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조선)

 



楊汀
? ~ 1466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조선 세조 대의 무신이자 정치깡패.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의 유모 혜빈 양씨와는 9촌 숙질 사이로 혜빈 양씨가 양정의 9촌 고모뻘이다.

2. 생애


양정은 고려말 도첨의정승을 지낸 양기의 5대손이다. 양기는 원나라 사람으로 공민왕의 왕비로 고려에 시집온 노국대장공주의 배종으로 수행하여 고려에 입국했다. 양정은 양기의 아들 중 양만수의 4대손으로 양만수의 동생 양지수는 혜빈 양씨의 증조부이고 양지수의 아들 호조판서 양첨식이 혜빈 양씨의 할아버지이다.
양정은 한명회의 추천으로 수양대군에게 가담했고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두루 공을 세웠다. 아닌 게 아니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직접 찔러 죽이고, 숨어있던 김종서를 찾아내 베었던 핵심 공신이 바로 양정이다.
그 후 북방 사령관으로 일하다가 신숙주홍윤성의 야인 토벌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신숙주가 문관이라서 무시하고 멋대로 몰래 병사들을 이끌고 여진들을 공격하다가 역으로 공격받아 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신숙주는 양정의 실수를 눈감아주었다. 이렇게 신숙주를 무시하다가 망신당한 일을 제외하면 딱히 세조의 공신들답게(?) 별 일은 없었다.
그런데 후일 세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해 처형당하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세조에게 양위할 것을 종용했다가 목이 날아갔는데 사실 그가 저지른 이 짓은 엄청난 일이다. 조선 왕조 500년 내내 대신에 의해 하야가 권유된 일이 딱 네 번인데 두번째가 양정 사건이고 첫번째가 이방원의 선위파동에서 수회차 진심없이 충성심 테스트만 하던 태종을 두고 정 그러며 뜻대로 하시라며 하륜이 발언한 일, 셋째가 유성룡, 정철이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자꾸 명나라로 넘어갈 눈치를 보이자 이왕 갈거면 광해군에게 양위하고 가라고 말하려다 말아 그나마 미수에 그친 일이며 마지막이 송병준헤이그 밀사사건을 일으킨 고종 보고 "너님 미쳤구나? 어떻게 일본 천황 폐하에게 그런 극악한 죄를 지을 수 있니? 어서 퇴위해서 사죄해라!"라고 깽판을 친 일이다.
이 중에서 두번은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해있던 경우다. 그나마도 임금이 의주까지 피란을 와서 중국으로 넘어가려고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음을 어필하는 상황에서도 대신들이 감히 하야를 권유하지 못했는데 양정은 세조의 위엄과 권위가 여전히 건재한 가운데 양위를 요구하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건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1466년, 즉 세조 12년에 양정은 오랜 북방 근무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왔고 이에 세조는 연회를 베풀어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했다. 이에 세자와 신숙주, 한명회, 병조판서 김국광(金國光), 이조판서 한계희(韓繼禧), 도총관(都摠管) 심회(沈澮), 위장(衛將) 오자경(吳子慶), 허형손(許亨孫), 신주(辛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서거정(徐居正) 등의 대신들이 참석했고 한창 흥이 무르익던 찰나였다.
당시 논쟁 공연이란 것을 즐기던 세조는 그 날도 가장 총애하던 두 논쟁꾼인 최호원과 안효례를 데려와 논쟁을 즐기려고 했는데 둘은 세조가 '니들 기분 나쁜거라도 있냐?'라고 재촉까지 했는데도 신경전을 벌이며 입을 열지 않았고 술에 취한 세조는 "임금이 명하는데 이것들이 말을 안해? 니들이 그러고도 신하냐?"라고 화를 내고 둘을 하옥하게 했다. 좌중은 급격히 싸늘해졌는데 세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세조가 이런 적이 한두번은 아니다. 술만 들어가면 까불었던 정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바른말 한번 했다가 강맹경은 최단임 영의정 기록을 세워야 했고 권람은 최단임 좌의정 기록을 세워야 했다. 아마 세조의 특성상 술김에 확 하옥시키긴 했어도 며칠 안가서 풀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양정이 갑자기 세조 앞에 꿇어앉았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대화이다.
양정(楊汀)이 앞에 나아와 끓어앉아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어찌 과도하게 근로(勤勞)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주(君主)는 만기(萬機)를 모두 다스리고 있으니, 어찌 근심하고 부지런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양정이 대답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임어(臨御)하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오로지 한가하게 안일(安逸)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말하는 바는 곧 사시(四時)의 순서(順序)에 성공(成功)한 자는 물러 간다는 것인가?”
