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hem

 


1. 개요
2. 바이오그래피
2.1. 밴드의 결성
2.2. 보컬리스트 데드의 자살사건
2.3. 사타닉 서클의 결성과 유로니무스 살인사건
2.4. 밴드의 해체와 재결성
3. 디스코그래피
3.1. Deathcrush
3.2. December Moon
3.3. Projections of A Stained Mind
3.4. Live in Leipzig
3.6. Wolf's Lair Abyss
3.7. Grand Declaration of War
3.8. Chimera
3.9. Ordo ad Chao
3.10. Esoteric Warfare
3.11. Daemon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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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네크로버처(베이스), 유로니무스(기타), 데드(보컬), 헬해머#s-2(드럼)

Freezing Moon의 2016년 라이브[1]
노르웨이의 블랙 메탈 밴드. 로고 위에 작은 글씨로 'The True'를 덧씌워 The True Mayhem이라는 명칭을 같이 사용한다.
블랙 메탈계에서는 가히 레전드로 받들어지고 있는 밴드이며, 어둠과 오컬트적인 색채를 가장 잘 표현한 밴드라고 알려져 있다. 유로니무스에 의하면 자신은 베놈, 바쏘리 등의 스래쉬 메탈탠저린 드림 등의 크라우트록을 즐겨 들었으며 밴드의 이름도 베놈의 곡 Mayhem with Mercy에서 따왔다고 한다.
음악적인 면으로는 블랙 메탈의 레전드라고 칭송받는 밴드이지만, 정작 멤버들의 문제로 사건사고가 많았어서 전성기 당시엔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다. 그 사건사고들 중에도 유로니무스 살인사건과 데드 자살사건이 유명하다.

2. 바이오그래피



2.1. 밴드의 결성


1984년 오슬로에서 베놈켈틱 프로스트의 곡들을 카피하는 스쿨밴드로 처음 결성 되었으며 1986년 데모 <Pure Fucking Amageddon>를 100장, 1987년 EP <Deathcrush>를 1000장 한정으로 발매하면서 데뷔하였다. 결성 당시 멤버는 메시아(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맨하임(드럼). 보컬인 메시아는 메이헴이 활동하던 동네인 Langhus과는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Pure Fucking Amageddon>은 네크로버처와 유로니무스가 번갈아서 보컬을 맡았다. 이후 메시아의 가족은 더 먼 릴레함메르(Lillehammer)로 이사를 갔고 메시아는 메이헴을 탈퇴했다.[2] 그래서 <Deathcrush> 녹음시에는 매니악이라는 새 보컬리스트를 고용하였다.
메이헴의 리더인 유로니무스는 당시 노르웨이의 청소년 공산주의자 클럽 Rød Ungdom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알게된 이오시프 스탈린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등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독재적인 리더쉽을 숭상하고 있었다. 참고로 유로니무스는 1990년까지만 해도 인터뷰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친구를 독살시키겠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공산주의를 신봉했지만 1991년 사타닉 서클을 결성한 이후부터는 네오 나치로 전향했다. 메이헴의 드러머였던 멘하임은 유로니무스가 살해된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전의 유로니무스를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멋진(Cool한) 놈'이라고 불려지기만 한다면 하바네로를 가득 넣은 샌드위치도 먹을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1985년 유로니무스가 살던 동네 Ski에서 진행된 축제 겸 밴드경연이었던 Follorocken 콘서트에 출연한 메이헴. 그야말로 극 초기 시절 메이헴의 공연영상으로 태동기의 블랙메탈 모습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영상이다. 메시아가 메이헴과 함께한 유일한 공연이기도 하다. 해당 경연에서 메이헴은 꼴등을 먹었지만 멤버들은 어차피 대중을 엿먹이기 위해 나온 것이므로 이걸 우승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공연 멤버로는 메시아(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맨하임(드럼).
<Deathcrush> 앨범의 녹음이 완료된 후,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지 않던 매니악과 밴드 생활에 지친 맨하임이 밴드를 나갔고 네크로버처와 유로니무스는 새 멤버들을 모집한다. 그 결과 스웨덴에서 Morbid(모비드)라는 데스 메탈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을 맡고있던 데드와 노르웨이 여러 지역의 메탈 밴드에서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던 드러머 헬해머가 밴드에 가입하고 메이헴은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리허설과 작곡을 시작한다.

