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태후

 


'''고려의 역대 왕후'''
광종
대목왕후

'''경종비'''
헌숙왕후
헌의왕후
'''헌애왕후'''
헌정왕후

성종
문덕왕후
문화왕후
'''千秋太后
천추태후
'''
'''시호'''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
'''존호'''
응천계성정덕왕태후
(應天啓聖靜德王太后)
'''관저'''
숭덕궁(崇德宮) → '''천추전(千秋殿)'''
→ 장생전(長生殿) → ?[1] → 숭덕궁(崇德宮)
'''본관'''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
'''능호'''
유릉(幽陵)
'''생몰년'''
964 ~ 1029.01 (66세)
1. 개요
2. 가계
3. 생애
3.1. 경종과 성종 시절
3.2. 태후가 되다
3.4. 폐위 이후
4. 평가
4.1. 청정 설
4.2. 불교정책
5. 기타
6. 대중매체
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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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5대 국왕인 경종의 제3비이자 제7대 국왕인 목종의 모후.
생전 아들 목종에게 받은 공식 존호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 그러나 비공식 존호로 관저였던 천추전을 딴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유는 후술한다.
사후 제8대 국왕 현종이 올린 시호는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이다. 남편 경종과 獻 자 돌림 시호를 받았으며[2] 시호를 줄여 '헌애왕후(獻哀王后)'라고도 한다.

2. 가계


  • 친할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 고려 태조 왕건
  • 친할머니: 태조의 4비 신정왕태후
  • 외할머니: 태조의 6비 정덕왕후
  • 아버지: 대종 선경대왕 왕욱(王旭)
  • 어머니: 선의왕후 유씨
  • 친오빠: 고려 제6대 왕 성종
  • 친동생[3]: 고려 제8대 왕 현종의 모후인 헌정왕후
태조의 손녀였음에도 성씨를 친할머니를 따라 황보씨(皇甫氏)로 삼았다. 초기 고려 왕실은 근친혼을 하면서도 일단 명목상은 같은 성씨라는 결합을 피하려고 왕족 여성은 왕씨가 아닌 다른 성씨를 쓰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
경종은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과 신정왕태후의 딸의 아들이고, 천추태후와 헌정왕후는 신정왕태후의 아들과 정덕왕후의 딸의 딸들이므로 경종과 천추태후와 헌정왕후의 혼인은 친사촌(삼촌 광종)/고종사촌(고모 대목왕후)/외사촌(외삼촌 광종)의 혼인이다. 게다가 부모끼리 다 이복이면 몰라도 경종의 어머니인 대목왕후랑 천추태후의 아버지인 대종은 친남매 간이었다. 양쪽 사돈 안팎 어르신들이 모두 형제자매에다가 2명은 아예 친남매였던 셈.

3. 생애



3.1. 경종과 성종 시절


경종에게는 제1비 헌숙왕후, 제2비 헌의왕후(문원대왕과 문혜왕후(정덕왕후의 딸)의 딸), 제3비 헌애왕후(천추태후), 제4비 헌정왕후, 후궁으로 대명궁부인(원장태자(정덕왕후의 아들)와 흥방궁주(신명순성왕태후의 딸)의 딸)이 있다. 그런데 헌애왕후만이 경종의 유일한 아들인 목종을 낳았다.
그러나 경종이 목종이 태어난지 1년만인 981년 6월에 붕어하자 헌애왕후 – 헌정왕후의 동복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된다. 과부가 된 뒤의 천추태후는 어린 아들과 함께 숭덕궁(崇德宮)에 머물렀는데 이때 동주(洞州) 사람으로 외족(外族)인 김치양을 만난다. 외족은 어머니의 일족으로 어머니의 부모, 형제자매와 배우자, 어머니 형제자매의 자녀가 여기에 해당한다. 동주 출신에 김씨(金氏)인 것을 보아 태조의 후궁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의 아버지 김행파(金行波)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추태후는 황주 황보씨[4]이니 김치양이 외족이라는 것은 황주 황보씨와 동주 김씨 사이에 혼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치양이 승려 모습이었다는 것을 보아 화엄종(華嚴宗) 승려로 추정되는데 천추태후가 불교를 적극 지원했다는 점에서 불교 세력 중에 화엄종의 힘을 빌리려던 것으로 보인다.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는 화엄종을 지원했으며 1006년 천추태후가 발원한 경전의 초교와 중교를 화엄종 승려가 맡았기 때문이다.
당시 천추태후가 바라던 것은 당연히 선왕 경종의 아들인 목종의 즉위였으며 김치양을 통해 목종의 즉위 세력을 대려던 것으로 보인다. 안소광(安紹光)은 동주 출신으로 연고를 통해 접점이 생긴 것으로 보이며 무술이 뛰어나고 왕을 추대한 공이 있다는 기록을 보아 근위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김치양의 유배에 대해서는 둘 사이에 추잡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데 고려 초기 왕족 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고려할 때 왕위를 노리던 왕족 세력들의 영향으로 보인다. 천추태후가 아이를 가진 건 목종 즉위 이후라는 점과 고려 초기 왕실의 권력 쟁탈전을 고려할 때 이때는 처신을 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
990년 목종은 개령군의 군호를 받았으며 12월 책봉 의례 때 성종은 교서를 내려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를 도와라.”고 했다. 이는 목종이 성종의 뒤를 이을 계승자로 공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997년 성종이 중병에 걸리자 목종에게 왕위를 전했다.

