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FC 우니온 베를린
1. 개요
1.FC 우니온 베를린(1. FC Union Berlin)[7] 은 베를린을 연고로 하는 독일의 축구 클럽이다.
현재 수많은 베를린 축구 클럽들 중 헤르타 BSC 베를린에 이은 두 번째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헤르타가 서베를린을 대표한다면 독일 통일 이후로는 이 팀이 동베를린 대표 격에 해당하는 클럽이다. 10년 넘게 승격도, 강등도 없이 중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2부리그의 터줏대감이었다가, 2018-19 시즌 3위를 차지, 1부리그 16위 슈투트가르트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전에서 승리하여 창단 첫 1부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
2. 역사
1906년 FC 올림피아 06 오베쇠네바이데(FC Olympia 06 Oberschöneweide)라는 이름으로 창단 된뒤 1부리그에서 잘나가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이 축구클럽들을 해산시켜서 해산되었다.
2.1. 동독 시절
1946년 SG 오버쇠네바이데(SG Oberschöneweide)라는 이름으로 다시 창단되었다. 그리고 1949-50시즌 하네 조베크감독과 함께 오베르리가 베를린에서 2위를 기록하며 전국대회 참가자격을 부여받게 되지만 냉전시대의 동독지역 클럽이 전국대회에 나가는걸 소련이 거부했고, 하네 조베크이 대부분의 선수, 코치진을 데리고 서쪽으로 도주해 SC 우니온 06 베를린이라는 이름의 클럽을 창단해버렸고 오버쇠네바이데는 그대로 동독에 남았지만 주축 선수들을 모두 잃어 초약체가 되었다.[8] 하지만 동독 정치가들은 DDR 오버리가에 동베를린팀은 2팀이 있어야한다며 강등을 누락시켜 1부리그에 남아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에 동독 축구협회에서 축구 수준을 상승시킨다는 이유로 모든 스포츠 클럽에서 축구부를 독립된 구단으로 전환시키고 거기에 축구팀을 기업이 후원하는 형태로 바꿔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며 우니온은 그러한 형태중 하나인 (BSG)[9] 로 강제로 재창단되었다.[10] BSG 모터 오버쇠네바이데(BSG Motor Oberschöneweide), SC 모터 베를린, TSC 오버쇠네바이데 등 수많은 명칭변경을 거쳤고, 잦은 재창단을 겪다보니 자연스럽게 팬층은 얕아졌고, 같은 동베를린을 연고로 하던 BFC 디나모와 ASK 포어베르츠 베를린으로 선수들이 떠나가 자연스레 2부리그로 강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최종적으로 1966년에 현재의 이름인 1. FC 우니온 베를린으로 클럽명을 정하고 창단되었다.[11]
1965-66시즌 창단과 동시에 2부리그에서 우승하며 다시 오버리가로 승격했다. 하지만 1부리그에 베를린 클럽은 2개만 있어야 한다는 동독 권력층의 반발이 있었고,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도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 회장 헤르베르트 바른케가 노동자를 대표하는 클럽을 만들것을 요구하며 1부리그에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부리그에서의 첫시즌 생각외로 선전하며 6위를 달성, UEFA 인터토토컵에 진출하며 클럽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에 진출했다. 거기다 1968년에는 FC 카를 차이스 예나를 상대로 승리하며 FDGB-포칼 우승까지 달성했다. 하지만 프라하의 봄 이후 유럽 동구권 클럽들이 유럽 대항전 진출권을 박탈당하며 UEFA 컵 위너스컵에 참가하지 못했고, 리그에서도 성적이 저조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며 슈타지와 군대간 권력싸움에서 슈타지가 이겼다. 따라서 군대에서 후원하던 ASK 포어베르츠 베를린이 연고지가 프랑크푸르트 (오데르)로 옮겨졌고, 베를린 연고팀은 BFC 디나모와 우니온 두팀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3개로 분리되어있던 베를린의 유소년 훈련장중 다수가 BFC 디나모에게 돌아갔고, 우니온은 더욱 성적이 저조해져 강등까지 당하게 된다. 그러다 1976-77시즌 승격과 동시에 하인츠 베르너감독을 선임했고, 4만5천명의 관중앞에서 BFC 디나모를 1대0으로 잡아냈고, 이후 2차전에서도 1대0으로 잡아냈다. 그러자 당시 슈타지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우니온 팬층으로 몰렸고, 평균 17,308명이 경기마다 찾아왔다.