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샤
1. 개요
Forgotten Weapons의 사격, 역사, 전술 소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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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RG M1915
프랑스군이 제1차 세계대전 중반(1915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자동소총이다.
프랑스군이 붙인 정식 명칭은 Fusil-Mitrailleur Mle 1915 CSRG이나, 보통 Mle 1915, CSRG M1915, 간단하게 쇼샤로 불린다. 기관총의 이름은 개발을 주도한 루이 쇼샤에서 따왔다. CSRG의 의미는 개발자 쇼샤, 쉬테르, 리베이욜의 3명과 프랑스의 생산공장 이름이었던 글라디에토(Gladiator)의 이니셜이다.
2. 역사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여느 열강들인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 다를 바 없이 길기만 한 르벨 M1886, 베르티에등과 같은 볼트액션 소총 중심의 편제로 전열보병 개념에서 나아지지 못한 보병사단 편제를 구성하였다. 이는 곧 벌어진 참호전에서 한계를 드러냈고, 프랑스 군부는 당시의 맥심 기관총같은 완전자동사격이 가능한 기관총이 참호 돌파시 보병사단과 함께 움직인다면 이 화력부족을 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이미 호치키스 M1909이라는 우수한 지원화기가 있었지만, 현재의 인식과는 다르게 당시 이 총은 보병을 지원하는 기관총 취급을 못 받았고, 차량용이나 항공기용 및 기병용으로 사용되었던 데다 무엇보다도 '''민간인과 민간 기업'''이 개발한 물건이라 그에 얽힌 상업적으로 얽힌 여러 문제들 때문에 군부는 이 물건을 별로 좋아하질 않았다.[2] 따라서 루이 쇼샤 육군 대령의 주도 하에 군이 개발한 신형 소총을 도입하기로 하고 이에 개발된 것이 바로 CSRG M1915 자동소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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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자체는 1907년부터 진행되어 1911년 시제품이 군에 납품되었고 1913년에는 이 시제품이 시험적으로 배치되어 운용 시험을 치르는 등 천천히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1차대전의 발발로 급히 무기가 필요했던 탓에 다급하게 시제품의 설계를 일부 변형하여 양산, 배치되었다. 시제품은 마치 Vz.26처럼 탄창을 위에서 꽂는 방식이었으나 양산형에서는 탄창삽입구의 위치가 아래쪽으로 옮겨졌다.
자동소총이라는 명칭이 다소 생소할 수 있다. 당시에는 경기관총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3] 보병을 따라다니며 지원사격을 퍼부을 수 있는 물건을 원했는데, 독특하게도 엎드려서 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돌격하면서 사격해야 했기 때문에 지향사격을 하기 쉽도록 설계되었다. 보병대열을 따라다니면서 사격하라는 의미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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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의 서서쏴 자세를 시연하고 있는 루마니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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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돌격사격의 개념은 쇠컵을 개머리판에다 끼운 뒤 돌격하면서 연발로 쏘는 방식이었다. 백병전 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사수 입장에선 쏠 때마다 골때리는 반동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위 그림과 같은 자세로 일반 소총수와 함께 참호 사이를 뛰어다니며 사격하게 만들어진 물건이다. 사수와 부사수로 구성된 두 명의 자동소총수가 한명은 사격을 가하고 한명은 탄창을 갈아주는 역할을 했으며, 때문에 탄창 측면에 구멍을 뚫어놓아 부사수가 잔탄을 쉽게 확인하고 재장전을 할 수 있도록 했다.[4] 미국 또한 이 사상을 받아들여[5] 이후 B.A.R을 제작한다. 이 물건은 이쪽 용도로만 사용하기 위해 심지어 양각대도 달아놓지 않았다.
하지만 자동소총의 개발 의도와 달리 서서 지항사격을 해 봤자 탄약만 낭비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의탁 자세에서 안정적인 지원사격을 가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다.[6] 보병들은 곧 끈끈하고 지저분한 진흙탕에 엎드려 기관총을 거치하여 사격하게 되었고, 기존의 기병용 경량 기관총이 이쪽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경기관총으로 운용방식이 변하게 된다.
