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1. 개요
3.15 부정선거 후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벌인 학생 시위다. 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생들이 정치깡패들에게 습격 당해서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고 곧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시위는 '4.18 의거'라고 부르기도 한다.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나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종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발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중략...)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투쟁의 전위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후략)
고려대학생 4.18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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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기념비.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교정 소재.
2. 설명
3.15 부정선거 직후 부산, 대구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시위는 4월에 들어서야 서울에도 상륙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중심으로 대학 연합 시위가 본격적으로 계획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유기되었던 시신이 마산항 부두에서 발견되며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러한 사건들은 초기에는 시위에 다소 미온적이었던 대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고[1] 4월 15일에 있었던 합의에 따른 서울 시내 대학의 전체 거사일은 21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선수를 날린 것은 고려대학교였다. 마침 고려대 총학생회에서는 4월 16일 전체 신입생 환영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2] , 이때 학생들이 모인 틈을 타서 한꺼번에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내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의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고려대 총학생회에서는 이 행사를 18일로 연기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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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인 18일, 10시 50분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신호에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은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4] 앞까지 행진하여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행진 도중 경찰의 곤봉에 맞아 여러 사람이 쓰러지기도 했다.[5] 다만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대를 응원해 주기도 했다고.
국회의사당에서 유진오 당시 고려대 총장과 이철승 의원[6] 등과 면담한 학생들은 일단 저녁이 되자 집회를 해산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일부는 국회의사당 앞에 남아 농성을 결정한다. 나머지 시위대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학교로 복귀하기로 한다. 이때에도 복귀하는 동안 경찰로부터 평화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경찰차가 갑자기 시청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을지로 쪽으로 갔다. 경찰차가 깡패 습격을 위해 원래 경로가 아닌 다른 경로로 유도한 것이다.[7]
어쨌든 평화시위를 하면서 학교로 돌아가던 중 청계4가에서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 소속 정치깡패들에게 습격 받아 수십 명의 학생들과 몇 명의 기자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비교적 경미한 부상을 당한 학생들은 깡패들은 나오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교로 돌아가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아직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후술할 '학생 1명 사망?'의 주인공 되겠다.
당시에도 언론의 자유는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구타 당하여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이를 본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게 된다. #기사 당시 사진