2.2. 보컬리스트 데드의 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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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생전의 모습.
본명이 페르 윙베 올린(Per Yngve Ohlin)인 데드는 어린 시절에 부모가 이혼한데다가 학교에 입학해서는 또래들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단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참다못한 페르가 평소 그를 괴롭히던 일진들에게 반항을 시도했다가 보복으로 린치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페르는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고 급히 병원에 이송되어 의료진의 노력으로 구사일생한 그는 이후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자신의 경험에 몰입하며 공포 만화/영화, 스래쉬 메탈에 깊게 빠져들었다. 그 결과 페르는 1986년 전학간 학교와 레코드 가게 Heavy Sound[3] 등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함께 Morbid(모비드)라는 이름의 데스 메탈 밴드를 결성하여 보컬리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닉네임과 기믹을 하나씩 설정한다는 모비드의 활동 지침에 따라 페르는 '데드'라는 닉네임을 쓰기 시작했다.

데드가 출연한 Candlemess의 Bewitched 뮤직비디오 (1987년). 비디오 중간에 여럿이 모인 젊은이들 중 맨앞에서 혼자 입을 벌리고 좀비 흉내를 내며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금발 청년이 데드다.
데드는 모비드의 노랫말과 앨범 자켓 디자인을 비롯하여 라이브 공연시의 무대 효과까지 직접 신경쓰는 등 밴드의 중추적인 역할을 도맡아했지만 1987년 12월, EP <December Moon>을 마지막으로 밴드의 기타리스트인 John 'Lennart" Hagström이 부모님에 의해 반강제로 밴드에서 탈퇴하자 모비드를 해체하고 1988년 메탈 팬진에 멤버 구인 광고를 실은 메이헴에 가입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떠난다.

메이헴의 리허설 모습이 찍힌 유일한 영상. 참고로 영상은 1989년에 찍혔으며 처음에 비친 금발의 청년이 바로 데드이고 밴드 연주 시 오른쪽에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이 유로니무스이다. 촬영은 Lasse John Henry Olstad라는 사람이 했다고 한다.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하지만 메이헴은 활동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얼마 못가서 활동을 중단하고 말았고 데드는 1989년 스웨덴으로 귀국했다. 그런 그에게 모비드에서 같이 활동한 동료들은 스톡홀름씬의 여러 메탈 밴드들이 연합하여 Entombed[4]라는 이름의 새 밴드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알리며 가입 여부를 물었지만 그는 "<메탈 히어로>가 되고싶은 밴드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며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예술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이었던 데드는 유로니무스가 "자신이 직접 레코드 회사 D.S.P.(Deathlike Silence Production)를 설립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메이헴의 활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편지를 보내오자 밴드에 재가입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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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니무스, 데드, 네크로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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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좌)와 유로니무스(우)