수십만 정이 생산되어 프랑스군 이외에도 미군 등의 다른 나라에서도 파생형인 30-06탄을 사용하는 M1918 등을 사용했고 쓸 만한 경기관총이 MG15nA나 MG08의 경기관총 파생형인 MG08/15 나 MG08/18 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수량이 부족한 독일에서도 노획한 쇼샤를 즐겨 사용했으나, 쇼사는 내재된 여러 문제들 때문에 1차대전 후 1922년 생산이 중단되고야 만다. 남은 물건들은 적백내전에 뿌려지거나, 폴란드가 마우저탄을 사용하는 버전으로 개량하여 사가기도 하는 등 일부 국가에 팔려나갔다. 이후 BAR의 구조를 기초로 한 FM 24/29 경기관총이 생산되면서 프랑스에서는 완전히 2선급 무기로 돌려지게 된다. 이 물건들은 2차대전 말까지 살아남아 간간히 사용이 목격되곤 했다고 한다. 후방부대나 알제리 등의 식민지 주둔군, 그리고 레지스탕스 등에서 꾸준히 사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게릴라들이 사용했다는 쇼샤가 베오그라드 군사박물관 같은 곳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때도 시리아군이 운용한 기록이 있다.
소련도 제정 러시아에 공여되거나 적백내전 때 뿌려진 쇼사를 한동안 운용하다 탄약 호환 문제로 퇴역시켰는데, 독소전 발발 후 예비물자로 보관되어 있는 외국제 총기를 조사해보니 673정의 작동 가능한 쇼샤가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Forgotten Weapons의 쇼샤 탄창을 장착한 베르티에 M1907/15 리뷰 영상
Forgotten Weapons의 쇼샤 탄창을 장착한 베르티에 M1907/15 사격 영상
한편 당시 프랑스군의 제식 소총이었던 베르티에 소총 중 일부는 쇼샤 탄창을 사용하도록 개량되기도 했는데, 영상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매번 장전할 때마다 급탄 불량이 생기는 데다 탄창이 빠지는 등 낮은 신뢰성을 보였다. 이는 반동으로 인해 탄약의 림이 8×50mm 르벨 탄의 큰 테이퍼로 인해 곡률이 커진 탄창의 곡면에 계속 끼는 데다, 쇼샤 탄창을 무리하게 베르티에 소총에 장착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기관총 중 하나로 유명하기도 한데 거의 최초의 본격적인 자동소총이다보니 설계 개념상 문제가 좀 있었고, 특히 신뢰성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다. 다만 마냥 최악이라고 하기도 곤란한데 상세한 것은 후술.
3. 특징
3.1. 장점
쇼샤의 무게는 9.1kg 정도로 영국군의 루이스 경기관총(13kg)이나 이전에 쓰던 호치키스 M1909(12kg)보다 가벼운,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가벼운 총으로서, 볼트액션 소총과 중기관총이 주력이던 개발 당시 기준으로는 돌격형 지원화기로서 상당히 개념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또한 분당 240발의 느린 연사 속도로 사수가 서서 쏴 등 양각대를 의지하지 않고 총을 들고서 자동 사격을 할 때 총을 제어하기 상당히 편했다.
또한 간단한 "롱 리코일 방식"[7] 을 채택하여 개발기간을 단축시키고, 구조를 단순화하여 생산비를 절감하는데 성공했다. 절삭 가공과 같은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며 재료 낭비가 심한 공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총 몸통 등 많은 부품을 생산성이 높고 재료의 낭비가 적은 프레스 가공을 최대한 사용하여 생산비와 제작 시간을 줄였다. 덕분에 거의 1차 대전 중에만 생산되었음에도 26만 정에 달하는 생산량을 자랑했다.
3.2. 단점
쇼샤 경기관총은 롱 리코일 방식 등을 도입하고 공정과정을 간략화하는 등 선진적인 면은 많았지만, 여러 모로 설계상으로 문제가 많아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M1918 브라우닝 자동소총에 비해서는 오래 쓰이지 못했다."이건 프랑스산 피클이야.(This is a french cho-cho.)"
"쇼-샤.(chau-chat)[8]
""쓰레기 그 자체니까 걱정할 필요 없고.(is piece a garbage don't worry about it.)"
