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야네스

 


'''파울 야네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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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프리츠 슈체판
(1934~1939)

'''파울 야네스
(1939~1942)
'''

프리츠 발터
(1951~1956)


''' 독일의 축구감독 '''
''' 이름 '''
'''파울 야네스'''
'''Paul Janes'''
'''출생'''
1912년 3월 11일
독일 제국 레버쿠젠 퀴퍼슈테크 지구
'''사망'''
1987년 6월 12일 (향년 75세)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뒤셀도르프
''' 국적 '''
독일
''' 신체 '''
178cm, 77kg
''' 직업 '''
축구선수(라이트 풀백, 하프백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30~1940)'''
SV 빌헬름스하펜 (1940~1941)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41~1942)
함부르크 SV (1942~1944)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44~1946)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46)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46~1951)
''' 감독 '''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49~1951)
''' 국가대표 '''
71경기 7골(독일 / 1932~1942)
1. 개요
2. 생애[1]
2.1. 선수 생활
2.2.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1. 개요


세계 대전 이전 독일 대표팀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던 풀백.

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야네스는 11살 무렵부터 축구를 시작한걸로 알려져있다. 벽돌공 견습생으로도 일했으며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 뛰게 되면서 뒤셀도르프로 이사하게 되었다.
19세가 되던 1931년에 포르투나에서 데뷔전을 치렀으며, 1933년에는 포르투나가 독일 축구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샬케를 3대0으로 꺾는데 일조하였다. 가울리가[3] 니더라인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는 상당한 강팀이었고, 3년 후에도 포르투나는 독일 축구 챔피언십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1. FC 뉘른베르크에 2대1로 석패하며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하지만 여느 유럽 축구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야네스의 커리어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꼬이고 말았다.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떠나 빌헬름스하펜에서 인명구조원 일을 하기도 했고,[4] 빌헬름스하펜 축구팀과 함부르크 SV에서 게스트 플레이어로 경기를 뛰기도 했다.
전후에 뒤셀도르프에 돌아온 야네스는 선수 겸 감독까지 맡아가며 친정팀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1951년 발 골절로 선수 생활을 그만두었고 감독 자리도 내려놓았다.​

2.1.2. 국가대표


야네스는 1932년 헝가리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 감독 오토 네르츠의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해 1년여간 대표팀에서 멀어졌다가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1933년 말엽부터 대표팀의 주축 수비수로 활약하게 된 야네스는 프리츠 슈체판과 함께 공수의 버팀목으로 활약했고, 독일을 최종 순위 3위로 이끌었다. 1936년 올림픽에서는 명단에 포함은 되었지만 경기를 뛰진 않았고 독일은 2라운드에서 짐을 쌌다.
​야네스도 슈체판, 뮌첸베르크와 더불어 브레슬라우 엘프[5]의 멤버가 되었고 덴마크 축구의 역사에 남을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 무렵 서유럽과 동유럽의 올스타전도 추진되었는데 야네스는 부상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1938년 월드컵에서 독일은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분더팀 오스트리아의 멤버들을 안슐루스로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 대회의 3위팀과 4위팀의 퓨전은 시간이 짧았는지 조직력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고 독일은 1라운드만에 재경기 끝에 한 수 아래인 스위스에 덜미를 잡히며 웃음후보가 되었다.
1939년 슈체판이 대표팀에서 은퇴한 이후 야네스는 대표팀의 주장 완장을 이어받았고, 대표팀에서의 마수걸이 골도 쏘아올렸다. 1942년까지 독일의 주장 완장을 차고 수비진에서 활약한 야네스는 하지만 이후 대표팀이 8년간 소집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밀려나게 되었다. 1950년 독일 대표팀이 다시 소집되었을 때 이미 야네스는 38살의 선수 겸 감독이었고 당시 독일 대표팀 감독이었던 제프 헤어베어거는 신임 주장 프리츠 발터를 축으로 새로운 팀을 짜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야네스의 대표팀 71경기 출전 기록은 28년이 흘러 1970년 우베 젤러에 의해 경신되었다.

2.2. 이후


선수 겸 감독으로서의 야네스는 선수로 보여주던 위상에 비해 크게 못 미쳤다.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독일 축구 연맹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레스토랑도 경영하면서 보냈다.
친정팀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는 팀에 대한 그의 공헌을 기려 1972년에 금과 다이아몬드로 된 명예 핀과 함께 야네스를 명예 멤버로 헌정하였고 이후에는 몬하임에서 여생을 보냈다. 1987년 야네스는 브런치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노면전차안에서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또한 플링어 브로이흐에 위치한 홈구장 이름을 1990년 파울 야네스 슈타디온으로 헌정하였고, 지금은 메르쿠어 슈필아레나에 이은 제2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의 시대에선 당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었다. 좋은 위치 선정과 뛰어난 기술, 훌륭한 점프력과 킥이 장점인 선수로 대표팀에서의 7골은 프리킥페널티 킥 등 데드볼 상황에서 기록하였다.[6] 그에 걸맞게 강한 킥력도 가지고 있었는데 포르투나의 팀 동료 마티아스 마우리츠의 회고에 의하면 실축한 페널티 킥으로 크로스바를 맞고 튀어나온 공이 하프라인 근처에 떨어졌다고도 한다.
대표팀에서는 뮌첸베르크와 함께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풀백진을 구성하기도 했다.

4. 수상



4.1. 클럽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1회: 1933(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6(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DFB 포칼 준우승 1회: 1937(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독일 서부 리그 우승 1회: 1931(포르투나 뒤셀도르프)
  • 가울리가 니더라인 우승 5회: 1935-36, 1936-37, 1937-38, 1938-39, 1939-40(포르투나 뒤셀도르프)

4.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나치 독일 시대의 최상위 지역리그. 여기에서 일정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독일 축구 챔피언십 참가자격이 주어졌다.[4] 아이러니하게도 야네스는 수영을 전혀 못하는 맥주병#s-2이었다.[5] 브레슬라우는 현재 폴란드의 도시 이름이고 엘프는 숫자 11을 뜻한다. 중립경기장은 아니고 당시 브레슬라우는 독일 영토였고 제2차 세계 대전때 잃은 영토를 모두 포기해서 지금은 브로츠와프라는 폴란드 도시로 남아있다.[6] 야네스는 이 7골 중 4골은 프리킥, 3골은 페널티 킥으로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