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트 판니스텔로이
[clearfix]
1. 개요
[image]
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풀네임은 네덜란드어로 '륏헤뤼스 요하너스 마르티뉘스 판니스텔로이(Rutgerus Johannes Martinus van Nistelrooij)'로 무지막지하게 길어서 영어식으로 줄여쓴 'Ruud van Nistelrooy(발음도 영어식으로 루드 반니스텔루이)'로 알려져있다. 그것도 한국어 음절이 길어서인지 귀찮은 해축팬들은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아예 '반 니'로 줄여쓰는 경우가 많았다. 여담이지만 8~90년대에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 캔디중에 반니라고 있다. 지금도 팔리고 있는 제품.[2] 박지성의 팬들이 말장난을 이용해 정말로 박지성에게 이 캔디를 보냈다. 현지에서도 이름이 길기때문에 줄여서 부르는데, 주로 부르는 별명은 van Gol(판 골), van the man(판 더 맨)이 유명하다. 유난히 긴 두상으로 인해 한국 한정으로 말 니스텔로이, 줄여서 '말니' 등도 있다.
과거에는 영어식 발음인 '루드 반 니스텔루이'로 적었으나, 2006년경에 네덜란드식 표준 표기를 적용하여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쓰기로 권고하며 언론이 바뀐 표기를 따랐기 때문에 현재는 바뀐 표기가 정착되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호사가들이 흔히들 일컫는 2000년대 4대 스트라이커의 한 축이었고, 또 그 네임밸류에 전혀 후달리지 않는 득점력을 지녔던,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스트라이커.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레전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총 150골을 넣었으며, 이 150골은 219경기에서 뽑아낸 골로, '''맨유 역사상 가장 높은 득점율'''이라고 한다. 참고로 맨유 통산 득점 1위는 웨인 루니.
대한민국에는 박지성과의 친분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3] 판니스텔로이가 이적한 후 한동안 '''박지성 왕따설'''이라는 우스꽝스런 루머가 국내에 퍼지기도 했을 정도.
2.1.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image]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에서 전전하던 시기에도 이름을 날렸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2001년 맨유에 입단했을 시기였다. 좌측에서 긱스, 우측에서 베컴, 중앙에서 스콜스가 수시로 정교한 롱패스를 날리던 맨유의 스타일과 딱 맞았던 판니스텔로이는 데뷔 시즌부터 23골을 작렬했고[4] 다음 시즌에는 EPL 득점왕이 되었다. 그리고 2001/02, 2002/03, 2004/05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2002/03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 이후의 세시즌은 속히들 말하는 맨유의 암흑기였다. 아스날은 2003/04 시즌 무패 우승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했으며, 주제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첼시는 2004/05, 2005/06 시즌 리그를 재패했다. 허나 맨유는 로이 킨, 데이비드 베컴등 주축 선수들과 퍼거슨 감독간의 불화가 심화되는 등 갈등이 심각했다. 맨유에게 있어선 최악의 시즌이 계속되고 있었으니 판니스텔로이의 이러한 득점력은 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5] 이 시기 챔스에서 판니스텔로이의 득점력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그 절정이던 2002/03 시즌은 단순한 득점왕 정도가 아니었다. 9경기, 681분 출장, 12골을 기록했다. 이 시즌 챔스에서 필리포 인자기, 로이 마카이, 에르난 크레스포, 라울 곤살레스, 얀 콜레르 등이 각기 1,000분 전후로 뛰며 10골에서 8골을 기록했다. 요새로 바꾸면 10/11 시즌 득점왕인 리오넬 메시가 13경기 1050분 출전해서 12골을 넣었다. 아무리 반니에게 있어도 독보적인 '커리어 하이'라지만 이 정도면 거의 탈인간적 수준… 또한 04/05 시즌 조별 라운드 4차전에서는 스파르타 프라하를 상대로 혼자 4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참고로 한 경기에서 4골을 넣은 다른 선수는 다도 프르쇼, 마르코 판바스턴, 필리포 인자기, 안드리 솁첸코,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있다. 5명이 공동 1등이었으나 2012년 리오넬 메시에 의해서 공동 콩등이 되었다. 판니스텔로이 이후 EPL에서 두각을 나타낸 에레디비시 득점왕 출신 스트라이커가 없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이었지만,[6] 루이스 수아레스가 13-14시즌 EPL 득점왕을 차지하며 오랜만에 네덜란드 리그 출신 EPL 득점왕이 탄생했다.
