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왕후
1. 소개
고려 제5대 군주 경종 헌화대왕의 4비이자 제8대 군주 현종 원문대왕의 모.
아버지는 고려 태조 신성대왕과 신정왕태후의 아들 대종(戴宗) 왕욱(王旭), 어머니는 태조와 정덕왕후의 딸 선의왕후 유씨(柳氏)로 부모가 이복남매 간에 혼인했다. 천추태후의 친동생이자 제6대 군주 성종의 여동생이다.[3]
헌정왕후의 삶은 자세하진 않지만 고려사와 현화사비에 기록되어있다.
2. 일대기
2.1. 고려사
사촌 지간인 경종과 혼인하였으며 동성혼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인 신정왕태후의 성씨인 황보씨를 칭하였다. 경종이 일찍 붕어하자 본궐에서 나와 왕륜사 남쪽의 자택에서 거처하였다.
혼자 사는 중 언젠가 꿈을 꾸었고 높은 언덕에서 소변을 누었는데 소변이 나라에 넘쳐 은색 바다를 이루었다.[4] 깨어나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니 "생자즉왕유일국",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는 왕이 되어 일국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 나왔다. 헌정왕후는 '난 과부인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가?' 하고 의심스러워 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태조와 신성왕태후의 아들인 안종 효의대왕 역시 왕륜사 근처에 살아 서로 왕래하다가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게 되었다.[5] '''두 사람은 삼촌과 조카 관계다.''' 이후 두 사람 간에 아이가 생겼다.경종이 훙서하자 왕륜사 남쪽의 사제로 나가 살았는데 일찍이 꿈에 곡령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나라 안에 흘러넘쳐 다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점을 쳐 보고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시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지리라." 라고 하자, 왕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거늘 어찌 아들을 낳겠소?" 라고 하였다.
<<고려사>> <경종 후비 헌정왕후 황보씨 열전>
헌정왕후가 일반 왕족이었다면 문제 없지만 죽은 선왕의 왕후라는 것이 큰 문제였다. 국왕이 죽어 과부가 되면 왕후라는 명예, 지위 때문에 평생 혼자로 살아야한다. 암만 상대가 왕족이라지만 '''남의''' 아들을 임신했으니 큰 논란이 될 것이란 건 뻔했다.
고려사엔 헌정왕후와 안종의 심리를 묘사하지 않아 당사자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을 따라가면 어쨌든 그녀는 낙태를 선택하지 않고 임신 10개월이 될 때까지 아이를 뱄다.[6] 하지만 헌정왕후의 주변 사람들은 소문을 내진 않았으나 심히 두려워 했다.
결국 문제가 터졌다. 성종 문의대왕 재위 11년(992년) 7월 1일에 헌정왕후의 가인(家人)들이 소동을 피운 것이다. 당시 헌정왕후는 연인 안종의 집에서 자고 있었고 가인들은 마당에 짚을 모아 큰 불을 일으켰다.
태조의 아들 집에 불이 났으니 온 조정이 난리가 나 불을 끄러갔다. 성종 역시 자신의 작은아버지인 안종의 안부를 묻기 위해 직접 행차했는데 거기서 모든 사정을 알게 되고 그 즉시 안종을 사수현[7] 으로 유배보낸다.[8] 고려사에 따르면 이 소란을 만삭에 지켜 본 헌정왕후는 큰 충격을 받아 "참한곡립", "화가 나고 부끄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9][10] 결국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산기를 느끼고 급하게 아들을 낳다 승하했다.
이후 아이에게는 왕순(王詢)이라는 이름이 붙어졌고, 왕순은 유모에 의해 양육되다가 아버지에게 보내진다. 왕순이 아버지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지는 기록이 전무하니 모른다.[11]안종의 집이 왕후의 집과 더불어 서로 가까워 그로 말미암아 더불어 오가면서 정을 통하였는데 산달이 가까워 와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성종 11년(992) 7월, 왕후가 안종의 집에서 머물자 그 집안사람들이 장작을 뜰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막 솟아오르자 백관이 불을 끄러 달려오고 성종도 급히 와 안부를 물으니, 집안사람들이 결국 사실대로 알렸으며 이에 안종을 유배보냈다.
