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연합군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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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미연합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주한UN군과 주한미군 사령관을 겸임하며 미 육군 대장이 보임된다
2. 상세
미군의 합동부대 보직이다.[2]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도 대장이기 때문에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모두 대장이다. 한국이 보기엔 이상할지 몰라도 미 해병대만 해도 해병대사령관과 해병대부사령관이 모두 대장이다. 각군 참모차장들에 합참차장도 대장이다. 어차피 휘하에 제7공군(중장), 육군 제8군(중장) 등이 있기 때문에 부사령관이라고는 해도 최소 중장 이상이어야 한다.
다만 대장이라고 다 같은 대장이 아닌게 한미연합군사령관은 미군 대장 보직이고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은 대한민국 국군 대장 보직이다.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형제관계상 미군이 형의 포지션이고 대한민국 국군이 동생의 포지션이라서 보직이 이렇게 배치되는 것이다.
사실 한미연합군사령관이 대장이 된 것에는, 한국 정부의 꼼수가 하나 숨겨져 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을 대장으로 정해둔 이유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문서 참조.
한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상시 근무하는 유일한 미군 4성장군[3] 이라 포스는 넘쳐보이지만 미군 대장 보직 자리들 중에서 보면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닌 편이다. 21세기 미군에서의 진짜 요직은 통합군사령관 중에서도 중동 지역을 관장하는 중부사령관이다. 물론 대장 자리 중에서 '''비교적''' 요직이 아니라는 거지, 미육군 입장에선 대장 보직이 하나가 늘어나는 셈이다 보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4]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보직이 한직으로 머무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여기가 요직으로 꼽히게 된다는건 조선인민군이 깝치는 틈에 중국 인민해방군까지 덤벼오는 한국 전쟁 Restart다(...) 뭐 그래도 존 베시, 존 위컴처럼 주한미군 사령관을 거쳐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간 사람도 있다. 아무래도 80년대까지는 북한이 이런저런 테러나 사고를 많이 치던지라 굉장히 무게감 있는 장군들도 많았지만 21세기 들어서는 그다지 요직이라 볼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이나 중국이 조금만 불경(?)한 모습을 보이면 곧장 천조국 황상(...)이 전화를 때리거나 본국 청문회에 불려나가는게 일상이기에 한직임에도 혈압은 팍팍 오르는(...) 영 좋지 않은 자리.
그래도 최근 주한미군사령관에서 NATO 사령관으로 영전한 커티스 스캐퍼로티 대장이나 대장 승진과 함께 태평양 공군사령관으로 임명된 테런스 오쇼너시 대장(前 주한미군 공군구성군(태평양 제7공군) 사령관 겸 주한미군부사령관) 예를 보면 아직은 백악관과 펜타곤이 주한미군의 지휘관 보직을 중요 보직중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직 중엔 다른 대장급 장군, 제독들보다 좀 파워가 딸릴지 몰라도, 퇴물 대장의 무덤같은 좌천되는 자리같은 건 아니란 소리다.
미국에서 몇개없는 대장자리인지라 한미동맹에 나름대로 숨은 역할도 수행중이다. 이들은 퇴역후 인지도가 나름 괜찮은 편이며 한국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발언등을 많이 해주기 때문이다. 로비가 합법인 미국의 특성상 이들이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목소리를 내줌으로서 간접적인 로비행위가 되는셈이다. 특히 미국은 참전용사들의 사회적인 존경심이 높은편인데 이들의 목소리까지 더해지면서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일본, 이스라엘등지에서 미국에 매년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가면서 로비를 하고 있는 현실에 비춰봤을때 이는 우리나라에 결코 적지않은 도움이 되고있다.
전시작전통제권 문제와 더불어 연합사 사령관은 항상 미군측이 맡았다는것이 환수찬성측에서 제기되자 사령관 자리에 한국장성을, 부사령관 자리에 미군장성을 앉히는게 어떻겠냐라는 의견이 있었고 양국 합의를 통해 이 방안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따라서 전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된 이후에는 한국군 대장이 사령관으로, 미군 대장이 부사령관으로 바뀔 예정이다. 중장으로 내려간다는 소문도 있지만 UN군 사령관[5] , 주한미군사령관도 같이 겸하고 있어 미국 입장에서도 계급을 내리는게 쉽지는 않다.
한번 사령관 자리에 부임하면 다른 대장 보직에서 옮겨왔는지, 아니면 중장에서 진급하여 부임했는지에 따라 임기가 달라지는 편이다. 기존 대장이 옮겨왔다면 보통 2년에서 2년6월, 중장이 진급하여 부임했다면 3년 가량이지만 아주 칼 같이 정해지진 않아서 몇 달씩 더 재임하기도 한다. 14대 스카파로티 대장의 경우 중장에서 진급한 후 첫 보직이지만 13대 제임스 서먼 대장의 경우 대장 보직인 육군 전력사령관에서 옮겨와서 2년간 근무하다 전역했고, 서먼 사령관의 전임인 12대 월터 샤프 사령관의 경우는 중장에서 진급하여 3년간 재임했다. 예외적으로 10대 리언 러포트 사령관은 2002년 5월부터 2006년 2월까지 거의 4년 가까이 재임했다. 러포트 사령관의 경우는 재임기간에 미선이 효순이 사건 등으로 반미감정이 들끓던 시기라서 고생을 많이 했던 케이스.