"근육질 친구들[9]
한테 맡기면 돼!!""프랑스군 소총을 어떻게 써? 우린 미군인데, 미국 무기를 써야지."
바탈리언(The Lost Battalion, 2001)[10]
에서 AEF(American Expedinary Forces) 소속 미 육군 병사들의 쇼샤에 대한 악평.
우선 냉각을 위해 총신 커버에 뚫어 놓은 구멍과 잔탄 확인 및 재장전용으로 탄창에 뚫어 놓은 구멍은 진창 투성이인 1차 대전의 전장에서는 오염에 매우 취약했다. 후에는 캔버스 재질로 만든 커버를 씌워 오염물의 유입을 막았지만 공정 과정에서 구멍을 뚫은 걸 다시 막는다는 삽질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완전히 밀폐된 탄창이 개발되었으나, 종전으로부더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개발되어 사용되지 못했다. 게다가 8mm 르벨 탄피의 테이퍼각이 커서 탄창을 크게 구부리다 못해 고작 20발을 넣는데도 커다란 반원형이 되어버린 탄창은 휴대가 불편했다.
한편 반동을 제어하기 위해 롱 리코일 방식까지 도입한 것은 좋았으나, 총몸과의 연결부가 고정성이 약한 회전관절로 만들어져 총을 확실하게 받쳐주지 못하는 부실한 양각대가 사격시 반동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또한 보조 수직 손잡이도 권총 손잡이 바로 앞의 애매한 위치에 있어[11] 잡은 상태에서는 총을 수평으로 들기 힘들었다. 총 자체도 롱 리코일 방식으로서 사격시 총열과 노리쇠가 동시에 후퇴하는 방식이었는데, 느린 연사 속도로 인해 반동은 적었지만 무거운 총열이 앞뒤로 긴 거리를 왔다 갔다 하니 총이 매우 크게 움직이는 편이었고 앞서 언급한 부실한 양각대와 수직 손잡이와 함께 엎드려 쏴 등 의탁 사격시에는 탄착을 조절하기 힘들게 했다.[12]
또한 이 움직이는 총열 위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원형 방열 덮개가 씌워져 있었는데 흔히 이 총 사진에서 보이는 나팔형 소염기가 붙은 부분은 총열이 아니라 외부의 방열 덮개다. 그런데 이 방열 덮개와 총열 간의 공간이 좁은데다, 총알과 직접 맞닿는 총열이 훨씬 더 빠르게 가열되므로 사격하면 가열된 철제 총열이 덮개보다 더 팽창해서 여기 끼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경우 아예 사격이 불가능해지게 되고, 총을 분해해도 마땅히 총열을 빼내거나 할 방법이 없다. 때문에 당황한 사수가 끼인 것 빠지라고 총을 나무에 내리쳤다가 파손하거나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5~10분 간 기다려서 총열이 식어서 저절로 빠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동안 적이 접근해오거나 하면 곤란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이것은 200발 정도를 거의 쉬지 않고 사격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었다. 프랑스군은 쇼샤를 반자동 사격이나 점사로 운용하도록 했고, 운영상으로도 자동소총이라 연사로 계속 갈겨댈 일은 적었다. 이럴 경우 과열될 무렵에는 기관총수가 탄약을 다 소모할 정도의 시점이라 문제가 발생할 일은 적었다.[13] 그래서 프랑스군 내부에서 실시된 쇼샤에 대한 문제점 조사에서도 작동 불량 원인은 대체로 탄창 문제에 집중되었고 총신 과열 문제는 크게 언급되지 않았다.
3.2.1. 최악이란 평을 받았던 이유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지만 알려진 쇼샤의 악평에 비해 프랑스군 입장에서 쇼샤의 문제는 전시상황에서 단점을 감수[14] 하고 쓸 정도는 되었고 총기의 운용을 포기해야만 할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고 보면 된다.
한편 상술한 문제가 전선에서 크게 부각되었던 이유 중 하나로 생산 초기의 부실한 품질관리가 있다. 전쟁 발발로 급하게 양산에 돌입하였던 만큼 초기 생산분은 신속한 생산을 우선시했고 이것이 그대로 품질 저하로 이어진 것이었다. 다만 생산이 지속되고 전선의 상황이 나아지면서 후기 생산분은 적절한 품질관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적어도 품질 문제만큼은 개선되어 총의 신뢰성도 우수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쓸 만한 수준으로 나아졌다.