3.2. 태후가 되다


그러다 997년 아들이 목종으로 즉위하면서 응천개성정덕왕태후(應天啟聖靜德王太后)로 높여지지만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했다고 하여 천추태후(天秋太后)라 불렸다. 고려 초기에는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녀이자 성종 제1비 문덕왕후 유씨의 언니 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과 문원대왕과 문혜왕후(文惠王后)의 아들인 천추전군(千秋殿君)이라는 사람이 별개로 존재한다.
목종이 즉위하면서 천추태후는 왕태후가 되었으며 김치양은 중앙 정계의 벼슬에 뛰어들었다. 1006년 만들어진 대보적경(大寶積經) 사경 발문에는 김치양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판삼사(判三司)라 적혀 있는데 상서우복야는 상서성(尙書省)을 관할하며 삼사의 판사, 사는 전곡의 출납 회계를 관장하므로 김치양은 행정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강조의 정변 때 김치양과 함께 죽은 사람들은 김치양의 친당(親黨)으로 보인다. 유행간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대량원군의 후계자 선정을 반대했다. 고려 초기 중앙에서 활동하던 유씨는 평주뿐이기에 태후의 향리(鄕里) 황주(黃州)와 김치양의 집안 동주(洞州)와 같은 패서호족(浿西豪族) 평주 유씨(平州 庾氏)로 추정된다. 즉 이들은 고려계통 패서호족 간의 연고로 뭉친 것이다. 그밖에 많은 천추전 궁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는 것으로 보아 여럿 죽은 것으로 보인다. 천추궁사(千秋宮司)를 맡은 문인위는 황주 인근 장연현(長淵縣) 출신이었다.
이주정은 태후의 친속으로 목종 12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전중감(殿中監)이었으며 마찬가지로 고려계통 패서호족으로 추정된다. 상서좌복야 이주헌은 동주 토산현 출신으로 삼사의 직임을 맡았는데 김치양이 동주 출신으로 삼사사를 겸한 걸 생각하면 연고로 가까워진 것 같다. 또 고속 승진한 점을 들어 목종 즉위의 공신으로 추정된다. 동주 토산현 출신으로는 안소광도 있었다. 그는 선휘원(宣徽院)의 판관이었는데 선휘원은 내료(內僚)를 총괄하고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관부다. 황보유의는 국왕의 측근 보좌 기구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천추태후 집안인 황주 황보씨라 추정할 수 있다. 천추태후의 친당은 모두 고려계통 패서호족이었으며 혈통 또는 지역적 연고를 가진 자들이었다.

3.3. 강조의 정변


1009년 정월 임오(壬午)일(16)에 천추전이 불타버려 천추태후는 거처를 장생전(長生殿)으로 옮기고 목종은 병을 얻어 정무를 보지 못했다. 이때 김치양이 왕위를 넘본다는 말이 나왔는데 유충정에게 뇌물을 주면서 도와달라고 했지만 유충정은 거절했다. 목종에게 봉서를 올려서 김치양이 왕위를 엿보고 있으며 심복을 널리 벌려놓았다고 말했다. 목종은 강조를 불러들였으며 반란이 일어나 김치양은 죽고 목종과 함께 폐위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강조의 정변 참고.