비록 2005/06 시즌에는 나이가 들어 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득점력은 죽지 않아 21골이나 집어넣어 클래스는 영원함을 보여주었다. 허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폼이 떨어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리 없었고, 결국 벤치를 달구는 일이 잦자 자연스레 불화 역시 생겨났다.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도 당시 감독인 마르코 판바스턴과 자신의 주전 기용 문제로 불화를 겪었다. 결국 2005/06 시즌과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난 후 레알 마드리드 CF로 훌쩍 이적했는데, 퍼거슨 감독에게 찍혔기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훈련 도중 충돌이 있었는데, 이 때 반니스텔로이는 호날두에게 "너네 아버지한테 가서 고자질 해라."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반니스텔로이가 지칭한 아버지는 수석코치 였던 카를로스 케이로스 였는데[7] 호날두는 그 아버지를 진짜 자신의 아버지라 알아 듣고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어."[8] 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9] 이 대화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후 판니스텔로이는 엄청 까여야만 했다.[10]
호날두와는 불화가 꽤 심했었던 모양인데, 판니스텔로이는 호날두가 자신에게 패스와 크로스를 안 한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호날두와 도저히 같이 못 뛰겠다고 늘상 투덜댔는데, 리오 퍼디난드의 증언에 따르면은 트레이닝 도중에 판니스텔로이와 호날두가 싸우는건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었고, 한 번은 여느 날 처럼 호날두와 말 다툼을 하던 판니스텔로이가 호날두를 발로 찼는데, 퍼디난드는 어린 호날두를 보호하기 위해 판니스텔로이를 살짝 발로 찼고, 그러자 판니스텔로이는 퍼디난드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판니스텔로이는 결국 다음 경기에 출장 하지 못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레알 마드리드로 쫓겨났다.
2.1.2. 레알 마드리드 CF
[image]
레알 마드리드 이적 초기에는 떨어진 폼 때문에 엄청나게 욕을 먹었으나, 조금씩 폼을 끌어올리더니 결국 이적 첫 시즌에 25골을 터트리며 데뷔 시즌 피치치(득점왕)라는 말도 안되는 득점력을 보여줬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라리가까지 3개 리그 득점왕을 석권한 것. 특히 리그 31라운드부터 '''최종전까지 8경기 10골'''을 때려박으며 최종전까지 승점이 동일했던 FC 바르셀로나와의 승부에 결정타를 꽂은 것이 바로 판니스텔로이였으니. 특히 판니스텔로이는 해당시즌 엘 클라시코에서만 1차전 1골, 2차전 2골을 꽂아넣으며 팀에게 승리에 이어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2007-08 시즌에도 여전한 활약상을 보여주었으며, 이에 2008년 1월에는 계약 기간을 2010년까지 연장시켰다. 비록 3월 달에 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한동안 결장을 하게되지만, 5월 7일 엘클라시코에서 교체 출전하여 복귀전에서 득점을 기록하였다. 그렇게 리그에서 24경기 16골, 모든 대회 총합 33경기 20골을 기록하며 팀의 2연속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비록 후반기에 당한 발목 부상으로 출전 횟수는 줄었으나, 경기력은 여전했다.