문제는 기관총이 부족했던 미군이 1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급하게 기관총을 찾으면서부터였는데, 생산성이 좋은 만큼 미군 입장에서는 쇼샤가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미군은 프랑스군이 쓰던 8mm 르벨 대신 자국의 제식 소총탄인 30-06 스프링필드로 탄약을 변경한 쇼샤 M1918을 프랑스에 대량 발주했으나 실수로 탄약 규격에 맞춰 약실 크기를 정확히 변경하지 않아 몇 발 쏘지 않고도 탄이 매우 자주 걸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때문에 히스토리 채널의 밀리터리 Q&A에서는 미군에 지급된 사상 최악의 병기로 꼽았다. 같은 히스토리 채널의 Lock n Load 기관총 특집에서도 어메이 중사가 4발 쏘고 급탄불량이 나는 막장성을 보여준다.
M1918의 실사격 영상. 앞서 언급된 부실한 양각대와 롱 리코일 방식의 총열의 문제로 사격시 총이 매우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콜트 BAR과 사격 영상을 비교해보면 더욱 티가 난다. # 2분대를 보면 13발을 쏘는 동안 탄이 찌그러지면서 총 내부에 걸리는 사태가 2번이나 발생하지만 약실 관련 문제는 발생하지 않아 수리된 버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1만 9천 정이나 생산된 30-06 버전의 40%는 사용부적격 판정을 받았고 나머지 60%도 문제가 많아 훈련용으로만 쓰였다.[15] 미군은 실전에 투입되는 부대에는 8mm 르벨을 사용하는 원본을 1만 6천 정 추가로 구매해여 지급해야 했고 그나마도 최악의 전장 환경을 가진 곳에 투입되어서 신뢰성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미군이 활동한 저지대는 스헬데 강, 라인 강, 그리고 뫼즈 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로 충적토-진흙 투성이에 참호 건설을 위해 땅만 파면 물이 솟아 오르는 막장 환경이었던 반면 프랑스군이 활동한 알자스-로렌 지대는 석회암 지대의 환경이었다. 같은 총이래도 진흙밭에서 구르던 미군과 돌밭에서 구르던 프랑스군의 체감 신뢰성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 밖에 없었다. 저지대에서 만큼 외부 오염 문제가 극단적이지 않았기에 프랑스군은 탄창 문제를 먼지 유입을 막는 캔버스천 주머니라는 개선안으로 대처하고[16] 26만정이라는 어마어마한 수량의 쇼샤를 생산-운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학을 뗀 미군은 M1918 브라우닝(BAR)을 도입하면서 쇼샤를 갈아엎어 버렸고, 당시 한 미군 장교는 BAR이 빨리 도입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건졌을까 하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때의 악명으로 이후 쇼사는 최악의 기관총 중 하나로 유명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좋은 기관총은 아니었지만 악평이 어느 정도는 과장된 면은 있다. 사실 악명 높은 기관총이 쇼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쇼사는 1차 대전기 개발된 물건이고 8mm판은 깨끗한 환경에선 그럭저럭 잘 나가며 개념적으로는 괜찮았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 11년식 경기관총이나 브레다 M30 같은 물건은 시대착오적인 설계였음에도 2차 대전까지 현역이었다.
4. 파생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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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미군이 사용했던 쇼샤 CSRG M1918. 탄약이 테이퍼가 작은 .30-06 스프링필드 탄으로 변경된 만큼 좀 더 상식적인 형태의 20발 들이 탄창이 도입되었으며 그에 따라 전방 손잡이가 더 앞으로 옮겨져 파지가 좀 더 편해졌고, 탄창에 난 잔탄 확인용 구멍도 없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아예 없어진 건 아니고 탄창 윗부분에만 작게 뚫려있어 총에 삽입시 가려지게 되어 이물질 유입 문제는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총 자체의 신뢰성은 설계상 오류로 엉망진창이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5. 대중매체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2001년에 제작된 영화 The Lost Battalion(국내 제목 '바탈리언')에서 이걸 들고 다니는 미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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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캡틴 코낭에서는 주인공 코낭과 부하들이 이걸 들고 자동소총처럼 사용하면서 적진에 침투해 특공대 짓거리를 하는 장면이 있다.