3.4. 폐위 이후


함께 귀양을 가던 아들 목종이 도중에 강조에 의해 시해당하고 결국 천추태후는 혼자 황주(黃州)로 내려갔다. 그리고 황주의 궁에 유폐되었다가 말년에 개경으로 돌아와 1029년 숭덕궁에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고로 천추태후가 죽은 후 2년 이후에 현종이 죽는다. 한마디로 천추태후는 현종의 재위기 시절 대부분을 그대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려사에서 가장 복잡한 시절이었음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여러모로 권력에 초연해져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광해군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4. 평가


목종과 천추태후의 위신은 바로 다음 국왕인 현종의 정통성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TV에서는 앵무새처럼 조선 시대 유학자 타령을 하지만 조선조 고려사 편찬 이전, 당대에 남긴 기록에서부터 곡필이 있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현종은 10대를 막 넘긴 어린 나이에도 이미 왕위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왕을 강조의 정변으로 원치 않게 즉위한 무고한 이로 포장해야 하니 목종은 어머니에 의해 허수아비가 된 유약한 임금, 천추태후는 불타는 권력욕으로 아들인 목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며 온갖 악행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다가 최후에는 아들 목종이 폐위당하고 죽게 만드는 원인이 된 사악한 악녀로 평가되었고 유교적 이념을 국시로 삼은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여자가 정치에 참여해 권력을 휘둘렀다는 것과 외간 남자와 사통했다는 것으로 인해 부정적 시선이 더욱 강해졌다. 따라서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천추태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도전의 경우 "천추태후가 음란해 김치양과 간통해 아들을 낳았다. 왕이 애초부터 이것을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해서 결국 모자가 모두 재앙을 입었고 사직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며 깠고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디스를 했다.

지어미로서 음탕한 행동이 있거나 신하로서 반역하는 뜻이 있다면 이는 강상을 무너뜨리고 천리를 어지럽히므로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인 것이다. 황보씨가 김치양과 간통하고서 (...) 어찌 태후의 호를 가질 것인가?

《동사강목》 현종 20년(1029)

현대에 들어 그녀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로 목종 재위 도중의 업적을 섭정을 맡은 천추태후의 공으로 돌려야 된다는 의견도 나오나, 목종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목종은 재위 초기부터 스스로 친정을 했고 그가 중반기까지 보여준 정치적 행보와 업적은 상당한 수준으로 여요전쟁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목종이 천추태후에 의해 휘둘리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천추태후가 목종을 압도하는 권력을 쥐었다는 통념을 부정하기 이전에 목종이 유약한 왕이었다는 통념부터 극복해야 한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권력 구도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게 되는데, 자세한 사항은 강조의 정변 항목을 참조할 것.

4.1. 청정 설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어머니 황보씨를 높여서 왕태후(王太后)로 삼고 함께 청정했다."고 나오는데 즉위 당시 목종의 나이가 18세였다는 점과 초기 목종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점에서 이쪽이 사실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청정은 임금의 뒤에서 발을 내리고(수렴)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청정) 수렴청정(垂簾聽政), 동궁(東宮)이 대신 듣는 대리청정(代理聽政)과 같은 명칭으로 섭정(攝政)과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섭정 제도는 여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를 한데서 비롯되었는데 조회에 참석하고 황제의 명령과 같이 황태후의 명령을 제(制)라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임조칭제는 고려 헌종의 임조칭제를 맡았던 고려시대 모후의 섭정을 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명분부터 모후가 임금을 대신하는 임조칭제와 선왕의 후비로서 임금을 보좌하는 것으로 달랐고 임금과 청정 대상이 특정 날짜에 동행해 조언하거나 반문하는 형식이었다.
수렴청정흥선대원군의 막후정치를 보면 알겠지만 후비의 청정은 정전에 가는 일은 드물고 평시에는 신하들과 임금의 논의를 듣고 결정하거나 정전(正殿)과 자전(慈殿)을 오가며 하인이나 문서를 통해 결정하는 막후정치였다. 천추전에서 청정을 했다는 것은 임조칭제보다 수렴청정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수렴청정의 경우 전면에 나서는게 아니라 자신의 거처에서 막후정치를 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조의 정변을 보면 알다시피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천추태후는 정사에 관여했다는 것치고 의외로 세력이 매우 약한 편이었다. 말 그대로 그냥 어머니로서 좀 도와주고 이런저런 사회 활동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4.2. 불교정책