2008-09 시즌은 부상으로 일찍 접어야했던 시즌이다. 2008년 11월, 판니스텔로이는 관절 내시경 수술을 통해 오른쪽 무릎의 반월상연골이 부분적으로 찢어져, 이를 복구하는 두 번째 수술 후 회복하는데 6달에서 9달 걸릴 것이라는 진단을 받아 잔여 경기에 나서지 못한다. 결국 후반기 팀의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며, 고작 12경기 10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이후 2009년 8월 24일, 2009-10 시즌 리가 개막전 헤레스와의 경기에서 80분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교체로 들어가 시즌 첫 라 리가 경기를 치렀다. 81분에 카림 벤제마의 골을 어시스트했고, 이어서 88분에는 자신도 득점했다. 그러나, 득점 도중 허벅지 부상을 당했고, 이후 6주간의 결장이 확정되었다. 결국 팀 외 전력으로 분류되어 이후 기회를 잡지 못했으며, 자신이 레알의 구상에서 멀어진 것을 안 반니스텔로이는 독일 함부르크로의 이적을 감행한다.
2.1.3. 이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UEFA 유로 2008 이후 은퇴했으나,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하고 싶다는 이유로 2009/10 겨울 이적시장 때 주전이 보장 되는 함부르크 SV 로 이적했다. 하지만 결국 2010년 월드컵에는 불참.
2011년 함부르크 SV와 계약이 해지되어 자유계약선수가 된 그를 말라가 CF가 영입했다. 2012년 여름에 조용형과 같이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을듯 했지만... 결국 말라가에서 현역 은퇴 선언을 한다. 링크[11]
2.2. 국가대표 경력
[image]
클럽 뿐만 아니라 대표팀에서의 활약도 상당하다. 판니스텔로이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선수들과 비교해봐도 반니가 더 우위라는게 중론. 로이 마카이나 너무 빨리 좆망한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에 비하여도 꿀리지 않는다. 클라위버르트의 전성기 시절 당시 반 니, 마카이를 포함해 EPL득점왕 출신인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 등 기라성의 스트라이커들은 클루이베르트 한명에게 전부 묻혔다. 그 중 클라이막스는 UEFA 유로 2000의 득점왕. 근데 판니스텔로이의 전성기는 클라위버르트의 전성기와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묻혔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애매한게 클라위버르트는 UEFA 유로 2000 이후 하향세를 겪게 되는 반면에 판니스텔로이의 전성기는 맨유에 이적한 2001-02 시즌부터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UEFA 유로 2004 본선에서는 클라위버르트를 제치고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 자리를 확보하면서 '''총 4골을 넣고 대회 득점 공동 2위에 오르는 활약을 선보인다.'''
재밌는 점은 클라위버르트와 판니스텔로이는 1976년 7월 1일로 둘 다 생년월일이 같다는 거다. 그런데 판니스텔로이에 비하여 젊을 때부터 천재로 불렸던 클라위버르트는 너무 빨리 몰락하고, 반대로 클라위버르트가 국대에 뽑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한참 멀었던 판니스텔로이가 클라위버르트보다 더 성장한 것은 아이러니.
다만 아쉽게도 판니스텔로이는 그 명성과 나름 긴 커리어에 비해 유독 FIFA 월드컵과는 인연이 거의 없던 비운의 선수들 중 하나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에는 아직 여러 유망주 중 하나 뿐이였던 관계로 뽑히지 않아서 월드컵 직후에나 국가대표 데뷔를 했고, 클럽에서 그의 최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시기에는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아일랜드를 넘지 못하고 '''최종예선에서 탈락을 한 관계로 아예 팀 자체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12] .''' 이후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드디어 대망의 월드컵 데뷔를 하게 되어 전경기에 선발로 나와 죽음의 조였던 조별예선에서 코트디부아르 상대로 골을 넣는 등의 활약을 했으나, 이어진 16강에서 다시 만나게 된 포르투갈 상대로 팀이 패배하여 조기탈락을 한 관계로 총 4경기 1골이라는 다소 아쉬운 성적으로 대회를 마무리 하게 됐다. 4년 후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 당시에는 함부르크에서 커리어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라 최종적으로 대표팀에 뽑히지 않았던 관계로 결국엔 독일 월드컵이 그의 선수 커리어 중 직접 뛴 유일한 월드컵 대회가 되었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PSV 에인트호번 유소년팀 (네덜란드)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일하다가 신임 히딩크 감독의 지명에 따라 반니스텔로이가 네덜란드 국가대표 코치로 선임되며 처음 국가대표 코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
2016년 6월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직을 사퇴한 후 PSV의 유소년 팀 감독으로 임명될 것임이 공식 발표 되었다. 그 밖에 2군팀의 스트라이커도 지도 한다고 한다.
