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조계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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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구(舊) 조계사종?
3. 조계사로 간 범종
4. 국보에서 해제되다
5. 위작 관련 논란
6. 현재의 상황
7. 같이보기


1. 개요


일제강점기시대 현 동국대학교 자리에 있던 일본 사찰인 대화정 조계사에 걸려있던 범종.[1]
현재까지도 진품인가 위작인가를 놓고 첨예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논란의 유물인데, 진품일 경우 통일신라에서 제작된 1,200여년이나 된 국보급 종이고 위작설에 따를 경우 과거에 존재했던 진짜 범종을 반출하고 일제가 가짜 종을 대신 걸어둔 것이 된다. 일제강점기 조계사가 폐사한 이후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 옮겨졌다가 2010년 원래 있던 경기도 양평 상원사로 옮겨졌다.

2. 구(舊) 조계사종?


구(舊) 조계사종은 원래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에 있던 상원사에 걸려있던 범종이라고 하여 "용문산 상원사종"으로 불리기도 했다.[2] 그러나 본래 이 종이 걸려있던 절은 원래는 용문산의 상원사가 아니라 그 상원사에서 가까운 산 밑에 있던 절 '''보리사'''에 걸린 범종이었다. 보리사가 폐사가 되면서 그곳에 있던 범종을 가까운 용문산 상원사로 옮겨와 걸어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이 종의 명칭은 원래 있던 절의 이름을 따서 '보리사 종'이나 '보리사 범종'이라고 해야 적절하다.
좀 복잡한 문제이지만, 위작설에 따르면 보리사 범종과 현재 보광사에 소장중인 '구(舊) 조계사종'은 '''보리사 범종을 위조한 범종'''이 된다. 그러나 진품설을 따르면 보리사 범종이 바로 구(舊) 조계사종이다.

3. 조계사로 간 범종


양평 용문산 일대는 구한말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고 일본군은 의병들의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용문산 일대의 사찰들을 무차별로 불질렀다. 이때 범종이 걸려있던 상원사도 불에 타게 되는데 천만다행으로 범종만은 소실을 면했다.
교토에 있던 정토종 사찰인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는 일제의 후원을 받아가며 조선 진출을 꾀한 끝에 을사조약 이듬해 1906년서울특별시 남산 아래에 '동본원사 경성별원'을 개창하게 된다. 이 절이 바로 대화정 조계사다.[3]
동본원사 경성별원, 즉 조계사는 범종을 걸기 위해 여러 군데를 수소문하다가 전소된 상원사에 범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사들이게 된다. 대체로 1907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능화는 1909년에 환속한 승려가 팔아넘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이능화가 연도는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종이 조계사로 넘어간 정황은 정확하게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범종을 사들인 조계사는 상원사에서 용문역까지 인근 연수리 주민들을 대거 동원해 범종을 옮겼고 1908년 4월 23일에 범종을 겨우 경성까지 옮겨왔다. 이틀 뒤에 경성별원 설교장에 범종을 걸고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후 이 종은 '경성별원종'으로 불렸고 일제시대에는 연말에 제야의 종을 이 종으로 쳤다고 한다. 그리고 경성방송국에서 그 타종을 라디오 생중계로 진행했다고 한다. 즉 현재의 보신각종이 하던 역할을 원래는 구(舊) 조계사종이 했다는 이야기다.
1939년조선총독부는 이 종을 보물로 지정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한국 고미술과 고건축을 연구하던 세키노 다다시의 평가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세키노 다다시는 제작연대는 불분명하나 고려초에 제작된 범종으로 신라양식과 중국양식을 절충한 독특한 종이자 우아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 남산의 조선신궁조선신사, 박문사등이 모두 폐쇄되고 철거될 때 조계사도 같은 처지가 되었고 그 시점에 범종은 종로의 태고사로 옮겨졌다. 이후 태고사가 조계사로 이름이 바뀌면서 조계사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정부의 문화재 조사 이후로 국보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4. 국보에서 해제되다


그런데 1962년 12월 12일에 문화재위원회는 이 범종을 국보에서 해제했다. 해제의 사유는 이 범종이 진품이 아니라 위작이라는 것이었다. 위작 판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황수영 교수의 주장이 컸다.
황수영 교수는 구(舊) 조계사종은 한국 범종의 전통 양식과 확연하게 다른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결정적으로 종의 윗부분인 용뉴가 한국종은 단룡인데[4] 이 종은 두 마리의 용이 형상화된 쌍룡뉴였고 또한 종의 문양이 가사문의 형태인데 이는 일본 범종의 전형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일본인이 만든 가짜라고 주장했다. 황수영 교수는 원래 있던 보리사 범종을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빼돌리고 경성별원에는 대충 만든 위작을 옮겨서 걸어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황수영 교수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구(舊) 조계사종은 결국 국보에서 해제되었고 일본이 만든 가짜 범종이라는 비난 속에 결국 1998년 조계사는 이 종을 양주의 보광사로 옮겨버렸다. 그랬다가 2010년에 원래 종이 있던 절인 양주 상원사로 옮겨졌다.

