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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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3대 국왕이자 건길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초기 기록에서 많이 드러나는 문제점이지만 재위 기간이 굉장히 길어 계보에 의심이 있기도 한다. 기루왕 혼자 길면 몰라도 앞뒤로 다들 40~50년 정도씩 재위한다고 써 있는데 계산해보면 아들을 가진 시기, 수명이 부자연스럽다.
2. 업적
다루왕의 큰아들로 서기 33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다루왕이 서기 77년에 죽자 즉위하였다.[2] 44년 동안[3] 이나 태자 생활을 한 셈. 처음에는 아버지 재위 후반부 때처럼 신라의 변방을 때리다가 105년에 화친을 청해 사이좋게 지냈으며 113년에도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런 화친 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신라를 침공한 말갈[4] 을 저지하기 위해 보낸 5명의 장군과 지원군이다.
하지만 아들 개루왕 재위기인 155년에 신라 아찬 벼슬의 길선이 반란을 도모했다가 백제로 도망온 걸 받아준 것 때문에 신라와 백제 사이의 조약은 50여 년만에 깨지고 다시 으르렁거리게 된다.[5]
별다른 내용은 없으나 천재지변 등에 대한 기록이 상당수이고 심지어는 32년에 가뭄이 극심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했을 정도이다. 재위 21년에는 왕을 상징하는 동물인 용이 2마리씩이나 한강에 나타났다고 하는 걸로 보아 백제의 내부 사정이 힘들었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나라 내부의 변고를 천재지변에 빗대어 기록하는 케이스도 있기 때문에 뭔가 있었을듯. 기루왕은 재위 21년에 죽고 두 왕자가 차기 국왕 자리를 두고 싸운 것에 대한 은유라는 설도 있다.
재위 52년만에 기루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개루가 왕위를 이었다고 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기루왕은 승하할 당시 최소 100살 이상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들 개루왕도 38년씩이나 재위한 것을 보아 믿을만한 기록은 아니다. 제2대부터 제8대까지의 재위 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기 때문에 실제로는 중간에 누락된 왕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3. 기타
부여왕 해부루(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 된다),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해유류), 고구려의 제3대 왕인 대무신왕(해주류) 등 婁(별이름 루), 留(머무를 류)등을 왕명으로 쓰는 왕들이 모두 해씨였기 때문에(비류는 流(흐를 유)자를 쓰지만 역시 해씨이다.) 婁를 쓰는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을 모두 마찬가지로 해씨로 보고(해씨는 고구려 국성인 고씨와 동일시되고 부여계 성씨로 추정되며 한성 백제 때부터 활동한 귀족으로 백제 개국공신 해루[6] 도 있다. 후에 해씨는 대성팔족 중 하나가 된다. 해부루 → 우태 → 비류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으로 이어지는 소위 해씨 비류계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다루왕과 '루'자 돌림 왕들은 온조왕과는 다른 왕통이며 후에 초고왕이 즉위함으로써 비류왕계 왕들이 물러나고 다시 온조왕계 왕들의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7] 게다가 이후 초고왕이 집권한 후 고이왕이 집권해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권력 투쟁을 벌이다 근초고왕 때부터 초고왕계가 집권하는데 고이왕 시기 우씨의 대거 출현과 고이왕을 우태 - 비류계로 해석[8] 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초기 백제를 온조왕계 - 초고왕계, 비류계 - 고이왕계의 권력 다툼으로 볼 수도 있을듯하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기루왕 본기'''
一年秋九月 기루왕이 즉위하다
九年春一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九年夏四月 객성이 자미로 들어가다
十一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다
十四年春三月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나지 않다
十四年夏六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쓰러지다
十六年夏六月一日 일식이 나타나다
十七年秋八月 횡악의 큰 바위 다섯 개가 땅에 떨어지다
二十一年夏四月 두 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나다
二十三年秋八月 서리가 내려 콩이 죽다
二十三年冬十月 10월에 우박이 내리다
二十七年 한산에서 사냥하여 신성한 사슴을 잡다
二十九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三十一年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다
三十二年 봄과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들다
三十二年秋七月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다
三十五年春三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七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年夏四月 서울 성문 위에 황새가 둥지를 틀다
四十年夏六月 한강 물이 넘쳐 가옥이 유실되다
四十年秋七月 수해를 당한 논밭을 복구하다
四十九年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장수를 파견하다
五十二年冬十一月 기루왕이 죽다
보면 알겠지만 재위 기간 52년 중 기록은 고작 25줄. 그나마도 자연 재해를 제외하면 5줄밖에 안 남고 그조차 전부 신라본기에서 베껴온 것이다.
[1] 삼국사기엔 고이왕의 숙부(작은 아버지)라고 함.[2] 보통 왕이 즉위하면 대사면령이 내려지는 게 일반적인데, 기루왕이 왕위에 오르고 한 달 뒤 엉뚱하게도 '''고구려'''에서 대사면을 하였다.[3] 재위 기간 50년을 생각하면 태어나자마자 태자가 돼서 마흔 중반에 오른 듯 하다.[4] 말갈 문서에 있듯 만주 쪽의 말갈이 아니라 2번 단락의 가짜말갈, 즉 동예 등 예맥계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5] 신라는 경주가 중심지인 우리가 아는 신라가 아니라 나중에 신라로 흡수될 진한 계통 나라를 신라로 소급해 기록한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아직 한성의 백제와 경주의 신라가 서로 국경을 맞댈만큼 영토를 넓혔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6] 첨언으로 해루도 별이름 루를 사용하며 십제공신 10명 중 1명이다.[7] 노중국(1988)<백제정치사연구>[8] 천관우(1976)<한국의 국가형성>, 노중국(1988)<백제정치사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