여담으로, 함부르크에서 뛰던 시절에 손흥민이 빅리그에서 잘 적응하도록 여러가지로 도와주기도 했다. 지도자 커리어도 좋은 모양이다.
4. 플레이 스타일
완벽한 위치 선정,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결정력, 군더더기 없는 퍼스트 터치, 장신을 활용한 제공권 장악 능력에 키에 비해 순간적인 돌파 속도가 빨라 전성기에는 일단 페널티박스 안으로 공을 넣어주면 양발과 머리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골을 넣어주는,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선수였다.
에레디비시에 시절 십자인대를 다친 이후로는 자제하게 된 플레이지만 필요하다면 상대 수비진을 작살내는 폭발적인 드리블도 할 줄 알았다. 맨유 시절 보여준 일명 말달리자 골이 유명.영상 은근히 더티플레이에도 능해 상대 선수를 끊임없이 괴롭혀 멘탈을 흔들어 놓는 능력도 상당했다. 오죽 했으면..
누가보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퍼거슨은 자서전에서 판니스텔로이를 '''순도 100% 포처'''로 평가했다.# 창조적 플레이도 가능한 완성형 포워드가 아니고 후방에서부터 볼 배급이 잘 이루어져야만 활약하는 인자기와 비슷한 유형의 선수였다. 물론 인자기보다는 신체조건과 기술이 뛰어나 한결 힘있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둘 다 피니셔 타입의 공격수였다. 처음 영입했을때는 활동반경이 더 넒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영입하고 나니 그런 타입이 아니었고 피지컬도 별로였다고. 이는 판니스텔로이가 데뷔 시즌부터 대활약을 해왔음에도 퍼거슨이 바로 다음 시즌 디에고 포를란을 영입한 이유이기도 하다. 포를란은 판니스텔로이와 달리 활동폭과 연계력, 드리블이 준수하고[13] 박스 밖 중거리슛이 위협적인 선수였기 때문. 하지만 당시 맨유의 선수 구성으로는 박스 안에서 더 파괴적인 판니스텔로이가 더 적합한 선수였으며 포를란은 부진했다. 박스 밖에서의 적극적인 움직임, 수비 가담 등은 본인이 내킬 때만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렇게 제한적인 선수였지만 데이비드 베컴과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같은 크로스, 롱패스의 달인들이 늘어서 있었기에 전성기 신체능력이 더해져 커리어 최고의 활약을 할 수 있었다.
골 욕심이 매우 강했던 선수다. 퍼거슨에 의하면 판니스텔로이는 박스 안에서의 움직임이 천재적이었고, 경기가 시작되면 본인이 어떻게든 득점을 하는 것에 집중했으며, 승패보다 자기가 득점을 했는지 안했는지를 중요시 여겼다고 한다. 원래 길게 드리블을 하지 않는 스타일인데 풀럼전 해트트릭을 기록할때 넣은 말달리자 골은 한참 물이 올라있던 시기에 경기 첫골도 넣은 상태라 골 욕심과 포텐셜이 터져서 나온 골이었다. 호날두와의 불화도 호날두가 당시 혼자우도 혹은 춤날두라고 불릴 정도로 템포를 끊는 지나친 드리블을 해서 크로스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골을 넣는게 축구에서 제일 중요했던 반니스텔루이는 호날두에 불만이 많았다. "쟤는 절대 패스를 안해" 하면서 늘 불평했다고 한다.[14][15]
레알로 이적한 이후에 말년부터는 연계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유로 08이 그 백미. 아무래도 이 때문에 몇몇 해축팬들은 그가 연계도 곧잘 했었던 선수로 안다. 그러나 정말 연계를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던 선수까진 아니었고, 타겟맨으로써 쓸만한 연계능력을 가진 선수 정도로 보는것이 알맞다.