메이헴의 첫 공연인 Live in Jessheim (1990.2.3)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두번째 공연인 Sarpsborg, Norway 공연 (1990.2.28)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다시 모인 밴드는 1990년 2월 3일 노르웨이의 Jessheim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밴드는 첫 공연에서 콥스 페인팅을 한 채 소품으로 준비한 돼지머리[5]를 관객들을 향해 던졌으며 공연 막바지에는 데드가 Chainsaw Gutsfuck을 부르면서 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콜라병으로 자신의 오른쪽 팔을 그었다. 결국, 공연 직후 상처가 너무 깊어서 데드는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한다. 데드의 부상이 어느정도 나아진 1990년 2월 28일 밴드는 노르웨이의 Sarpsborg에서 두번째 공연을 펼쳤다. 이들은 해당 공연에서 '죽음의 느낌을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전달하여 그들을 공포에 떨게하고 싶다'며 무대를 암전 상태로 만들고 연습실 근처 숲에서 모아온 동물 시체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무대에 올려놓았다.
Jessheim과 Sarpsborg에서의 공연 후 노르웨이의 라이브 클럽들이 밴드를 보이콧하여 노르웨이에서 공연을 진행할 수 없게되자 밴드는 대신 오스트리아의 글라이스도르프(Gleisdorf)에서 공연을 하려 했지만 이 공연 또한 밴드가 오스트리아로 떠나기 직전에 모종의 이유로 취소되었다. 1990년 4월, 밴드는 훗날 컴펄레이션 앨범 Projections of A Stained Mind에 수록된 The Freezing Moon과 Carnage를 녹음했고 이후 네크로버처를 제외한 밴드 멤버들은 아예 새로 마련한 연습실에서 생활하면서[6]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곡들은 훗날 De Mysteriis Dom Sathanas 앨범에 수록되었고 앨범 제목도 생전에 데드가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헬해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밴드는 그리 원만하게 굴러가지 못했다고 한다. 밴드의 중심축인 데드와 유로니무스는 블랙 메탈에 대한 견해 차이[7] 및 성격 차이로 대립했으며[8] 네크로버처는 동거중인 여자친구가 임신해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빠서 연습에 잘 나오지 않았고[9] 자신도 밴드의 지지부진한 활동에 실망감을 느껴서 노르웨이 전역을 돌아다니며 세션 활동을 병행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밴드는 유로니무스가 속해있던 공산주의 단체의 의뢰를 받아들여서 1990년 11월 동독에서 공연을 하게되었다. 동독 투어의 첫 스케줄인 Annaberg 공연 부터 데드는 수증기 발생장치로 만든 연기를 무대에 깔고서 땅 속에 묻었던 옷을 입고 콥스 페인팅을 한 채 공연을 진행했으며 세번째 스케줄이자 마지막 공연이었던 Leipzig 공연에서는 데드가 또다시 나이프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이후 메이헴은 노르웨이로 귀국하기 전인 1990년 12월, 터키 이즈미르에 들려서 한 차례 공연을 진행했으며 이것이 밴드의 마지막 공연이 되고 말았다.[10] 메이헴이 터키 라이브를 위해 열차를 타고 이스탄불[11]로 이동하던 중에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데드는 계속 코피를 흘렸다고 한다.
종합해보면 메이헴의 활동 당시 밴드의 라이브 일정은 다음과 같다.
February 3rd 1990 - Jessheim, Norway (The Great War bootleg)
February 28th 1990 - Sarpsborg, Norway (Dawn of the Black Hearts bootleg)
November 23th 1990 - Annaberg, Germany
November 24th 1990 - Zeitz, Germany (War and Sodomy bootleg)
November 26th 1990 - Leipzig, Germany (Live in Leipzig album)
December 1990 Izmir, Turkey
투어 이후 네크로버처는 밴드를 탈퇴하고 멤버들과의 연락도 완전히 끊었고 핼헤머도 세션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멤버들의 이탈로 정상적인 밴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유로니무스는 데드를 배척한 채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블랙 메탈 전용 레코드 점의 개장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데드는 메이헴의 연습실에 홀로 남아 숙식을 해결하며 밴드의 활동 재개를 기다리다가 1991년 4월 8일[12], 칼로 자신의 손목과 목을 긋고 산탄총으로 머리를 쏴서 목숨을 끊었다. 1969년 생이었으니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이혼 상태였던 데드의 부모님은 아들의 자살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으며 1년 뒤 재결합했다.
다음은 데드의 유서 전문이다.