[12] 이렇게 정부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우니온으로 몰리자 슈타지의 특별 관찰을 받게 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그렇게 많은 팬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1979-80시즌 강등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BFC 디나모를 이겨보지 못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승격과 강등을 반복하다 1985-86시즌 오버리가에서 7위를 달성, UEFA 인터토토컵에 다시 진출했고, FDGB-포칼에서 FC 마그데부르크, SG 디나모 드레스덴같은 팀들을 누르고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승전에서 1. FC 로코모티베 라이프치히에게 5대1로 패했다. 그리고 다음시즌 인터토토컵에서 FC 바이어 05 위어딩겐, FC 로잔 스포르 스탕다르 리에주와 한 조가되어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하지만 리그에선 다시 강등권경쟁을 했고, 1988-89시즌 6번째 2부리그 강등을 하게된다. 그런데 강등된지 얼마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2.2. 독일 재통일 이후
1990년 독일이 통일된 뒤 3부리그인 NOFV-오버리가로 배정된 우니온은 다른 동독 출신 클럽들이 그랬듯 재정적 위기로 인해 라이선스를 따지 못해서 1993년과 1994년에 3부리그 우승을 했지만 상위 리그로의 승격이 거부되고 만다. 하지만 계속된 노력끝에 불가리아의 축구감독 게오르기 바실리에프(Georgi Vasilev)휘하에서 2000-01 시즌 새롭게 3부리그로 바뀐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에서 우승해 2부리그로 승격했고, 그시즌 포칼컵 결승까지 올라가며 베를린의 No.2 클럽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결과는 아쉽게도 FC 샬케 04의 2대0 승리. 하지만 2004-05 시즌에 2부리그에서 강등되었고, 2005-06 시즌엔 4부 리그까지 강등되었지만 바로 우승하고 2008-09시즌 3. 리가의 창립멤버에 포함, 3. 리가에서 우승한 뒤 이후 2018-19시즌까지 10시즌간 2.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했다.
2018-19시즌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VfB 슈투트가르트를 제치고 클럽 최초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
3. 역대 시즌
3.1. 2018-19 시즌
주전 센터백이었던 토니 라이스트너를 떠나보냈다.
독일 전통의 명문이었던 함부르크와 승격을 경쟁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즌 말미로 갈 수록 함부르크의 상태가 심각해지면서 역전할 기회가 있었으나 번번히 놓쳤고 파더보른에게 추격을 허용하고 만다. 3경기를 앞두고 함부르크에게 2대 0으로 승리하면서 함부르크를 드디어 제쳤지만 같은 날 파더보른 역시 승리하면서 다이렉트 승격권인 2위 등극에는 실패하고 만다. 다만 아직 2위 파더보른과 4위 함부르크간 맞대결이 남아 있어서 여전히 2위로의 상승 기회는 있다.
37라운드까지 치루면서 3위는 확정을 지었고 2위 파더보른과 승점 1점차가 나면서 다이렉트 승격의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 38라운드에서 파더보른이 드레스덴에게 3대 1로 완패를 했음에도 우니온은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골득실차로 2위 등극에 실패했고 결국 분데스리가 16위 VfB 슈투트가르트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승강 플레이오프 1차전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 원정에서 2-2로 비기며 원정 다득점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2차전 홈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면서 창단 첫 분데스리가 승격에 성공했다. 동베를린 출신 클럽 중 최초로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팀이 되었고, 동독 출신 5번째 분데스리가 클럽이자[13] 6번째 승강 플레이오프 출신 분데스리가 클럽[14] 이라는 타이틀을 따냈다.
3.2. 2019-20 시즌
- 분데스리가: 11위
- DFB-포칼: 8강 VS 바이어 04 레버쿠젠
3.3. 2020-21 시즌
4. 서포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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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니온의 서포터즈는 노동자들이 많은데 이는 우니온의 연고지인 쾨페니크의 오버쇠네바이데가 19세기 말 산업혁명으로 크게 성장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2부 리그라지만 1부 팀이 18개뿐이고 절대적으로 구 서독 팀들이 주도하고 있는 독일에서 이렇게 성공적으로 구단세를 유지하고 있는 구 동독 팀은 우니온과 디나모 드레스덴, FC 에르츠게비르게 아우에 정도이다. RB 라이프치히는 통일 이후에서야 사실상 새로 창단된 클럽이어서 예외 중의 예외에 해당된다. 게다가 이제는 창단 최초로 1부 리그에도 진출했다.
