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섬
1. 개요
홈페이지
유진그룹 계열 섬유/화학업체. 합성섬유 분야에서는 한때 국내 최고의 기술을 자랑했고 전성기에는 국내 섬유원사의 40%를 생산하던 회사였다. 과거 한일그룹의 모기업이기도 했다.
2. 역사
2.1. 창업과 전성기
1964년 수당 김한수가 '한일합성섬유공업'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967년에 경상남도 마산시 양덕동 222[1] 에 아크릴공장을 세우고 본사를 이전한 후 줄곧 그 자리를 지켰다. 1969년 김해 합섬방직공장, 1971년 구로 염색공장, 1973년 양구 스웨터공장을 각각 세웠다. 1974년에는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1975년에 대구와 수원에도 공장을 세웠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0년대 ~ 1970년대에는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을 상징했던 대규모 섬유업체였다. 옛 마산시에서는 봉암공단의 마산수출자유지역[2] 과 함께 '''향토기업의 대명사'''로[3] 군림하면서 지역 경제를 이끌었다. 1973년에는 국내 최초로 '''수출 1억불'''을 달성하면서 당시 새로 만들어진 억불탑을 최초로 수상했으며, 1976년경에는 '''사원 수가 무려 27,000명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소위 전국 7대 도시였다는 마산이 잘나갔던 시절이다.
이를 바탕으로 1973년에는 부국증권과 동서석유화학을 인수했고 1982년 김한수 회장 사후 2세 김중원 대에 들어 1986년 국제상사, 남주개발, 신남개발, 원효개발 등 구 국제그룹 주요 계열사들을 인수한 후, 1987년에는 비료생산 공기업 진해화학까지 인수하며 사세를 급속히 확장했다. 1993년 중국 허베이성에 첫 해외 현지법인을 세우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프로야구단 창단을 시도했다. 1985년에는 제 7구단 창단 신청서를 제출하기도 했으며[4] , 1989년 제 8구단 창단 때에는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라북도의 미원&쌍방울 컨소시엄과 야구단 유치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한일합섬 측은 나름 마산의 야구열기가 높았다는 점과 지역 경제력이 높다는 점을 어필했으나 지역균형발전 명목[5] 으로 결국 먼저 발을 뺐고, 결국 미원&쌍방울 컨소시엄이 승리하면서 쌍방울 레이더스가 탄생하게 된다. 마산에 프로야구단을 창단하려 했던 한일합섬의 계획은 한일합섬이 마산에서 사라지고 마산이라는 행정구역도 사라진 2011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2.2. 몰락
섬유산업의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수원공장이 1996년에 문을 닫았다. 본사인 마산공장 마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단계적으로 해외로 설비를 이전하면서 폐쇄 수순을 밟게 된다. 특히 우성건설 인수 등 김중원 회장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1997년 외환 위기가 겹치면서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이 때 같이 퇴출된 곳이 동남은행이다.
한일합섬 공장 폐쇄로 인한 여파는 1990년 50만을 훌쩍 넘었던 '''마산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6] 마산의 섬유 산업이 몰락하면서 1995년 도농통합 직전의 마산시 인구는 35만명 수준까지 뚝 떨어졌다. 순식간에 '''15만명''''이라는 인구가 5년 새에 다 빠져나간 것이다. 마산시는 이 때의 인구 감소 여파로 도농통합 때 창원군 내서읍, 삼진면[7] , 구산면을 흡수[8] 했음에도 45만명이 채 되지 않았었다.[9] 그마저도 2010년 통합 창원시 출범 직전엔 40만 8천명 수준으로 간신히 40만명에 턱걸이했을 정도. 이중 7만 3천명 정도가 내서읍 인구, 3만명 정도가 구산면+삼진면 인구 임을 고려할 때 마산 시내지역엔 30만명도 채 되지 않는 인구가 남아있었다는 소리다. 주력산업의 몰락으로 도시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당시 운영 중이었던 여자배구 팀도 결국 해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대표적인 선수가 최광희, 김남순(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김철수 감독의 부인), 이수정(現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세터코치), 박미경 등이 있다.
2.3. 현재
2007년에 동양그룹으로 인수된 후 지주회사격인 동양메이저로 흡수합병되어 한일합섬사업부라는 '회사 안의 회사'로서 사업을 이어나갔다. 동양메이저는 이후 (주)동양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2016년 동양그룹이 해체된 후 유진그룹이 (주)동양을 인수하면서 한일합섬사업부 역시 유진그룹으로 넘어갔고, 2018년 원래 명칭으로 재분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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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파트 한일타운
한편 한일합섬은 업체 직원의 숙소 마련 겸 지역사회의 공헌 목적으로 '''한일타운'''이라는 브랜드로 아파트를 대규모 신축하였다. 특이한 점은 부지가 모두 과거 한일합섬의 소유였던 곳으로 공장이 있었던 마산과 수원에 각각 건설하였다. 마산은 옛 한일합섬 본사 부지를 둘러싸고 1~4차(!)까지 건설되었으며 수원은 현재의 장안구청(조원동) 북쪽에 조성하였다. 이 한일타운은 경기도 내 단일 아파트 단지로는 최대인 '''5282세대'''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 아파트가 지어진지 꽤 됐지만 여러모로 인기있는 아파트. 한창 아파트가 올라가던 시기에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연달아 일어나 감리감독이 빡세진 탓에 굉장히 튼튼하게 지어졌고, 실제로 해당 지역주민들의 인식에도 그렇게 박혀있다. [10]
마지막으로 한일합섬 마산 본사 부지에는 폐건물이 2000년대 중반까지 방치되어 오다가 태영건설의 '''메트로시티 1,2단지'''가 들어섰다. 특히 이 부지를 놓고 '''공장이 원활히 돌아가던 시기'''[11] 에 주거용지로 전환한 것을 놓고 온갖 비판이 끊이질 않았었다.[12] 그 덕에 주거단지는 2010년대를 훌쩍 넘긴 이후에야 간신히 1단지가, 2015년에야 2단지가 조성되었다. 현재 이 공장부지의 모습은 창원 메트로시티 문서 참조.