Excuse the blood, but I have slit my wrists and neck. It was the intention that I would die in the woods so that it would take a few days before I was possibly found. I belong in the woods and have always done so. No one will understand the reason for this anyway. To give some semblance of an explanation I'm not a human, this is just a dream and soon I will awake. It was too cold and the blood kept clotting, plus my new knife is too dull. If I don't succeed dying to the knife I will blow all the shit out of my skull. Yet I do not know. I left all my lyrics by "Let the good times roll"—plus the rest of the money. Whoever finds it gets the fucking thing. As a last salutation may I present "Life Eternal". Do whatever you want with the fucking thing.
P.S. I didn't come up with this now, but seventeen years ago.
/ Pelle.[13]
한편, 오랜만에 메이헴의 연습실에 갔다가 데드의 시체를 발견한 유로니무스는 그의 죽음을 경찰에 신고하기 전 근처 상점으로 달려가서 일회용 카메라를 산 후 데드의 시신을 훼손시키고 그 주위에 일부 사물을 늘어놓은 뒤 사진을 찍었고 자살현장에서 뼈조각들 일부를 빼돌려서 팬던트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녔다.[14] 심지어 이 목걸이를 귀중한 것이라며 동료 뮤지션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데드의 뼈조각을 선물받은 이들은 자신들이 유로니무스에게서 데드의 뼈조각을 받은 사실을 계속 부인하다가 2005년 선물받은 사실을 인정했다.[15]
이후 유로니무스는 기자들에게 인터뷰 약속들을 잡아서 "나는 메이헴이라는 밴드의 기타리스트 유로니무스라고 한다. 밴드의 보컬인 데드가 블랙 메탈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데드는 좋은 가수에다 중요한 사람이었고 블랙 메탈러인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데드의 자살을 통해 블랙 메탈은 세상에 널리 알리질 것이며 나는 우리들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라는 발언을 통해 데드의 자살을 언론에 대서특필되게 하여 밴드를 홍보하였다. 이때 유로니무스는 핼헤머에게 다시 연락하고 당시 자신의 룸메이트였던 Occult라는 인물을 메이헴의 보컬리스트 겸 베이시스트로 받아들여서 메이헴의 활동을 재개하려 했으나 얼마 못가서 유로니무스와의 불화로 Occult가 탈퇴하여 무산되었다. Occult는 유로니무스와 함께 블랙 메탈 전용 레코드점 Helvete의 기본 컨셉을 고안한 사람이기도 했다.
참고로 데드의 시체 사진들은 유로니무스가 자신의 레코드점 Helvete에 전시해 두었다가 도난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로니무스 사후인 1995년에 유로니무스가 콜롬비아에 위치한 레코드 회사에 보냈던 데드의 시체 사진이 앨범 자캣으로 쓰인 부틀랙 앨범 <Dawn of the Black Hearts>이 발매되었다.[16]
메이헴의 베이시스트인 네크로버처는 밴드에서 자신과 데드는 좋은 친구였으며 라이브시의 데드는 마치 짐 모리슨을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메이헴의 드러머였던 멘하임은 훗날 인터뷰에서 "데드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마빈과 같은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회상했다.
터키 이즈미르의 공연 프로모터 Arcan[17]은 데드에 대해 회상하길 데드는 자신의 말에 연신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었으며, 과다출혈(코피+자해)로 인해 창백하게 질려있는 얼굴에다가 몸에는 상처가 없는 부위가 없을 정도로 전신에 걸쳐 많은 상처들이 있었다고 한다. 펍에서도 데드는 혼자 가만히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고 한다..
유로니무스의 전 여자친구는 데드를 스쿠비 두섀기 로저스를 닮은 무해한 약쟁이(Stoner)였으며 데드의 자살 소식을 접하자 슬펐다고 회상했다. 해당 인터뷰에서 그녀는 노르웨이의 블랙 메탈 씬은 처음엔 그저 자신들이 얼마나 쌔고 반항적인지를 표현하려 했던 중2병에 걸린 노르웨이 청년들의 모임이었을 뿐이었지만 유로니무스를 대표로 한 사타닉 서클이 결성된 후 서클에 파우스트나 카운트 같은 극우적인 사상을 가졌고 네오 나치와도 결부되어 있던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부정적인 방면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에 질린 나머지 유로니무스 몰래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일주일 정도가 지나서 유로니무스가 카운트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버줌의 카운트 그리쉬니크는 "데드는 주로 메이헴의 연습실 한켠에 마련한 자신의 방에 틀여박혀 있었다. 나 역시 유로니무스의 소개로 데드를 딱 한번 만나서 간단한 대화를 나눈것이 그를 유일하게 본 순간이었다. 그는 자살하기 전부터 이미 나와 같이 활동했던 노르웨이의 음악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전설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엠페러의 드러머이자 유로니무스의 레코드샵에서 점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던 파우스트는 유로니무스 사후 인터뷰에서 "생전 유로니무스는 자신을 포함한 블랙 메탈러들이 데드에 대해 물어볼때면 항상 '데드는 별거 아닌 놈이었다. 내가 그를 좀 더 극단적으로 행동하게 부추긴 장본인이다. 심지어 나는 데드와 사이가 안좋아지자 그를 일부러 배척해서 결국 자살하게 만들기도 했다.'라며 자랑스럽게 떠벌렸다."고 증언했다.