지금도 그렇지만 대한민국에는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기풍이 짙게 남아있었으며, 학생 인구의 대다수가 대학과정을 거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와는 달리 문맹퇴치교육으로 겨우 문맹에서 벗어난 세대들이 사회생활하던 시절이었고, 1960년 시점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부모님 일을 돕거나 따로 취직을 해서 밥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학생이라고 하면 21세기 대학원생의 위치도 가볍게 넘어서는 국내 최고의 엘리트들이며 그야말로 앞으로 사회를 짊어지고 갈 동량이 될 인재로서 여겨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치깡패들은 일반 사회에서는 인간 쓰레기로 여겨지고 있어서 이후 군사 정권에서는 마구 사형시켜도 반발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학생 한 명이 한쪽 눈을 심하게 다쳐 사경을 헤맬 정도로 다친 바람에 병원으로 옮겨져 기사 표제로 '학생 1명 피살?'이라고 나갔는데, 물음표가 실제로 보면 눈에 띄지 않았기에 "깡패 새끼들이 대학생을 때려죽었다더라!"로 와전되어 시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특히 동아일보가 이를 앞장서서 보도했다.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가 인수한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의 전신이었기 때문.[8]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미 2월부터 특집코너로 부정선거 관련속보를 전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날 보도도 그의 연장선이라고 추측된다.[9]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에는 이 날을 기리는 의미에서 4.18기념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다만 4.18과 관련된 전시 공간은 아니며 교내 부처 사무실 혹은 복지공간으로 사용된다. 관련 전시물 관람은 고려대학교 박물관 백년사전시실에서 가능하다. 또한 4.18 구국대장정 혹은 정파에 따라서는 민중해방대장정이라 부르기도 하는 행사를 통해 매년 4.18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구타를 당한 건 사실인데, 구타를 당한 이유가 깡패들이 먼저 학생들한테 시비걸었다가 개발살나서 쪽팔린 나머지 나중에 몰래 습격해 구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낮부터 학생들과 깡패들의 소규모 충돌은 있었고[10] 이러한 것이 누적되어서 학생들이 동대문파의 구역에 들어섰을 때, 대규모 충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주장하는 쪽은 주로 당시의 깡패들이다. 자신들이 한 일이 계획적인 집단 폭력이 아닌 우발적인 일이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애초에 시위하고 있는 군중에게 시비를 건 것부터 무리수였다. 게다가 고려대학교 본 항목의 '야사모음집'에도 나와 있지만 당시 고려대생들은 어지간한 깡패들보다 더 깡패같은 학생들이었다.[11] 실제로 깡패가 쇠갈고리를 들고 "야 이 새끼들아!"라고 시비를 걸어서 한 학생이 "뭐 임마?"라고 대꾸했더니, 그 학생이 깡패가 형님으로 모시는 학생이어서 깡패가 "어이쿠 형님"하고 조용히 사라졌다는 일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대 학생 측에서도 부상자가 꽤 많이 나왔고 심지어 깡패들에게 서서히 밀리기도 했다. 이때 고려대학교 공수도부(現 태권도부)의 부장인 사학과 주석환이 '''"고대 죽었느냐, 공격 개시!"'''라고 외쳐서 고대생이 반격에 들어갔고, 결국 깡패들은 퇴각했다.[12]
2.1. 고려대생 사망자 1명 발생
고대신문 관련 기사
화학과 54학번 김왈영, 총격으로 숨지다.
4.18 고대생 의거의 60주년을 맞는 2020년, 60년만에 4.19 혁명의 고려대 희생자를 찾았다.
서명일 고려대학교 박물관 기록자료실 과장이 발견한 고대생 4·19혁명 희생자의 이름은 ‘김왈영(金曰寧)’이다(이때 ‘영’은 ‘편안할 녕’ 자다. ‘김왈녕’과 ‘김왈영’ 중, 묘비에 기재된 대로 ‘김왈영’이라 표기했다). 이는 60년 만에 새로운 역사로 기록된다.
유일한 고대생 4·19혁명 희생자로 확인된 김왈영은 서울 출신으로 1935년 7월 3일생이다. 서울 중앙고등학교[13] 를 졸업해 1954년 4월 1일 고려대학교 문리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1960년 4월 19일 있었던 경무대(오늘날 청와대) 앞 시위에 참여했다.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행된 부정과 불법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경무대로 몰려들었고, 당시 데모를 진압하던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사격이었다. 이날 경무대 앞 경찰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21명, 부상자는 172명이었다.
김왈영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데모 학생들이 탄 차를 몰고 경무대 입구 바리케이드를 뚫다 목에 총상을 입었다. 이후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후 5시경 사망했다.
보도과정에서 ‘김왈영’의 ‘왈(曰)’을 ‘일(日)’로 착각하고 ‘김일녕’이라 오기한 탓에, 여태까지 4.19 혁명의 고대생 사망자는 없었다고 인지되어 왔다.
하지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2020년 '4.18 의거 60주년 특별전'을 위해 전시 자료를 준비하던 중 서명일 과장은 언론에 보도된 사망자 명단 속 ‘고대문리대 김일녕’을 찾았다. 검토 끝에 '김일녕'이 고대생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국립4·19민주묘지 안장자 기록과 ‘김일녕’이라는 이름으로 전산화된 고려대학교 학적부의 생년월일과 사진을 비교해본 결과 '김왈영'임을 확인했다.
이로써 고대도 4.19 혁명으로 인한 사망자가 나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2.2. 4.18 고려대생 부상자 명단, 국가문화재로 지정
관련 기사
문화재청은 2020년, 4.19 혁명의 60주년을 맞아 '고려대생 시위대 피습 사건' 부상자 명단을 공개했다.
