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야구)
1. 개요
前 OB 베어스, 쌍방울 레이더스, 현대 유니콘스 소속의 외야수이자 두산 베어스, NC 다이노스, kt wiz의 코치.
현역시절 왼손 외야수로 교타자로서 명성을 날렸고, 타격왕에도 오른 적이 있는 1993년과 1995년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2. 선수 경력
독종의 왼손 타자, 김광림
공주고 출신으로 1학년이던 1977년에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개교 이래 최초의 전국대회 우승에 기여하였다.[3] 그 때 인연을 맺은 2년 선배가 바로 김경문.[4] 여하간 공주고의 전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활약하면서 고려대학교에 진학했고, 1984년 연고지 팀인 OB 베어스[5] 에 1차 지명되어 입단하게 되었다. 다만, 고교 시절에 비해 대학 시절에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한 편.
프로 초년 시절에는 널뛰기 활약을 보였지만, 4년차인 1987년부터 3할 타율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9년 도루하다가 스파이크에 손가락이 찍히면서 탈골 부상을 입었고, 이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 이 부상의 후유증으로 1990년에는 0.167의 타율을 기록하며 완전히 망쳤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극복하면서 마침내 1993년 생애 첫 골든글러브 수상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6]
그런데 골글 수상 직전, OB 베어스는 그를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발 투수 강길룡을 상대로 최동창과 함께 트레이드해 버린다.[7] 사유는 그의 부족한 클러치 능력 및 낮은 장타력. 물론 실제로 김광림은 프로 생활 내내 단 한 번도 두자리 수 홈런을 기록한 적이 없었고, 50타점 이상 기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유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교타자를 잡지 않은 것은 분명 실수였다. 특히 강길룡이 OB에 합류한 후 겨우 6승에 그쳤고, 강길룡의 프로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9년에는 평균자책점이 10점대로 치솟는 등 OB 역사에 남는 실패한 트레이드가 되었다[8] .
그렇다면 쌍방울로 간 김광림은 어땠길래? 한 마디로 '''완전히 날아다녔다.''' 애당초 매일 야구 비디오를 보면서 공부하고 훈련한다고 평판이 좋던 사람이 독기까지 품었으니. 1994년에는 트레이드 충격 탓인지 부진했지만, 1995년 0.337의 타율로 생애 첫 타격왕에 올랐고, 홈런도 생애 최다인 7개(...)를 때렸다. 타점 역시 생애 최다인 49타점을 기록하면서 일약 쌍방울 공격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 결과 1995년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고, 그 해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서도 맹활약하면서 대한민국 쪽 MVP가 되었다. 1996년에는 중심 타선에서 맹활약하며 쌍방울이 2위까지 도약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1997 시즌 기량이 상승한 조원우, 심성보가 외야 주전을 차지하면서 자연히 김광림은 밀려나게 되었고, 때마침 3할 타율을 치는 교타자를 현대 유니콘스가 눈독들여 1997년 6월 외야수 강영수[9] , 공의식을 상대로 한 명목상의 1:2 트레이드로 데려갔다. 여기서 한 시즌을 뛰면서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시즌 후 현대는 코치 제안을 했고, 이를 거부하면서 자유계약선수로 풀렸다. 결국 쌍방울로 돌아가서 1년을 있다가, 1999 시즌 막판에 은퇴를 선언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은퇴와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은퇴 경기는 하고 떠났다. 만일 쌍방울이 남았다면 쌍방울에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겠지만, 현실은...
곱상한 외모와 달리 현역 시절에는 악바리로 유명했다. 다른 선수라면 당연히 경기에 빠질 정도의 부상도 참고 뛰었다고 한다. 투수와의 기싸움에서도 절대 지지 않았다고.
3. 지도자 경력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4년 고교 및 대학 선배인 김경문의 두산 감독 취임 이후, 11년만에 두산으로 컴백했다. 타격 코치를 맡았는데, 전반적으로 두산 팬의 평가는 호의적인 편. 특히 김현수를 발굴하고, 그의 재능을 키우는데 일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두산 베어스 2군 감독으로서는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10년 두산 베어스 2군 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1시즌만에 박승호가 2군 감독으로 임명되고, 그는 다시 2군 타격코치가 되었다.