2.3. 사타닉 서클의 결성과 유로니무스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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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 그리쉬니크와 유로니무스
데드의 자살을 통해 자신과 블랙 메탈에 대한 악명이 높아지자 유로니무스는 1991년 6월, Helvete(노르웨이어로 '지옥'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블랙 메탈 전용 레코드샵을 개장했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규합해서 《사타닉 서클》이라는 조직을 결성, 본격적으로 절도, 묘지 훼손, 교회 방화 등의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전부터 유로니무스는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것과 극우적인 사상[18] 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카운트 그리쉬니크라는 10대 소년과 친했는데 《사타닉 서클》을 결성한 후부터는 카운트의 원맨 밴드 버줌의 앨범 녹음을 후원하거나[19] D.S.P.에 소속된 뮤지션들의 앨범 프로듀싱을 카운트에게 맡기는 등 카운트를 아예 자신의 오른팔로 키울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카운트도 이런 유로니무스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서 범죄 행위를 가장 많이 저지르는 조직의 행동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1992년 한해에만 노르웨이의 국보로 지정된 대형 교회들이 방화로[20] 연이어 소실되어 사회에서 블랙 메탈과 사타닉 서클에 대한 경각심이 한껏 높아질 즈음 유로니무스와 카운트는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핼헤머와 기타리스트 Blackthorn(Snorre Ruch), 평소 유로니무스가 좋아하던 헝가리의 메탈 밴드 Tormentor의 보컬리스트 아틸라[21]의 도움을 받아서 베르겐의 그리그홀에서 1992년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메이헴의 데뷔 앨범 De Mysteriis Dom Sathanas 레코딩을 진행한다.
1993년 1월, 카운트는 블랙 메탈과 메이헴의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대형 언론사인 Bergens Tidende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되는데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회 방화 사건의 용의자 중 한명이며 1993년 4월에 메이헴의 데뷔 앨범을 발표한 뒤, 앨범 표지처럼 노르웨이의 국보인 니다로스 대성당 (Nidaros Cathedral)을 폭파시킬 것"이라는 계획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이 내용을 들은 기자는 깜짝 놀라서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경찰에 카운트를 신고하였고 카운트는 경찰에 잡혀서 구치소에 수감된다.
그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노르웨이의 각종 언론들은 본격적으로 사타닉 서클에 대해 취재를 시작하여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고 유로니무스의 아버지[22]는 사타닉 서클의 두목으로 지목된 유로니무스의 얼굴과 아들의 얼굴이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아들이 경영하고 있다는 레코드점을 직접 방문, 깜짝 놀라서 정부에 신고했다.[23] 그러자 유로니무스는 Helvete를 폐쇄하고 잠적한 뒤 편지나 전화 등을 통해 "카운트에 대한 것이나 교회 방화 등에 대해 진술을 한다면 사타닉 서클로부터 피의 복수가 있을 것"이라고 동료 뮤지션들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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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vete를 찾은 유로니무스의 아버지.
왼쪽부터 아틸라의 부인 노라, 핼헤머, 유로니무스, 유로니무스의 아버지
한편, 1993년 3월 증거 불충분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카운트 그리쉬니크는 자신이 전에 방화한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판토프트 목조 교회(무려 12세기에 건축된 교회이다.)가 불에 탄 모습을 자신의 원맨 밴드 버줌의 새 EP인 Aske의 표지로 썼다.[24] 한편,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유로니무스가 연락을 끊고 잠적하였으며 Helvete 또한 폐쇄되었다는 사실을 접하자[25] 카운트는 본명을 크리스티안에서 Varg Qisling Larssøn Vikernes[26]로 개명하고 '나는 범죄행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기는 두려워하고 동료 뮤지션들에게 이념을 주입시키기만 했던 유로니무스와는 다르다. 나는 감옥까지 다녀온 행동파다.'라고 주장하면서 서클의 각종 범죄 활동을 재개시켰다. 또한 새로운 레이블 Cymophane Productions을 창설하여 그동안 자신이 음반 작업에 참여했던 밴드들을 자신의 새 레이블로 데려가려는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 8월 10일, 카운트는 같이 메이헴의 데뷔 앨범 녹음에 참여했던 Blackthorn라는 기타리스트에게 유로니무스가 살고있는 Tøyen가(街)에 위치한 공동주택의 위치를 알아낸다음 유로니무스를 무참히 살해했다.[27]
일주일 후, 카운트는 노르웨이 경찰에게 붙잡혀서 살인, 방화, 강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노르웨이 사법부는 범행의 잔혹성을 고려하여 노르웨이 법정 유기징역 최고형량인 징역 21년을 선고했다. [28]
카운트는 법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하였고 모든 혐의도 인정되었지만 2년 뒤 교도소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갑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며 유로니무스가 전화로 자신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살해협박을 자주 했으며 이에 따른 보복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카운트의 인터뷰들을 보면 그 뿐만 아니라 교회 방화 등 자신의 범죄 행위까지 다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있어서 그의 주장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으며 노르웨이 법은 오히려 그의 주장을 가중 사유로 적용했다.
그러나 노르웨이 사회 특성상 일부 위험인물을 제외하면 징역형을 만기까지 채우거나 형기를 연장하지 않는 관행 때문인지 카운트는 16년 만인 2009년 5월 24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2014년 가석방 기간 종료 예정. 다만 범죄의 동기가 극도로 불순했던데에다가 살인 방식의 잔혹함, 그리고 그 전의 국보급의 교회 방화,사보타주 등의 혐의도 있어 전세계에서 입국 금지 블랙리스트에 올렸기 때문에 그 뒤에도 해외 입국은 불가능할 전망이라 지금까지도 유럽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이렇게 해서 블랙 메탈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인성이 엉망이었던 유로니무스의 생애는 25세로 끝나고, 각종 범죄 행위를 실천할만큼 호전적인 인성을 지닌 카운트는 살인자로 전락하여 사회에서 영구 추방당하게 되었다.