이렇게 전에 대장 보직을 경험했느냐 여부로 임기가 달라지는 것은 미군의 연금규정에서 원인을 찾는 의견이 있는데, 중장급 이상의 고위급 장성이 전역할 경우 해당 계급으로 일정 기간 복무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특례를 인정할 정도의 특별한 사례가 아니고서는 해당 계급으로 예우를 받지 못한다는 조건이 있어서라고. 다시 말해 받는 연금의 액수가 적어진다. 그외에 미군 기지 접근권 등 의료보험 혜택 등의 문제도 있다. 실제로 스탠리 매크리스털은 ISAF 사령관 시절 대장 진급한 지 1년 만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욕설 및 비난을 하여 잘렸는데, 4성장군 예우로 퇴역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줘서 겨우 중장 강등을 당하지 않았다.
3. 역대 한미연합군사령관
4. 여담
- 한국군의 4성 장군들이 주로 보병 출신이 많은 점을 감안한 인사조치가 나오기도 한다. 스캐퍼로티 사령관은 보병 출신이지만 21세기 들어서는 기병 쪽에서 활동한 사령관이 자주 왔던 편. 특이하게도 서먼 사령관은 헬리콥터 조종사 출신이다.
- 한편 12대 샤프 사령관은 부친이 6.25 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던 인연이 있어서 사령관 부임 후에 아버지가 싸웠던 전장인 강원도 양구군 펀치볼지구를 방문하기도 했다. 샤프 사령관은 본인이 처음 별을 달 때도 주한미군에 있었는데 대령으로 예편했던 아버지가 아들의 장군 진급을 축하한다고 휴전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고.
5. 관련문서
[1] 각각 주한미군, UN군, 한미연합군사령관을 뜻한다. 세 보직을 대장 한명이 모두 겸하는 형태.[2] 통합군(Unifed Combatant Command)과는 다르다.[3]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는 미해군 7함대와 5공군은 모두 중장이 사령관에 임명된다. 주일미군사령관은 제5공군 사령관이 겸직. 태평양 전역까지 범위를 넓히면 태평양통합군사령관과 그 휘하 태평양 육/해/공군사령관 총4명의 대장이 더 있기는 하다.[4] 장군 정도 되면 자리 자체가 TO이다. 즉, 자리 = 진급자 수라는 소리. 비어있는 자리가 없으면 진급 자체가 안되고, 자리가 많으면 비어질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보통 자리 욕심을 많이 낸다. 이는 한국군도 마찬가지. [5]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설치되어 있어 상징성이 대단하다. 심지어 고립주의자를 자처하는 트럼프마저도 주한미군감축등은 언급할지언정 UN군은 오히려 역할을 확대해야 된다는 언급을 했다. 현재로선 섣불리 해체하는것도 쉽지않아 상당기간 UN군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6] 주한미군 사령관 겸임[7] 주한미군 사령관 / UN군 사령관 겸임[8] 5.16 군사정변 당시 쿠데타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윤보선의 거부로 진압하지 못했다.[9] 일본 항복 당시 육군부 중령으로, 딘 러스크(1960년대 미 국무장관 역임)와 함께 38선을 그은 장본인.[10] 6.25 전쟁 당시 미군 제25사단 27연대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며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1사단과 함께 방어작전을 펼쳤다.[11]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미군 사령관. [12] 사병 출신 장성, 그것도 현지임관자로서 4성장군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재임기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했던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낸바 있다. 주한미군 이후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합동참모의장까지 지냈다.[13]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 1980년에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하였으나 신군부를 제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한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레밍과 같아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그에게 우르르 몰려든다'라는 말을 남긴 그 분이다.[14] 영변 핵시설 공습론이 거론된 1차 북핵위기 당시의 사령관이었다.[15] 두차례의 동해안 잠수정 침투, 제1 연평해전을 겪었다.[16] 부임 직후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의 장갑차 압사 사건을 겪었고, 주한미군 평택 이전 등을 맡았다. 때문에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들 가운데서도 가장 힘든 시간을 겪었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재임기간이 4년으로 가장 길었던 것은 아이러니.[17] 2010년의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을 겪었다.[18] 2015년 8월의 DMZ 지뢰 매설과 서부전선 포격 사건 등을 겪었다. THAAD 배치도 그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이후 나토군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19] 최초의 흑인 출신 주한미군 사령관이다.[20] 美육군 전력사령부(Force Command) 사령관, 육군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