이 문서에는 4월 18일 당시 고려대 학생들이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는 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은 상황이 드러나 있다. 자세히는, "곤봉 엇개(어깨) 맞다", "머리 터지다", "천일 백화점 근처에서 깡패의 몽둥이로 후두부를 맞고 실신" 등의 구체적인 표현이 기재되어 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학과, 학번, 이름, 부상 정도 등 또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020년 4월 9일, 문화재청은 이를 포함한 4.19혁명 관련 문화유산 7건을 국가문화재로 등록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그중에서도 '고려대생 부상자 명단'은 올해 상반기 우선 등록을 추진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은 당시 정황을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높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민주화 문화유산으로는 최초로 지정된 국가문화재인 셈.
2.3. 깡패들의 최후
나중에 이 습격을 지휘한 임화수와 습격을 현장에서 주도했던 신정식은 교수형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정재의 부하인 낙화유수는 죽을 때까지 이 사건이 우발적이었으며 학생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발생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동아일보 기자에게 계획적이었다고 반박당하는 등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았다.
2.4. 고려대학생 4.18 선언문
1960년 4월 18일 오후 12시 50분 박찬세 고대신문 편집국장이 쓰고 이세기 정경대 학생위원장이 읽다.친애하는 고대학생제군!
한 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고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
존경하는 고대학생동지제군!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경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하겠다.
고대학생동지제군!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구호
1.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1.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1. 우리는 행동성이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1.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1.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고려대학생 4.18 선언문
3. 다른 매체에서
3.1. 제2공화국
시위 규모가 갈수록 커지자 박마리아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그냥 사태를 확 키워 계엄령을 선포할 명분이라도 만들자는 의도에서 신도환에게 시위대 습격을 지시하는 식으로 나온다. 이에 신도환이 임화수, 유지광에게 지시해서 깡패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생들을 습격한다. 물론 이 때문에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4.19 혁명이 촉발되어 박마리아가 의도한 대로 계엄령이 선포되지만 정작 계엄 사령관인 송요찬이 선을 지키면서 과격 진압을 거부했기에 이기붕 일가는 결국 집까지 잃고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깡패들 분장은 그야말로 동네 양아치들 수준으로 나오며 심지어 쇠사슬까지 들고 다니기도 한다.
3.2. 야인시대
사실상 동대문 사단 주먹패들의 생사가 갈리게 된 사건. 학생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유지광은 부하 주먹패들에게 절대로 시위진압에 참여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때문에 유지광, 도꾸야마, 낙화유수, 독사는 시위를 관전만 할 뿐 시위진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일 백화점 골목에 있던 고바우와 돼지, 망치, 김삼수, 권상사 등 다른 하급 주먹패들은 시위하던 고대생들을 습격해, 학생들을 몽둥이로 진압해버린다. 이 때 최동열 등 언론인들이 있었기에, 깡패들이 학생들을 여럿 때려죽였다는 기사가 대문장만하게 신문에 실린다. 사건 직후 유지광은 부하들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혼을 내고 거기다 이석재까지 회장님이 찾으신다며 유지광을 찾아온다. 조열승은 임화수를 찾아가 왜 이런짓을 했냐며 크게 따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 와중에 반공청년단이 전화를 걸어 신문사를 테러할 것을[14] 요구했으나 도꾸야마는 대놓고 거부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학생들을 구타한 주먹패들은 훗날 혁명재판에서 사형이나 중형을 선고받아 조리돌림을 당하고 파멸한 반면 시위 당시 가만히 있던 주먹패들은 책임자 유지광을 제외하고는 잡혀가지 않았고 그나마 잡혀갔던 유지광도 재판 과정에서 사형→무기징역을 거쳐 훗날 석방됐다.
습격 시간이나 시위대가 경무대로 진입하는 장면의 시간대 등 극소수의 일부만 빼면 연출이나 대사 상당수가 무풍지대와 겹치는 게 많다. 무풍지대나 야인시대나 둘 다 이환경이 극본을 맡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