2.4. 밴드의 해체와 재결성


유로니무스가 죽은 뒤 드러머인 헬해머는 1994년 5월 24일 데뷔앨범 De Mysteriis Dom Sathanas를 재믹싱하여 발매하고 공식적으로 해체를 발표하게 된다. 밴드결성 10년만의 일이었다. 참고로 레코딩 멤버는 유로니무스(기타), 카운트 그리쉬니크(베이스)[29] Blackthorn(기타), 헬해머(드럼), 데드(작사), 아틸라 (보컬).
이후 1995년 유일하게 남은 멤버인 드러머 헬해머가 다시 전 멤버들을 설득, 규합해서[30] 메이헴을 재결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2008년, 재결성 때 부터 참여한 기타리스트 Blasphemer가 밴드를 탈퇴하였고 Blasphemer 탈퇴 후 밴드의 기타리스트 자리는 Morfeus와 Silmaeth(프랑스 출신이라고 한다.) 라는 두 명의 멤버가 투어멤버로 들어왔으며 2011년 2월 Silmaeth가 나가고 노르웨이 기타리스트 Teloch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2017년 현재 공식적인 멤버는 아틸라, 네크로버쳐, 헬해머, 그리고 Teloch이다. 공연은 라이브 세션 기타리스트 Charles Hedgar 를 포함해 5인 체제로 진행하는 중. [31]
2012년 밴드의 리더인 핼해머는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음악은 정말로 사악하지는 않다(즉 다 컨셉이다.) 라는 인터뷰를 하였다.
2014년 밴드 결성 20주년을 맞아 새 앨범 <Esoteric Warfare>이 6월에 발매했다.

3. 디스코그래피



3.1. Deathcrush



메이헴의 첫 EP Deathcrush. 18분짜리의[32] 소규모 EP로 초판은 1987년, 1000장 한정 발매되었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메시아(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맨하임(드럼).

3.2. December Moon



모비드의 유일한 EP. Deathcrush와 마찬가지로 17분짜리의 소규모 EP이다. 1987년 12월에 발매되었으며 앨범의 녹음을 마지막으로 모비드는 해체되고 데드는 메이헴에 가입한다.

3.3. Projections of A Stained Mind


The Freezing Moon
Carnage
노르웨이의 인디 레이블 CBR에서 발매된 컴펄레이션 앨범으로 발매는 데드 사후인 1991년에 되었지만 녹음은 1990년 4월에 이루어졌다. 데드가 메이헴 제적시 남긴 유일한 스튜디오 트랙인 The Freezing Moon과 Carnage가 수록되었다. The Freezing Moon은 거의 라이브처럼 녹음되었다고 한다.
레코딩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4. Live in Leipzig



메이헴의 유명한 라이브 앨범 Live in Leipzig. 위 공연은 1990년 11월 26일에 녹음되었으며 데드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녹음된 공연이다.
공연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5. De Mysteriis Dom Sathanas



2008년 발매된 EP <Life Eternal>에 담긴 앨범의 러프 믹스 버전. 카운트의 베이스 소리가 뚜렷하게 들린다.
유로니무스가 있었던 시기의 유일한 앨범이자 밴드의 첫 정규 앨범.
레코딩 멤버는 유로니무스(기타), 카운트 그리쉬니크(베이스), Blackthorn(기타), 헬해머(드럼), 데드(작사), 아틸라(보컬).

3.6. Wolf's Lair Abyss


유로니무스 살인 사건이 발생한 후 메이헴은 해체되었는데, 헬해머가 매니악과 네크로버처, 그리고 새 기타리스트인 블래스패머를 영입하여 밴드를 다시 꾸리게된다. Wolf's Lair Abyss는 처음으로 유로니무스가 참여하지 않은 곡들로 채워진 EP로, 원래의 메이헴 사운드와 상당히 다르다. 이 앨범부터의 메이헴을 "뉴 메이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7. Grand Declaration of War


유로니무스 사후에 처음으로 나온 정규 앨범. Wolf's Lair Abyss EP에서의 테크닉 위주 블랙 메탈 사운드를 더욱더 끌어올렸다. 1집과 그 이전의 메이헴 팬들에게는 대부분 혹평을 받지만, 오히려 메이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앨범을 최고로 꼽기도 한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8. Chimera


정규 3집 앨범. 매니악이 방출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녹음한 앨범이기도 하다. 1집과 2집의 사운드를 적절하게 섞어서 많은 팬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명반으로 불리기도 한다. My Death는 공연 때마다 빼놓지 않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앨범 크레딧에는 네크로버처가 베이스를 녹음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블래스패머가 기타와 베이스를 모두 녹음하였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베이스), 헬해머(드럼).

3.9. Ordo ad Chao


정규 4집 앨범. 1집에서 보컬을 녹음했던 아틸라가 다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녹음한 앨범이다. 기본적으로 3집의 사운드를 이어받았으나, 3집에 비해서는 별로라는 평이 많다. 앨범 크레딧에는 네크로버처가 베이스를 녹음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블래스패머가 기타와 베이스를 모두 녹음하였다.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베이스, 작사), 헬해머(드럼).

