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성

 



'''홍윤성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조선의 영의정'''
'''《第 38 代》'''
'''世宗 7年~
成宗 6年'''

'''제38대'''
'''1469.8.22~
1470.4.6'''









洪允成
(1425 ~ 1475[1])
1. 개요
2. 생애
3. 관련 매체


1. 개요


조선 세조 때의 신하이자 조선의 연쇄살인마다. 본관은 회인, 호는 영해, 시호는 위평.

2. 생애


양민 출신으로 1450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무인의 기질이 뛰어나서 사복시에 발탁되었다. 이어 한성참군 등을 역임했는데 야망이 있던 수양대군과 의기투합하게 된다. 수양대군이 홍윤성에게 반란을 도모할 의사가 있는지 홍윤성을 떠보자 "장부라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며 망설이지 않고 가담했으며 계유정난이 있던 날에는 무사들의 호응이 예상외로 시원치 않자 당황하여 결단을 못하는 세조에게 "군사를 일으키는데 가장 난관인 것이 바로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며 부추겨서 계유정난의 감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적 덕분에 계유정난 이후 2등 공신, 인산군(仁山君)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홍윤성은 권세를 휘두르며 세간의 비난과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행패를 부렸고 남이 베풀어준 호의는 아랑곳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패악질을 해댔다. 집 앞에 말을 타고 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해 반드시 감시해 말 타고 지나가는 이를 두들겨 패게 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여서 야사에서는 홍윤성을 살인마 정승이라 불렀을 정도.
홍윤성이 정승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홍윤성 고향의 유향소에서 노비 두 사람을 선물로 주었는데 홍윤성은 노비들이 튼실하지 못하다며 노비를 고른 담당자인 나계문을 잡아가서 죽기 직전까지 팼고 나계문이 일생에 걸쳐 가꾼 나무들을 베어버렸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집 종의 남편인 김돌산이 3명의 동조자들과 함께 나계문을 발가벗겨서 때려죽였다. 하지만 관아는 홍윤성의 권세가 무서워 홍윤성의 명을 받아 아전을 때린 김돌산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홍윤성의 폭행에 가담한 3명의 종만 체포하여 조사하는 시늉을 했으며 홍윤성 집의 종들이 떼로 몰려와서 이들을 풀어줘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나계문의 아내 윤덕녕은 감사에게 진정을 하는 등 억울함을 풀기 위해 만방으로 뛰어다녔으나 감사는 홍 정승의 비위를 건드렸으면 죽어도 싸다는 이유로 일가를 오히려 옥에 가두어버렸다.[2] 아내 윤덕녕은 온양 온천에서 요양 중인 세조를 직접 찾아가서 진정했고 세조는 크게 노하여 김돌산을 능지처참하고 함께 폭행에 가담한 종들을 참수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든 수령과 아전들을 죄다 곤장을 쳐서 유배했으며 감사도 잘라버렸다. 그리고 아전의 아내에게 10섬의 을 내려 지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노력함이 가상하다고 치하했으나 홍윤성은 벌주지 않았다. 일화는 홍윤성이 노비를 선물로 받은 주제에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온갖 악행을 일삼았을 정도로 포악한 인물이었다는 것과 정작 패악을 부린 당사자는 처벌받지 않았고 노비만 처형되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홍윤성은 하루가 멀다하고 만행을 저질렀으나 그럼에도 세조는 홍윤성을 감싸고 벼슬을 자꾸 올려 주었다. 심지어 홍윤성을 어릴 때 거두어 돌보던 숙부가 홍윤성을 찾아와 벼슬 자리를 하나 부탁하자 홍윤성은 논 스무 마지기를 요구하여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삼촌을 때려죽이고 앞마당에 암매장했다. 벼슬을 청탁한 숙부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때는 딱히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홍윤성의 숙모가 원한을 품고 세조에게 탄원하였는데 공신을 죽일 수는 없다하여 홍윤성의 몸종들만 도륙당했다. 그리고는 이게 술 탓이니 술을 금하라는 금주령을 내렸으나 홍윤성이 "신은 술이 없으면 죽습니다."라고 보채서 취소시켰다고 한다. 세조가 직접 경음당(鯨飮堂)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고 도장까지 내려주었는데 고래 경 자에 마실 음 자이니 경음이라는 건 술고래라는 뜻이다.
포악한 성격으로 밑사람을 하도 괴롭혀서 온갖 욕을 먹었으나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세조 시절 평안도 군량미 30만 석을 혼자서 횡령했었음에도 세조가 덮어주었을 정도였다. 다만 덮어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에 하루는 술자리에서 자중하지 않으면 숙부를 죽인 죄를 물어 극형에 처하겠다고 꾸짖었는데 이에 홍윤성은 '주상께서는 조카를 죽이시지 않았느냐'고 여유롭게 되받았고 세조는 배짱이 남다르다며 웃고 말았다고 한다. 술자리에서는 군신 간의 예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왕명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냥 배짱이 남다른 정도가 아닌데 그럼에도 용서한 것은 세조가 술자리에서 저지르는 망언에 관대했던 것도 있고 홍윤성이 세간의 욕을 얻어먹으면 얻을수록 보신 차원에서라도 세조에게 충성을 다 바칠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조 사후 예종, 성종 때는 위세가 꺾이긴 했어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50세로 죽었는데 병으로 쓰러져 의원들이 가망이 없다고 하자 의원들에게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3] 자식을 남기지 못해[4] 홍윤성의 재산은 애첩이 상속받았는데 애첩은 재산으로 풍족하게 살다가 갔으며 정작 홍윤성에게 제사 1번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정수터에 묻혔는데 생전에 저지른 악행이 엄청나다는 이유로 홍윤성이 쓴 글은 성주군 세조대왕태실비문을 제외하고 모조리 불태워졌다. 원한이 있던 사람들이 와서 무덤 비석을 깨부수고 침을 뱉었지만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두어 마침내는 성종이 홍윤성을 치하하며 세운 묘비문이고 뭐고 남아있던게 없었다고 한다. 한참 뒤에야 조정에서 죽은 이에게 너무하다고 다시 묘비문을 세웠지만 그마저도 관리가 안 되었으며 현재는 향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2003년 무덤 앞에 있는 장명 등이 도난당하고 무덤에 오줌을 누던 사람까지 나타나는 등 배척당하고 있다.