5. 위작 관련 논란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황수영 교수의 위작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경성별원은 이미 돈을 주고 이 종을 사들인 상태였다. 즉 다시 말하자면 형식적이든 어쨌든 간에 외견상 보이는 바로는 정상적으로 종을 구매했다라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동본원사의 입장에선 굳이 위조품까지 만들어가면서 빼돌릴 이유가 있는 건지는 의문스럽다. 게다가 일본이 한국 문화재를 반출해간 것을 보면 그냥 가져가 버리지 위작까지 만들어가며 빼돌린 경우는 없다.
  • 범종을 제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무리 위조품이라고 해도 말이다. 성덕대왕신종만 해도 여러번의 실패를 거쳐서 수십년만에 간신히 만들었고 현재 보신각에 걸려있는 보신각종만 해도 제작기간이 1년 7개월이 걸렸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종 만드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일본 범종이라고 뚝딱 나올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이게 일본에서 만들어진 종이라면 일본에서 실어와야 할텐데 운반 과정에도 시간이 걸린다. 이 모든 일을 1907년 7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약 9개월만에 뚝딱 해치우는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 구(舊) 조계사종을 자세히 살펴보면 흠집 자국이 남아있다. 꽃집 테두리 중심부에 나뭇잎 모양의 흠집이 남아있는데 마치 총알이나 포탄이 튕겨나간 듯한 모양새다. 만약 이 흉터가 총알이나 포탄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일본군이 상원사를 불태울 때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즉, 원래 상원사에 걸려있던 진품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 일본으로 빼돌려 졌다는 '진품' 범종의 행방이 묘연하다. 만약 동본원사가 빼돌렸다면 동본원사 어딘가에 있거나 일본 어딘가에는 있어야 하는데 일본 어디에서도 빼돌려졌다는 진품 범종의 행방은 현재까지도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위작설을 제기한 황수영 교수도 진품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반출 도중에 파기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내놓았지만 이 추측은 터무니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이 바보도 아니고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해서 일본까지 운반해온 걸 아무런 생각도 없이 파기한다는 게 과연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 걸까? 게다가 범종은 크고 무거운 것이라 아무리 몰래 옮기더라도 어딘가에는 운송의 흔적이 반드시 남아있을 텐데 그런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위작설을 반박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석도륜으로 국보에서 해제된 지 2년 후인 1964년에 <한국고금순례>라는 책에서 구(舊) 조계사종은 진품이며 신라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황수영은 이듬해 <조명기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에서 다시금 위작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후 2년 뒤인 1967년에는 츠보이 료헤이가 진단학보 31호에 낸 '전 상원사종고'에서 세키노 다다시의 평가와 비슷하게 한국 범종과 초기 중국 범중의 형식을 절충한 독특한 양식의 범종이라는 평가와 함께 진품이란 주장을 펼쳤고 1972년에 남천우 교수가 다시금 진품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남천우 교수는 7세기에 제작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이라는 주장까지 펼치기도 했다.
성낙주 또한 구(舊) 조계사종은 진품이라고 주장하며 이 종이 중국의 범종양식을 들여온 신라가 오대산 상원사 범종과 성덕대왕신종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는 진품 신라범종이라고 보았다. 그 근거는…
  • 황수영 교수가 위작의 근거로 제시한 쌍룡뉴와 가사문은 원래 초기 중국 범종의 형태다. 이런 초기 중국 범종의 형태가 신라와 일본에 전해졌을 것이고 그렇게 본다면 단순히 쌍룡뉴와 가사문만을 가지고 일본 범종의 형태와 같으니 일본에서 만든 위조품이라고 보는 건 너무 단순한 합리화라는 것이다.[5]
  • 오대산 상원사 범종과 성덕대왕신종에서 형성돤 단룡뉴와 원통의 형식은 만파식적에서 나왔다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대로라면 단룡뉴와 원통이 없다는 것은 만파식적이 나오기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일본인들이 모조품을 만들려고 했다면 원래 있던 종의 형태를 본떠서 만들지 굳이 일본 범종처럼 만들 이유가 있었을까? 위작은 본래 진짜처럼 보이려고 만드는 것이란 걸 상기한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만약 진품 보리사 범종이 존재하고 단룡뉴와 원통이 있었다면 일본인들도 그런 형식을 조잡하게나마 본떠서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까?
  • 구(舊) 조계사종의 표면에 새겨진 비천조각에는 구름무늬인 운좌가 없다. 위작설에 따르면 운좌가 없는 것은 위조 과정에서의 실수라고 말하지만 복잡한 비천조각은 하면서 그보다 간단한 운좌는 왜 빼먹은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황수영 교수는 당시 범종의 운반에 참여했던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내세우고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농촌의 순박한 청년들이 56년의 세월이 흘러서 70~80세가 되었을 때에 한 증언이 얼마나 정확한 건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한국 범종과 일본 범종의 차이를 알았을리도 만무하다. 이들의 증언만을 가지고 위작설을 제기하는 건 학술적이지 않다.
  • 동본원사 경성별원은 일본 불교가 한국 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거창하게 세운 절이다. 이런 절에서 가짜 범종을 걸어놓고 수십 년 동안 가짜 범종을 치면서 예불을 드렸다는 결론이 된다. 게다가 이 가짜 범종은 일제시대 내내 제야의 종소리로 조선 전국에 생중계까지 된 종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조잡하게 만든 가짜 범종이라면(그것도 단 9개월에 뚝딱 해치운) 제대로 된 소리가 날 리가 없는데 일제시대 내내 어느 누구도 구(舊) 조계사종의 소리가 이상하다느니 하는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위작설을 전부 받아들이면 일본인들은 9개월 만에 청아한 소리를 내는 훌륭한 가짜 범종을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엄청난 기술력이 있단 결론이 나온다.[6]

