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리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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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사령관
존 리드 하지
John Reed Hodge'''
[image]
미군정 사령관 재임시절[1]
<colcolor=#fff><colbgcolor=#002664> '''출생'''
1893년 6월 12일
미국 일리노이 주 골콘다
'''사망'''
1963년 11월 12일 (70세)
미국 워싱턴 D.C.
'''신체'''
173cm
'''학력'''
일리노이 대학 - 어바나-샴페인
미 육군 전쟁대학
1952년 육군 대장 시절의 하지 장군
1. 개요
2. 군인으로서의 경력
2.1. 전간기 시절
2.2.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
2.3. 군정 이후 행적
3. 미군정의 군사적 상황
4. 군정 시기의 행적과 평가
5. 진급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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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군인. 미 육군 제24군단장 시절, 1945년 ~ 1948년 전후 남한미군정 사령관을 겸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사령관에 취임한 초기부터 인민위원회건국준비위원회를 일방적으로 해산시키고, 한민족의 항일투쟁을 지도해 온 대표기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등[2] 편향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섣불리 미곡가격자유화를 강행했다가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친일파 인사들을 재기용해 식민 잔재 척결을 방해하는 등 '''전후 한국인들의 민심을 거스르고 국가의 안녕을 저해하는 행위를 계속해서 저질렀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에 대한 비하 발언을 서슴없이 입에 담거나, 4.3 사건, 대구 10.1 사건 등 여러 대형 사건들을 수습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만 급급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몰라도 '''정치가, 행정가로서는 극히 무능하고 부적합했던 인물.''' 그래도 좋든 싫든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이하의 무능력한 행보로 인해 그의 역사적 비중에 비하여 한국인들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고, 미국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신 같은 기간 동안 '한반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인'으로서의 인지도는 당시 미 극동군 사령관이자 훗날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해진 더글라스 맥아더가 차지한다.

2. 군인으로서의 경력



2.1. 전간기 시절


군인이 되기 전에는 일리노이 남부 사범대학과 일리노이 주립 대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육군 장교에 지원하여 OCS 과정을 통해 1917년 10월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직후 제6사단에 배치되어 사단의 선발대 요원으로 유럽 전구에 파병되었고, 이후 제5사단 제9여단 제61보병연대로 전출되어 휘하의 통신 장교와 중대장으로 전쟁을 치뤘다. 파병 도중 하지는 프랑스가 군사교류의 일환으로 미군에 제공한 프랑스 육군 대학의 교육 과정에 선발되어 교육을 이수하였고,[3] 그 외에 진위가 불분명한 기록이지만 전쟁 말기에 대대장을 지냈다고 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 본토로 귀국한 하지는 1921년 대위로 진급하고 미시시피 주 주립대학의 군사학 교수로 임명되어 4년 동안 근무했다. 정황상 갓 태동한 ROTC의 교관으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교수 보직을 마친 후 육군 보병학교의 고등군사반 과정을 수료하고 1926년~1931년의 기간 동안 하와이에 있는 제27보병연대와 뉴욕에 있는 제18보병연대에 배속되어 연대 장교로 지냈다. 이어서 1936년까지 하지 대위는 육군의 교육기관 4곳[4]에 각각 입교하여 교육 과정을 수료했는데, 특히 항공 전술학교를 수료한 경험은 훗날 그가 태평양 전구에서 부대를 지휘할 때 육군 장성들 중에서 특별히 항공 지원을 적극 활용하고 전술에 능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게 되며 35년에 소령으로 진급한다.
5년 간의 학교 과정을 마친 후 1936년에 대대장이 되어 1년 간의 임기를 지내다가 전쟁부(육군성)[5]의 참모장교가 되어 41년 초반까지 워싱턴에서 근무하면서 중령으로 진급했고, 이후 제7군단으로 전출하여 군단 참모(계획/교육 참모)로 지내다 참모장으로 승진하고 대령으로 진급한다.[6]
당시 군단장은 로버트 리처드슨(Robert Richardson) 소장이었는데, 훗날 중장으로 승진해 43년부터 중부태평양 미 육군 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당시의 하지를 좋게 평가했는지 하지는 그의 휘하에서 2계급(대령, 준장)을 진급했고, 훗날 하지 소장을 제24군단장으로 추천해 주기도 하였다.
40~41년 미군의 초기 팽창 시기에 폭증하던 군 규모에 비례해 기존 정규군 장교들도 조기 승진이 많이 이뤄졌지만, 자신을 좋게 평가해 준 상관의 후원도 영향이 컸음이 짐작되는 기록들이다. 42년 여름에 참모장 직을 마치고 하와이로 전출가면서 그의 경력이 고속 발전한다.

2.2.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참전하여 레이테 섬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7]에서 군단장(Corps Commander)으로 대활약하면서 일개 보병 대령(1941년 12월)에서 중장(1945년 6월)까지 3년 반 만에 진급할 정도로[8][9][10][11][12][13][14]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어 뼛속까지 군인으로 인정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지의 이미지는 대개 한국에서의 군정 통치를 했던 인물로 기억되나, 한국에 오기 전 오키나와에서 군단을 지휘할 때만 해도 하지는 태평양 전 구역에서 절대적인 명성을 떨치던 인물로 당시 태평양 전선 최고 책임자였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15]을 제외한 실무 지휘관급에선 크게 알아줬던 지휘관이었다. 한국 통치로 인한 세간의 평가와는 별도로 하지는 이미 미군 내부에서 인정받은 유능한 군인이었던 것이다.[16] 보병 장교임에도 육군 항공기 승무원 자격 휘장을 취득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여러모로 검증된 인물이다. 하지가 전쟁이 끝나기 직전 중장으로 진급한 것과 1952년에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17][18] 결코 운이 아닌 것이다.
하지는 대령 계급에서 전쟁이 한창인 1942년 6월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하와이에 주둔한 제25보병사단의 No.2(부사단장)으로 지내며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했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얼마 안가 하지는 소장(Major General)으로 진급했으며 아메리칸 사단의 사단장을 맡아 1944년 3월까지 지낸다.
이후 하지는 1943년 남태평양 해역군의 카트휠 작전의 일환이었던 뉴 조지아 섬 지상전과 부갱빌 섬 전투에서 사단장으로 전역에 참가했다. 1944년 4월 하지는 하와이에서 신설된 육군 24군단장[19]으로 임명되어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1948년 8월까지 군단장으로 지내게 된다.
제24군단은 사이판과 티니안 전투에서 군단 포병대[20]를 지원했으며 9월에 있을 팔라우 제도 작전에서 본도였던 바벨투아프 섬에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일본군이 섬에 병력을 증원하고 요새화를 대거 진행중이라는 첩보가 입수되어 취소되었고 대신 제도 동쪽에 있는 서부 미크로네시아의 야프 섬과 울리시 환초, 인근 섬들로 목표가 변경되었다. 작전 개시일은 10월 5일이었고 이를 위해 제24군단은 9월 초순부터 승선과 적재를 해서 9월 15일에 하와이를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야프 상륙 작전은 출항하기 직전이었던 9월 13일에 돌연히 뒤바뀐다. 당시에 팔라우 제도 침공의 예비 단계에서 홀시 제독의 제3함대 제38기동부대는 일본군의 배후지였던 필리핀 열도 곳곳을 폭격했는데 일본군의 저항은 미약했고 이에 홀시 제독은 필리핀의 일본군이 약한 전력이라고 판단하고 니미츠 제독을 비롯한 상부에 전문을 보내 건의하여 야프 상륙작전에 쓰일 제24군단과 제3함대의 상륙함대군을 맥아더 장군에게 넘겨서 레이테 섬을 조기에 침공하자고 주장한다. 니미츠 제독은 출항전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오는 하지 장군에게 홀시 제독의 전문을 보여줬고 하지 장군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대로 합동참모본부에 건의를 올렸다.
홀시 제독의 건의는 승인되었고, 제24군단을 태운 수송선단은 하와이를 출항, 마셜 제도의 에니웨톡 섬에서 재급유를 받고 남태평양의 마누스 섬으로 이동하여 맥아더 장군의 전구에 배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와이에서 선단이 출항할 때 하지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급히 항공편으로 뉴기니 섬 서부의 홀랜디어로 가서 레이테 섬 전투를 총괄할 제6군 사령부에 신고를 하고, 제6군의 작전수립에 제24군단을 추가하는 기획과정을 거친후 다시 항공편으로 에니웨톡으로 이동, 선단에 합류하여 승선했고, 10월 초에 마누스 섬에 도착한 선단은 2차 급유를 받아, 제7함대의 나머지 선단과 합류해 레이테로 항해한다.
1944년 10월 하지는 24군단을 지휘하여 레이테 섬에 상륙해서 12월 말까지 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24군단은 섬에서 몇달간 재정비를 하고 오키나와 침공 작전에 동원되어[21] 1945년 4월 상륙했다. 24군단은 오키나와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결국엔 섬을 점령했고 하지는 공로를 인정받아 45년 6월[22]에 중장으로 진급했다.[23] 그 후 하지 중장과 제24군단은 오키나와 섬에서 휴식과 재편을 하며 몰락 작전을 준비하던 도중 곧 일본이 항복하면서 점령군으로 한국에 급파된다.

