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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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의 아내이다.
2. 생애
1911년 4월 21일에 경상남도 용남군 명정동에서 대한제국 때 군인이었던 아버지 공도빈(孔道彬)과 어머니 방말선(方末善) 사이에 7남매 중 2녀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후 홀어머니와 언니 밑에서 자랐다. 통영공립보통학교(現 통영초등학교), 동래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요코하마공립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해 고문을 받기도 했다. 광복 이후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다.
윤보선과는 15세 정도 차이임에도 결혼을 했다.[3] (단, 당시 공덕귀의 나이가 39세로, 당시 여성으로는 엄청나게 결혼이 늦은 상황이어서 윤보선이 재혼이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남에도 친정에서는 결혼을 강하게 찬성하였다고 한다.) 결혼 직후 “1949년 1월 6일 안국동 8번지(당시 윤보선의 집)로 귀양을 왔다”고 할 정도로 시집살이가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윤보선이나 시가 식구들이 그녀를 박대한 것은 물론 아니고, 오히려 잘 대해 주었다. 다만 공덕귀는 본래 피아노, 수영에 능한 활달한 성격에 결혼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로 유학을 가서 신학을 전공하고 인도로 전도를 갈 예정이었지만, 집안의 강요로[4]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윤보선 가문은 당시의 명문가[5] 답게 가풍이 엄격했으니 고등교육[6] 을 받은 공덕귀로선 더욱 시집살이를 갑갑하게 여겼을 법 하다.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도 청와대에 들어가길 싫어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공덕귀는 5.16 군사정변으로 1년 6개월만에 영부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영부인에서 물러난 뒤로도 기생관광 반대 운동, 원폭 피해자 돕기 운동 등을 전개하며 사회운동가로 적극 활동하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윤 전 대통령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은 이후로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구속자 가족 협의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가장 위험한 시위 현장을 골라 돌아다녔다. 왕년의 ‘대통령 영부인’을 함부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정작 남편인 윤보선은 유신 때 야당 생활을 하다가 5공화국 때 슬그머니 전두환에게 달라 붙는 추태를 보였다. 이런 남편 때문에 맘고생이 심했다고...
슬하에는 혈연관계가 없는 딸[7] 2명과 본인이 낳은 친아들 2명이 있다.
종교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개신교(장로회)이다.
최초의 '''한국인''' 영부인[8] 이기도 하다.
[1] 도로명주소 미발급.[2] 윤보선 대통령 역장과 합장되어 있음[3] 전임자의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도 이승만과 25세 정도 차이가 난다. 윤보선에게는 재혼이다.[4] 덤으로, 미국 유학 자금을 어느 목사가 삥땅치는 바람에...[5] 윤보선의 할아버지가 윤영렬, 삼촌이 윤치영, 오촌이 윤치호이다.[6] 당시 대부분의 여성이 정규교육을 받지 않던 시절임에도(실제로 최규하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홍기는 정규교육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대학 수준의 교육까지 받은 엘리트 중 엘리트 여성이었다.[7] 윤보선이 사별한 첫번째 부인인 여흥 민씨(본명은 알려지지 않음) 사이에서 얻은 자녀들이다. [8] 대한민국의 첫 영부인 타이틀은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갖고 있지만, 프란체스카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혈통의 영부인은 공덕귀가 최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