김경문이 NC 다이노스 감독으로 임명되자, 두산 2군 타격코치였던 그도 모종의 스캔들 등으로 어수선했던 두산의 2011 시즌 후 NC 다이노스로 옮겨 2012년부터 NC 다이노스의 타격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NC 팬들은 그를 광림매직이라 한다.
2017 시즌부터 kt wiz로 옮긴다. 다만 kt wiz에서는 팀의 암울한 타선을 보면서 고생중... 폭삭 늙는 소리가 팬들 귀에 들릴 지경이다.[10] 그 때문에 전반기까지만 해도 '이숭용 돌려내라!' 소리가 나오다가 후반기를 기점으로 로하스가 한 손을 놓는 타격폼으로 타격을 교정한 이후 상승세를 탐과 동시에 정현이 후반기에 무섭게 자리를 잡으면서 어느 정도 시즌 초에 비해 평가가 나아진 모습.
2017년 시즌 종료 후 계약 1년만에 성적의 책임을 물으며 해고되었다.[11] 이후 스포츠투아이[12] 가 운영하는 야구학교의 분당구B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4. 여담
- 1988년에는 개막전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장호연이 선발 투수로 낙점이 되었는데 원래는 장호연이 등판할 경기가 아니었으나 당초 선발 등판 예정이었던 김진욱이 경기 시작 전 김광림의 배팅연습을 도와주다 김광림의 타구에 을 가격당하며 결국 김진욱은 그 날 쉬고 장호연이 등판하였는데 이 경기가 최초의 개막전 노히트노런 경기가 되었다.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OB시절에는 중견수로 주로 출장했고, 좌익수 수비도 보았다. 현대에서는 전준호가 처음 중견수를 볼때 좌익수로 나왔다. 이때는 박재홍이 우익수로 뛰기도 했고, 이숭용도 외야 알바를 뛰었다. 외야 틀이 잡히고 나서는 기존의 김인호나 윤덕규는 타격이 부족하거나 나이가 들어 김광림이 자동으로 우익수로 출장하는 등 가리지않고 전 외야 포지션을 다 봤다.[2]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3] 공주고는 1977년 대통령배 우승 이후로 1992년에 노장진의 활약으로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2013년에 대통령배를 36년만에 다시 가져온다.[4] 김경문은 1958년생이긴 하지만 1년 유급한 전력이 있다. 동갑내기인 김시진에게 형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것.[5] OB는 1985 시즌 연고지 이전 전까지는 대전이 연고지였다. 1986년부터 빙그레가 연고지로 들어왔다.[6] 이 부상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 내내 이렇다 할 중상을 입은 적이 없고, 규정타석에서 빠진 적도 없었기 때문에 한때 고무인간이라 불리기도 했었다.[7] 박동희 기자의 말로는 집에서 전구를 갈고 있다가 '''그의 팬에 의해''' 트레이드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다시 서술하지만, '''구단이 아니고 팬에게'''... 김광림은 처음 들었을 때 만우절인 줄 알았다고.[8] 그나마 OB 이적 첫 해에는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범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9] 1993년 시즌 후 쌍방울로 트레이드될 당시 상대였던 강길룡이 그랬던 것처럼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적이 있었다[10] 여담으로 김진욱 감독과 김광림 타격코치는 선수 시절에 정말 안 좋은 기억이 있다. 바로 훈련 도중 김진욱이 김광림의 타구에 급소를 맞아서 후대 생산을 못 할 뻔했던 것. 김진욱은 결국 내정되었던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그 경기에서 장호연이 노히트를 달성해버린다.[11] 이 당시 코칭스태프 해고에 대해 논란이 잠시나마 일었었다. 이 논란이 나오자마자 구단 측에서는 코칭스태프의 거취를 결정하기 위해 김진욱 감독과의 상의를 우선적으로 가졌고 김진욱 감독도 그것을 받아들여서 나온 결정이라고 단장이 직접 나서서 단번에 일축하면서 이 논란은 종결되었다.[12] 스포츠 기록을 담당하는 기업이며, 독립야구단 성남 블루팬더스를 운영하고 있다.