2.3. 군정 이후 행적


군정 종료 후 미 본토로 귀국,[24][28][31][32] 포트 브래그의 5군단장[33]을 지냈고 한국 전쟁 초기 시점에서 본토의 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2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육군 지상군 사령관[34][35]을 지내다 한국 전쟁이 끝날 무렵 전역했다.[36][37]
1948년 8월 미 군정 종료 이후의 하지 장군의 행적은 세간의 인식엔 절대적으로 한국과는 인연이 끝난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최근에 발견한 사실로는 그게 아니었다. 1952년에 미국 육군 지상군사령관(Field Forces C.G)에 보임되고 육군 대장이었던 그는 그해 10월경 해외 주둔 미 육군에 대한 시찰의 일환으로 전쟁 중인 한국을 몇 주간 방문한 것이다. 당시 제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과 접견하고 유엔군, 한국군 각급부대, 포로 수용소를 두루 살폈던 그는 백선엽, 유재흥 장군을 위시한 한국군 수뇌부와도 만났는데 미 군정시절(국방경비대)부터 알았던 인연들이다.

1953년 하지의 육성 인터뷰 영상.
그 뒤에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다가 1963년 12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3. 미군정의 군사적 상황


  • 이 항목은 군정 초기의 미군의 전술적 상황을 중점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그 외의 내용은 미군정 문서를 참고할 것.
밑에서 후술되었듯이 원래 남한에 배치될 미군은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스틸웰 육군 대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10군이었고 초기 계획에선 하지 중장의 제24군단(예하 3개 보병사단)을 주력으로, 야전군 직할로 공병, 전차, 방공여단과 그외 전투지원부대와 근무부대가 배속되어 총합 11만명의 병력이 수송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병력 계획은 폐지됐고 계속 변경되어 최종적으로는 미군의 선발대가 조선 총독부의 항복과 서울을 접수하고 후속부대가 지방 곳곳으로 배치될 때인 45년 가을이 돼서야 확정되었는데 이때쯤 되면 크게 축소되고 많이 달라진다.
먼저 남한 군정을 담당할 사령부가 10군에서 24군단으로 격하되었는데, 미군 수뇌부에선 원래 10군에 배속된 각종 부대들을 그대로 24군단으로 전환시켜 크게 증강된 군단급 부대로 기능유지를 도모하려고 한 듯 하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작전의 진행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린건지, 각지의 미군 부대를 싣고 수송할 해군 수송선단의 집결 및 도착이 계속 지연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만주 지역에서의 소련군의 진격이 매우 빨라서 한반도 전체를 금방 석권할 조짐이 포착되자 미군은 일단 24군단 본부와 일부 직할대(제24군수지원사령부, 제1특별공병여단의 분견대) 휘하 1개 사단(제7사단) 등 2만 5천명의 병력을 1차 제대로 편성하여 9월 4일까지 승선을 완료하고 5일에 출항하여 8일에 인천에 도착했다. 선박의 부족으로 각 부대에 편제된 중무기, 중장비는 대부분 남겨둬서 거의 전부가 사실상 보병 차림이었는데 그들의 장비는 후속 선단이 싣고 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9월 15일 맥아더 원수는 하지 중장에게 무전으로 훈령을 보내어 미국 본토에서 전시 동원의 해제가 진행중이며 태평양 전구에서 가용한 점령군의 규모를 60만명 이하로 축소시켜야 하는 관점에서 점령 작전의 진행에 중장비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장비가 많은 부대를 점령군 부대 목록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하지는 오키나와에서 대기하던 군단 직할부대 중 3개 대공포대대와 1개 포병대대, 1개 전차대대와 제20기갑단 본부를 임시로 헌병부대로 전환시켜 후발 제대로 남한으로 이동시켰고, 떠나기 전에 부대들이 편제했던 주력 병기, 중장비와 관련 부속, 기자재들은 섬의 창고로 이관시켰다. 그외 다른 3개의 포병대대는 점령군 목록에서 지워졌고 잔여 방공, 기갑, 포병부대의 이동은 취소시켰다. 선발대로 남한에 온 제7사단 포병대는 야포를 가져왔지만 제24군단 포병대는 모든 야포를 오키나와에 두고 왔다.
1차 제대의 주력 부대인 제7사단은 태평양 전쟁에 1943년 4월 해외파병되어 북태평양 알류샨 열도의 에투 섬 전투를 시작으로 44년 2월과 10월에 각각 마셜 제도의 남부 콰잘린 환초 전투와 필리핀 중부의 레이테 섬 전투(지상전)를 치뤘고 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로 4개의 전역(Campaign)에 참전했다. 전쟁 기간 동안 총합 921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매 전투마다 계속 보충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단엔 그간의 전투 경험이 누적된 다수의 베테랑 장병들이 많이 포진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최소 2차례 이상의 전역를 치뤘고 사단의 장병들중 35%(5200명)는 즉시 제대가 가능했던 전역 점수 85점 이상[38]을 획득한 상태였다. 그들은 제7사단보다 더 뛰어난 부대는 없다고 자부했다. 비록 전후 군축으로 훗날 한국전쟁 초기의 미 7사단은 많이 열악했지만 이 당시만 해도 베테랑 사단이었다.
이 1차 제대가 편성되기 전까지 병력 계획이 무려 12번이나 계속 변경되었는데 그만큼 당시의 상황과 변수가 매우 유동적이었고 미군은 최초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게 명백했다. 가장 중요했던 3가지의 변수는 해군 선박의 부족과 소련군의 진격 상황, 그리고 종전 직후 바로 시작된 미군의 군축이다.
45년 11월 1일경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7만 7천명으로 가장 최고치였다. 하지만 그 직후 군축의 영향으로 감소하여 46년 4월 경엔 4만 4천명으로 감소했는데 그 직후 교대 병력의 도착으로 일시적으로 6만명까지 증가했지만 47년부터 군정 종료까지 4만명 정도로 유지된다.
상당수의 미군 장병들은 전역 점수 85점 이상과 그에 상응하는 복무기간을 이미 달성한 상태였고 군에 잔류하려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장교[39]와 사병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전역하여 집에 가고 싶어했다.[40] 제7보병사단에서만 이런 순환배치로 45년 가을부터 46년 중반까지 최소 7500명 이상의 사단 장병들이 본국으로 순환배치되어 대부분은 전역했다.
제7사단의 휘하 연대(제17, 32, 184 보병연대)중 제184보병연대(주방위군)도 동원해제되어 46년 1월 20일에 제7사단의 부대서열에서 방출되어, 후술할 40사단과 동일하게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으로 복원갔고, 대타로 태평양 전쟁 초기, 42년 필리핀 방어전의 바탄 전투에서 항복/소멸한 제31보병연대가 재창설되어 제7사단의 3번째 보병연대로 편제되었다. 기존의 184연대원들중 점수미달 장병은 31연대로 편입되었다.
제31보병연대는 최초 창설부터 미국령 필리핀에 기반을 둔 현지 미군의 정규 전투부대로 필리핀 방어전에서 필리핀 군이 밀릴 때 전선의 소방수 역활을 담당했으나 바탄 전투의 암울한 상황과 맞물려 결국엔 항복했고 부대의 재창설엔 GHQ의 맥아더 원수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연대는 훗날 한국전쟁의 장진호 전투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게 된다.
제24군단 휘하 사단들중 먼저 제40사단이 철수했는데 40사단은 남한에 상륙한지 1달만에 전시동원의 해제예정을 통보받아 미 본토로 철수하여 원래의 역활이었던 주방위군 사단으로 캘리포니아 주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45년 겨울부터 6, 7사단에 담당구역을 순차적으로 인계하고 46년 2월 20일부터 사단 본대의 철수가 예정되었고 사단의 각급 부대에서 인원을 추려서 300명 규모로 사단 후발대가 편성되어 철수 전 사단의 기록과 서류/행정 작업을 완료하고 3월 중순 철수한다. 그동안 46년 연초부터 40사단의 장병들중 전역 점수가 미달되는 장병들은 24군단 휘하의 다른 부대로 내보냈고[41] 점수를 충족되어(45점) 전역을 희망하는 장병들은 일시적으로 사단에 편입되어 미 본토로 가는 철수 행렬에 합류했다.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주한 미군정의 전술부대중 최후로 철군한 부대는 제5보병연대 전투단으로, 연대의 역사를 보면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8년에 처음 창설된 유서 깊은 부대로, 2차대전에선 1939~1943년 시기에 파나마 운하 경비대로 주둔하다 미 본토에서 제71보병사단이 신설되면서 휘하 연대로 편제되었다. 연대는 1945년 1월에 유럽 전구로 파병되어 라인란트 전투를 겪었으며 이후 남부 독일, 오스트리아로 진격했고 그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점령군으로 지내다 군축의 영향으로 1946년 11월에 해산되었다가 1949년 1월 1일에 한국에서 다시 창설되었다. 부대의 기간장병과 장비는 일본으로 철수하던 제7보병사단에서 추려내어 편성했으며, 미 군정의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후위대로 몇달을 더 주둔했는데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는 신생 한국군이 질적으로 향상될 때까지 전쟁 억지력 차원에서 미군이 계속 주둔하길 바랬지만, 미군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내놓은 생색내기적 방안이었다. 제5연대는 49년 6월 30일에 한국을 떠났으며 하와이 주둔군이 되어 지내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다.
ㅡ 다음 단락 자료 분석과 구상 및 작성중, 문맥상의 공백부분 보완 준비중...ㅡ