6. 현재의 상황


이런 논란이 계속되자 결국 구(舊) 조계사종에 대한 과학적인 정밀조사가 진행되었다. 카이스트 전통과학기술단에 의해 진행된 과학조사 결과 구(舊) 조계사종은 '''한국 전통의 재료를 사용한 밀랍법에 의해 제조된 범종'''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게다가 구(舊) 조계사종의 성분을 분석해본 결과,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구성성분과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일본에서 만든 가짜 범종이라는 주장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의 나라 시대, 가마쿠라 시대, 에도 시대 등의 범종의 구성성분과도 비교해 보았지만 화학적 조성에서 큰 차이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납동위원소비는 80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의 선림원종과 일치한다는 결과도 나왔다.

성덕대왕신종과 선림원종, 구(舊) 조계사종이 모두 같은 납동위원소비를 나타냈고 한국의 전통적인 청동제품의 납동위원소비보다는 낮은 쪽이지만 북한, 중국, 일본의 납광산의 납동위원소비와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즉, 다시 말해서 성덕대왕신종과 선림원종, 구(舊) 조계사종은 모두 신라에서 채굴된 을 사용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또한 비천조각의 신녀가 4현 비파를 타고 있는데 이는 당나라 시대의 4현 비파로 통일신라시대와 일치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결과는 구(舊) 조계사종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진품'''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범종의 내부가 근대의 재료로 훼손된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종의 윗부분인 천판 중심부의 납 성분이 천판의 다른 부위의 납 성분보다 납 함유량이 9배나 더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범종 주조 이후에 누군가가 근대의 재료로 범종을 훼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천판에 새긴 명문을 지워버리려 하지 않았는가 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과학적 분석결과를 근거로 일각에서 구(舊) 조계사종의 국보 재지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구(舊) 조계사종이 통일신라의 진품으로 공인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 주류의견이다.

7. 같이보기


[1] 참고로 대화정 조계사는 현재의 조계사와는 다른 사찰이다.[2] 강원도에 존재하는 오대산 상원사와는 당연히 다른 절이다. 용문산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면 오대산 상원사의 범종과 오해할 우려가 있다. 마침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 동종도 국보급 통일신라 범종이 걸려있어 오해하기 쉽다.[3] 현재의 조계사는 일제강점기에는 태고사라 불렸다.[4] 오대산의 상원사 범종과 국립경주박물관성덕대왕신종이 모두 단룡 형식의 용뉴의 대표적 형태다.[5] 사족을 달자면, 고유한 단룡뉴 양식을 갖고있던 우리나라도 쌍룡뉴를 안쓴 것도 아니다. 화재로 파괴되었던 낙산사 동종이나 선암사 소장 대원사 부도암종과 화순 만연사종등 여러 조선시대 범종 유물들만 해도 쌍룡뉴를 하고 있다.[6] 여담이지만 일본 범종과 한국 범종은 제작기법이 다르기 때문에 범종의 소리도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