥타르에 달하는 농지를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장전하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개신교 선교는 개신교 성경이 루테니아어로 번역되면서 가속화하는 듯 하였으나, 결국 17~18세기 예수회의 활동으로 저지되었다. 예수회 역시 성경을 루테니아어로 번역하면서 농민들에게 가톨릭을 교육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600년에는 스웨덴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이던 리보니아를 침공하자, 리투아니아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명장 얀 카롤 코트키에비츠[15] 가 폴란드 후사르 기병 3천여명을 이끌고 스웨덴 왕이 직접 지휘하는 스웨덴군 정예 기병대를 여러차례 제압하였다. 1611년 스웨덴 군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 축출한 그는 1605년부터 1618년까지 모스크바 공국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동부 영토를 수비해냈으며, 1620년에는 노령의 나이로 폴란드-오스만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에 공헌했다.
얀 카롤의 활약과 윙드 후사르 기병의 힘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영토를 보전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죽음 이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많은 영토를 내주기 시작했다. 스웨덴은 윙드 후사르에게 국제적인 개망신을 당하고 나서, 군사 개혁을 강행하며 유럽의 강대국으로 거듭나는 사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부실한 행정 능력으로 인해 병력수의 제한이 생기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스웨덴 왕국의 부사관과 참모들이 날이 갈수록 수준이 올라갈 때,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믿을만한 보병 전력이 부족해서 국가 예산을 탈탈 털어 외국인 용병 보병을 고용해야 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의 국력 쇠퇴의 분수령이 된 이른바 대홍수 때는 라지비우 가문[16] 을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인 마그나트(대귀족)들이 폴란드로부터의 독립과 스웨덴과의 동군연합을 주장하며, 연방을 침략하는 스웨덴 군을 지원하였다. 스웨덴 군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약탈하면서 민심이 이반하는 사이에 1656년 폴란드 군에 연속으로 두 차례 대패하면서, 리투아니아와 스웨덴 사이의 동군연합 계획도 물건너가게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제일 가는 귀족 가문이었던 라지비우 가문은 이를 계기로 많은 영지를 잃고 몰락했다.
루스 차르국의 지속된 침략과 영토 상실로 리투아니아는 점차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1700년 리투아니아 내전이 터졌다. 1700년에 일어난 리투아니아 내전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구성국이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몇 개의 마그나트(대귀족) 가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다. 17세기 말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가장 권세를 떨치던 사피에하 가문[17] 에 맞서 라지비우 가문, 비쇼베츠키 가문, 파시 가문, 오긴스키 가문의 네 가문이 내전에 참가했다.
사피에하 가문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많은 고급관직을 독점했었는데, 1700년 당시 카디메슈 얀 사피에하가 리투아니아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미하우 사피에하는 리투아니아 궁내청 장관, 베네딕토 파비우 사피에하는 리투아니아 재무부 장관의 지위에 있었다. 사피에하 가문은 궁정에서 큰 발언력을 가져 다른 대귀족 가문에는 불리한 법령을 제정, 실행하여 다른 가문 사람들이 중요한 관직에 오르든 걸 방해했다.
이러한 일은 보다 약한 대귀족과 일반 귀족들에 의한 반 사피에하 연합을 결성하는 결과를 낳았고, 사피에하 가문은 11월 18일에 오르케니키 전투에서 귀족연합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여, 미하우 세르바치 비쇼베츠키에게 가문의 본거지인 루쟈누이 궁전이 파괴되었다. 이후 사피에하 가문은 대공국 내에서 패권을 상실하여 두 번 다시 이전의 지위로 돌아가지 못했다. 내전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정치불안이 계속되어 여러 대귀족 가문들이 사피에하 가문이 상실한 관직과 영지를 둘러싸고 싸우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분쟁의 영향으로 인해 폴란드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곧이어 시작된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의 군사원정 진격로가 되어 국격이 크게 실추되었다. 패권을 상실한 사피에하 가문은 반국왕파의 리투아니아 연맹을 조직하여 스웨덴과 결탁해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분열을 초래했다.