4. 군정 시기의 행적과 평가


그를 남한의 미군정 사령관으로 선임한 것은 실책이었다. 그는 한국의 역사나 한국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행정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조직을 이끄는 일에는 문외한이었다. 결국 한국인들과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이끌 만한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그에게는 매우 부족했다.

제임스 매트레이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년~1988년)은 '''"하지는 단지 수송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약 2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의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선택된 인물"'''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 말 곧이곧대로 단순히 수송 문제나 미국의 무지로 하지 장군이 임명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게, 원래 남한의 군정 사령관 내정자는 육군 대장 조지프 스틸웰이었지만[42][43] 장제스와의 불화 때문에 불발, 이후 임명된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의 경우는 이전 근무지인 중국의 국공내전 중재 등의 일 때문에 임명이 철회되었다. 한 마디로, 하지가 임명된 것은 '''불가항력적인 불운'''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44]
어쨌든,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본인부터가 당연히 한반도 정세에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한반도 정치 세력 중 가장 미국과 입장이 맞는 세력이 한국민주당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민주당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여운형에게 "쪽바리(Jap)로부터 을 얼마나 받아먹었지?"라고 심문'''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전형적인 외곬수 군인이다 보니 정치에 감각도, 재능도 없었다. 당장 한반도 북부에 소련의 영향력이 건재한 판에 조선 내부 좌파 활동(특히 공산당 쪽)에 대놓고 제재와 차별을 가하여 소련과 국내 좌파 세력 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그렇다고 친미 우익 세력들과 관계가 돈독했느냐면 또 그건 아니어서, 반공 성향이 강한 동시에 독립운동 경력 등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서도 좌익 인사들을 견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던 이승만이나 김구는 독선적이라고 꺼려했고, 여기에 반탁 운동을 계기로 이들과 더 사이가 안 좋아졌다.[45] 정치인 테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근거도 없이 김구만을 테러의 배후로 지목해 더욱 서로가 떨떠름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또한 존 하지 치하의 미군정이 실시한 경제정책도 혼란을 부채질했는데, 우선 1945년 작황은 풍작이긴 했지만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를 무리하게 해산시키고 섣불리 미곡 가격자유화 조치를 취하다가 과도한 통화팽창으로 인해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결국 가격자유화 조치를 철회했지만 매점매석 단속에 실패해서 쌀값 통제에 실패했다. 거기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콜레라가 돌았을 때 봉쇄 조치를 취했는데, 막상 생필품과 식료품, 의약품의 보급을 소홀히 하여 대구 시민들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이는 결국 1946년 10.1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적산을 불하하는 과정에서 기존 직원들이 조직한 위원회는 좌익 운동의 소굴이 된다는 이유로 취소하고 엉뚱한 자들에게 분배하는 경우도 허다해서 불협화음이 잇따랐고, 토지개혁도 북한의 급진적 조치에 비해 온건해서 여론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는 이유로 미루는 등 그야말로 미숙하기 그지없는 아마추어였다.[46]
이처럼 일제 치하부터 내려온 민생경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미숙하기 그지없는 조치로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등 군인으로서는 몰라도 '''행정능력이나 정치적 능력은 최악이나 다름없었고''', 같은 편이었던 우익 인사들조차도 하지의 무능에 대해서 학을 뗐을 지경이니 자연히 당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존 하지는 비호감,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박헌영남로당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니 일정 수준의 혼란이야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백색테러를 제어하지 못하거나, 4.3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 수습은커녕 되려 이를 부추기는 행보를 보이는 등 혼란 수습에 무능하면서 무책임하기까지 했는데, 이처럼 국내 질서를 수습할 수 있었던 영향력 있는 집단, 어쩌면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을 미국을 대표하는 인사가 될 인물이라기에는 완전히 부적격자 수준이었다.
물론 그 나름대로 공로가 있기는 하다. 소작료를 크게 낮추면서 소작농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대대적인 문맹 퇴치와 교육시설 증대로 78%에 달하던 문맹률을 단 3년 만에 절반 수준인 41%로 크게 낮추는 등 분명히 잘한 일들도 있긴 한데, 상기된 초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 유발, 남북 분단 고착화, 4.3 사건 등 온갖 삽질들과 비교하면 그냥 개평 수준이다.
어쨌든 국내 정치 세력들에게 좌우를 막론하고 이렇게 어그로를 주고받았던 탓인지, 하지는 광복 직후 상황을 끝내 주도하게 된 이승만에게 '''특히''' 감정이 안 좋았다. 하지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승만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하고 싶다"고 적어놓기도 했다. 또한 방한한 미 전쟁부 차관 드레이퍼 앞에서 "이승만은 스스로를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단독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으로,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독재 정권'''"이라고 이승만을 신랄하게 까 댔는데, 물론 그가 무슨 통찰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감정적으로 욱해서 비난한 것이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처음 이승만을 불렀을 때는 그가 한국 내부의 지도적 인물임을 인정해서 굉장히 공손한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설이 있다. 정해구의 <분단과 이승만 : 1945 ~ 1948>에 따르면,
"하지 장군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는 기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허리를 굽실거리며''' 옆걸음질로 들어오면서 'Please, this way(이쪽으로 오시지요.)'라고 세 번인가 되풀이해서 안내말을 하면서 백발이 성성한 이 박사를 인도해요. 미 육군 헌병들이 이 박사에게 거수 경례를 하는 속에서 회의실에 들어온 이 박사가 곧 붉은 가죽에 앉았는데도 '''하지는 앉지도 않고 거의 부동 자세로 서 있습디다.''' 그러니까 이 박사가 하지 장군을 쳐다보면서 'General, Please sit down.(장군, 앉으시지요.)'하고 말하니까 그제서야 이 박사와 나란히 앉습디다."
라는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쪽 독자를 타겟으로 나오는 책들이 그렇듯이 신빙성있지는 않고 증거도 없다.
하지는 이렇게 이승만을 접견한 후 한반도 진입 때 인공에서 보낸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여운형의 비서 조한용, 미국 브라운 대학 출신 백상규가 찾아왔을 때 문전박대를 했고, 언론들의 환영식도 다 씹었다. 광복 직후 당시의 이승만이 상당한 거물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영향력의 고하를 떠나 반대 진영의 인사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만남을 무시하는 것은 상대에게 큰 결례이며, 특히 정치인으로서는 절대로 삼가야 할 무례한 행위이다. 하지가 기본적으로 중립을 표방해야 할 의무를 가진 지도자로서는 완전히 실격인 인물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들 중 하나.
사실 당시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야 이승만의 입지라는 것이, 여운형의 동생이나 비서가 아니라 여운형 본인이 온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중요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승만은 하지의 직속 상관인 맥아더보다 5살이나 위인 노인이었다. 그런 노인이 그 나이가 다 되도록 독립 운동을 했다고 한다면[47]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또한 다대하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하지는 앞에서 보았다시피 한반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니 일단은 본인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자신들에게 쓸모있어 보이는 쪽을 먼저 선택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군정에 있으면서 그가 남겼던 어록들도 하나같이 가관이기 짝이 없는데, 입만 열었다 하면 '''"나는 정치를 모른다"'''라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는 수준이었다.

