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나우두/비판과 반박

 



1. 개요
2. 비판
3. 반박


1. 개요


호나우두에 대한 비판과 반박을 담은 문서이다.

2. 비판


호나우두의 전성기였던 바르셀로나 시절 그가 뛰던 바르셀로나가 약팀이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바르셀로나가 챔피언스 리그까지 제패하던 1기 시절에 비하면 침체기로 볼 수도 있으나, '약팀'소리까지 들을 팀은 결코 아니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대패한 후 팀을 리빌딩하는 과정에서 4위, 3위를 했고, 리그에서도 호나우두 입단 전 3위, 호나우두 영입 후 준우승, 호나우두 이적 후 리그 2연패의 기록을 세운 팀이 바르셀로나였다.
호나우두의 광팬들에 의해 가장 많이 비교되곤 하는 메시 뿐 아니라 그의 선수 커리어 전체를 조망해 보면 펠레, 마라도나 등과 비교하기에는 약점이 많다. 먼저, 호나우두가 바르셀로나에서 세운 시즌 최다 골 기록은 2010/11 시즌 메시와 호날두에 의해 깨졌다.
'''특히 호나우두의 유럽 클럽 대항전 기록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한다.''' UEFA 컵 위너스컵UEFA컵 우승을 이끌었지만, 아무래도 컵위너스컵과 UEFA컵은 챔피언스 리그에 비해 우승 난이도가 낮다.
호나우두의 UEFA 챔피언스 리그 통산 기록은 42경기 16골로, 경기 당 0.4골이 안 된다. '''당연하게도 한 차례의 챔스 득점왕을 차지하지 못했는데,''' 이는 다음 세대의 아이콘인 메시와 호날두가 각각 6회와 7회 득점왕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함은 물론 판 바스턴과 호마리우는 각기 경기당 0.7골과 0.63골의 기록은 남겼고, 게르트 뮐러의 경우 유럽 대항전에서 79경기 70골을 기록하여 '''경기당 0.89골'''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동시대의 라이벌들과 비교해도 필리포 인자기, 다비드 트레제게, 안드리 솁첸코, 로이 마카이,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라울 곤살레스, 티에리 앙리, 뤼트 판니스텔로이, 마르코 시모네, 자르데우보다 뒤떨어지며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랑 비슷하고 에르난 크레스포,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에우베르, 히바우두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기록인데, 그나마 그들도 전부 다 최소 20골 이상 득점하여 통산 득점이 호나우두보다 많은 선수들이다. 디디에 드록바, 카림 벤제마, 마리오 고메스같은 후배 선수들도 호나우두보다 현격히 좋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챔피언스 리그 본선 기록만 보자면 더 비참해진다. 5골을 기록했는데, 안드리 솁첸코의 18골은 물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10골보다도 낮은 수치이다.
또한 호나우두는 전성기가 굉장히 짧다. 그의 수상 기록은 얼핏 보면 화려하지만, 잘 살펴 보면 바르셀로나에서의 한 시즌과 인테르에서의 한 시즌 반, 마지막 전성기였던 2002 월드컵 직후에 몰려 있다. 메시와 호날두가 타 선수들과 달리 신계라 불리는 이유는 실력과 기록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15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세계 최정상급의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호나우두의 부족한 자기관리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초창기에는 폭발적인 스피드를 무기 삼다가 노화 또는 부상으로 인해 신체적인 부담이 적은 플레이 스타일로 바꿔서 꾸준히 기량을 유지하는 선수들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호날두가 있다. 그러나 호나우두는 무릎에 큰 무리가 가는 플레이 스타일을 계속 유지했고, 그나마도 팀의 주장인 라울 곤잘레스와 갈등을 일으킬 정도로 유명했던 방탕한 사생활과 게으른 태도로 체중 관리에 실패하며 스스로 본인의 전성기를 단축시켰으니 이는 프로 정신의 부재이다.