5. 근대: 러시아 제국의 지배 기간
폴란드 분할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상식적이고 단결된 결정을 내리기는 커녕, 서로 이권다툼을 하기에만 바빴다. 결국 1795년 3차 폴란드 분할이 완료된 이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18]
[image]
빌노 현, 코브노 현, 수바우키 현으로 삼등분된 러시아 제국 지배 시절의 리투아니아
상술했다시피 리투아니아인들은 14세기에 들어서야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늦은 것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리투아니아인들 상당수(특히 농민들)는 이중 신앙을 유지하거나 무늬만 기독교인으로 아예 발트 다신교를 그대로 신앙하는 경우가 많았다.[19] 그러나 오늘날에는 러시아 제국의 강점기를 계기로 역설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가톨릭 신앙심이 강한 나라중에 하나로 거듭났다. 폴란드 분할 이후 정교회를 강요하던 러시아는 종종 가톨릭이나 리투아니아어를 탄압하긴 했지만, 리투아니아인 귀족 지주들은 대부분 그대로 계급을 유지시켰다. 가톨릭은 탄압받지만 계급은 그대로 유지된 상황에서 리투아니아인 귀족 지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톨릭의 성도인 로마[20] 에서 찾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어를 가정 내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보존하고 일부러 라틴어 어휘를 대거 도입하면서, 리투아니아어를 지키기 위해서 분투노력했다.
리투아니아의 도심지에는 유독 가톨릭 성당들이 많은 게 특징으로, 러시아 제국의 탄압이 심해질 때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가톨릭을 중심으로 뭉쳤다고. 그 대표적인 유적지가 리투아니아 제4의 도시인 샤울레이에 있는 '십자가 언덕'이다.[21] 십자가 언덕은 18세기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에 의해 분할당했던 시절에 사람들이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에 유래됐고, 소련 치하에 있던 시절에 민족의 성지로 꼽히기도 했다.[22]
다른 발트 국가인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 입장에서 기독교는 “외국인 지주들이 외국어로 예배 보는 문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대 비해, 리투아니아인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민족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러시아 제국 지배 기간동안 에스토니아인들이 여전히 겉으로만 기독교를 믿는 이교도 취급받은 것과 대비되는 부분. 에스토니아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무신론자 비율이 많은 나라가 된 것과 다르게, 소련 붕괴 이후 리투아니아의 가톨릭교회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6. 현대사
러시아 제국 치하의 리투아니아아인들은 민족 의식이 강하고 교육열이 유달리 높았다 한다. 1904년 기준 문해율이 70%에 달했으며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피해 몰래 동프로이센에서 인쇄된 책을 밀반입하여 가정에서 자체적으로 리투아니아어를 교육시켰다 한다.
결국 리투아니아는 20세기 초에 벌어진 1차대전을 계기로 독립을 쟁취했다. 러시아 제국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하면서, 독일에 무조건 양보한 뒤 전쟁을 중단해버렸다.[23] 독일은 리투아니아에 리투아니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설립하고 독일 귀족인 빌헬름 카를 폰 우라흐를 민다우가스 2세로 추대했으나, 결국 독일 제국조차 얼마 안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었고, 이렇게 리투아니아인들은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소련은 물론 붉은 군대를 통해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려 했지만 폴란드와의 폴란드-소련 전쟁으로 리투아니아를 침략할 여력이 부족했다. 길다면 길었던 리투아니아 독립전쟁 후 독립한 리투아니아는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이라는 공화정으로서 새출발했다.[24]