"한국인은 일본인처럼 고양이와 같은 민족이다."

"왜놈들을 다루는 것은 쉬운 문제다. '''한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약탈당하고 매를 맞았다고 떠들어 대지만 증거가 거의 없다.''' … '''이들보다 더한 '멍텅구리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한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강간하고, 강탈하고, 살인을 했다. 그들은 사람을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

"주민의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으로 의미없이 인민이 희생되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되어 재건이 지연될 것."

"앞으로 몇 달 동안의 당신들의 행동을 통하여, 세계의 민주 국가들과 그들의 대표자인 나에게 당신들의 민족으로서의 도량과 능력, 독립국의 일원으로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인들을 비롯, 제국주의 시대 서구인들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심심하면 하던 오만한 발언들과 큰 차이가 없다.[48]
요컨대, 그의 한반도 군정 통치는 '''정치를 모르는 군인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떤 사단이 나는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 준 일종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한때 당이 480개가 난립한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지경이었던 혼미한 한반도 정세 속에서, 그나마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위치인 미군의 수장급 인사라는 작자가 하는 짓마다 저런 꼴이었으니 혼란과 갈등이 수습되기는커녕 악화되는 것이 당연했다.
오죽하면 당시 한반도 문제에 있어 영향력이 가장 컸던 미국 군인 세 사람, 즉 맥아더, 하지(군사령관), 러치(군정 장관)를 가리켜 이런 드립도 유행했을 정도라고 한다.

맥아더: 한국 문제는 되는 대로 '''막하자'''.[49]

러치: 그'''렇지''', 그'''렇지'''.

하지: 되는 대로 '''하지'''.

삼팔선이 등장한 과정에서도 그의 책임이 일정부분 존재한다. 해방과 일본의 돌연한 항복으로 국무성은 3성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50]는 8월 10에서 15일 사이에 몇 차례 장시간 회의를 열었다. 미 국무성은 미국이 가능한 한 북쪽으로 진주해서 항복받을 것을 건의했다. 군으로서는 즉시 이용할 만한 병력이 부족했고, 또한 시간과 거리상의 조건으로 보아도 소련군이 이 지역에 진입하기 전에 더 북쪽으로 가기는 어려웠다. 군의 견해는 만일 항복 수락 제안이 현재 우리들의 군사 능력을 훨씬 초과한다면, 소련이 이를 수락할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다. 맥클로이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대령에게[51] 대기실에 가서 미군을 가능한 한 북상시켜 항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치적 요망과 미군 진주 능력의 명백한 한계를 조화시키는 안을 작성해 오라고 요청했고, 미군은 현실적으로 미군 관할 지역 내에 한국의 수도를 포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 역시 38선 분할에 동의한 것이었다.
매일신문에 연재된 레베데프 비망록에 의하면, 서울로 온 테렌티 시티코프 장군 및 레베데프와 의논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LIFE 잡지에서 풀어놓은 사진 중에 비망록에서 말한 5월 21일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들도 보인다.
말년에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회고하며 "내가 민간인이었다면 아무리 거액의 보수를 줘도 맡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하지 본인도 군정 사령관 시절을 자신의 흑역사로 여긴 것이 분명하다.
반면 그의 부하였고 후임으로 제2대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던 존 콜터 장군의 경우 한국 전쟁 초기에 군단장으로 참전했고, 1952년에 전역한 후에도 1960년대까지 한국과 밀접하게 활동을 펼쳤다. 이 콜터 장군의 약력을 살펴보면, 2차대전 당시에 제85보병사단장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했고 전후 47년 10월에 제7보병사단장으로 한국에 부임했고 48년 8월에 하지 중장의 후임으로 제24군단장 겸 주한미군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주한 사령관이 되었을 땐 이미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고 미군의 철군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그는 철수과정을 감독하고 잔존 미군을 책임지는 역활에만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의 철수는 순차적으로 계속 진행되어 1949년 1월이 되면 제24군단이 해산되고 콜터는 일본으로 임지를 옮겨 제1군단장으로 취임했고 49년 여름, 한국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그의 한국 근무가 끝날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한국에 잔류하는 미군 군사고문단의 단장에 보직되길 요청했으나 각하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후 군축의 연속에서 미군의 부대 통폐합으로 인해 1950년 3월에 제1군단도 해산되었고 콜터는 미국 본토의 제5군 부사령관이 되었는데 몇달 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콜터는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된다.
1990년대에 KBS-1에서 방영한 광복 이후 한국사 다큐멘터리에서도 한국을 무시하던 하지라고 엄청 깠다. 한국에 대하여 몰랐던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모르는 부분에 대해 알아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후진국이라며 무시하던 사람이었기에 미군정이 한국사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되던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내레이션이 대놓고 깔 정도이다.
1998년 8월 MBC가 건국 50주년 특집으로 제작한 5부작 다큐 '격동 반세기의 통치자들'에 등장하는 4명 가운데 한국인이 아닌 인물로 유일하게, 그것도 제1편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52] 물론 비판적인 시각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하지 이후의 미군정들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처럼 영 좋지 않게 끝나버린 경우가 많아서 하지 시기의 미군정이 상대적 고평가를 당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존 하지 시절의 한국이 제대로 굴러가는 나라였냐면 그건 아니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은 군정 이후로도 반군이 대놓고 나돌아다니는 등 개판이었다. 최소한 한국의 미군정은 비록 진통을 겪긴 했지만, 빨치산이 암약한다던가 하는 일 없이 그런대로 행정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데만큼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가 정말 좋은 통치자였다는 식으로 재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 그만큼 미국의 군정이 이후로도 형편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퇴보한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

5. 진급 내역


※ 계급 형식의 차이는 각주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생략.
  • 정규계급, 중령까지 적용
  • 전시계급, 중장까지 적용