하니, 양정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부터 왕위(王位)에서 물러나 스스로 편안하려고 했으나 감히 하지 못하였다.”
하니, 양정이 말하기를,
“이것이 신(臣)의 마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서방(西方)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서방의 인심(人心)도 또한 이와 같던가?”
하니, 양정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그 누구들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죽고, 신숙주와 한명회도 죽고, 경(卿)도 또한 죽어서 임금과 신하가 모두 죽는다면 국가의 일은 누가 다스리겠는가?”
하니, 양정이 대답하기를,
“차차(次次)로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임금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
하고, 즉시 승지(承旨) 등에게 명하여 대보(大寶)를 가지고 오게 하여 즉시 세자(世子)에게 왕위(王位)를 전하려고 하니, 승지(承旨) 등이 부복(俯伏)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신숙주·한명회 등이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성인(聖人)은 천하를 관가(官家)로 여겨서 집안에 현명(賢明)한 아들이 없으면 도부(陶夫)를 구하여 천하를 물려 주었는데, 하물며 지금 세자(世子)의 재주가 능히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이미 덕이 적어서 백성의 마음이 떠나버리었다. 양정은 정직한 신하인 까닭으로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은데 내가 어찌 감히 임금의 자리에 오래 있겠는가?”
하면서 신면(申㴐)을 재촉하여 나가서 대보(大寶)를 가지고 오게 하니, 신면이 마지 못하여 나가서 상서원(尙瑞院)에 이르러 너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옥새(玉璽)를 받들고 앉아 있으므로, 또 윤필상(尹弼商)에게 명하여 재촉하니, 윤필상이 나가서 신면(申㴐)과 더불어 서로 이르기를,
“신(臣) 등이 비록 죽더라도 어찌 감히 옥새를 받들어서 바치겠는가? 차라리 임금의 명령을 어긴 죄를 받겠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承旨) 등은 어찌 옥새를 가지고 오지 않는가? 옛날에 우리 태종(太宗)께서 왕위(王位)를 전하려고 하니 그때의 여러 신하들이 즉시 옥새를 가져 오지 않았는데, 오늘날에도 어찌 마땅히 이와 같이 하는가? 만약 큰 일이 이미 정해졌다면 어찌 대보(大寶)를 전하고 전하지 않는 데에 관계되겠는가? 그것을 속히 가지고 오라.”
하고, 또 홍도상(洪道常)·정난종(鄭蘭宗)·이수남(李壽男) 등에게 명하여 이를 재촉했으나, 홍도상 등도 또한 상서원(尙瑞院)에 와서 죽어도 명령에 응하지 않기로 기약하였다. 또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물거윤(勿巨尹) 이철(李徹)과 의빈(儀賓) 정현조(鄭顯祖)·사산군(蛇山君) 이호(李灝) 등에게 명하여 옥새를 가져 오게 했으나 부(溥) 등도 또한 나가서 머뭇거리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양정(楊汀)이 아직도 어탑(御榻) 아래에 있다가 부르짖기를,
“임금의 명령이 이와 같은데, 승지(承旨) 등은 어째서 대보(大寶)를 가져오지 않는가?”
하면서 이를 재촉한 것이 두세 번이나 되었다. 임금이 또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가서 가져오게 하니, 세자가 마지 못해서 보루문(報漏門) 밖으로 나갔다. 승지 등이 끓어앉아 아뢰기를,
“대보(大寶)는 신(臣) 등이 맡아서 지키는 바이니, 신 등이 마땅히 친히 받들어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세자가 도로 들어왔으나 복명(復命)하기가 어려워서 겉에서 오래 머물고 있었다. 신숙주·한명회 등이 전상(殿上)에서 슬피 통곡하면서 되풀이하여 진청(陳請)하고 머리를 조아리기를 마지 않았다. 이때 밤이 이미 삼경이 되니,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서 신숙주에게 명하여 술잔을 올리게 하고는 마침내 내전(內殿)으로 돌아갔다. 신숙주가 물러와서 신면(申㴐)에게 이르기를,
“이미 임금의 뜻을 자세히 알았으니, 임금의 노여움을 더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신면이 옥새를 받들고 합문(閤門) 밖으로 나오니, 임금이 명하여 대보(大寶)를 강녕전(康寧殿)에 두게 하고, 신면을 불러 술잔을 올리게 하고서 말하기를,
“그대는 신숙주의 아들이니, 진실로 인물(人物)이 무리가 각기 같지 않도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또한 모두 헤어져 나갔다. 신숙주·한명회·한계희 등은 사정전(思政殿) 문 밖에 남아 있으면서 아뢰기를,
“양정(楊汀)의 말은 정상(情狀)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법사(法司)에 내려서 추국(推鞫)하여 중한 형벌을 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신숙주 등을 불러 다시 술자리를 베풀고는 전교(傳敎)하기를,