3. 관련 매체


개화기에 이해조(1869~1927)가 쓴 홍윤성전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여기에서 홍윤성은 정의롭고 용맹한 영웅 호걸로 묘사되었다. 조선 시대에 쓰인 동명의 작품도 있는데, 이건 작가가 누군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두호가 88년부터 90년까지 월간 성인만화지 만화광장에 연재했던 덩더꿍에서는 홍성윤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왕족인 양수대군을 도와 제위시킨 1등 공신으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린다. 노비인 장독대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학대하여 크게 다치게 만든다. 아버지가 치료비라도 어찌 부탁한다고 애원하자 손수 칼로 부모를 죽인 천하의 호로잡썅놈이자 최종빌런. 악연은 이걸로 끝나는게 아니라 버려지고 겨울날에 굶어죽어가던 독대를 구해준 첫 사랑 길님이(홍윤성의 노비였다.)까지도 술상에서 수발을 들지 않는다며 손수 활로 쏴 죽였다. 포스는 장난 아니라 길님이 시체를 쓰러지지 않게 했다고 노려보는데 독대는 그저 노려보는 홍성윤을 보고 오줌까지 지렸고, "알았다. 더 따지지 않을테니 그 시체를 그냥 강물에다 내다버리거라."는 명령을 듣었을때 그 말이 부처님이 지옥에서 구해주는 자비같았다고 나중에 회고할 정도였으며 당시에는 그저 "예예...이런 쌍것은 죽여서 내다버려야 합죠."라고 말하면서 손수 길님이 시체를 강물에 내다버리고 절규했다. 거기에 몸종으로 팔려나간 누이도 홍성윤 덕분에 죽게 되니 원수지간이 제대로 된 셈이다. 이 만화에서 그려진 힘없는 주인공이 겪는 번민과 절규가 소름끼칠 정도인데 길님이 죽은 걸 독대는 어디에도 하소연도 못하고 주막에서 술먹다가 취해 술병이나 깨부수는 수준으로 화풀이할뿐. 버럭거린 주모나 술집에서 술먹던 덩치들에게 죽어라 쳐맞는다. 나중엔 자신을 구해준 스님까지 어찌하여 그만 죽이고 ....스님은 그다지 탓하지 않으며 죽었으나 독대는 절규하여 그 벌이라며 스스로 한쪽눈을 찔러 애꾸가 되어버리기까지 한다. 편안히 죽은 실제 인물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독대에게 원한에 찬 칼에 맞아 죽는데, 이두호가 홍윤성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이런 자가 편안하게 죽은 데 격분해서 의도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독대는 분노한 양수대군, 아니 왕에게 노여움을 받아 공개 참수형을 당한다. 그리고 그 목을 효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이대근이 연기했는데, 호탕하고 쾌활한 인물로 한명회에서의 이미지와 상당히 유사하다. 아무래도 작가가 동일인물이어서 그런 듯.
사극 한명회에서는 쾌남아 캐릭터를 탁월하게 소화하는 배우로 유명한 김형일이 열연했는데, 이미지는 이두호의 만화에서 따왔으나 다른 세조 측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미화되어 우직하고 충성스러우며 인의를 아는 호걸로 그려진다. 특히 용력에서는 조선 최고라고 할 만한 장사로, 바위를 집어던지며 힘 자랑을 하는 장면은 어찌 보면 멋지지만 어찌 보면 실소를 머금게 하기도 한다.