- FPS 게임 배틀필드 1 DLC인 'They Shall Not Pass(그들은 지나갈 수 없다)'에서 보급병 주무기로 추가됐다. 경기관총류 중에서 연사력이 가장 낮은 대신 가장 높은 데미지 성능을 가지고 있다. 그 덕분에 보급병 플레이어들 대부분은 이 총기를 돌격소총 같이 사용하고 있다.[17]
- 후속작 배틀필드 V의 협동임무와 싱글플레이 캠페인들 중 하나인 '척후병' 임무에서 등장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이후, 1944년 프랑스 탈환 작전에 파병된 프랑스군 소속 세네갈 출신의 흑인 의용군들 중 플레이어블 캐릭터 한명이 주무장으로 사용한다. 특이하게, 언급한 협동모드와 싱글플레이에선 등장하면서 멀티플레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플레이어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개발사 다이스측은 '타이드 오브 워: 챕터 5 이후에 추가하겠다.'라고만 하고 정확한 날짜를 밝히지 않은 상태.
- 소녀전선에서도 등장한다. 4성 기관총치고는 꽤 좋게 나오는 편.
- 베르됭(게임)에서 등장. 프랑스제 Mle 1915와 미국제 .30-06 M1918이 모두 구현되어 있다.
6. 둘러보기
[1] 시리아군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쇼샤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전쟁.[2] 사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각국 군부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사용할 무기는 국가가 직접 설계하고 생산해야 한다'라는 경직된 사고가 꽤 많이 퍼져있었고, 호치키스 사의 설립자가 미국인이었던 탓에 (당시에는 이미 사망했지만) 호치키스 사는 완전한 프랑스 기업이 아니라는 인식이 프랑스 군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호치키스 기관총이 수출시장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1차대전 발발로 호치키스 M1914를 대량 도입하기 전까지 프랑스군은 호치키스 기관총을 소량만 제한적으로 도입하는 데 그쳤고, 호치키스의 설계를 회피하면서 설계한 생테티엔 M1907을 한동안 주력 중기관총으로 운용했다.[3] 경기관총 형태로 만들어진 물건이 많이 있었지만, 일선 보병의 지원화기로 사용하려는 생각 자체를 안했다. 경기관총이라는 명칭도 후대에 붙여졌다. 대표적인 것이 호치키스 M1909와 마드센 경기관총이다.[4] 후술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탄창 구멍을 유지했던 이유는 탄창의 형태 및 구조로 인해 탄창 구멍으로 손가락을 넣어서 탄밀대를 잡아줘야 재장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탄창이 귀했던 1차 대전 당시에는 기관총반이 탄창 외에 여분의 탄약을 들고 다니다가 현장에서 삽탄했기 때문에 탄창에 잔탄 확인 구멍을 뚫는 것은 필수적일 수 밖에 없었다.59분 56초부터 1시간 2분 14초까지[5] 미 육군은 영국군보다는 프랑스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차대전 중에는 자국산 소총들인 스프링필드 M1903과 일선에서 점차 퇴역 중이었던 스프링필드 M1892, 영국산 소총인 엔필드 P14의 라이센스 생산형인 엔필드 M1917, 미국제이나 영국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루이스 경기관총의 파생형인 새비지 M1917을 제외하곤 죄다 호치키스 M1909나 호치키스 M1915 등의 프랑스제 분대지원화기나 4.7cm M1897 야포 같은 자국산 야포도 썼지만 프랑스제 75mm M1897 야포 나 155mm GPF 곡사포 등의 프랑스제 명품 야포들이나 영국제 BL 9.2인치 곡사포 등의 영프연합군의 중장비들을 공여받아 독일 제국군과 싸웠다. 야드 파운드법을 그렇게 사랑(?)