3.10. Esoteric Warfare


정규 5집 앨범. 블래스패머 탈퇴 후 새롭게 영입된 기타리스트 테로크와 찰스 헤드저가 처음으로 녹음할 앨범이다. 역시 3집부터 계속되고 있는 뉴 메이헴식 블랙 메탈을 들려준다. 4집 앨범 Ordo ad Chao에 비해서 더 낫다는 의견이 많긴 하지만 다소 지루하다는 평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팬들은 메이헴이 계속해서 앨범을 내주고 있는 것을 고마워하는 듯하다.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보컬, 작사), 테로크(기타), 찰스 헤드저(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3.11. Daemon


정규 6집 앨범.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보컬, 작사), 테로크(기타), 찰스 헤드저(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1] 멤버로는 아틸라 (보컬), 네크로버처 (베이스), 헬해머 (드럼) Teloch (기타), Charles Hedgar (기타)[2] 메시아는 탈퇴 후에도 멤버들과 친분을 유지했고 덕분에 <Deathcrush> 앨범 녹음에도 참여하였다.[3] 헤비메탈이나 락 뿐만 아니라 당시 스웨덴에서 거의 유일하게 Sarcofago, Sodom, Possessed 같은 익스트림 음악들과 언더 밴드들의 데모를 취급하였던 레코드샵으로, 당대 스웨디쉬 데스 메탈의 생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스웨덴 익스트림 씬의 성지였다.[4] 포제스드Seven Churches, 데스Scream Bloody GoreLeprosy 등으로 대표되는, 보다 스래쉬 메탈의 형태에 가까웠던 미국의 데스 메탈과 당시 유럽 언더그라운드 시장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던 하드코어 및 크러스트 펑크의 사운드 포징을 결합한 스웨디쉬 데스 메탈의 대표주자로서 활동한 밴드. 특히, 1993년 10월 4일 발표한 3집 앨범 <Wolverine Blues>부터는 멜로딕 데스 메탈의 성공을 본받아서 기존의 스웨덴식 데스 메탈에 좀 더 리듬 위주의 리프 전개를 기반으로 하는 빌드업을 특징으로한 Death 'n' Roll 장르를 개척하였다.[5] 유로니무스가 도축업자에게서 구해온 것인데 보관을 제대로 안 해서 고기가 상한 상태였는지 한 관중이 장난으로 씹었다가 탈이 났다고 한다.[6] 당시 유로니무스는 자신의 가족 별장이었던 오슬로 외곽의 오두막 한 채를 밴드의 연습실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다.[7] 유로니무스는 공산주의자였고 블랙 메탈을 바라보는 관점도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집단주의에 가까웠다. 이와 달리 데드는 반문화주의자였고 블랙 메탈에 대해서도 어떠한 정치적 이념과 결부되지 않고 사회의 관습에도 매몰되지 않는, 그저 주류에 대한 거부 혹은 반대를 표출하는 수단으로만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밴드 생활 초기에는 하드코어 펑크를 배격하는 등 둘의 사상을 절충하여 밴드가 운영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둘이 생각하는 밴드와 미래의 블랙 메탈에 대한 청사진이 달라졌다고 한다.[8] 메이헴의 드러머인 핼헤머에 의하면 어느 날 유로니무스는 연습실에서 데드가 끔찍이 싫어하던 신스팝을 크게 틀기 시작했고 이에 잠을 자고 있던 데드가 베개를 들고 밖으로 나왔는데 이를 본 유로니무스가 따라 니와서 산탄총을 허공에 대고 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데드가 갑작스럽게 자해를 시도할 때면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를 막을려고 노력했지만 유로니무스는 오히려 데드가 자해를 하도록 부추겼다고 증언했다. 헬해머는 유로니무스가 단지 (아무 생각없이) 데드를 놀릴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자신이 주변인들에게 '악마'라고 불려지기를 원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9] 이를 못마땅해한 유로니무스는 네크로버처의 여자친구에게 살해 협박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10] 터키 공연은 녹음본이나 영상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메이헴이 공연을 하던 도중 경찰의 단속으로 라이브가 강제 중단되고 장소가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메이헴의 멤버들은 공연 전 음향 담당자에게 라이브 테잎 레코딩을 부탁한 바 있었으나, 경찰이 강제 종료 시켜 혼돈스러웠던 정황상 테잎을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11] 우선 이스탄불에서 내린 뒤 버스를 타고 장장 8시간을 달려서 공연 장소인 이즈미르에 도착했다고 한다.[12] 추정 사망일자.[13] Pelle는 Per(페르)의 애칭 중 하나이다.[14] 시신의 살점을 떼어내어 스튜를 끓여먹었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는데, 유로니무스가 살해당하기 하루 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시신이 굳어있어서 스튜로 만들어서 먹지는 못하였다고 해명하였다.