4.1. vs 클라위버르트
[image]
위에서 언급한대로 판니스텔로이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와 많이 비교가 되었다. 나이는 물론 생일, 체격까지 같다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 후자는 그야말로 초천재의 엘리트 길을 걸어온 반면 전자는 말그대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인생여정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클라위버르트는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명문 중의 명문 AFC 아약스 유스 출신[16] 으로 18살의 나이에 데뷔해 25게임 출장 18골이라는 괴물같은 활약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밀란을 상대로 1-0승리를 결정짓는 골을 넣은 반면, 판니스텔로이는 그 때 FC 덴 보쉬 출신으로 18살에 2부리그 팀을 상대로 15게임 출장 3골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참고로 덴 보쉬는 60년 가까운 클럽 역사상 1부리그에 올라온게 겨우 6번. 어쩌다 올라와도 강등 당하는 팀. 판니스텔로이가 있던 4년간 한 번도 승격한 적 없다.
뭐, 나이를 감안하면 판니스텔로이도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게다가 클라위버르트는 다음 해에도 15골을 넣었지만, 판니스텔로이는 역시 2부리그 상대로 21게임 출장 고작 2골… 또한 클루이베르트는 이 해 챔피언스리그에서도 8경기 출장 5골[17] 이라는 우수한 기록을 남겼다. 한마디로 축구신동 클라위버르트는 만 19세에 벌써 세계 최고의 축구스타 중 한명이였다는 말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때만 해도 클라위버르트는 22살의 나이에 벌써 네덜란드 국대의 주전 골잡이였지만, 판니스텔로이는 그냥 집에서 TV로 보아야만 했다. 이후 클라위버르트는 아약스에서 AC 밀란[18] 과 FC 바르셀로나라는 그야말로 명문클럽들만 차근차근 밟아갔지만, 판니스텔로이는 SC 헤이렌베인과 PSV 에인트호번을 거치고서야 맨유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위버르트는 그 기량이 너무 빨리 시들었다. 물론 FC 바르셀로나에서 리그에서만 90골을 넣은 클라위버르트가 실패한 선수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클라위버르트도 전성기 때는 분명 월드 클래스 소리를 들을 만한 선수였다. 그러나 바르샤에서 03-04 시즌부터 골골대다 결국 04-05 시즌 사무엘 에투의 영입으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로 이적 후 빠르게 몰락한 것과 대조적으로, 판니스텔로이는 07-08 시즌까지도 세계 최고 레벨의 팀에서 좋은 폼을 유지했다.
같은 날 태어난 천재가 있었지만, 최후에 웃은 자는 판니스텔루이였던 셈. 출장/골로 본 최종 커리어는, 클루이베르트는 리그 343경기 149골, 국제대회 79경기 40골, 판니스텔로이는 리그 449경기 249골, 국제대회 70경기 35골. 보다시피 리그 커리어에서 100골이나 차이가 나며, 출장경기수도 100경기 이상 차이 난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PSV 에인트호번 (1998~2001)
- 에레디비시: 1999-2000, 2000-01
- 요한 크루이프 스할: 1998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1~2006)
- 프리미어 리그: 2002-03
- FA컵: 2003-04
- 풋볼 리그 컵: 2005-06
- FA 커뮤니티 실드: 2003
- 레알 마드리드 CF (2006~2010)
- 라리가: 2006-07, 2007-08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8
5.2. 개인 수상
- UEFA 올해의 공격수: 2002-03
- UEFA 올해의 팀: 2003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4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2001-02, 2002-03, 2004-05
-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2001-02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98-99, 1999-2000
- 에레디비시 득점왕: 1998-99, 1999-2000
- 라리가 득점왕: 2006-07
- PFA 올해의 선수: 2001-02
- PFA 팬 선정 올해의 선수: 2001-02
- PFA 올해의 팀: 2001-02, 2003-04
- 프리미어 리그 시즌의 선수: 2002-03
-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2002-03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2001년 12월, 2002년 2월, 2003년 4월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골: 2003년 3월
- FA컵 득점왕: 2003-04
- FA컵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04
- FIFA 100: 2004
- 맷 버스비 경 올해의 선수: 2001-02, 2002-03
- BBC 이달의 골: 2003년 3월
- ESM 올해의 팀: 2001-02
- lFFHS 세계 최고 득점자: 2002
- ESPN 2000년대 베스트 XI: 2009
5.3. 출전 기록
6. 판니스텔로이에 대한 말, 말, 말
[image]
'''그는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다. 그는 어떤 패스든 골로 연결시킬 수 있다.'''