하는 미국이 포 구경을 표현할 때 영국처럼 파운드를 안쓰고 mm를 쓰는 것도 이때 사용한 자국산 이나 프랑스산 야전포나 곡사포들의 구경이 mm 구경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무게 단위인 파운드가 나오는 이유는 영국 육군은 실제로 포탄의 질량에 해당하는 파운드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해군은 영국이고 미국이고 그냥 인치를 썼고. 물론 지금은 영국도 mm로 표기한다.[6] 개발자들의 의도는 배틀필드 1처럼 보급병이 쇼샤를 포함한 보급병용 경기관총을 들고 사격하는 것과 비슷하게 사용하는 것을 예상했지만, 현실과 게임은 엄연히 다르다.[7] 격발 후 총열이 노리쇠와 결합된 채로 끝까지 후퇴한 후, 총열이 먼저 전진하여 원위치로 돌아가고 이어서 노리쇠가 전진하며 차탄을 장전, 격발하는 방식이다. 이에 대응하는 방식인 쇼트 리코일은 총열과 노리쇠가 함께 후퇴하다가 대략 총알이 총구를 떠난 직후에 총열과 노리쇠의 결합이 해제된 다음 노리쇠만 끝까지 후퇴한다.[8] 영어로 피클과 쇼샤가 발음이 비슷하다는걸 이용한 일종의 언어유희다.[9] 기관총 사수를 말한다.[10] 제 1차 세계대전 후반기인 1918년 백일 전투에서 미군의 공세인 뫼즈-아르곤 공세를 다룬 영화로, 이름이 같은 좀비 영화와는 상관없다.[11] 이는 특유의 탄창 탓에 전방 손잡이를 달 위치가 애매했기 때문이다.[12] Forgotten weapons 채널의 1차 대전 경기관총 비교 실험 영상을 보면 이런 모습이 잘 보인다. MG 08/15는 의탁 사격이든 무의탁 사격이든 너무 무겁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 경기관총으로는 낙제점이었다. 루이스는 의탁 사격 시 가장 안정적이고 매우 훌륭한 집탄을 보여 줬으나 무의탁 사격 시에는 비교적 빠른 연사와 무거운 편인 무게 탓에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BAR은 양각대가 아예 없어 의탁 사격 시의 집탄은 비교적 좋지 못했으나 무의탁 사격 시에는 훌륭했고 가장 가벼웠다. 쇼샤는 부실한 양각대와 길게 왕복하는 총열 때문에 의탁 사격에선 최악이었으나 가벼운 무게와 느린 연사 덕에 무의탁 사격 시엔 양호한 집탄을 보여줬다.[13] 잘 생각해보면 200발을 쐈다는 건 탄창 10개를 비웠다는 뜻이다. 즉 탄창을 10개는 비워야 과열로 인한 사격 중단이 발생하는데, 그 큼직한 탄창을 그 정도로 많이 휴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그렇게 많은 탄을 한 번에 쏠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게다가 쇼샤는 오픈 볼트 방식이라 사격하지 않을 때 식는 속도가 현대의 돌격소총에 비해 빠른 편이다.[14] 현대전의 시각에서 평가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당시는 좁은 진창에 3만명, 5만명을 갈아넣어서 인간비료로 만들고도 '전쟁의 승리를 위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희생으로 평가하던 시대였다. 천민 잡졸이 뭐라 하건 잘 관리했을 때 총알이 잘 나가주기만 하면 군 상층부의 귀족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대의 경쟁작들도 루이스나 BAR 정도를 제외하면 현대적 기준으로 봤을 때 어딘가 나사가 한군데 씩은 빠져 있어 쇼샤의 미흡한 면모가 상대적으로 큰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15] 그래도 독일군이 노획해서 운용하는 사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어느 정도 쓰이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16] 물론 완전히 밀폐된 탄창도 개발되기는 했지만 도입되진 않았다. 탄창을 장전하기 위해선 탄창 구멍을 통해 스프링을 밀어내야했기 때문.[17] 실제 현실에서도 거점 사격이 아닌 옆구리에 끼고 전진하면서 사격을 하는 것을 상정하여 만들어졌다. 물론 이런 돌격 사격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호전 상황에서의 돌격이라 근래의 돌격소총의 돌격 개념과는 다르다. 보조 수직 손잡이는 이를 위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