천추태후의 본관인 황주는 화엄종을 믿었고 천추태후의 아버지 대종은 선종(禪宗) 광자대사를 흠모해 그 제자가 될 정도로 선종을 선호했고 황주 승려 균여는 화엄종을 중심으로 유가종(瑜伽宗)을 포섭하기를 원했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해 팔관회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불교와 토속 신앙을 억제했지만 최승로 사후 전통 중심으로 회귀했다. 부모의 기일에 사원에서 분향하고 서경에 종종 행차해 재제(齋祭)를 지냈다. 성종 9년 12월 한언공에게 요청해 송 황제에게서 대장경 2500권을 받았다. 성종 10년 4월 귀국해 대장경을 바치자 승려를 초빙하고 사면령을 내렸으며 목종에게 양위한 뒤 내천왕사로 옮겨 38살에 사망한다. 이런 후기 성종의 종교 정책은 천추태후의 뜻도 일정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언공은 성종 후반에 중추원 설립을 주도해 중추원부사와 중추원사를 역임하고 참지정사에 오르더니 목종 대 평장사를 거쳐 문하시중까지 올랐다. 한언공은 목종 6년에 사망했는데 대장경을 좋아한 성종과 한언공은 천추태후와 목종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태조와 정종에서 시작된 서경 중시 정책은 성종 후반부터 시작되어 목종 때 더욱 강화되었다. 목종 원년 7월 호경(鎬京)으로 개칭하고 호경에 4회 행차해 재제를 지냈는데 호경에서 팔관회가 열렸을 가능성이 있다. 목종 12년 개경 정변 당시 왕은 상정전(詳政殿)에서 연등회를 연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부활했음을 보여준다. 호경은 고대 주나라 전성기인 서주 시대 수도로 함양(진나라)과 장안(한나라, 당나라)으로 이어지는 중국 전성기를 상징한다. 측천무후는 황제였던 시절 국호를 대당에서 주(周)로 고친 적이 있는데 호경을 중심으로 천하를 통일한 주나라처럼 평양성을 중심으로 고려를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열망이 있던 것 같다. 이는 주의 계승자를 자처한 측천무후의 영향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목종 2년 7월 진관사(眞觀寺)가 성남(城南)에 천추태후의 원찰, 3년 10월 숭교사(崇敎寺)가 목종의 원찰로 창건되고 10년 2월 진관사 9층탑이 건립되었다. 이는 선덕여왕이 삼국통일을 기원해 만든 황룡사 9층탑과 왕건이 후삼국통일을 기원해 평양성에 만든 9층탑을 천추태후가 이어받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이상의 나라를 만들고자 한 염원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진관사는 화엄종, 숭교사는 유가종(법상종) 계열이었다.
김치양은 농민을 사역해 고향 동주에 신사(神祠)를 세워 성숙사(星宿寺)라 했으며 개경 궁성 서북 모퉁이에 십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그 형태가 기괴했다고 한다. 다른 마음을 품어 넌지시 도와 그릇마다 그 뜻을 새겼는데 종에는 “지금 동국에 태어난 때에 선한 씨앗을 함께 닦아 후에 서방에 가는 날에 함께 보리를 증명하리라.”고 새겼다. 성수사는 성수(星宿)라는 명칭이 붙고 사(祠)로도 표현되기에 별을 숭배하는 신사의 기능을 지닌 사찰로 보이는데 도교적, 성신(星辰) 신앙, 무속적 성향이 보인다. 시왕사는 저승시왕을 모신 토속, 무속적 절로 저승에 간 사람까지 시왕을 지배하여 구제한다는 지장보살도 모셔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를 갈구하고 시왕사에 모셔진 시왕과 여러 신들의 모습이 기괴하다는 것으로 보아 밀교적인 면모가 있다. 이런 불교 사업은 천추태후의 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목종 9년 7워 《대보적경》(大寶積經)을 금 글씨로 필사했다. 대보적경 권32를 금색 실로 베낀 발문이 남아있는데 여기에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있다. 연월 글 쓴 사람과 함께 초판을 쓴 승려는 화엄종이었다. 천추태후는 ‘보살계 제자’니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금자대장경을 베꼈다는 것으로 보아 권32뿐만 아니라 대보적경 전부와 다른 사본도 필사한 것 같다. 대보적경은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하나로 묶은 경전으로 49첩 1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무변장엄회, 제3밀적금강역사회(여래불가사의비밀대승경), 제11출현광명회, 제24우파리회(결정비니경;삼십오불명예참문) 등에는 밀교사상이 있는데 무변장엄회는 다라니와 부처 이름을 외우는 공덕이, 출현광명회는 부처가 월광보살月光菩薩에게 지혜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제5무량수여래회(무량청정각경)에는 서방정토사상이, 제46문수사리설반야회에는 반야사상이 담겨있다. 제10문수사리보문회(보문품경), 제15문수사리수기회, 제46문수사리설반야회 등에는 문수신앙이, 제41미륵보살문팔법회, 제42미륵보살소문회(미륵보살소문본원경)에는 미륵신앙이 있다.