1920년대 폴란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재건과 리투아니아 내 폴란드인들을 빌미로 동맹을 깨고 쳐들어와 안 그래도 독립된 지 얼마 안 되어 군사력이 보잘 것 없던 두 나라만 서로 죽어라 싸우면서 같이 엉망이 되었다. 되려 적대국인 소련이 둘을 중재하면서 더 이상 같이 싸운다면 둘 다 뭉갠다고 협박하자 겁먹은 폴란드에서 순순히 물러서긴 했으나 이때 스탈린이 오히려 교묘히 두 나라의 이간질을 배후조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 폴란드가 빌뉴스를 점거하고 뒤통수를 때린 이래[25] , 1920년-1939년 사이 리투아니아의 수도는 카우나스였다. 양차 대전 중의 기간에 빌뉴스는 폴란드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지만 리투아니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빌뉴스를 법적 수도, 카우나스를 '''임시수도'''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1938년의 '최후통첩' 때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는 국교가 없었고, 교통, 통신, 우편까지도 완전히 차단되었다. 1938년 봄에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하였다. 하지만 국교 정상화에도 불구하고 그 해 5월의 새 헌법에서도 여전히 빌뉴스를 정식 수도로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 파란은 일어나고 폴란드는 독-소에 양분된다. 그렇게 1939년 9월의 폴란드 점령 후 리투아니아와 소련은 '리투아니아-소련 상호원조조약'을 체결,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힘을 빌려 빌뉴스를 수복할 수 있었다. 다만 항구지역인 메멜란트는 대부분 독일에게 빼았겼다가 반환하였다. 이른바 리투아니아 마니어라고 불린 이 메멜란트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은 500년간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으며 루터교회로 개종한 상황이었기에, 가톨릭이 사실상 국교나 다름없었던 리투아니아에서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리투아니아 또한 메멜을 반체제인사들의 유형지쯤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국방력이 엉망이 된 끝에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0년, 일단 '자발적으로' 소련에 합병되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전쟁 이전에 리투아니아에 살던 유대인 및 폴란드에서 피난 온 유대인까지 대략 206,800명 정도가 학살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중 91%가 사망했다고. 결국 2차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면서 리투아니아는 다시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소련에 대항하던 게릴라들[26] 은 물론 죄 없는 일반 양민들까지 정치범으로 몰려 시베리아 정치범 수용소에 강제수용당한 것은 리투아니아의 슬픈 흑역사. 이런 리투아니아의 슬픈 역사를 보고 싶다면 수도 빌뉴스에 있는 KGB박물관을 꼭 방문하길 바란다.
[image]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인 1991년에 독립했다. 1989년 발트 3국이 독립하기 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거쳐 빌뉴스로 이어지는 약 600km를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인간 띠를 이은 ''''발트의 길''''은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유명하다. 발트의 길은 동원된 인원 수와 인간 띠가 이어진 거리가 그 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소련에게 당한 게 많음에도 소련 시절 잔뜩 만들어둔 블라디미르 레닌 및 이오시프 스탈린 동상과 흉상은 하나도 없애지 않고 '''유료''' 공원(!)에 전시하고 있다. 이웃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 이런 흔적들을 마구잡이로 부숴버린 것과 대조적. 우습게도 이걸 유료로 보게 하니 이것들을 조각한 러시아 조각가들이 입장비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했는데, 그렇게 요구한 조각가들의 작품들은 공원 밖에 놔둬서 거저로 구경하게 만들어버렸다.
2004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했고 같은 해에 NATO에도 가입했다. 현재에도 유럽연합과 나토 양쪽 다 가입한 회원국이다.