'''라이언 긱스'''
'''나는 항상 같은 포지션인 판니스텔로이를 동경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스타였다.'''
'''라다멜 팔카오'''
'''내가 봤던 공격수 중 가장 파괴적인 피니셔였다.'''
'''리오 퍼디난드'''
'''판니스텔로이가 유나이티드에서 이뤘던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같은 네덜란드인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웠다.'''
'''데일리 블린트'''
'''판니스텔로이의 기록을 봐라, 그는 엄청난 공격수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던 역대 공격수 중 최고다.'''
'''알렉스 퍼거슨'''
'''마치 코브라같다. 볼에 닿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든 쓴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인자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언페어. 수비수를 질리게 하는 것이 인자기라면, 짜증나게 만드는 것이 판니스텔로이다. 살짝 가르쳐주자면 폭력과 구분 가지 않을 정도의 플레이도 있다. 물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교묘하지만.'''
'''크리스티안 키부'''
'''원톱 포메이션에 있어 판니스텔로이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다.'''
'''주제 무리뉴'''
'''저와 뛰었던 선수 중 가장 마무리 능력이 최고였던 선수는 뤼트 판니스텔로이'''
'''박지성'''
7. 여담
[image]
▲ 대선배 뤼트 판니스텔로이와 대화 중인 손흥민.
2010년부터는 함부르크에 있을 때 손흥민과 친밀한 관계를 보여서 눈길을 끌었다. 여러가지로 손흥민에게 영향을 주는 게 많았던 것 같다. 그가 말하길, "나는 과거 현재의 손흥민이 받고 있는 도움을 받지 못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도움을 손흥민에게는 전해주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이로서 한국인 한정 까방권 획득을 하기도 했다.
박지성 및 한국 선수와 인연이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좋은 이미지로 각인된 선수인데 사실 심판 안보는 데서 지저분한 파울을 서슴없이 하며 다이빙, 오버액션에도 능한 치터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것도 어지간한 치터 수준이 아니라 '''내추럴 본 치터'''라고 까이기도 한다. 파트리크 비에라는 자서전에서 전성기 때 앙숙인 로이 킨도 별로 까지 않았지만 판니스텔로이 만큼은 원자가 되도록 깠다.
박지성을 위해 반칙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더욱 호감도가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박지성을 위해서 했다기 보다도 가격을 당한 일본선수가 판니스텔로이와 경합중에 목쪽을 긁어 이에 대해 복수를 한것이다. 영상은 이경규가 등장하는 MBC 예능 프로그램인데 의도적으로 편집자가 판니스텔로이가 박지성을 위해 복수극을 했다는 흥미로운 스토리를 위해 편집한 것인지, 아니면 판니스텔로이가 일본 선수와 벌인 주작인지는 모른다.
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에 등장하는 NPC들 중 반리, 스탠, 루이가 있는데 이 셋의 이름을 조합하면... 게다가 과거에 셋이 서로 친했을 시절에 셋이서 축구화를 만들었다고 유물 이벤트에서 밝혀졌다.