대보적경은 밀교사상이 농후해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밀교적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아있는 사본인 대보적경 권32가 대보적경 제11출현광명회(권30~34)의 일부라는 점이 뒷받침한다. 서방정토와 아미타불 신앙은 물론 반야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신앙에도 관심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대보적경에는 여자 신도의 신앙에 대한 내용도 많다. 부처가 아난에게 수태 과정, 태아의 성장, 아기의 출생에 관해 설명은 물론 부처가 여자의 수태에 대해 설명한 것, 묘혜동녀를 내세워 불교수행에는 남녀노소가 없다는 제30묘혜동녀회, 부처와 여자 신도가 문답한 제31항하상우바이회, 여자가 닦아야 할 도리가 언급된 제40정신동연회, 승만부인이 대승불교에 대해 설명한 제48승만부인회 등이 그것이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대보적경 사본은 목종 5년 무렵에 수태해 아기의 건강한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산후에는 아기의 성장과 장래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목종 10년 개경 총지사에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이 간행되었다. 삼세여래의 전신사리가 모두 보협인다라니에 함축되어 있으니 이를 간직한 보협인탑을 만들면 모든 부처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는 총지사 주지 보협인다라니경을 불탑 안에 널리 안치해 공양하기 위해 보협인경의 사본을 제작하고 찍은 것인데 이 경전판의 제작은 초조대장경의 탄생에 기여했다. 총지사에서 밀교 보협인경이 대량으로 간행됨에 따라 많은 불탑에 안치되었을 것이다. 밀교의 총지사는 고아종이 화엄 귀법사를 창건했을 때 그 소속의 총지원이었다. 이 절이 목종 때 원이 아니라 사로도 불렸다.
목종 10년 창건된 진관사 9층탑에도 보협인경이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총지사는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홍철의 보현인경 제작은 천추태후 내지 목종의 후원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천추태후는 보협인경과 보협인탑 신앙, 불탑신앙, 다라니신앙, 밀교신앙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때 송에서 대장경이 전래되면서 성종 후반기와 목종 대에 대장경 필사가 활기를 띄었으니 현종 이전에 이미 초조대장경 각판사업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달원 원종대사 비문에 따르면 광종도 22년 10월 원화전(元和殿)에서 대장경을 숭배했다고 한다.
천추태후는 본인 원찰인 진관사가 화엄종이고 발원해 제작한 대보적경을 화엄종 승려가 맡은 것으로 보아 화엄종 신도로 보인다. 또 목종의 원찰인 숭교사가 유가종이고 대보적경 일부에 미륵신앙이 있는 점과 김치양의 시왕신앙이 지장보살과 관련이 있고 지장보살은 유가종과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유가종 내지는 미륵보살에도 관심이 있던 것 같다.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자처하면서도 화엄종의 지지를 받은 측천무후의 불교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화엄종을 중심으로 법상종(유가종)을 통합시키려고 한 균여의 신앙과 토속신앙의 면모가 짙은 균여의 불교성향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균여가 천추태후의 친정인 황주 황보씨의 지원을 받은 영향일 것이다. 하지만 유가종에 기반한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 부모와 자신의 원찰로 거대한 법상종의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하면서 유가종이 우위를 차지했다. 현종도 화엄종 중광사(重光寺)를 창건하기는 했지만 법상종 중심이었다.