[1] 사진에 보이는 군복에 부착된 하트 모양의 부대 마크는 미 육군 제24군단의 마크이다.[2] 유념할 점은 이것이 하지의 독단이 아니라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기 전부터 맥아더의 미 극동사령부가 미군정 외의 정부 세력을 불허한다고 선포했던 것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며, 이 부분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맥아더에게 있다.[3] 미군 외 다른 연합군에도 개방한 교육과정이었다. 당시 그의 교육생 동기들 중 고모다 고이치라는 일본군 장교가 있었는데, 하지는 훗날 45년 9월에 조선 총독부의 항복식에서 경성 사관구 소장이 된 고이치와 재회했던 바 있다.[4] 육군 화학전 학교, 육군 지휘참모대학, 육군 전쟁대학, 육군 항공대 전술학교[5] 2차 대전 때의 미 육군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해군부와 함께 전후 국방부 예하로 편입되었다.[6] 오늘날의 미군/한국군의 군단 참모장의 계급은 준장인데, 이 때까지의 미군은 평시의 작은 군대 규모와 그에 따른 인사적체 때문인지 보직 적정계급이 지금의 미군보다 낮았다. 미군이 대전에 참전하면서 광범위하게 팽창된 군 조직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유의 계급 인플레이션이 생겼고, 현재까지도 이 중 일부는 적정하다고 여겨져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7] 오키나와 전투의 지상 병력으로 육군 4개 사단과 해병 2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미 육군 제10군의 사령관인 육군 중장 버크너 장군의 지휘하에 있었으며, 여기서 육군 사단들로 구성된 육군 군단을 지휘한 인물이 바로 하지이다.[8] 미국 독립 전쟁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미군은 전쟁일 때만 군 규모를 늘렸다가 전쟁이 끝나면 최소한으로 매우 감축시켰는데 이때까지의 미군은 평시엔 심각한 인사 적체로 2차 대전에서 큰 활약을 떨쳤던 많은 군인들이 당시에 한 계급의 근속을 최대 10년이 넘도록 있었고 그 이전에 더욱 심했다. 그래서 군대에 정말 헌신할게(?) 아니면 보통 대위에서 전역하는 게 당시의 분위기였다. 2차 대전이 터지고 미군의 규모가 유례없이 폭발적으로 불어나자 그때까지 있던 정규군 장병들은 전시 육군 징집군 체제- : Army of the United States(베트남 전까지 이어진다)의 중핵으로 급속 진급하였다.[9] 2차대전이 개전된 시점인 1939년 9월의 미 육군은 18만명(현역)이었는데 전쟁 개전 직후 현역 정원을 23만 명으로 증가했고, 통계상엔 없는 존재였던 주방위군도 같은 정원으로 늘리며, 40년 6월 프랑스의 항복을 계기로 9월에 징병법을 신설하여 징집병(63만)을 병력 규모에 포함시키고 현역(50만)과 주방위군(27만/현역 동원)의 정원을 다시 늘려 전체 병력 정원을 140만 명으로 확대해서 41년 여름에 충원을 달성한다. 진주만 공습 시점의 미 육군은 170만명으로 확대되어 39년 개전 시점의 규모의 9.4배(940%)에 달했다. 물론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후엔 병력규모가 훨씬 폭발적으로 팽창하지만 참전 직전의 기존에 팽창한 군대 규모를 유지하려한 노력이 오히려 더 컸다. 이 와중에 전간기의 군축을 견뎌내고 초장기간의 인사적체에 근속했던 육군 정규군의 영관급 장교들은 잠재적으로 전시 군대를 주로 이끌 주력 지휘관/참모로 발탁되어 고속 승진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40년 8월 시점에서 미국 육군 장교의 총원은 1만 5천명이었지만 44년 1월 시점에선 30만명으로 증가했다.[10] 전시에 신규 편성된 군의 조직과 부대들이 어마어마해서 미군의 전시 체제 편성이 완료될 43년 초반까지만 해도 기성 장성/장교단이 상위 계급으로의 진급과 중요 보직(?)에 임명되는 것은 쉬웠으나 그 이후로는 달라진다. 초기에 해외 파병된 미군이 추축군과 실전을 겪으면서 발생한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나름 자성하면서 실전에서 두각을 보인 인물 위주로 고속 진급과 중책 유임과 임명이 작용하고 실전에서 도태되고 미흡한 자들은 한직으로 보내져서 전쟁의 남은 기간동안 지낸후 전후 군축의 구조조정에서 0순위로 강등/전역처리가 되고 몇몇은 50년대까지 장포대급으로 살아남아 만기 비슷한 전역한 사례가 많다. 예를 들면 43년 9월 이탈리아 전선에서 이태리 본토의 살레르노에 상륙한 미 육군 제6군단장 어네스트 달리 소장은 상륙 초기에 졸렬한 지휘로 독일군의 반격에 군단 휘하에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바다로 밀려날 뻔했다. 결국 상관인 제5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대신 수습하고 그 직후 지중해 전구 사령관인 아이젠하워가 그를 해임시키고 미국 본토로 전출보냈다. 43년 연말에 달리는 전시 소장 계급(41년 10월에 진급)이 박탈되었고(Termination of Rank), 평시 계급이었던 대령(39년 5월에 진급)으로 강등된다. 한창 전쟁중이고 미군이 계속 팽창할 시점일 때에 벌어진 극히(?) 이례적인 강등 조치로, 보통의 경우엔 일단 한직으로 보낸 후 전후의 군축에서 계급 처분되는 것을 감안할 때 군 상층부에서 달리 대령을 매우 괘씸하게 본 듯하다. 그후 달리 대령은 후방 직책과 한직을 전전하고 47년 9월에 61세로 전역하면서 예비역 준장으로 진급했고(상층부에서 그를 불쌍하게 봐서 체면을 봐준 듯 하다) 48년에 예비역 소장이 된 게 끝이다.[11] 미군의 장군/제독의 보직 및 계급 T/O도 2차대전을 치르면서 매우 증가했는데 2차대전, 냉전, 테러와의 전쟁 이후 그 때 마다의 군축으로 줄었어도 2020년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육군 대장 계급자는 전간기~진주만 기습 이전까진 육군참모총장, 단 1명(조지 마셜)이었지만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9월 시점에선 참모총장 및 기존의 대장들이 원수로 승진한 것(마셜, 맥아더, 아이젠하워, 헨리 아놀드)을 제외해도 10명이 넘었다. 관련 사례는 작성중이며, 현재 2020년의 미군도 육참총장외에 대장급 직책에 자군/합동 보직이 꽤 많다.[12] 마셜 장군을 제외하고 육군 대장 계급자의 경우, 44년까진 4명으로, 진급 서열순으로는 맥아더(41년)> 아이젠하워>(43년) 헨리 아놀드(43년)> 스틸웰(44년)이며 45년에 진급한 대장들은 12명으로 그들 각각의 보직과 진급일자를 기재한다. 1. 월터 크루거(45년 3월/제6군 사령관-태평양) 2. 브레혼 소머벨(45년 3월/육군 근무군 사령관-미국 본토) 3. 조지프 맥너니(45년 3월/미군 지중해 전구 사령관-이탈리아) 4. 제이콥 데버스(45년 3월/제6집단군 사령관-프랑스>독일) 5. 조지 케니(45년 3월/남서태평양-극동공군(전구공군)사령관-태평양) 6. 마크 클라크(45년 3월/제15집단군 사령관-이탈리아) 7. 칼 스파츠(45년 3월/미군 유럽전구 전략공군사령관-영국) 8. 오마 브래들리(45년 3월/제12집단군 사령관-독일) 9. 토마스 핸디(45년 3월/육군참모차장-미국 본토) 10. 조지 패튼(45년 4월/제3군 사령관-독일) 11. 코트니 하지스(45년 4월/제1군 사령관-독일) 12. 조나단 웨인라이트(45년 9월/전직 미군 극동 전구 사령관/42-45년 전쟁 포로)[13]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 사령관이었고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와 크레이튼 에이브럼스는 웨스트포인트 1936년 졸업생으로 진주만 기습이 발생한 1941년 12월엔 대위 계급이었는데 전시 진급으로 둘 다 42년 2월에 소령, 42년 9월에 중령이 되었고 44년 7월, 45년 4월에 각각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 2명 외에 전쟁 말기의 대대장 및 연대장을 지냈던 미군의 많은 중견급 지휘관들이나 동 계급의 참모장교들도 전시 계급으로는 중령(대대장의 경우엔 소령도 많이 분포했다), 대령이었고 군복의 계급장과 불려지는 계급 호칭도 동일했으나, 정규군 계급으로는 중위나 대위로 등록되어 있었다. 전후 46년 시점에서 이 둘의 정규 계급은 대위였으며 웨스트모어랜드의 경우 불투명하지만, 에이브럼스의 경우엔 중령(전시 계급)으로 강등됐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1년이 돼서야 전시 대령으로 재진급했다. 에이브럼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능력은 괜찮은데 보직이 없거나(혹은 참전 경력/전공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해당되는 경우도 꽤 있다), 젊은 나이에 급속 진급해서 전후에 전시 계급의 유지는 가능해도 최소 1계급 강등을 겪은 장성, 장교들도 많았다.