창원 지역 연구가 허정도 교수는 '''마산시의 졸속행정'''과 '''기업의 판단미스'''로 낳은 합작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4. 학교법인 한효학원
한일합섬은 육영사업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기업이었다. 이미 1963년에 김한수 사장은 부산 소재 학교법인 명지학원(부산 경일중고등학교)의 이사장을 지내고 있었고, 1970년대에는 산업체 부설학교를 설립하면서 그 의중을 확고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1974년에 학교법인 한효학원을 설립하면서 마산 한일합섬 공장 부설 산업체 부설학교인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지금의 마산한일여자고등학교)를 개교하였는데 국내 최초의 산업체 부설학교이자 국내 최대의 산업체 부설학교로 정말 유명하였다. 많은 산업체 부설학교들이 기업의 생색내기용이던 시절 여기만큼은 정말 제대로 된 산업체 부설학교였다. 모기업에서 자금 지원도 많았고 학교 시설도 상당히 훌륭해서[13]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극소수 몇 개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색내기용 산업체 부설학교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그 이후로도 1979년에 김해 공장 부설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1980년에 수원과 대구 공장 부설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만들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자 대한민국의 생활 수준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산업체 부설학교의 수요는 급감하게 되었고 한일합섬 측에서는 이들 학교를 정규 고등학교로 전환하였으나, 예외적으로 대구에 있던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의 경우는 한효학원 산하 산업체 부설학교 중에서는 가장 약체였던 탓인지는 몰라도 유일하게 폐교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일합섬 한효학원 계열 학교들은 정규 고등학교로 전환된 마산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 (현 한일여자고등학교), 김해 한일여자고등학교, 수원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로 남게 되었나 한효학원이 2010년 들면서 경영난을 겪게 되자 수원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는 계열분리되어서 수원전산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되었고(2019년에 다시 한봄고등학교로 변경), 2019년 현재는 마산 한일여자고등학교와 김해 한일여자고등학교 2개교 체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들 학교의 운영주체는 2019년 현재도 옛 한일합섬 계열로써 사실상 한일합섬의 현존하는 마지막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옛 한일합섬 계열은 현재로써는 학교법인 형태로만 남아있는 상황.[14] 실제로 마산 한일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에 가면 모체가 되는 한일합섬의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구 한일합섬 계열은 마산 한일여자고등학교를 적통으로 인정하고 있는 듯 하다.
5. 김근조 이사 고문치사 사건
1982년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수사관에 의해 당시 본사 이사인 김근조가 신길동 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
6. 관련 문서
[1] 현 주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80. 후술하겠지만 창원 메트로시티 자리다.[2] 현재의 마산자유무역지역[3] 무학이나 몽고식품도 굉장히 오래되었지만, 규모 면에서는 한일합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4] 다만 기사 내용대로 이때는 뻥카였을 가능성이 높다.[5] 말은 그렇게 했지만 쌍방울 레이더스 항목에 적혀있는 대로 정치권이나 타 구단에서 쌍방울&미원 컨소시엄을 밀어줬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까지도 전북에 프로야구단 창단을 지시했다. 사실 KBO가 훗날 창단 기업 선정 과정에서 균형발전보다는 경제 논리를 우선시했다는 점, 2019년 현재도 경상도에 3개 야구단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점으로 봤을 때 한일합섬이 주장한 균형발전 명목은 설득력이 없다.[6] 의아하겠지만... 이 여파로 창원은 물론이고 부산까지도 그 피해가 갔다.[7]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8] 나머지 동읍, 북면, 대산면은 구 창원시가 흡수했다. 이는 당시 창원군이 월경지였기 때문.[9] 그 여파로 마산시에는 2000년을 끝으로 일반구가 폐지되었다. 창원시 통합 이후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로 나뉘어 다시 부활.[10] 우연의 일치인지, 수원의 한일타운과 마산의 한일타운 근처에 홈플러스와 야구장이 있다.[11] 사실 공장은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으나, 기업이 멀쩡하진 않았던 시기였다. 앞서 서술한 무리한 사업 확장때문에...[12] 물론 이때는 전자제품이나 반도체를 만들던 회사나 과자 만들던 회사 까지도 건설사업부를 만들어서 아파트 건설 사업에 뛰어들 정도로 아파트 열풍이 어마어마하던 시기였다.[13] 마산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는 시설 면에서는 산업체 부설학교 중에서는 가장 최고급이었으며, 당시의 어지간한 일반 정규 고등학교 보다도 훨씬 크고 우수한 시설을 자랑했다. 1974년 개교 당시에 이미 알루미늄 재질 고급 창호에 천장을 텍스로 마감했을 정도였는데, 당시의 정규 일반 고등학교도 이정도로 건물 마감을 한 곳은 거의 없었다. # 21세기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훌륭한 시설로, 그 덕분에 정규 고등학교로 전환할때도 별다른 시설의 증축 없이 그대로 정규 학교로 전환하였다.[14] 과거 한국 최대의 자동차 재벌이었던 신진자동차 역시도 현재는 학교법인 신진학원(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으로만 현존하며, 일제 강점기부터 대표적 조선인 자본가로 자리했던 화신백화점 역시 현재는 학교법인 광신학원(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 한일합섬과 비슷한 말로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