호나우두에게는 전술적 제약이 있었다는 것도 문제점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나우두는 120경기에 출장해 82골을 기록하는 좋은 득점 능력과 순간적인 축구 센스를 과시했고, 첫 시즌에는 라리가 우승을 이끈다. 그러나 그는 전성기 시절 선보인 오프사이드 라인 침투, 현란한 드리블과 보디 밸런스로 상대 수비를 돌파하는 모습을 보이기에는 운동 능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었으므로 포쳐 성향을 띈다.
이런 포처형 공격수들은 미드필더진의 지원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상대가 라인을 내리고 수비에 치중하면 경기에서 지워지기 십상이라 활용하는 데 제약이 크다. 호나우두가 득점왕을 차지하기 직전 득점왕을 차지하고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던 로이 마카이가 좋은 예로, 그도 득점에만 주로 관여하는 스트라이커여서 국대에서는 항상 판 니스텔루이에 밀렸다. 이렇듯 포스트플레이에 능한 판 니스텔루이는 호나우두가 갖고 있던 주전 스트라이커의 자리를 차지하자 2위 바르셀로나보다 득실이 나빴던 레알임에도 우승에 성공시킬 정도의 득점력, 특히 원정에서의 대활약을 선보인다. [1]
따라서 그가 이뤄낸 레알 마드리드 시절의 기록과 라리가 우승이 과연 호나우두여서 가능했는지는 의문을 제기할 만 하며, 그나마도 말기에 가서는 체중 증가로 인한 기량 저하로 베르나베우에서 홈 팬들에게 자주 야유를 받는다.
호나우두는 다른 약점은 전술 이해도이다.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푸슈카시 페렌츠,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 등 다른 올타임 레전드들은 개인의 능력 뿐 아니라 축구 전체를 이해하는 능력이 빼어나 수비 및 플레이 메이킹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하지만 호나우두의 전술 이해 능력은 저들과 비교하면 명백히 한 수 아래였다. 호나우두와 라이언 긱스의 발언이 유사하면서도 뉘앙스가 다른 것[2]은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늘상 나오는 그의 부상 문제는 그와 비교되는 다른 선수들은 물론 모든 프로 선수들이 겪는 것이다. 물론 호나우두의 부상은 회복하는 데만 최소 2년 정도에 최악의 경우 선수 생활을 마감할 가능성도 있었을 정도로 치명적이었으나, 펠레도 선수 시절 심각한 부상을 여러 번 겪었고, 특히 1966년 월드컵에서 모라이스에게 더블 백태클을 당하며 입은 부상은 펠레의 신체적인 전성기를 끝냈다.[3] 그러나 펠레는 이후 스타일을 바꾸어 플레이메이커로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1970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호나우두 바로 전 세대의 탑 스트라이커 마르코 판바스턴 역시도 호나우두처럼 20대 초반 당한 무릎 부상으로 나이 30도 못되어 실질적 은퇴를 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공격수들을 압도하며 발롱도르를 꾸역꾸역 차지했다.[4]
또 하나 더하자면 월드컵에 탈락할 때마다 지단앙리가 이끄는 프랑스에게 항상 패배했는데, 이 둘이 이끄는 프랑스를 상대로 '''2전 2패 무득점'''이라는 기록과 함께 '프랑스 앞에선 작아지는 선수'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처음 프랑스와 맞붙은 결승전에서는 원인 모를 발작의 영향이 컸으니 그렇다 쳐도, 2006 FIFA 월드컵 독일 8강전에서는 빼도박도 못한 부진에다가 호나우두의 오랜 라이벌이자 4살이나 많은 지단의 어시스트로 역시 스트라이커계의 라이벌인 티에리 앙리의 결승골로 패했으니 완벽해보이는 호나우두의 국가대표 커리어 역시 분명한 오점이 있다.