<<고려사>> <경종 후비 헌정왕후 황보씨 열전>
왕순은 태조의 직계 손자라는[12] 강력한 혈통을 가졌기에 이모에게 죽음을 당할 뻔하다가 겨우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르고도 반역자에게 휘둘리고 북적의 침입을 겪지만 모두 악착같이 헤쳐나가 결국 나라를 중흥시키니 그가 바로 '''현종 원문대왕''', 고려, 조선왕조 내내 존경을 받은 위대한 성군이었다.[13]
헌정왕후의 가인들이 조용히 넘어갔다면 그녀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 왕후가 사통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건 너무 큰 일이다. 안종과 아이가 안 죽고 유배되기만 한 이유는 두 사람이 바로 태조의 혈통이니 그걸로 봐준 것이다. 안종은 심지어 돌아오지도 못하고 유배지에서 삶을 끝마쳤다. 고려와 신라 왕실 양쪽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안종도 이 정도인데 가인들이 이 일을 숨기고 있다면 기군죄로 즉시 처형 당했을 것이다. 결국 가인들도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도 있다.
비슷한 경우로 천추태후와 사통한 김치양은 아들까지 얻었으나 천추태후가 실각해 권력을 잃자 바로 아들과 함께 사이좋게 처형당한다. 이것만 봐도 당시 가인들이 느낀 두려움은 우리의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14]
헌정왕후의 일대기는 미묘하게 문희와 김춘추 일화와 비슷하다. 다만 헌정왕후는 꿈을 직접 꾸었지만 문희는 언니 보희가 꾼 꿈을 비단치마 한 벌 주고 샀다는 차이가 있다. 안종 및 김춘추와 사통하고, 집이 불타고 군주가 알게 되는 것까지는 같지만 문희와 김춘추의 속도위반은 김유신이 의도한 것이고, 오빠가 군부 대표인 문희의 지위[15] 와 진골 귀족 대표인 김춘추의 권력이 워낙 세서 아무런 방해가 없고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헌정왕후와 안종은 그만 한 권력이 없었으니 두 사람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는 차이도 있다. 대신 아들이 엄청 잘 됐으니 다행일지도. 여기에 이후의 천추태후의 행보를 보면 차라리 그 더러운 꼴 안 볼 수 있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헌정왕후 사후 26년이 지나 1018년에 현종은 황비(皇妣) 황고(皇考)[16] 를 위해 현화사(玄化寺)를 짓고 1021년에 현화사비(玄化寺碑) 비석을 세워 부왕과 모후를 추모했다.
2.2. 현화사비
근데 현화사비의 내용이 고려사와 조금 다르다. 현화사비엔 헌정왕후가 경종의 왕후였던 건 쏙 빼고 처음부터 안종의 왕후였던 것처럼 서술했다. 또한 헌정왕후가 993년 3월 15일에 대내 보화궁에서 붕어했다고 한다. 즉 현종을 낳고 8개월 정도 더 살았던 것이다.
성종이 헌정왕후를 위해 후계자 목종을 시켜 제사를 지낸 것이나 능묘 조성을 위해 도감을 설치한 것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 기록이다. 현화사비는 현종이 직접 세웠으니 현화사비가 맞다고 볼 수도 있긴 하나, 그 내용의 신빙성에 다소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다. 가령 비석엔 안종이 유배 가서 죽은 걸 '거란을 피해 남하 했는데 급병 걸려서 죽었다.'라고 써놨고 당시 아기였고 만월대에 있던 현종이 '안종을 부축하며 같이 내려 왔다.'고 써놨다. 현화사비는 현종이 부모를 기리기 위해 세웠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3. 시호
그녀의 시호는 고려사에 두 개, 현화사비에 한 개가 전하진다.
고려사의 하나는 헌정왕후, 둘은 효숙왕후(孝肅王后)다. 헌정왕후는 동생 성종이 올렸는데 아마 경종 獻화대왕의 왕후로서 獻 자 돌림 시호를 받은 듯 보이고 효숙왕후는 효숙왕태후를 줄인 것으로 안종 孝의대왕의 왕후로서 孝 자 돌림 시호를 다시 받고 현종이 자신의 친모이니 왕태후로 올려 추존한 것이다.
현종은 즉위한 후 1009년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로 추존하고 원릉(元陵)의 능호를 올렸다. 1017년 5월에 혜순(惠順)이라는 시호를 추가하고, 1021년 6월에 혜순(惠順)을 고쳐 인혜(仁惠)라 하였으며, 1027년 4월에 선용(宣容)을, 고종 40년 10월에 명간(明簡)을 추가하였다.