2019년 5월 26일에 리투아니아에서 총선이 있었는데, 총선에서 경제학자 출신이 최종 당선되었다.#
7. 관련 항목
[1] 이전에 몇몇 선교사들을 보내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 사실 이들이 발트족들이 신성시하는 숲의 나무들을 베고 강압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려 드니 당연히 원주민들 입장에선 신성모독으로 여겨져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2] 몽골 제국의 계승자들은 키예프 루스에 해당하는 영토를 직접 통치하는 것보다는 그저 대충 앉아서 노예와 자원을 수탈하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예상외로 빈틈이 많았다.[3] 이러한 역사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유럽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군을 좋게 보지 않는다.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십자군에 대한 낭만과 환상이 있는데 반해, 리투아니아에서는 자신들을 핍박한 침략자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리투아니아의 역사극이라던가 설화 같은데서도 이러한 모습이 많이 나온다.[4] 1336년에는 필레나이 요새에서 기사단과 전투를 벌이던 리투아니아군과 주민들이 기사단에게 노예로 팔려가지 않으려고 함락 직전에 집단자살했다. 근현대에 필레나이 군민의 최후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자들에게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상징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5] 발트 다신교는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농민들에게 (기독교를 믿으면서 동시에 발트 전통 신앙도 믿는) 이중 신앙의 형태로 살아남는다.[6] 폴란드어 이름은 야기에우워[7] 로무바(Romuva)라고 불렀는데, 현대 리투아니아의 고대 신화 재현운동을 하는 단체 이름이기도 하다.[8] 자세한 내용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항목 참조[9] 이걸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아담 미츠키에비츠였다. 이 사람은 도회지 리투아니아 귀족 출신이라, 리투아니아 출신임에도 리투아니아어 시는 없고 폴란드어로만 시작을 하는 시인이라는 복잡한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 때문에 아담 미츠키에비츠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서로 자기네 시인이라 자랑하는 모습이 있다. 일단은 폴란드 문화원이 아담 미츠키에비츠를 선점하면서, 대외적인 이미지는 폴란드 이미지가 강하다. 추가로 고향이 지금 벨라루스 영토라, 벨라루스 쪽에서도 은근히 자기 시인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10] 18세기 무렵 남자 농노는 200루블, 여자 농노는 100루블에 매매되었는데 반해서,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말의 가격은 500루블'''이었다. 당시 연방의 귀족들이 농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11] 남유럽으로 치면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될 당시 포르투갈 왕국 귀족들은 이를 기뻐했지만 훗날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각종 차별을 받은 것 때문에 현대 포르투갈인들이 이베리아 연합 시절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포르투갈 왕국이 무력을 통해 스페인으로 독립한 것과 달리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또다른 외세들에 의해 폴란드 왕국과 함께 멸망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폴란드로부터 독립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부터 미사와 전례를 라틴어 대신 자국어로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13] 리투아니아인 학생들은 보통 일부러 독일인처럼 보이려고 독일어로만 말하며, 자신이 리투아니아인인 걸 숨기려고 했다.[14] 폴란드어 이름은 미코와이 라지비우[15] 리투아니아어 이름은 요나스 카롤리스 초드케비츄스[16] 리투아니아의 아스티카스 가문에서 폴란드인 귀족들과 통혼하면서 분가한 가문이다.[17] 리투아니아인 가문은 아니고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루테니아인 출신 가문이다.[18] 수세기 전에 독일 기사단한테 정복당해 독일화가 완료된 동프로이센의 메멜 지역 제외.[19] 만약에 리투아니아인 농부들의 이중 신앙이 아니었으면, 구전으로 전해온 발트 신화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20] 가톨릭 교회의 본산인 이유도 있고, 리투아니아 전설에 따르면 네로 황제 때 일족과 북쪽으로 떠나 리투아니아 땅에 정착한 팔레몬이 리투아니아인의 조상 중 한 명이라고 한다)참고).[21] 원래 샤울레이 일대는 15세기 무렵에는 요가일라의 가톨릭 개종 정책에 가장 반감이 심했던 지역이었다.[22] 역설적으로 리투아니아의 민족 정체성과 신앙심은 폴란드와의 연합왕국이 무너진 뒤에 핍박받으면서 더 강조되었다. 하긴 민족주의가 다 그렇긴 하다.[23] 1차 세계대전 와중에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 제국이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참조.[24] 하지만 이후 독립영웅 안타나스 스메토나에 의해서 군부독재로 변모한다. 자세한건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문서 참조[25] 심지어 괴뢰국인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까지 만들어 합병하였다.[26] 약 6만명 가운데 2만명은 필사적으로 죽기 아니면 싸우기로 굴자 대대적으로 군대를 보내 마구잡이로 폭격하여 아주 몰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는 시베리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