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베시
'''John William Vessey Jr'''
1922년 6월 29일 ~ 2016년 8월 18일
1. 개요
미국의 군인. 제10대 합참의장을 지냈다.
최초의 한미연합군사령관이며, 사병 출신 장성으로 합참의장까지 영전한 입지전적인 사례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1922년 6월 29일에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났다. 1939년 5월, 즉 16세 11개월에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채 미네소타 주방위군의 예비군 이등병으로 등록했다.[1] 고등학교는 1940년 6월에 졸업했다. 주방위군에서 소속은 34사단 59포병연대 본부 운전병[2] 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주방위군들도 징발되면서 그도 미국 육군의 일원으로 파병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싸웠고 오마 브래들리의 휘하에 있었다. 1942년 1월에는 상사(First Sergeant)로 진급할 정도로 쾌속 진급했다.[3]
1944년 5월에는 현지임관으로 소위가 되었다. 이래저래 22세에 소위가 됐는데 나이로만 따진다면 사관학교 졸업자들이 임관할 때 22세인 경우가 많다. 이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2.2. 한국 시절: 최초의 한미연합군사령관
1976년에 대장으로 승진했는데, 대장으로서 첫 보직은 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이었다. 그러다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초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졸지에 감투가 3개로 늘어난 셈(...).[4] 이 시기,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가 추진했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더불어 카터 행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던 박정희 정부의 노력에도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오늘날까지 베시 장군은 역대 주한미군사령관 가운데서도 한국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1979년, 존 위컴[5] 대장에게 한국 내 사령관직을 이양했다. 당초 카터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한 까닭에, 보직해임당하거나 대장 2차 보임이 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우세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육군본부로 복귀하여 군 후배인 에드워드 마이어 육군참모총장을 보좌하는 육군참모차장으로 지명되었다.[6]
2.3. 합참의장이 되다
미군에서는 이런 서열 역전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지만, 행정부와 각을 세웠던 경험까지 보태 본인 스스로도 마지막 보직으로 인식하고 전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1년,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출범하며 그에게 전역연기를 요청했다. 그가 연기를 수락함과 동시에, '''전체 미군의 최선임자인 합참의장에 지명되었다.''' 이는 참모총장이나 통합군사령관을 거치지 않은. 미군 역사상 최초의 합참의장이다.[7] 약 3년 간 의장직을 수행한 뒤, 1985년 퇴임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졸 출신 대장이 되었다.'''
존 베시가 미 합참의장을 역임하던 시기 미군은 군의 징집체계, 군수 재계약 체계, 인사/복지 및 전투준비태세를 아우르는 대대적인 변혁을 진행했다. 같은 시기에 소련은 동유럽에서 군세를 확장하며 SS20을 동독에 전개했으나, 자유진영은 여기에 군사적으로 밀리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전역하던 때에 이르러선, 나토는 매우 강력한 군사동맹 체제로 되살아났다.
2.4. 퇴역 후
전역 후인 1987년에도 그는 레이건 행정부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정부와 협상을 벌여 전사한 미군 시신의 송환을 추진했었다. 전역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며 정부를 위해 자문활동을 했고, 그 공로로 1992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민간인이 수여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대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받았다. 당시 부시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그는 절대로 '죽지 않는' 노병이며, 실제 2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던 마지막 4성장군 세대의 인물"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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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합참의장인 마틴 뎀프시를 만난 베시.
2016년 8월 19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1] 21세기에는 18세 이상만 입대가 가능하고 나머지는 청소년 학군단에서 군대놀이 하든가 지연프로그램 등록하고 18세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2] 자동차가 아닌 오토바이를 몰았다고 한다.[3] 다만 당시 미군의 사병 계급 체계는 지금보다는 단순했다.[4] 이때부터 한반도에서의 휴전체제를 관리하는 주한UN군사령관이, 전시에 한국군과 주한미군에 대한 총괄적인 작전권을 행사하는 한미연합군사령관과 주한미군의 최고위 장교인 주한미군사령관까지 3개 직책을 동시에 수행하게 되었다.[5] 그가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중에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6] 미군은 참모총장과 참모차장이 모두 대장 계급이다.[7] 주한미군도 합동군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미국에서 합동군(Joint)과 통합군(Unified Combatant Command)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