[1] Rutgerus Johannes Martinus "Ruud" van Nistelrooij ˈryt fɑn ˈnɪstəlroːi̯[2] 2013년 시점에서 팔리는 반니는 초콜릿이 들어간 캐러멜이지만, 초기에는 반투명 캔디였다.[3] 박지성의 맨유 입단 당시에 같은 PSV 출신이기에 둘이 친해질 거라고 예상한 팬들이 많았다. 사실 박지성의 맨유 입단 이전에도 이미 맨유 소속이었던 반니스텔로이가 PSV의 훈련에 가끔씩 참가한 적이 있기 때문에 둘은 이미 구면이었다.[4] EPL 개막 후 8경기 연속 득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5] 게다가 이 시기는 퍼거슨 경이 대륙 축구를 수용하던 시기라 중원 강화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판니스텔로이가 있었기 때문에 공격수는 한 명만 두고 중원을 강화한다는 복안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킹 루드' 체제로 빗대기도.[6] 판니스텔로이 이후 네덜란드를 제패한 마테야 케즈만은 EPL에서 완벽하게 망했고, 디르크 카윗은 스타일을 바꾸고 나서야 정착할 수 있었다.[7] 같은 포르투갈 국적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유독 친했었고, 호날두가 케이로스를 잘 따랐었기 때문에 비꼰 것이다.[8] 당시 호날두는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9] 이 부분은 사람마다 증언이 다르다. 대부분의 목격자들이 호날두가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고 이야기했으나, 퍼거슨 감독의 자서전에는 호날두가 반니스텔로이에게 화가 나서 덤벼들었다고 쓰여있다.[10] 물론 후에 "호날두는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라는 드립을 쳤었던 주제 무리뉴가 이 당시 판니스텔로이보다 훨씬 많이 까였다.[11] 4골에 그친 성적 탓이 있었던듯.[12] 다만 이 때는 판니스텔로이도 키프로스, 에스토니아와 안도라 등 약체 팀 상대로만 양학을 하고 가장 중요한 상대였던 포르투갈과 아일랜드 상대로는 팀과 같이 삽질을 하고 침묵했다는 점에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13] 물론, 전형적인 타겟맨, 포쳐 타입이라 잘 부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판 니스텔로이 역시 테크닉은 훌륭하다. 이를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는 유로 2008 프랑스전에서 판니 - 로벤 - 판 페르시의 마무리로 이어지는 득점에서 판니는 마르세유턴 패스로 왼쪽 측면을 하프라인에서부터 파고 드는 로벤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연결시켰다. 맨유 시절에도 여러 고난도 개인기를 성공시키기도 했다.[14] 물론 호날두->판니스텔로이 합작 골들도 은근히 많았고 초반에는 사이가 괜찮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날두의 플레이스타일뿐만 아니라 맨유 전략 내에서 호날두의 중요도가 올라가면서 시기심도 느끼지 않았나 싶다. 말년에 레알에서 같이 만난 것도 있고 현재 판니스텔로이는 호날두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세계최고 수준의 선수라고 칭찬을 했다.[15] 근데 다른 맨유 선수들의 증언을 보면 반니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호날두가 너무 혼자 플레이하는거에 대해서 한마디씩 했다고 한다. 잠재력이 뛰어난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인 플레이가 팀의 승리에 도움이 안될때가 많았고 호날두의 잠재성을 오히려 막고 있었다고. 퍼거슨도 호날두한테 팀플레이를 하라고 많이 혼냈다고 하는데 그럴때마다 많이 쫄아있었다는듯.[16] 지금에 와서는 아약스가 그저 네덜란드에서나 공좀 차는 클럽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90년대 초의 아약스는 UEFA컵 우승(90-91), 챔피언스 리그 우승(94-95)을 차지한, 유럽 최고의 명문팀이었다. 특히 아약스 유스는 당시로서는 유럽 제일의 유스 시스템을 갖춘 팀이라고 평가받던 시절이었다.[17] 이게 클라위버르트가 프로 데뷔한지 두번째 시즌의 기록이다.[18] AC 밀란에서는 26경기 7골을 기록한다. 결국 조지 웨아, 로베르토 바조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만다.[19] FA컵 + 리그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