3. 반박


클럽 활약의 일관성과 1인자로서의 위상을 보여준 기간이 짧다는 약점으로 호나우두를 펠레, 마라도나 같은 올타임 레전드들과 비교하기에는 무리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호나우두는 그런 약점들을 감안해도 축구 역사에 남을 위대한 선수이다.
당연히 호나우두의 선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월드컵 관련 기록으로 폄하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프리츠 발터, 바비 무어, 고든 뱅크스, 디에고 마라도나 등 클럽에서 세운 기록은 다소 빈약해도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각국의 레전드로 남은 경우도 있고, 가린샤,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파올로 로시 등 월드컵에서의 임팩트로 당대의 위상은 물론 전체적인 선수 평가가 더 높아진 경우는 흔하며, 무엇보다도 펠레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사실과 그가 축구 황제로서의 위상이 굳건한 가장 큰 이유는 '월드컵 3회 우승'이다.
1994년 월드컵에 1경기도 뛰지 못했다고 저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으나 전통의 강호이자 영원한 우승후보이며,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수없이 쏟아져 세계에서 가장 발탁되기 어려운 국가대표팀 중 하나이다. 더구나 월드컵 스쿼드에 당시 10대였던 그가 포함된 것은 고평가받으면 고평가받아야지 절대 저평가받을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논리를 적용하면 마라도나는 1978년 월드컵 엔트리에 아예 포함되지도 못했으니 마라도나의 재능이 부족했던 것이라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또한 월드컵은 스쿼드가 제한되어 있고, 조별리그 이후 단기간에 단판제 토너먼트로 진행되며 체력 소모와 부상 등 여러 변수가 따르므로 당연히 아무리 브라질이라도 우승을 기정사실화하고 스쿼드 한 자리쯤은 자국 유망주의 성장을 위한 배려로 비워둘 여유는 없다. 2018년 월드컵에서 1명이 빠진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후반부로 갈수록 체력 소진에 고통받은 것을 상기해보면 결과적으로는 그가 미출전했으나 당시 브라질이 호나우두를 스쿼드에 포함시켰던 것이 단순히 '경험 시켜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호나우두는 10대의 나이에 세계 최고의 대회에서 세계 최고의 국대 중 하나의 가용 전력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한 세기 가까이 되어가는 월드컵 역사를 통틀어 호나우두만큼의 활약(1998 골든볼+1998 준우승+2002 골든슈+2002 실버볼+2002 우승+2006 브론즈슈+통산 15골)을 보여준 선수는 몇 안 되며, 이마저도 상당히 어린 나이로 인한 경험과 정신력 부족, 선수 생활 마감도 가능할 정도의 심각한 부상, 그로 인해 2년 가까운 공백기 등 여러 치명적인 악조건을 안고 세운 것이다.
호나우두의 전성기가 짧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엄밀히 말하면 호나우두의 전성기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그럼에도 이렇듯 화려한 업적들을 세운 것으로 고평가받아야 하는 대목이다. 선수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은 경험이 쌓이면서 신체적 노화가 진행되기 전인 20대 중후반에 전성기를 맞는데 호나우두의 경우 흔히 바르셀로나에서 뛰며 득점왕을 차지한 1996-97시즌을 전성기로 꼽히나 그는 만 20세에 불과했다. 당시 그는 스피드와 기술은 엄청났으나 부족한 경험으로 패스 타이밍, 마무리 능력, 동료들과의 연계 등 전술적으로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9경기 47골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이는 20대 중반에 접어들어 기량이 만개한 메날두에게 깨지기 전까지 십수 년간 유지되었다. 바르셀로나 시절보다 더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던 PSV 시절에는 당시 준1류리그였던 에레디비시에서도 득점왕을 차지한 것이 호나우두이다. 물론 후술하겠지만 자기 관리 부족도 기량 저하의 한 원인이었다는 점은 프로 의식 부재로 비판할 수 있으나, 인테르 의료진의 판단 미스와 갑상선 이상 등 호나우두 본인의 책임으로 볼 수 없는 치명적 악재들도 여럿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축구를 접어야 할 확률이 50%인 부상을 겪고도 부활에 성공하고 불가피하게 신체 기량이 크게 저하되었음에도 골 결정력만을 거의 유일한 무기 삼아 월드컵 우승에 득점왕까지 차지하고 레알 마드리드 시절 전반기에 이룬 준수한 기록은 왜 그가 아직까지도 많은 선수들의 우상으로 추앙받는지 보여준다.
호나우두의 자기 관리에 대한 비판은 분명 일리가 있다. 인테르 시절 동료인 비에리의 증언과 레알 마드리드 시절 불성실한 태도로 팀의 주장인 라울과 충돌한 유명한 일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부상 이전의 호나우두는 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매우 성실하게 하는 선수였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2002년의 부활로 그가 재활 훈련을 게으르게 했다면 절대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조르제 칼데이라의 저서 '호나우두, 한 축구영웅의 시련과 영광의 드라마'를 보면 호나우두의 성실한 훈련 태도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부족한 클럽 경력, 특히 챔스 경력에도 옹호의 여지가 있는 것이 호나우두가 부상을 입기 전 챔스는 각 리그 1위만 출전이 가능했다. 따라서 호나우두가 챔스에서 온전히 제 기량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호나우두가 바르셀로나와 인테르에 몸 담고 있던 시절의 경우 두 구단이 약팀이라고까지 보기는 무리이나, 전체적인 전력이 강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 예로 호나우두의 바르셀로나 시절 감독인 바비 롭슨의 경우 언론으로부터 "전술이 없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였고, 이에 롭슨 감독은 "호나우두가 곧 전술이다."라고 반박한다. 인테르의 경우에도 호나우두를 영입한 이유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함이었으니 그들의 리그 우승 실패를 무조건 호나우두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가혹하다.