[14] 한창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군의 해외파병 전구(유럽, 태평양)에선 장교의 원활한 보충과 공급을 위해 추가적으로 최소 사단급 이상 제대에 현지 임관 재량권(권한 행사는 임의가 아닌, 법률에 의거)을 부여하여 내부적으로 휘하 부대들의 부사관들 중에서도 능력이 출중하거나 리더쉽과 같은 자질을 인정받아서 상관들의 단계별 추천과 승인(중대장 ~ 사단장)을 받아서 현지 임관(대개는 현지 임관자들이 사단 본부로 출두하여 단기간의 신분화 교육을 받고 사단장에게 임관신고를 마침)으로 장교가 된 사례도 굉장히 많았다. 이들은 대개 기존에 근무했던 부대에서 장교로서 계속 복무했고 간혹 진급(최대 영관급까지)으로 상위부대로 전출가기도 했다.[15] 니미츠는 태평양 중부 해역군 사령관, 맥아더는 태평양 서남 해역군 사령관이었다.[16] 하지가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평판을 얻은 배경을 설명하면, 그는 간부후보생(학사장교) 출신으로, 단적으로 서술하면 그의 시대였던 전간기의 미군은 규모도 매우 작아서 육사 출신이 아니면 영관급으로조차 진급이 거의 안 됐고(궁극적으로 베트남 전쟁 이후에 인사제도가 개편되었다) 육사 출신도 밑에 후술된 대로 초장기간 근속해야 진급할까 말까의 수준으로 처참했다. 또한 2차대전으로 군 규모가 폭증하고 진급이 수월했어도 중장 이상의 고위장성으로의 승진엔 명백히 유능한 능력과 실적이 검증되어야 했다.[17] 이때의 대장 진급은 공로보다는 중장으로서의 근속 기간(7년)이 충분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2차 대전 때 급속 진급한 많은 인물들이 밑에서 후술된 내용과 더불어 군축으로 인한 강등(+직책)을 겪고나서 한국 전쟁이 터져서야 2차 대전 당시의 고속 진급한 전시 계급 그 이상으로 진급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2차대전과 한국전쟁으로 고속승진하고 군축의 영향을 적게 받은 장성들이 많아서 그런건지, 세대 교체가 되는 50년대 후반까지 한직이나 뺑뺑이 돌리기가 많았던 듯하다.[18] 미군정 이후 하지의 행보를 보면 제5군단장 - 제3군 사령관 - 육군 야전군 사령관(Army Field Forces - 맥네어 장군의 직책의 후신) - 전역이다. 군단장을 중임하고 군사령관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 보직들의 주업무는 미국 본토 방어 및 후방 군정 업무였다. 당시 상황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보직이 있다면 그건 한국의 미8군사령관과 미국 극동군사령관,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정도. 하지가 맥네어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핵무기 체계(Ex : M65 핵 야포)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을 듯하지만 그 외의 공로는 아직 불분명하다.[19] 미 육군이 2차대전에서 창설한 사실상의 마지막 정규 군단으로 당시의 미 육군 군단 단대호상으로는 더 존재했으나 전쟁기간 동안 실질적 활동을 펼친 것은 24군단이 마지막이었다. U.S 7th Infantry Division in WW2 책에 의하면 전쟁 중반, 중부 태평양 전구의 미국 육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처드슨 중장(니미츠 제독의 휘하 육군 구성군 사령관)이 중부태평양 지역에 주둔한 육군 사단들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이들을 통제할 상급 조직의 필요성을 참모총장이었던 조지 마셜 대장에게 설파해서 이뤄진 것이었다. 처음에 군단장으로 내정된 인물은 콰잘린 환초 전투에서 제7사단을 지휘한 찰스 콜렛 소장이었지만 그는 마셜 장군에 의해 유럽 전선의 군단장으로 영전하면서 대신 남태평양에 있던 하지 소장에게 낙점된 것이다. 여담으로 제7사단의 후임 사단장은 기존에 제7사단의 사단포병단장이었던 아치볼드 아놀드 준장이었는데 사단장으로 영전과 동시에 소장으로 진급했고 이후 레이테 섬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단장으로 지휘했고 하지 중장을 따라 남한으로 파병되어 미 군정 초기의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가 미.소 공동회의의 미국측 수석대표가 되어 46년 9월까지 지내다 미 본토로 전출되었다.[20] 현지의 지상군이었던 제5수륙양용군단의 포병대는 티니안 전투 이후에 창설되었고 그때까진 제24군단 포병대가 배속되어 대신 역활을 해줬다. 레이테 섬 전투에선 반대로 제5상륙군단 포병대가 배속해서 활동하다 12월 2주차에 재편을 마친 제24군단 포병대가 레이테 섬에 도착해서 교대하여 괌 섬으로 철수했다.[21] 원래 제24군단은 니미츠 제독 휘하의 육군부대였고 레이테 전투에 참가한 것도 맥아더 장군에게 빌려준 것이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1945년 7월 무렵에 전쟁 내내 적용되었던 니미츠, 맥아더 2개 합동전구 체제가 종료되었고 각자의 해군과 육군을 지휘하기로 변경하면서 제24군단은 맥아더에게 귀속되었다.[22] 미국 육군이 2차대전에서 중장 진급인사를 마지막으로 실시한 달이었고. 후속 중장 진급인사는 48년이 돼서야 재개한다. - 이외에 6월에 하지 장군과 같이 진급한 다른 미군 장성들(+ 당시 보직,근무지)을 소개한다. 레이몬드 맥레인(제19군단장/독일), 존 헐(육군성 작전참모부장/미국 본토), 어니스 화이트헤드(제5공군 사령관/태평양), 네이단 트위닝(제15공군 사령관/이탈리아), 트로이 미틀턴(제8군단장/독일), 르로이 루츠(육군 근무군 참모장/미국 본토), 매튜 리지웨이(제18공수군단장/독일), 찰스 홀(제11군단장/태평양), 윌리스 크리텐버거(제4군단장/이탈리아), 알반 길램(제13군단장/독일)[23] 이 시점의 미군은 유럽 전선의 종전 영향으로 군축의 초기 단계에 돌입했고 이미 평시계급이 확정되거나(다수의 사례를 접한 결과, 대개의 경우 급여만 그렇고, 전시 계급의 유지는 가능하며 보직도 그에 맞게 준 듯하다) 아예 강등된(Termination of Rank) 장성/장교들(이 경우엔 보직도 강등된 계급에 맞게 준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선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핵무기의 존재여부는 군 수뇌부만 알고있는 극비사항이었고 일선에선 몰락작전의 시행이 당연히 예정되어 전쟁 지속을 46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적어도 전구에 파병된 장병들에겐 일본이 항복한 8월까지 진급이 활발했다.[24] 여러 기록들을 봤을 때 2차 대전의 종전후 군에 남은 대다수의 장교들, 특히 전시에 평시 계급에서 2단계 - 3단계 상승했던 인물들의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1단계 - 3단계의 강등을 겪는다. 4성급의 사례는 아직 확인되진 않았지만 중장이 준장으로, 준장은 영관으로 영관은 위관급으로 각각 확정/강등된다. 직책 진급의 성격이 강했던 관련 보직들은 잔여 임기 간에, 혹은 점령군에서 근무한 인원들은 종전 후 일정 기간 동안은 전시 계급을 유지했고 본토 근무로 발령되거나 타 보직으로 전환될 때 대부분은 강등되었으나 극소수는 근속 기간을 채웠을때 평시 계급으로 인정된 사례가 있고 전역 할때 전시계급을, 혹은 진급시킨 사례도 많다. 하지 장군의 경우 1946년이 되면서 준장으로 확정되었는데 급여만 준장급으로 받고 보직과 중장 계급장은 유지했다.[25] 이것은, 미군이 1940년 하반기부터 나름 2차대전 준비를 시작해서 군대 규모가 팽창하기 시작했고 그에 비례해 그때까지 인사적체였던 정규군 장병들이 쾌속 진급시작된 초기 시점에 그 배경이 있다. 추가로 2차대전 미군의 팽창 초기에 능력자로 인식되어 단번에 2계급 진급이나 진급후 단기간에 재진급한 인물은 그 외에도 많이 존재한다.[26] 사례를 보면 전쟁 전의 미군(전군)에선 징계가 아닌 일반적으로도 강등 후 전역, 전출이 흔했다. 강등되기 전의 최고계급은 그 직책(상설이 아닌 순환보직의 성격이 컸던 게 대부분)을 수행할 때만 유효했던 것이다. 군대 규모가 작았던 당시 상황과 미군 특유의 역사적으로 이런 인사적 전통(?)이 깊어서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2차대전 전후의 미군은 군축시 군에 남지 않고 전역하려는 장병들에겐 대개 전시 계급으로 전역할 수 있었다(물론 퇴직금, 연금 같은 건 정규 계급 기준으로 적용한다). 그래서 소머벨 장군의 경우는 좀 이례적이다.[27] 사실 미군 장성들 중에도 해외파병되지 않고 전쟁 내내 본토에서의 근무는 주로 한직에 속했고 해외파병된 장성들 중에서 실책으로 해임되었다면 대개는 본토로 보내져서 종전까지 근무했다. 운이 좋다면 재신임되어 다시 해외로 재배치되지만 그건 극소수의 사례이다. 그래서 후방근무를 계속한 장성 중엔 중장 이상으로 진급한 자는 극소수다. 