현화사비에는 조금 바뀌어 인혜가 앞에 오고 고려사엔 없는 시호가 추가돼 줄여부른 효숙인혜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 풀 시호 효숙인혜순성대왕태후(孝肅仁惠順聖大王太后) 시호가 등장한다.
4. 대중 매체에서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신애가, 아역은 박은빈이 맡았다. 작중 그녀는 황후 자리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가 정략 결혼으로 인해 억지로 경종과 혼인한 것으로 나왔으며, 이후 자신에게 진심으로 잘 대해준 안종 왕욱을 항상 사모하며 그와의 로맨스를 갈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오라비인 성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훗날 현종이 되는 아들 왕순을 출산하고는 산고로 인해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연출되었다.
한편 SBS의 보보경심 려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훗날 안종이 되는 14황자 왕욱(남주혁 분)이 안부인사 차 이복형인 8황자 왕욱[17] (강하늘 분)의 집에 들렀다가,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우희를 빼닮은 한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 소녀를 보고 "너, 욱이 형님의 딸이지?"라고 묻는 장면이 나왔다. 훗날의 인연을 암시하는 장면인 셈.
5. 같이보기
[1] 고려사 기록에 따른 것.[2] 현화사비 기록에 따른 것.[3] 현화사비엔 윗누이 자를 써서 성종의 둘째 누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천추태후랑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데다가 고려사에선 경종의 4번째 왕비로 경종열전에 실렸기 때문에 손아랫누이 매를 윗누이 자로 잘못 쓴 거로 보는 게 적절하다. 뭐 두 한자 모양도 상당히 비슷하고[4] 이런 비슷한 부류의 스토리(?)는 많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김유신의 두 동생들 중한 명인 보희가 이 꿈을 꾸자 부끄러워서 동생 문희에게 비단 치마 한 벌 받고 팔아버렸는데 훗날 무열왕 사이에서 문무왕을 낳고 문명왕후가 된 것. 키루스 2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5] 현종이 992년 7월 1일(음력)에 태어난걸 보아 두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진 건 대략 991년도 즈음으로 보인다.[6] 안종 문서에서 나와있듯이, 이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자기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유언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역성혁명을 꿈꾸지 않는다고 쳐도, 고려때는 조선에 비해선 사실상 왕의 피만 이으면 내가 왕을 하겠다고 주장할 수 있던 시대였다. 현종 자체만 봐도, 어머니인 헌정왕후와 아버지인 안종 모두 왕족이니 왕이 될 수 없는 처지도 아니었다. 헌정왕후와 안종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시대상을 보면 자기 아들이 왕이 되길 바란것이 '''허황된 망상은 아니었다.'''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큰 흠집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현종의 혈통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이들이 없던 것으로 보아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다지 큰 흠이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목종, 천추태후, 김치양, 강조 등 강조의 정변과 관련된 거의 모든 주역(?)들이 목종 다음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로 현종을 꼽았으며, 심지어 현종마저 자신이 직접 왕이 되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의혹도 있을 정도. 못할 일은 아니라는 것.[7]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8] 고려사 성종 세가엔 992년 7월 임진일에 유배했다고 나온다.[9] 고려사에서 유일한 헌정왕후의 심리묘사이다.[10] 안종이 처벌받아서 화가 났는지 아니면 부끄러워 화가 났는지는 알 수 없다.[11] 물론 들었다 해도 기억할 수 있었을 리는 없다. 안종 역시 현종이 네~다섯살때 쯤 붕어했으니 아니면 왕에 오른 이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안종 입장에서도 상당히 곤란한 게 어느 아버지가 제 정신이 아닌 이상에야 불륜으로 낳은 제 자식보고 "너는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다." 라고 말하겠는가... 더군다나 그거 때문에 유배당한 처지에 뭐 좋은 꼴 보려고?[12]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어머니는 태조의 친손녀. 외할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외할머니는 태조의 딸.[13] 현종 이후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 모든 고려 국왕들은 현종의 후손들이니 헌정왕후의 후손들이기도 하다.[14] 다만 김치양의 경우에는 천추태후의 실각만이 원인은 아니고 천추태후와 작당하고 고려의 사직을 끊으려고 했으니 단순 사통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성종에게 최초로 발각되었을 당시에는 안종처럼 유배보내는 선에서 끝냈다.[15] 달리 말하면 자신에게 왕후 같은 제한이 없는 지위.[16] 족보상으로 비는 어머니쪽, 고는 아버지 쪽을 이른다. 즉 황비 황고는 황제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르는 말.[17] 훗날의 대종 선경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