[15] 물론 사체손괴는 범죄인 만큼 당연히 법적 책임을 져야 정상이지만 유로니무스는 이미 그 전에 카운트에게 살해당했으니...[16] 절대로 해당 앨범의 표지를 링크 혹은 jpg로 걸지 말 것. 굉장히 참혹한 광경이라 정상적인 성인 남녀의 눈으로도 비위가 상해서 눈 뜨고 제대로 보기가 엄청 거북할 정도고, 임산부나 아이들에게는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톨소퍽이나 Disgorge보다는 나으므로(?)이미 이런 쪽에 익숙한(?)사람들은 찾아봐도 괜찮다.[17] 유로니무스와 80년대 후반부터 연락을 주고받으며 유로니무스에게서 여러 희귀한 익스트림 밴드들의 소식과 데모 테잎들 그리고 Deathcrush 카세트 테잎을 받기도 한 사람이었다.[18] 1987년부터 스킨해드 패션과 네오 나치 활동을 시작한 카운트는 블랙 메탈씬에 나치즘을 제대로 도입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1992년 발행된 네오 나치 단체 블러드 앤 호너(Blood & Honour)의 정규 잡지에서는 카운트가 존 88(Zorn's 88) 소속의 네오 나치이며 화이트 아리안 레지스탕스 (White Arian Resistance)애도 소속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19] 버줌 1집에 수록된 <War>의 후반부 기타솔로는 유로니무스의 연주이다.[20] 1992년 한해에만 무려 8건의 교회방화가 일어났다.[21] 아틸라는 앨범 녹음을 위해 노르웨이에 와서 난생 처음 경험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문화와 육식위주의 식생활(아틸라는 채식주의자라고 한다.)에 적응하지 못해서 한 동안 굉장히 힘들어했으나 자신이 몸담았던 밴드를 존경한다는 그들의 말과 데드의 일대기에 감동을 받아서 이를 악물고 끝까지 보컬파트의 녹음을 끝마쳤다고 한다. 이후 아틸라는 헝가리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메니악이 해고된 후 메이헴의 정식 멤버로 합류하여 활동하고 있다.[22] 유로니무스의 아버지 Helge Aarseth는 NRK 등 여러 미디어에 출연하였던 저명한 변호사이다.[23] 2012년에 노르웨이의 한 저가 항공사가 승객들에게 '노르웨이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인물'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하고 1등을 한 인물을 자사의 비행기에 그려 넣겠다는 이벤트를 열었는데 유로니무스가 1등으로 선정되자 유로니무스 부모님의 요청으로 이벤트가 중지된 적도 있었다.[24] 해당 교회는 12세기 교회 자체로서 의미도 있었던 건물이지만 세계대전의 화염 속에서 살아남은 건축물로도 의미가 있으며 목조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노르웨이 건축물이었다.(다른 목조교회들은 세계대전 중 많은 수가 전소, 파괴되었다.) 우리나라에 비교하자면 반불교 세력들이 부석사 무량수전에 불을 지른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 뒤 해당 교회는 1997년에 복원되었다.[25] 유로니무스 사후, Helvete가 위치했던 공간은 한동안 빈터로 남아있다가 빵집이 자리잡았고 2013년부터는 일종의 관광 명소로 사용한다며 Helvete의 모습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현재는 Nosebleed 레코드점으로 운영 중[26] 참고로 Varg는 늑대(Wolf)라는 뜻을 가지며, Qisling은 비드쿤 크비슬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27]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유로니무스의 시체에는 칼로 찌른 자국이 23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카운트의 증언에 따르면 살려달라며 도망치는 유로니무스를 계속 찌르고 또 찔렀다고 한다.[28] 훗날 노르웨이 연쇄 테러의 범인 브레이빅 또한 징역 21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카운트가 잡혔을 당시에는 무기징역이 있었기 때문에 예방적 구금 처분은 받지 않았다.[29] 유로니무스의 부모님이 믹싱 작업을 하고 있던 헬해머에게 베이스를 다시 녹음해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나 헬해머는 베이스를 연주할 줄도 모르고 베이스 세션을 다시 구하기 귀찮아서 베이스가 녹음된 트랙의 볼륨만 낮추었다고 한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의 연주가 동시에 실린 앨범이라는 것. 한마디로 고인드립인 셈인데 유로니무스에 대한 평이 전 멤버들에게조차 얼마나 나빴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30] 네크로버처, 매니악(메이헴의 초대 보컬, 2004년 알콜 중독 때문에 팀에서 해고되었다. 현재는 아틸라가 정식 멤버로 들어와서 활동 중)[31] https://www.thetruemayhem.com/the-band/ [32] 초판에만 Outro가 있어서 1분 정도 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