만약 진급했다면 몸담고 있던 그 분야가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거고 능력자라서 가능한 것이다.[28] 여담으로 전후에 당시의 미군 대장급 장성 중에서 강등된 인물이 1명이 있는데, 그는 브레혼 소머벨 장군(공병 병과)으로 전쟁초기엔 육군성의 군수참모부장(소장)을 지내다, 육군의 후방지원기능을 집합한 사령부인 육군 근무군 사령관(중장)으로 영전되어(육군 지상군 사령관이었던 맥네어 중장과 동격이었다) 종전까지 지냈고, 45년 3월경 대장(전시 계급)으로 승진했다. 그의 계급 이력을 일부 설명하면, 35년부터 41년 1월까지 정규군 중령이었는데, 전시계급이 적용되어 대령을 건너뛰고 준장(전시 계급)으로 2계급 승진했다.[25] 진주만 기습이후 42년 1월에 전시 소장으로 승진했다가 2개월 만인 3월에 전시 중장으로 승진했다. 평시 계급으로는 1943년 9월에 소장으로 확정되었는데 현역에서의 정규 진급은 그게 끝이었고 46년 4월 그가 전역할 때 정규 소장으로 강등되어 전역했다가[26] 48년 6월 예비역 대장(정규 계급)으로 진급되었다. 강등배경을 추측하면, 전후 군축과정에서 소머벨 장군의 경우, 아마도 급속진급[27]의 반대급부로 페널티를 준 것같고 현역 시절 뭔가 실책을 저지른 게 아닌 듯하다. 정확히는 전후 군축의 흐름에서 대장급 장성의 T/O에서 딱하게 구조조정 대상에 선정되었다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 예시로 45년 연말, 미국 육군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패터슨은 언론 발표를 통해 전쟁 중의 소머벨 장군의 업적에 찬사를 보내면서 그가 구축한 보급체제와 노력으로 전쟁에서의 미군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전쟁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고 했다.[29] 정황상 한 때 전시 소장 계급을 지냈고, 워커 중장의 신뢰와 배려와 육군 수뇌부의 묵인으로 퇴역 시점이 미뤄진 듯 하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 전쟁에 참전할 수가 없다고 추측한다. 저 때의 시점이나 오늘날의 한국군은 퇴역 연령에 임박하면 요직에서 만기로 은퇴하는 커리어 패스 엘리트가 아니면 1 - 2년 전부터 대개 후방 한직으로 보직되어 전역 준비를 할 수 있게 여건을 조성해주는게 관행이지만 랜드럼의 경우엔 나름 최전선에 있다가 바로 전역한 사례라서 남다르다.[30] 전쟁 초기 한국에 전개한 미군 제8군의 참모장은 유진 M. 랜드럼 대령이었는데 그의 경력을 살펴보면, 1943년에 전시 소장 계급으로 진급했던 전직 장성으로 애투 섬 전투 중반부터 제7보병사단장으로 잠시 지냈고 그때의 공적으로 훈장도 몇개 받았는데 그 이후 미 본토에서 2차 사단장 직(87보병사단)을 맡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유럽 전구로 보내져 잠시 무보직으로 지내다 제90보병사단장(3차 사단장 직)으로 부임했다. 이 사단은 상륙 작전의 후속 제대로 6월 10일부터 전투에 돌입했는데 졸전을 펼친건지, 1주일도 안되어 군단장에 의해 사단장과 연대장 2명이 해임되었고 급히 대타로 온 것이다. 랜드럼은 8월까지 있었는데, 작전 지휘를 둘러싼 부사단장과 격렬한 언쟁과 갈등 끝에 괘씸죄로 그의 계급 강등과 전출을 상부에 요구했고 수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개선된 것은 없었고 7월의 작전에서만 사단의 사상자가 5천명을 넘었다. 결국 랜드럼은 해임되었고 미 본토에서 4차 사단장직(71보병사단)을 잠시 지내다 텍사스 주에 있는 캠프 맥시의 보병 보충병 고등 훈련소장으로 종전까지 지냈고, 46년 1월에 2계급 강등되어 대령이 되었다. 전후 그는 미 본토로 복귀한 제5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의 참모장이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대령 계급장을 부착했지만 워커는 항상 랜드럼에게 장군 호칭을 붙여 존중해줬다. 48년에 워커가 일본으로 부임할 때 랜드럼도 따라갔고, 그 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미군이 남한에 전개했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랜드럼은 워커의 방어 전략에 많은 보좌를 하며 나름 활약해서 다시 훈장을 받았는데, 전투가 최고조인 시점에서 워커는 수시로 랜드럼에게 예비부대와 보충병력의 현황에 대해 묻고 그가 준비한 병력을 토대로 버텨냈다. 이 무렵 육군 수뇌부에선 랜드럼의 나이(59세)를 이유로 참모장에 다른 장성을 임명하고 랜드럼은 비공식적으로 부참모장으로 워커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지낸후 51년 1월 중순에 이임되었는데 정년 퇴역 시점[29]이 동시에 맞물려서, 그는 미국 본토로 귀환하고 바로 전역했다. 한국 전쟁 초기의 분투가 인정된건지 그는 소장 계급으로 복권되어 전역할수 있었다.[31] 2020년 3월 시점에서 확인된 사례로는, 2차대전에서 사단장을 지냈던 일부 소장급 장성들이 전후 46년 시점(적용 시점은 월별로 다르지만 46년 내내 인사명령이 하달됐다.)에서 아예 2계급 강등되어(Termination of Rank - Major General and Brigadier General) 대령이 되었는데 당사자들의 강등 배경엔 대체적으로 윗 주석글에 기재된 돌리 장군과 같은 사유로 전쟁 중에 부대 지휘력(리더쉽)에 치명적인 실수/과오가 있었고(또는 휘하 지휘관/참모와 갈등이 거센 끝에 보직해임/강등시킨 전적도 존재한다)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가 심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일단 대령으로 전역했다가 몇년 지나서 예비역 소장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윗 주석의 서술대로 장포대급으로 한직에 만기까지 군에 남아 근속했고 혹은 곧 벌어진 한국전쟁에 잠시 참전하기도 했다.[30][32] 제이콥 데버스 장군은 45년 7월부터 49년 6월에 전역할 때까지 스틸웰의 후임으로 미국 육군 지상군 사령관으로 지냈고 2차대전 전후 군축의 많은 부분을 그가 담당했다. 먼저 육군 근무군 사령부가 46년 5월에 해체되었고 그 기능은 데버스의 사령부로 이관되었는데 데버스는 근무군 사령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스팀슨 위원회에서 이를 기각했고, 해외 파병되었다가 미국 본토로 복귀해서 군관구 역활을 하게 된 6개 야전군의 통제권이 주어졌다(제1 ~ 6군). 또한 군축으로 인한 육군 장교들에 대한 강등 처분도 맡았는데 데버스 자신은 이를 불쾌한 일로 여겼지만, 전투 병과 3곳(보병, 포병, 기갑)만 중점적으로 시행해서 군축의 여파를 최소화 시키려 했다. 48년엔 그의 사령부가 육군 야전군 사령부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야전군 통제권은 육군부 직속으로 이관되었다.[33] 당시 기록을 보면 2차대전 전후 미군의 초고속 군축에 대전 당시 존재한 24개의 군단급 부대는 대다수가 해체된 상태였고 1946 - 1950년 시기동안 남은 몇개는 해외 주둔 미군(독일, 일본)에 잔존했고 미국 본토엔 제5군단만 딸랑 존재했다.[34] 2차 대전의 미군에 대해서 아는 위키러들이라면 레슬리 맥네어 장군이 누군지 아실 것이다. 그가 맡았던 자리다. 하지는 자신의 마지막 군 생활을 이 보직으로 마쳤다. 한국전쟁 기간에 미국은 본토의 네바다 주에서 육군의 핵병기 실험을 많이 했는데, 그것을 촬영한 필름에는 하지의 시찰과 그의 평가가 담겨있다. 한국을 떠난 이후의 하지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구글이나 유튜브를 정밀하게 검색해볼 것.[35] 하지의 최종 보직이었던 이 사령부는 이후 수십 년간 명칭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미 육군의 상급 군정 업무 기관인 건 비슷했다. 현재는 육군 전력 사령부(4성급 자리)이다. 역사를 볼 때 쟁쟁한 인물들이 맡았는데 한국 전쟁 중 지평리 전투의 영웅이었던 프리먼 대령은 4성 장군이 된 후 여러 보직을 지내다 전역하기전 이 직책을 수행했고 콜린 파월 대장도 합참 의장이 되기전 대장 1차 보직으로 지냈다.[36] 책으로 나와있는 이승만의 전쟁 비망록에 기술된 내용에 의하면 한국 전쟁이 터진 후 대한민국으로 전개한 미군은 당시 본토에서 근무하던 하지를 한국으로 오게 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2차 대전 당시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 지휘 경험과 수년간 한국을 군정 통치한 경험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극렬한 반대로 하지 장군이 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하지 개인적으로도 군정사령관 시절을 흑역사로 생각하기 때문에 꺼렸을게 유력하다.