“양정이 어찌 정상이 있겠는가? 이것도 또한 바른 말을 한 것뿐이다.”
하였다. 신숙주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아뢰기를,
“양정의 말은 도리에 어긋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임금은 양정이 공신(功臣)이라 하여 차마 가두어 국문(鞫問)하지는 않고 논의하다가 시간이 넘어서야 파하였다.
한마디로 "너 오래 해먹었으니 이제 그만 물러나라!"라고 대놓고 요구를 하면서, 원로 대신들이 주저하자 본인이 직접 나서서 재촉까지 한 셈이다. 이에 분노한 세조는 옥새를 가져오길 재촉했다. 세자는 아예 겁을 먹고 들어오질 못했고 신하들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청하기에 이르는 엄청난 상황이 벌어졌다. 신하들이 양정을 죽이라고 청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양정은 6월 8일에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고 4일 만인 6월 12일에 참수되었다. 다만 세조가 이 일에 연좌제는 적용하지 않아서 양정의 가족들은 화를 면했다. 다음은 실록의 기록이다.
도승지(都承旨) 신면(申㴐)과 의금부 판사(義禁府判事) 윤자운(尹子雲) 등이 강녕전(康寧殿)에 들어가서 양정(楊汀)에게 과죄(科罪)할 일을 친히 아뢰니, 임금께서 글로써 유시하기를,
“양정(楊汀)이 나를 도와 나라를 안정시켜 이름이 훈록(勳錄)에 성대(盛大)하고 변경(邊境)을 지킨 지도 몇 해가 되었으므로, 바야흐로 칭찬하여 더욱 존중(尊重)하려고 했었으나, 성품이 본디부터 경망하고 우매하여 나의 강직(剛直)하고 명민(明敏)한 것을 꺼려서 빨리 왕위(王位)에서 물러나기를 원하는 것이 언설(言說)에 나타났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죄주기를 청하고 종친(宗親)과 훈신(勳臣)도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건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지나친 일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의로운 일과 다름이 없다. 대체로 두 마음을 품고 금장(今將)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대악(大惡)이니, 공의(公議)에 힘써 따라 사정(私情)을 끊고 죄를 정하여 8도(道)에 돌리게 하는데, 부자(父子) 이외에는 모두 연좌(緣坐)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말하기를,
“양정의 죄는 비록 크지마는, 그대로 훈로(勳勞)가 있으니 참형(斬刑)은 그 자신(自身)에만 그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즉시 명하여 양정을 도성문(都城門) 밖에서 목 베게 하고, 그 아우 양지(楊沚)·양호(楊浩)·양형(楊泂) 등을 모두 파직하게 하고, 그 아들은 그대로 가두어 두게 하였다. 양정은 처음에 매우 미천(微賤)했으나 팔뚝 힘이 있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임금이 정란(靖亂)할 적에 공로(功勞)가 있었으므로 존귀(尊貴)해져 양계(兩界)에서 오랫동안 진수(鎭守)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훈구(勳舊)로서 오랫동안 외방에서 노고했다고 여겨서 평거(平居)할 때 늘 마음에 불만(不滿)을 품고 있었다. 그가 평안도(平安道)에 있을 적에는 교만하고 방종하여 꺼림이 없어서 사람을 죽인 것이 또한 많았었다. 한명회(韓明澮)가 여러 번 말하기를, ‘평안도는 양정에게 진수(鎭守)시킬 필요가 없습니다.’고 하니, 임금께서도 또한 양정을 소환(召還)하려고 했으나, 그 대신할 사람을 어렵게 여겨서 이를 지체(遲滯)시켰더니 양정이 더욱 분개하여 원망함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주대(奏對)하는 데에 조리가 없었고 말이 문득 불손하였으므로 마침내 대륙(大戮)에 이르게 되었다.
사관은 양정이 북방에 오래 처박아 놓아 불만을 품고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추측한 것이다.
사실 양정같은 성격상 보면 정말 불만이 많았다면 이 정도는 양반일 것이다. 세조 본인이 제일 큰 적으로 여긴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친건 임어을운이지만 그 아들인 김승규를 죽인 건 본인인 만큼 공도 나름 있다. 문제는 그런 공을 세우고도 변방에서 고생해야 했는데 이쯤되면 인조 때의 어떤 반란이 생각나지 않는가? 양정의 공이 이괄보다 크지는 않아도 적어도 세조 말마따나 10년 넘게 변방이나 지키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즉 공에 비해 보상이 작은데 불만이 있다면 세조에게 양위 요구를 할게 아니라 그냥 지가 군대 끌고 와서 쓸어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절제사 직을 맡았을 정도로 함경도에서 군권을 많이 쥐고 있었기에 불만이 있다면 양위가 아니라 폐위를 시키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힘도 있다.
그러나 세조는 결국 양정이 죽은 3년만에 예종에게 양위했다.(...) 양위한 다음 날 죽었기는 한데 과연, 죽을 상황이 아니었으면 양위하기나 했을지...