현재 구장인 슈타디온 안 데어 알텐 푀르스테라이의 2008년 6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약 13개월가량의 리노베이션 기간동안 구단의 서포터들이 함께 건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5. 라이벌
- BFC 디나모 - 동독시절 같은 동베를린을 연고로 하던 BFC 디나모와 라이벌리가 있었는데, 이 디나모가 슈타지의 지원을 받으며 자연스레 우니온의 수준급 선수들을 강제로 데려갔고, 그대신 BFC에서 뛰다 전성기가 지난 선수들을 받았다. 일련의 일들이 이어지자 디나모 베를린에 대한 반감이 심해졌고, 우니온은 반체제 클럽으로 비춰졌다. 통일이후 BFC 디나모는 동독 시절 대놓고 정부지원을 받았던 과거가 흑역사가 되어 통일 이후 팬 베이스를 잃고 낙오된 반면, 디나모의 조작에 반대하며 정치색이 훨씬 옅은 노동자의 팀이었던 우니온은 디나모 등 다른 동베를린 팀의 서포터들을 흡수, 성공적으로 동베를린의 메인 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동독시절부터 동베를린의 팬수는 디나모보다 우니온이 더 많았다.
- SC 우니온 06 베를린 - 과거 우니온 오버쇠네바이데에서 떨어져나간 클럽. 1990년 합병논의도 나왔으나 팬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후 1995년 자신들이 우니온 오버쇠네바이데의 계승 클럽이니 슈타디온 안 데어 알텐 푀르스테라이를 사용할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다 거부당했고, 이후 갈등이 생겼다. 하지만 만날 일은 없어보인다...
6. 마스코트
7. 응원가
7.1. Eisern Union
8. 여담
- 토니 크로스의 동생인 펠릭스 크로스가 뛰었던 팀이기도 하다. 2019-20시즌이 끝나고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로 이적했다.
- 독일의 프로축구팀 중에서 골송이 없는 얼마 안되는 팀 중 하나이며, 1. 분데스리가 팀들 중에서는 유일하다.
9. 1군 스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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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명 선수
- 마르코 레머
- 네벤 수보티치
- 막스 크루제
- 크리스티안 겐트너
- 펠릭스 크로스
- 토르스텐 마투슈카
- 로베르트 후트(과거 우니온 유스 소속)
- 미하엘 파렌센
- 라파우 기키에비츠
- 세바스티안 안데르손
- 외르크 하인리히
- 슈테펜 바움가르트
- 지몬 테로데
- 토니 라이스트너
- 스티븐 스크십스키
- 제바스티안 폴터
- 우치다 아쓰토
- 파트리크 콜만
- 크리스토프 멘츠
- 크리스토퍼 크비링
[1] 영어로 The Iron Ones[2] 베를린을 구성하는 12개 자치구 중 한 곳으로, 구 동독 지역에 해당된다.[3] 독일어로 '''강철 대오'''를 의미한다.[4]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5]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6]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7] 에르스테 에프체 우니온 베를린이라고 읽는다.[8]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서베를린으로 도주한 SC 우니온 06 베를린은 서베를린에 고립되어 오늘날에는 8~10부리그 언저리에 머무는 초약체가 되어버렸다.[9] 어떤 기업이 후원하는 형태의 구단[10] 이전까지 팀의 상징색은 파랑+하양이었으나 이때부터 현재의 빨강 하양으로 바뀌었다.[11] 그와중에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우니온 오버쇠네바이데를 유지하려 했으나 계속해서 선수들이 우니온으로 강제이적당하며 1972년 끝내 해산되었다.[12] 이는 SG 디나모 드레스덴에 이은 2번째로 많은 수다.[13] 나머지 네 팀은 SG 디나모 드레스덴, FC 한자 로스토크, VfB 라이프치히, FC 에네르기 코트부스이다.[14] 나머지 5팀은 FC 바이어 05 위어딩엔, 1. FC 자르브뤼켄,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 FC 뉘른베르크,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