어떤 레전드 선수들의 커리어에도 약점은 있다. 펠레조차도 월드컵 득점왕과 코파 아메리카 우승이 없고, 마라도나도 코파 아메리카와 챔스 우승이 없으며, 메시는 원정(특히 챔스)에서의 저조한 기록과 무엇보다도 국대 무관이라는 점, 호날두도 강팀을 상대로 득점이 상당히 저조하다는 것과 월드컵 결승 근처도 못 가 봤다는 약점이 있다. 호나우두만 클럽 경력 부족을 이유로 선수로서의 전체적인 평가를 폄하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월드컵 경력과 더불어 호나우두가 가진 강점은 압도적인 재능이다. 그가 부상을 입기 전 득점 기록은 동 나이대의 메시와 호날두와 비교하면 '''80골 가량 차이가 날 정도로 독보적이다.''' 그가 펠레와 호나우두의 플레이를 모두 봤던 브라질의 레전드 선수인 지쿠는 부상을 입기 전 호나우두를 가리켜 펠레랑 동급이라고 평가했고, 마라도나와 호나우두를 모두 상대해 본 말디니 역시 그 둘을 동등한 레벨로 평가했다. 펠레 역시 자신의 후계자로 호나우두를 인정했으며, 펠레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에 그렇게 질색하던 마라도나 역시 호나우두를 가리켜 "부상만 없었다면 그는 역대 최고 선수가 되었을 것임을 의심치 않고, 세상은 나와 펠레를 잊었을 것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였다. 메날두 시대로 불리는 최근에도 선수 보는 눈이 누구보다도 정확하다고 알려진 무리뉴 감독이 역대 최고 재능에 대한 질문을 받자 "엄밀히 재능과 기술만 보자면 누구도 호나우두를 넘을 수 없다."며 호나우두의 재능을 메날두의 앞에 두고, 라리가 전문가로서 메날두의 플레이를 누구보다 많이 봤을 Sid Lowe도 호나우두를 가리켜 "하려고만 했다면,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하는 등 여러 축구 관계자들로부터 경력과 별개로 그의 재능을 축구 역사 상 최고로 치는 증언과 평가가 많다.
물론 이런 독보적인 재능에 비해 자기 관리 부족으로 공백기를 겪었거나 스스로 전성기를 단축시키며, 상대적으로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활약을 한 기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성실한 자기관리를 통한 지속적인 활약을 중요시하면 호나우두를 메날두보다 아래로 평가하는 것도 분명 일리는 있다.
그러나 호나우두는 어린 나이로 신체적 능력은 좋았으나 경험이 미숙할 때는 당대 라리가 득점왕과 FIFA 올해의 선수상, 월드컵 준우승과 골든볼을 차지했고, 신체적으로 저하된 후이지만 경험이 쌓였을 때는 월드컵 우승과 골든슈, 라리가 우승 등을 차지했다. 최연소 발롱도르 수상 기록은 여전히 그의 몫이며, 미로슬라프 클로제에 의해 월드컵 최다 득점 기록은 깨졌으나, 월드컵 토너먼트 득점 기록은 여전히 호나우두의 우위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부상 전후로 뭔가 선수로서 크게 부족한 악조건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니 그가 선수 시절 타고난 기량을 전부 선보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만약에'라고 가정을 하며 기준에 따라 그를 메날두 위, 펠마와 동급으로 두는 것도 분명 일리가 있으며 무의미한 '가정도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호나우두의 광팬들이 국대 경력으로 메날두를 폄하하는 것처럼 타 팬들 역시 호나우두의 커리어 약점을 들먹이며 그를 폄하하고 호나우두의 팬들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 또한 심각한 우를 범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1] 레알은 호나우두를 영입한 첫 시즌에 86득점 42실점으로 우승을 차지하지만, 다음해 72득점 54실점으로 실망스럽게 4위, 그 다음 시즌은 바르셀로나의 73득점 29실점에 비해 71득점 32득점으로 득실은 별 차이가 없었지만 승점은 차이가 나서 준우승하는데 홈에선 심심찮게 5골 이상 득점했지만 원정에서 부진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다음 시즌은 66골 40실점으로, 5골 이상을 넣은 경기는 한 경기도 없었으며 2위 바르샤의 78골 33실점보다 득실이 나빴는데도 우승에 성공한다.[2] "머리로는 수비수를 어떻게 따돌리는지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호나우두) vs "몸은 느려지는데 머리는 더욱 빨라진다"(긱스)[3] 펠레의 득점 기록상 커리어 하이는 17살, 38경기서 58골을 넣었을 때이며, 20대 중반에 입은 부상 이후에는 그런 미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토스탕은 1970년의 펠레로 그를 평가하지 말라며, 그는 그보다도 훨씬 뛰어났던 선수라고 말했다.[4] 다만 당시 발롱도르는 유럽 국적의 선수 한정이었으며,(이러한 국적제한은 1995년에 최초로 풀리게 된다.) 판바스턴은 호나우두와는 반대로 클럽에 비해 국가대표 활약이 초라했다. 전성기 때 제대로 자신의 활약을 보여준 때는 UEFA 유로 1988뿐이었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포함한 기타 국제 대회에서는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반 바스텐이 자신의 대선배 요한 크루이프발롱도르 숫자로는 동률이더라도 국제대회 활약에서 크게 밀려 그와 비교시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게 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