3. 기타


세조의 공신이나 세조의 미움을 사서 처형당한 양정이 워낙 유명하나 양정말고도 세조의 공신이나 세조에게 처형당한 공신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봉석주이다. 양정이 그냥 세조에게 양위하라고만 했다면 봉석주는 아예 세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아들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런데 어째 양정은 유명한데 봉석주는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양정이 그냥 망언만 한 정도라면 봉석주는 아예 자기가 옹립한 임금을 시해하려고 한 대역죄인인데 말이다.

4. 대중매체에서


MBC 드라마 설중매에서 장보규가 연기했다.
1990년의 사극 파천무에서는 송종원이 연기했다.
1994년 KBS 사극 한명회에서는 선동혁이 연기하였고, 한명회의 추천을 받아 수양대군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반영하여 극 초반부터 한명회와 친하게 지내며 한명회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등 비중있게 등장하며 양정의 최후도 상사하게 묘사된다. 본작에서는 공이 큰데도 외지를 맴돈다는 불만은 있었지만 아무튼 세조의 충신으로 나오는데, 한양으로 돌아온 후 한센병으로 얼굴까지 망가진 세조의 꼬라지를 보고 충격을 받아 "산송장에 가까운 전하를 옥좌에 앉혀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차라리 물러나 몸 관리나 하며 천수를 누리시는게 진정 전하를 위한 길이다"라는 이유로 세조더러 물러나라 청했다가 결국 목이 달아난다. 양정이 참수당할 때 한명회가 곁에서 그걸 지켜본다. 이 드라마에서 수양대군은 서인석이 맡았는데 재밌게도 다음해에 나온 드라마 서궁에서는 서인석이 이이첨으로 선동혁이 최명길로 나와 양정이 최명길로 환생하여 이이첨으로 환생한 세조에게 복수했다는 배우개그가 성립한다.
이후에 선동혁은 인조의 공신 최명길, 세종의 공신 최윤덕, 태종의 공신 이숙번, 태조의 공신 이지란을 맡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양정은 선동혁이 맡은 공신 역할 중에서 말로가 가장 비참한 자이다.
KBS 사극 왕과 비에서는 손호균이 연기했다. 김질을 보고 "네 녀석은 집현전 학자들을 팔아먹고 부귀영화 잘도 누리냐?" 하고 힐난을 한다. 처형 직전에는 "내 장담하건대 당신아들은 절대 보위에 못 오를 것이오."라고 사실상 저주를 한다.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조경훈이 연기했다. 계유정난에서 악역 포스를 내뿜으며 단종의 충신들을 죽인다. 그러나 이후 힘든 북방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같은 정난공신들이 양정을 고생했다고 위로해주기는커녕 조롱하고 놀려먹으며(...) 양정은 세조가 있는 궁궐에서 펑펑 울며 어찌 저한테 이러실 수 있냐고 울부짖는데 계유정난 당시 악역 포스는 어디로 가고 참 안쓰럽게 보인다... 결국 세조에게 양위 드립을 쳤다가 사형당하며 "네놈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저주의 말을 남기며 생을 마감한다.
그래도 정난공신들에게 양정의 죽음이 워낙 충격적이었던지 정난공신들이 한명회의 집에 찾아가서 양정이 저렇게 될 때까지 뭐했냐며 한명회가 차려준 밥상을 뒤집고 한명회의 옷을 더럽히고 한명회의 집 바닥에 침을 뱉는다. 한명회의 아내는 그렇게 억울하면 지들이 대신 죽어줄 것이지 왜 여기와서 행패냐며 공신들에게 삿대질을 하고 남편에게는 저런 말 신경쓰지 말라고 하나 한명회도 양정의 죽음이 꽤 충격이었는지 갑자기 실성한 듯 울면서 "전하, 어떻게 된 것이옵니까? 정녕 우리의 결의를 잊으신 것입니까?"라며 흐느낀다. 물론 한명회의 아내는 이 사람이 실성했냐며 당황한다...
박시백은 자신의 저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래도 이제 호화로운 한양 생활이 시작되는 마당에 그랬을 것 같지는 않고, 북방에서 병사들과 같이 고생을 하여 노고를 아는 인물이 한양에서 세조와 신하들이 노는 꼴을 보고 속이 뒤틀려서 그랬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했다.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에서도 양위 에피소드가 짧게 나온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