5. 기타


  • 경종 사후 헌애왕후의 관저는 '숭덕궁(崇德宮)'이었다. 아들 목종은 즉위 전, 성종에게 '숭덕궁 적자(崇德宮 嫡子)'로 불렸다. 이후 태후가 된 헌애왕후의 새 관저는 그 유명한 본궐 내 천추전(千秋殿)이었다. 헌애왕후가 김치양과 사통할 때 대놓고 김치양을 천추전에 데려 왔기 때문에 김치양의 관저로 불리기도 했다. 강조의 정변 이후 자신의 고향 황주[5]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숭덕궁(崇德宮)에서 죽는다. 숭덕궁에서 출발해 숭덕궁에서 죽은 것.
  • 최사위 묘지명엔 여후(呂后)란 명칭으로 등장한다. 천추태후를 한고조 유방의 황후인 여태후에 비유한 것으로 태후를 비난하려고 한 것이다.
  •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따르면 천추태후의 관저는 먼 후손 인종이 다시 언급하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자겸의 관저를 정해줄 때 부의 이름을 숭덕부(崇德府)로 한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천추태후의 관저는 김치양의 관저로 취급되기도 했는데 인종이 싫어했던 이자겸을 엿먹일려고 일부러 안좋은 유래를 가진 이름을 준 것이다. 정작 이자겸은 이를 몰랐는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인종 같이 왕실 내부의 역사를 속속히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인종이 이자겸의 사병을 숭덕부군(崇德府軍)이라고 부른 기록이 남아있다.

6. 대중매체



6.1. 천추태후


드라마 천추태후에서의 모습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천사태후'''. 김소은이 연기한 어린 시절(1~8화)의 천추태후의 모습은 츤데레에 가까워서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지만 채시라가 연기한 성인 시절은... 아들 목종의 업적을 거의 다 가져온 데다 김치양과 애인 사이가 된 후에도 매우 떳떳했다. 그런데 아들이 신경쓰인 건지 목종이 정 싫어한다면 김치양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현종의 머리를 깎아서 절로 보냈는데 미워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조카니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만.[6]
고려를 지키기 위해 거란과 맞서 싸우는 의로운 모습이 돋보인다. 태후시절에도 비록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으나 그 잘못을 인정하고 왕권을 스스로 다음 왕인 현종에게 넘기는 완벽한 '''개념인'''.
또한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자는 각종 유혹도 번번히 거절했다. 김치양의 반란 때에 김치양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긴 했지만 극 중 모습에서 보면 결국 끝까지 사랑한 것 같다. 어쨌든 '''마냥 천사처럼 착하다.''' 중반에 약간 악해지자 시청자들이 주인공을 악역으로 만들지 말라고 반발했다는 설도 있는데, 알 수 없는 일.

6.2. 기타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천추태후를 주제로 다뤘을 때 그 당시를 다룬 사극이 드라마 천추태후밖에 없어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부분들만 편집해서 보여주었다. 출연진들도 은연중에 이 드라마의 막장성을 아는건지 "'''무슨 고려를 부흥시키려던 영웅까지는 아니지만...'''"이라는 언급을 했다. 그래도 마냥 평면적인 악녀로만 볼 수도 없고, 나름대로 추구한 사회 모습이나[7] 야심도 있었던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의미'''로서의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7. 같이보기


[1] 강조에 의해 황주로 쫓겨나서 21년간 유폐됨.[2] 경종 獻화대왕과 獻애왕태후.[3] 현화사비엔 윗누이 자를 써서 성종의 둘째 누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천추태후랑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데다가 고려사에선 경종의 4번째 왕비로 경종열전에 실렸기 때문에 손아랫누이 매를 윗누이 자로 잘못 쓴 거로 보는 게 적절하다. 뭐 두 한자 모양도 상당히 비슷하고[4] 유배 후에 내려간 곳도 어머니의 고향인 정주가 아닌 할머니의 고향인 황주였다.[5] 현 황해도 황주.[6] 사실 누구로부터 보호하느냐 하면 그것부터 웃기다. 신혈사의 스님들은 천추태후로부터 현종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위의 각주에서 나온 승방 지하 땅굴도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7] 신라 유학 세력이 내세운 유교적 질서의 사회와 대비되는 개국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고려 본연의 사회를 추구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