왕과 비에서도 김형일이 홍윤성을 맡았는데, 특히 궁술을 비롯해 무술 실력은 있으나 쓰레기 인성을 가진, 고증이 잘 된 인물상을 보여주었다. 운검이 폐지되자 거사를 망설이는 성삼문 등을 선비와는 일을 못하겠다며 일단 수양을 베고 시작하자는 유응부 등의 길을 군졸들과 함께 무력으로 막아서기도 한다. 사육신을 처형하는 장면에서는 신하들이 눈을 돌리자 역적들의 말로를 똑똑히 지켜봐야지 어느 놈이 감히 눈을 돌리냐며 일갈하거나, 한명회가 불리한 정국에서 가만히 몸을 사리며 기회를 노리는 것을 두고 평소에 형님이라 부르던 것을 싹 집어치우고 '칠삭둥이 한명회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나 보자! 참으로 볼 만할 터이니!' 라는 식으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등 인격적으로는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그려진다. 왕과 비가 한명회 못지않게 세조 미화로 혹평을 듣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왕과 비에서의 미화 없는 홍윤성의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무리 미화를 하려 해도 결국 수양대군 일파의 만행은 그려져야 하니, 그중 일부가 미화된다면 최소 나머지 일당이라도 그대로 악하거나 오히려 더욱 나쁜놈으로 나올 수밖에 없긴 하다. 죄다 미화된 좋은 놈들이면 계유정난도 왕위 찬탈도 단종복위시도도 없었을 것이니..
다음 만화속세상의 19금 일요 웹툰 살생부에서는 실제와 같이 탐관오리의 교본을 보여주는 듯 하는 악역인데, 주인공 이화에게 죽는다.
광대들: 풍문조작단에서는 최원영이 연기하였다.
[1] 음력 9월 8일, 양력 10월 7일[2] 조선 시대에 양인이나 상민이 양반에게 소송을 걸면 강상 윤리를 깨려는 자로 몰려서 사실 여부를 떠나 처벌받았다. 본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정도는 허용되었지만 규정이 엄격해서 실제로 소송하기가 쉽지 않았다.[3] 같이 정난을 성공시킨 신숙주는 58세, 한명회는 72세, 정창손은 85세까지 살았지만 권람은 49살로 죽었듯이 다 홍윤성보다 오래 산 건 아니다. 아무래도 아직도 많은 재산 쌓아두고 죽는 게 두고두고 아쉬웠는 듯.[4] 봉사손도 없었는데 회인 홍씨 가문에서도 홍윤성의 악명 때문에 홍윤성의 봉사손을 배출하기를 꺼려한 듯하다. 다만 홍윤성이 온갖 만행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걸로 보아 만약 세조의 치세에 홍윤성이 일찍 죽음을 맞이했다면 회인 홍씨 가문은 해당 대체역사에서 홍윤성의 죽음을 슬퍼했을 세조를 의식해서라도 억지로나마 자신들 중 누군가가 홍윤성의 봉사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 홍윤성이 세조 사후에도 안 좋은 일을 당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간 것과 별개로 세조의 죽음으로 인해 더이상 세조와 같은 든든한 빽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종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빽이 있지 않았냐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홍윤성이 죽을 당시에는 한명회의 딸이자 성종의 비였던 공혜왕후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한명회는 더 이상 외척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리고 홍윤성 정도의 인간성이라면 같은 계유정난 공신이라 해도 실드치기 힘들 것이다. 홍윤성을 제외한 다른 계유정난 공신들도 단종 본인 및 단종의 충신들, 단종을 동정하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홍윤성과 똑같이 천하의 개쌍놈이었지만 최소한 세조 즉위 후에는 홍윤성처럼 막나가는 언행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람도 온갖 행패를 부렸으나 적어도, 비리같은 건 있을지언정 대놓고 무고한 백성을 죽이던 홍윤성처럼 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