[37] 여담으로 한국 전쟁에서의 미군의 군단장급 이하 주력 상급 지휘관 및 상급 사령부의 장성급 참모들은 전쟁 초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2차대전 말기 시점에서 준장 혹은 갓 소장으로 진급한 장성들이었다. 그 윗 선배들(대표적으로 전쟁 초기의 군사령관 및 군단장이었던 워커 중장과 밀번 소장 / 콜터, 아몬드 소장)은 2차 대전 중기부터 종전까지 군단장과 사단장으로 지냈으며 워커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51년 중반기에 보직 이임되어 한국을 떠났고 52, 53년에 퇴역 했다. 그외에 2차 대전기에 많은 활약(42 ~ 46년 사이의 기간 중 최소 1년 ~ 2년 이상 재직)을 펼쳤던 사단장급 이상의 야전 지휘관 경력을 가진 장성들은 최소 5명(위의 4명과 다른 1명은 존 오다니엘 장군)을 제외하면 한국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2차대전 종전 이후 대거 전역하거나, 남은 자들은 미국 본토에서 후방 직책 혹은 다른 해외지역(비 전쟁지역)에서 근무하고 퇴역했다. 사견으로는 이들을 전용해야 할 정도로 전쟁의 상황이 절박한 것(한국 전쟁 초기에도 미군은 장교, 장성이 부족한게 아니라 사병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설령 이들을 기용하려고 해도 임명할 적절한 상급 보직이 없었고(이미 2차대전에서 상급 지휘관으로서 해외 파병 근무를 충분히 하고 연령 근속한 점도 감안), 군 수뇌부 차원에서 연령대가 젊은 장성들(연대장의 경우 45세 초과 금지)을 정책적으로 중점 기용해서 인 듯하다. 2차대전 기엔 9개 야전군(1. 유럽: 제1, 3, 5, 7, 9, 15군 2. 태평양: 6, 8, 10군)이 해외파병 했지만 한국 전쟁엔 제8군(+극동군 사령부) 1개만 동원되었다.[38] 2차대전에서 해외파병된 미군들에겐 특별 인사정책이 적용되었는데 정식 명칭은 적응 복무점수라는 제도이다. 각종 복무 요소(복무기간, 해외파병기간, 훈장획득개수, 전역참가횟수 등)를 점수로 계량화하여 특정 점수를 획득한 장병을 제대시켜주는 것이었다. 종전까진 전역 기준 점수는 대개 85점이었으나 전후 기준을 낮춰서 45년 연말엔 일반적으로 장교와 사병은 각각 70, 50점과 또는 공통으로 복무 기간이 4년이면 귀향할 수 있었고 미국의 전시동원체제가 최종 해제된 47년 6월까지 이 제도에 의한 소집 해제와 전역이 계속된다. 제7사단의 경우엔 오키나와 전투에서 잠시 예비부대로 있던 45년 5월 중순에 사단의 첫번째 점수 획득자 수십명이 본토로 전출되었고 전투 종료후 6~8월에 두번째 귀향 행렬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단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45년 겨울부터 46년 가을까지 다시 전역장병의 전출 행렬이 이어진다.[39] 확인된 사례로는 소령 계급 이하의 장교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배경상으로는 전쟁 전엔 생업이 있던 민간인이었고 전시임관으로 참전했던 이들이 대다수였던 집단이어서 그런 듯 하다. 물론 중-대령과 장성들도 전후 전역을 택한 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나 본래 직업군인들 출신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적긴 하다. 전역이 결정된 장교들은 그들의 최후 보직에서 이임되어, 개별적으로는 미국 본토로 복귀하는 장병 행렬에 편입되어 일시적으로 각급 인솔자가 되어 본토에서 전역 절차를 밟을 때까지 사병들을 관리했고 함께 전역했다.[40] 최근 기록으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45년 하반기에 전 세계 곳곳에 파병되고 구 추축국의 점령군으로 있던 연합군 장병들(미국, 영국, 호주)의 일부가 연달아 파업/시위(?)를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물론 목적은 집에 가고 싶다이다. 각국의 국민 여론도 이에 호응해서 전시 동원을 빨리 해제하라고 정계에 압력을 가했고 그 영향으로 군축의 속도가 빨라진 점이 있다. 미국의 경우 덕분에 꼭 전쟁 초기부터 참전한 베테랑 같이 85점 이상을 획득한 경우가 아니어도 그 시점(45년 연말~46년 상반기)에서 대략 파병기한(복무 기간과 동일한 점수로 추가 부여)이 최소 1년~1년 반 이상 되는 장병들까진 즉시 전역 대상이 될수가 있었다. 이하 미만이었던 장병들(전시 체제의 군대에 등록은 했지만 전쟁 말기에 입대, 참전해서 활약의 여지가 없었을 병아리들...)도 전역을 희망하는 자들(너무 늦게 입대한 자들은 47년 전후 체제에서 일정 기간은 복무했다)은 47년 6월까지 제대했고 전후 군대에 잔류한 이들은 제외되어 그들은 전후 체제의 군대에서 계속 복무했다.[41] 이것은 전후 미군의 군축이 본격화하면서 해외 점령군으로 주둔중인 미군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 인사 정책으로 보인다. 부대를 통폐합시키고, 미국 본토로 원복시키는 과정에서 기존에 전역 점수가 높은 장병들을 본토로 가는 부대의 소속원으로 편제시켜 보냈고, 낮은 장병들은 점령군으로 잔류하는 부대로 전출시키면서 병력 및 부대 구조조정을 감행했다.[42] 2차 대전 당시 중국 / 버마 / 인도 전역 미군 사령관이었고 장제스의 군사 고문이었다. 장제스와의 불화로 인해서 불명예 해임되어 종전시 오키나와 주둔군으로 있었다.[43] 여담으로 기존의 제10군 사령관이었던 버크너 장군이 오키나와 전투 막바지에 전선 시찰 도중 전사하고 그 후임으로 온 게 바로 스틸웰이었다. 그리고 스틸웰이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후 10군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맡았던 자리가 바로 레슬리 맥네어 장군의 직책이었던 육군 지상군 사령관이었다.[44] 일각에서는 스틸웰이 그나마 아시아 사정에 밝았기 때문에 만약 그가 예정대로 임명되었다면 하지보다는 나은 행보를 보였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스틸웰이 장제스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쪽도 마찬가지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되었을 확률이 높다. 즉, 하지 개인의 문제와는 별도로 기본적으로 당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얼마나 이해도가 떨어는지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45] 특히 이승만이 미국 방문 중에 하지를 하도 지독하게 비난해 댄 탓에, 1947년 2월 미국에 잠시 귀환했을 때 고위층에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라고 해명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46] 당시 일본이라고 해도 패망 직후였기에 상황은 한국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인데다 강제 예금몰수를 실시해서 빚을 갚아야 할 정도로 엉망인 시절이었고, 중국의 경우에는 국공내전이 터져 물가상승률이 3000%에 달했을 정도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미군정의 경제적 무능은 개도 비웃을 정도였다. 차라리 소군정이 지주들을 족치는 방식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토지개혁과 뒷수습은 재빠르게 했기에 더 낫다는 평.[47] 물론 국내에서 공식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도 1900년대 초부터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조선 독립 의제를 미 의회에 올리는 등 상당한 활동을 했고, 태평양 전쟁 전후로 미국 정계에 쌓은 인맥도 상당했다.[48] 이에 영자신문 "The Seoul Times"는 '''차라리 미개한 어느 보르네오 섬 추장의 통치를 받는 게 더 낫겠다'''며 하지를 깠고, 미국 관영 소식통마저 '''한인과 대항하여 일본과 미국이 동맹을 맺는 효과를 가진 것 같았다'''고 했다.[49] 맥아더를 일본식 영어로 읽으면 맛카사(マッカーサー)가 된다.[50] 구성원은 국무성의 제임스 던(James C. Dunn), 육군성의 존 맥클로이(John J. McCloy), 해군성의 랄프 바드(Ralph Bard).[51] 이 두 사람은 이후 1960년대에 미 국무장관, 주한미군 사령관을 각각 역임했다.[52] 나머지 3명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 그리고 박정희(혼자서 1부, 2부로 나뉘어 출연했다) 대통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